2013년 9월호

“내가 지금 서른이면 당장 중국 가서 사업할 것”

‘태백산맥’ 넘어 ‘정글만리’ 종횡무진 조정래

  • 최호열 기자 │honeypapa@donga.com

    입력2013-08-22 11:4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소련은 무너졌는데 중국은 왜?’…20년 취재
    • 대하소설 3편 쓰던 20년간 술 한 모금 안 해
    • 박근혜, ‘솔찬히’ 잘하고 있다
    • 도종환 국회 입성, 안도현 절필 선언 이해 안돼
    • 작가는 시대의 나침반…여야, 좌우 초월해야
    “내가 지금 서른이면 당장 중국 가서 사업할 것”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70) 씨가 3년 만에 장편소설 ‘정글만리’를 펴냈다.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발돋움한 중국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그린 작품이다. 그동안 주로 민족문제에 천착해온 그였기에 다소 뜻밖이었다. 지난해 대선 때 무소속 안철수 후보 후원회장까지 지낸 그가 박근혜 정부 6개월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궁금했다.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아내 김초혜 시인과 함께 장을 보는 중이라고 했다. “심심해서 운동 삼아 나왔다”며 웃었다. 두 사람은 문단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난 잉꼬부부다.

    ▼ 요즘 어떻게 지냅니까.

    “소설과 관련한 스케줄이 계속 이어지네요. 9월 초에나 제주도를 며칠 다녀오려고요. 백번 가도 좋은 곳이 제주도예요. 제가 문인 중에선 세상 여행을 가장 많이 한 편인데, 세계 어디에도 그렇게 아름다운 곳은 없어요. 전에는 여행 가면 손주들이 따라왔는데, 이번엔 집사람과 둘이만 가요. 이제는 커서 ‘할아버지 할머니도 중요하지만 친구도 중요하다’고 하더라고. 벌써 버림받기 시작한 거지(웃음).”

    제주도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중국인들이 제주도 땅을 엄청 산다는데, 심각한 문제예요. 도지사가 외자유치 개념을 잘 모르는 모양이야. 외자유치는 산업자본을 들여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지, 땅을 팔아먹는 게 아니잖아요. 게다가 5만 달러만 내면 영주권까지 준다고 하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 부동산 경기가 침체해 있는데, 중국인이 제값에 사주면 좋은 것 아닌가요.

    “중국인이 제주도 땅 70~80%를 장악한 후에 자기네 땅이라며 한국 법을 수용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쩔 건가.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하는 것처럼 중국도 이어도를 자기네 거라고 하고 싶어 해요. 중국의 영토 탐욕은 무서워요. 방심하다 당할 수 있어요.”

    중국인의 자존심

    소설은 탈고했지만 여전히 그의 머릿속은 중국으로 가득한 듯했다. ‘정글만리’는 3권, 13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지만 읽다가 중간에 멈출 수 없을 만큼 흡인력이 강하다. 중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유용한 정보가 가득하다. 중국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는 공감을, 대(對)중국 업무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비즈니스 노하우를, 젊은이들에게는 중국이라는 ‘무한한 기회의 땅’을 향한 꿈을 심어주리라는 평가다.

    ▼ 중국을 다뤘다는 게 뜻밖입니다.

    “소설 ‘아리랑’을 쓰기 위해 1990년 중국 취재를 갔어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은 붕괴했는데 왜 중국은 건재할까 하는 의문을 가졌는데, 며칠 만에 그 답이 보이더군요. 소련은 빵 하나, 달걀 하나를 얻기 위해 혹독한 추위 속에서 200m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는데, 중국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으로 14억 인구의 배고픔을 해결했어요. 그때 중국이 엄청난 힘으로 경제발전을 할 수 있겠구나 예감했고, 실제로 우리보다 더 빠르게 발전했어요. 앞으로 30년이 굉장히 중요해요.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우리의 생존이 걸려 있어요.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 20년 동안 관심을 갖고 취재한 셈이네요.

    “그동안 중국을 8번 다녀왔는데, 발전상이 확연하게 보여요. 20년 전에는 5%도 안 되던 도로포장률이 지금은 95%에 달해요. 대도시마다 초고층빌딩이 어머어마하게 많고요. 상하이엔 4000채가 넘어요. 지금도 해마다 새로운 초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있어요. 끝없이 이어지던 자전거 부대는 오토바이 행렬로, 다시 자동차의 물결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중국에 대해 더럽다, 게으르다, 가짜가 많다는 편견에 빠져 있죠. 물론 가짜 많죠. 하지만 빠른 속도로 줄고 있어요. 더럽다는 것도 대도시에선 옛날얘기고요.”

    소설을 읽다보면 우리가 잘 모르던, 중국인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관시(關係), 붉은색과 8자에 대한 집착, ‘짝퉁’에 대한 너그러움 같은 것들이다.

    ▼ 소설에서 중국 현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더군요.

    “상품도, 인간관계도 현지화가 중요합니다. 상품은 중국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그들을 위한 상품을 만들어내는 게 중요해요. 인간관계도 문화 동질성을 갖고 접근하고 정(情)을 통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에선 명품 회사들이 기부활동 안 한다고 알려지면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져요. 일본과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영토 문제로 갈등이 불거지면 바로 반일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지죠. 일본 여행상품 판매가 취소되고, 중국에 있는 일본 상사들은 문을 닫아야 할 정도예요. 대만 독립 문제도 중국인에겐 아킬레스건이라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나요. 프랑스가 대만에 무기를 팔자 전국에서 프랑스계 할인매장 까르푸 불매운동이 벌어져 엄청난 타격을 받았죠.”

    ▼ 왜 그렇게 예민한 걸까요.

    “중국은 지난 2000년 중 1800년 동안 국내총생산(GDP )세계 1등 국가였잖아요. 그러니 최근 200년 동안 굴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못 견디는 거죠. 우리가 일본에 굴욕을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어요. 그런 특성을 이해하고 접근해야 합니다.”

    “中 공산당 체제 100년은 거뜬”

    조 씨는 소설에서 이르면 2016년,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G1’으로 올라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많은 경제학자가 중국의 급부상을 예상하지만 ‘선진국 문턱에도 못 오를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1926년 세계대공황과 맞먹는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에서도 중국은 아무 탈 없이 7.8% 성장했어요. 2010년 유럽발 경제위기도 끄떡없이 지나갔고요. 오히려 중국은 이를 통해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경제발전은 없다는 걸 확인시켰죠. 중국엔 14억 인구가 받치는 확실한 시장이 있어요. 전체적으로 따지면 1인당 GDP가 5000달러 수준이지만, 일찍 개방한 동북 연안은 2만 달러에 가까운데 그 인구가 2억 명에 달해요. 상상이 안 되는 규모죠. 반면 임금은 미국의 5분의 1 수준이죠. 현재 노동자가 2억 명인데, 농촌에서 유입된 산업예비군인 농민공이 2억5000만 명에 달해요. 농업기계화가 이뤄지면 7억 농민 중 2억5000만 명이 추가로 농민공으로 유입될 겁니다. 그러니 당분간 저임금 구조가 지속될 것이고, 이를 기반으로 20~30년 동안 계속 발전할 수밖에 없어요.”

    그는 “내가 지금 서른 살이라면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겠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지 않을까요.

    “중국은 우리가 1970년대에 겪은 천민자본주의를 그대로 겪고 있어요. 발전과정이 똑같아요. 그래서 저는 중국식 사회주의가 아니라 ‘중국식 자본주의’라고 말합니다.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빈부격차는 심화할 수밖에 없어요. 그걸 해소하는 게 복지인데, 시진핑 시대에 들어오면서 내세운 이슈가 관리들의 부정부패 척결, 빈부격차 해소, 지역격차 해소예요. 마오쩌둥이 정치혁명을 이루고 덩샤오핑이 경제혁명을 일으켰다면 이제 사회혁명을 일으킬 지도자가 나타날 시기예요. 그게 시진핑일지는 모르겠지만, 사회혁명의 성공 여부가 중국의 미래 100년을 좌우할 겁니다.”

    ▼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민주화 욕구가 분출할 텐데 그때도 공산당 일당독재가 가능할까요.

    “중국 공산당원이 8500만 명이 넘는데, 아무나 당원이 되는 게 아니에요. 엘리트만 당원 후보가 될 수 있고, 당원이 된 후에도 수많은 검증을 거쳐 최고 수뇌부에 오릅니다. 서민들은 이런 구조를 합리적이라고 여겨요. 부정부패에 대해서도, 자기들을 잘살게 해줬는데 그게 무슨 대수냐고 생각해요. 또한 사유재산, 거주이전, 결혼, 여행 등 선거권을 제외한 모든 자유가 다 있어요. 10년 전부터는 부자들도 당원으로 받아들여 자본가들이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고요. 민주화투쟁을 하는 사람이 있긴 해도 소수에 불과하고 호응도 없어요. 관료들의 부정부패 문제만 해결되면 공산당 체제가 100년은 갈 거라 봅니다.”

    ▼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대부분 재미를 못 봤다고 하는데.

    “처음 진출한 업종이 대부분 라이터, 휴대용 가스레인지 같은 단순 제품이었어요. 그런 기술은 6개월이면 배울 수 있어요. 당연히 기술을 배운 중국인들이 독립해서 경쟁을 하죠. 이들은 1원만 남아도 팔지만 우리 기업은 최소한 10원 이상 남아야 타산이 맞으니 가격경쟁이 안 될 수밖에요. 우리가 과거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배운 후 저임금으로 경쟁했던 것과 같은 이치죠. 그걸 뭐라고 하면 안 되죠. 그리고 실제로 망한 기업은 10분의 1밖에 안 돼요. 그것도 대부분 현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죠. ‘정글만리’에 한형만이라는 중소기업 사장을 등장시킨 것도 중국 진출 기업이 제대로 정착하기 위한 노하우를 들려주고 싶어서였어요.”

    “남북문제, 믿고 기다려야”

    “내가 지금 서른이면 당장 중국 가서 사업할 것”

    조정래 작가가 ‘정글만리’ 집필을 위해 준비한 기초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조정래 작가는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4대강 정비사업 반대 등을 거리낌 없이 주장해왔다. 지난 대선 때는 박근혜 후보에 대해 “겉은 육영수이고 속은 박정희”라며 거칠게 비판했다. 그런데 최근엔 “(박 대통령이) 국정운영을 잘하고 있다”며 “전라도 말로 ‘솔찬히’ 기대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 그는 “주위에서 왜 칭찬하느냐고 난리다. 잘하는 거 잘한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냐”며 웃었다.

    “몇 가지를 잘했어요. 역사교육 강화해야 한다고 한 게 먼저 마음에 들어요. 이명박 정부 때 영어가 중요하다며 역사를 경시하다보니 아이들이 삼일절을 ‘삼점일절’이라고 읽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역사교육을 정상으로 돌려놓으려는 것은 정말 잘하는 일이에요.”

    ▼ 외교는 어떻습니까.

    “대통령이 취임하면 먼저 미국 가고, 다음으로 일본 가는 게 순서였어요. 그런데 이번에 미국 다음으로 중국에 간 것은 잘했어요. 국제 현실을 잘 파악한 거지. 외교는 우리 생존과 직결된 것인데, 중국은 우리의 미래라 할 수 있거든. 칭화대에서 중국어로 연설하는 등 친밀감을 드러낸 것도 잘한 일이에요. 독도, 위안부 문제 등으로 끝없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일본에 대해 ‘실익 없는 것은 하지 않겠다’며 정상회담을 거부한 것도 옳은 선택이고.”

    ▼ 잘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면.

    “인사 문제가 큰일이야. 눈을 크게 뜨고 적절한 인재들을 찾아 써야 하는데 너무 답답하고 협소하게 인사를 하는 게, 사람들 말을 전혀 듣지 않는 모양이에요. 그러니까 윤창중 같은 문제가 터지는 거지. 이번에 김기춘 비서실장을 임명한 것도 별로예요. 또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는 국정원장이 혼자 결정했다고 하는데, 국정원은 대통령 명령대로 움직이는 곳이잖아요. 만약 국정원장이 마음대로 했다면 국민 앞에서 ‘국정원장이 잘못했다. 그래서 내가 따끔하게 야단쳤다’고 해야 하는데, 왜 침묵하는 건지….”

    ▼ NLL(북방한계선) 문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 아닌가요.

    “만에 하나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온 국민이 국경선으로 알고 있는 NLL이 느닷없이 없어집니까.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데 그게 어떻게 무너져. 그런 엄연한 사실을 갖고 왜 정치권이 저렇게 몇 달째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경제는 어렵고 전셋값은 오르고 국민은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아직도 NLL에 파묻혀 있는 여야 모두 미숙해요.”

    ▼ 경제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비정규직 문제가 갈등을 키우고 있습니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제도가 생겼어요. 그 후 김대중 대통령이 외환위기가 해결됐다며 국민에게 소비를 권장했습니다. 그때 비정규직을 없앴어야 했는데 그냥 뒀어요. 노무현 대통령도 방치했고, 이명박 정부는 기대할 것도 없고. 새 정부 들어 몇몇 기업이 비정규직을 수천 명씩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이것도 박 대통령이 잘하는 일이에요.

    박근혜 정부가 꼭 해결해야 할 문제가 두 가지라고 봐요. 비정규직 완전히 없애기, 그리고 이명박 정권 때 파탄 난 남북관계 회복 이 두 가지만 제대로 하면 역대 대통령 중 제일가는 대통령이 될 겁니다.”

    ▼ 남북관계는 교착 상태가 더 심해진 듯한데요.

    “임기가 4년 반이나 남았어요. 조급하면 안 돼요. 남북문제는 정말 복잡해요. 원칙을 고수하면서 한편으로 민간교류의 물꼬를 터주는 것은 잘하는 거예요. 한꺼번에 다 이뤄지길 바라는 건 과욕이고, 뜸 들이는 시기가 필요해요. 뜸이 잘 들어야 밥이 맛있죠. 박 대통령이 지금 방향을 잘 잡고 있으니까 좀 더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소설에도 썼듯이 개성공단 같은 걸 북한에 10개는 더 만들어야 해요. 그러면 우리 기업은 중국에 진출하는 것보다 더 싼 임금으로 생산할 수 있어 좋고, 북한 주민도 중국까지 가서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어 좋고. 그렇게 경제협력을 하면 통일비용도 크게 줄어들 겁니다.”

    안철수 지지한 이유

    안철수 의원과의 관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대선 때 무소속 안철수 후보 공식 후원회 회장을 맡았던 조 작가는 지금도 안 의원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크 내일’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를 지지한 이유는 한 가지예요. 가장 비정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할 거라고 본 거죠. 우리나라는 다른 분야는 다 자리를 잡았는데, 정치만 가장 낙후돼 있어요. 우리나라 정치인은 정직하기만 하면 돼요. 안철수 지지율이 57%까지 올랐던 이유도 거기 있었어요. 그의 새 정치가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징검다리 하나 더 놓는 역할이라도 한다면 그 영향으로 20~30년 후 우리 손자 세대에는 정치가 좀 더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만약 그가 처음 가졌던 생각과 다르게 변질된다면 단호하게 끊을 겁니다.”

    ▼ 과거에도 안철수 못지않게 도덕성, 정직성을 내세운 인사들이 정치권에 들어왔지만 결국 정치를 바꾸진 못했습니다.

    “표가 안 나는 것 같아도 우리 사회가 이만큼 온 데는 그들의 역할이 컸어요. 안철수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이 계속 나와야 거짓말 많이 하고 부화뇌동하는 정치인들을 막을 수 있어요.”

    그는 평소 “작가는 그 시대의 산소, 그 시대의 나침반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대와 호흡을 같이해야 한다는 뜻이다.

    ▼ 작가가 현실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차원을 넘어 도종환 시인처럼 국회의원이 돼 정치 일선에 뛰어드는 것은 어떻게 봅니까.

    “그 사람 나름의 필연적 선택이었겠지만, 저는 근본적으로 아니라고 봅니다. 작가는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정치에 직접 관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문학을 하는 것 자체가 정치예요. 문학은 그 시대의 총체적인 모순과 갈등, 문제점을 직시해서 해결하려 노력하는 겁니다. 그래서 작가는 여와 야, 진보와 보수가 있을 수 없어요. 진보도 잘못하면 비판하고, 보수도 잘하는 게 있으면 칭찬해야 하는 게 작가의 소명이에요. 그런데 특정 정당에 소속되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당론에 따라야 할 의무가 생겨요. 문학의 사명과는 다른 방향으로 선택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국회의원은 아무리 잘났어도 300명 중 하나일 뿐이지만, 문학으로 이야기하면 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요. 작가가 자기 기능을 그런 식으로 약화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작가가 어떤 당에든 들어가는 것은 반대예요.”

    ▼ 안도현 시인도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글을 쓰지 않겠다”고 절필 선언을 했습니다.

    “작가는 어느 시대에나 글을 써야지. 안 시인도 자기 나름의 필연성이 있었겠지만, 솔직히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정글만리’ 각권 맨 뒷장 판권에는 ‘조정래’ 도장이 찍힌 인지가 붙어 있다. ‘작가와의 협의에 따라 인지를 생략합니다’라는 문장조차 생략되는 지금, 천연기념물 같은 고집이다.

    “인지 붙이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요. 큰 이유는 없고, 재미있잖아요. 내 책에 대해 검증했다는 느낌도 주고…. 인지에 하나하나 도장 찍고, 한 권 한 권 붙이기 때문에 엄청 힘들어요. 사람을 사서 하니까 내가 일자리 창출도 하는 셈이죠(웃음).”

    그의 남다른 고집은 또 있다. 아직도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쓴다. 육필작가는 조 작가와 소설‘객주’의 작가 김주영 씨뿐이다. 그런데 ‘정글만리’는 인터넷에 먼저 연재됐다.

    “난 컴퓨터를 켤 줄도 몰라요. 원고지에 써서 출판사에 넘기면 출판사가 작업을 해서 인터넷에 올린 거지. 동시다발적으로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고, 독자들 의견을 바로바로 알 수 있다고 출판사에서 제안해서 해봤는데, 반응이 놀랍더라고. 미국에서 잘 읽고 있다고 연락이 오고, 중국에서 상사원들이 너무 실감 난다고 댓글 달고. 반응이 곧장 전해지는 걸 보며 인터넷이 지배하는 세상이 이렇게 무섭구나 실감했죠.”

    ▼ 육필을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컴퓨터로 작업하면 처음 딱 떠오른 문장을 쓰게 되는데, 그건 나이브한 문장이지 내 문장이 아니야. 전 한 문장을 쓸 때 평균 세 번 생각해서 곰삭힌 다음에 원고지에 옮겨요. 그러고 나서 전체를 다시 또 읽으면서 추가하고…. 그렇게 네다섯 번의 과정을 거치죠. 그런데 컴퓨터로 쓰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문장이 길어지고 밀도감도 떨어지더라고. 집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컴퓨터로 원고를 쓰는 실험을 해봤어요. 마루타가 된 거지. 몇 개월 작업을 하더니 날더러 하지 말래. 문장 깊이도 떨어지고, 전자파 때문에 머리도 아프다고.”

    ▼ 시는 컴퓨터로 써도 괜찮지 않나요.

    “소설은 많은 분량을 써야 하니까 팔이 아파서 컴퓨터로 한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컴퓨터로 시를 써? 그건 아니지. 시는 갈고 갈고 또 갈고,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서 한 문장에서 인생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걸 컴퓨터로 해요. 말이 안 되는 거지.”

    그러면서 그는 “소설을 쓰기 전엔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다”고 수줍게 말했다.

    “문단에 이런 농담이 있어요. 시 쓰다가 안 되면 소설 쓰고, 소설 쓰다가 안 되면 평론 쓴다고(웃음). 평론가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인데, 나도 처음엔 시를 썼지. 동국대 국문과 1학년 때 1등에 뽑혀서 문학의 밤 때 시낭송도 했으니까. 그런데 다른 친구들은 일주일에 한 편 쓰는데 나는 하루에 다섯 편씩 써져. 시도 자꾸 길어지고…. 1년쯤 시를 쓰다 ‘나는 시인은 안 되겠구나’ 하는 걸 느꼈지. 겨울방학 때 구례 화엄사에 내려가 각황전을 바라보면서 사흘을 고민하다 소설로 바꿨어요. 결국 시를 못 쓰는 회한 때문에 시인을 아내로 삼았죠(웃음).”

    20년 글감옥의 고통과 희열

    “내가 지금 서른이면 당장 중국 가서 사업할 것”

    조 작가는 매일매일 집필한 원고 분량을 기록한다. 글감옥이 따로 없다.

    조 씨는 1983년 ‘태백산맥’을 연재하기 시작해 1989년에 1만6500매 분량의 대작을 완성했다. 1년 뒤인 1990년에 다시 ‘아리랑’을 집필하기 시작해 1995년에 탈고했다. 2만 매 분량이었다. 3년 뒤인 1998년부터 2000년까지는 1만5000매 분량의 ‘한강’을 썼다. 20년 가까이 ‘글감옥’에 살았다.

    그 20년 동안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고 집필 중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태백산맥’을 쓰느라 아버지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아리랑’ 집필 때는 오른팔이 손가락 끝까지 마비돼 침을 맞아가며 썼다. ‘한강’을 끝내고 대수술을 해야 했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탈장이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묵묵히 원고지 한 장 한 장을 탈고할 때마다 자신이 이름을 새긴 도장을 찍어가며 정진했다. 아내가 “당신은 사람도 아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 원고지 1만5000장을 채운다는 게 상상이 잘 안 갑니다.

    “산술적으로는 첫 장을 쓰면 1만5000분의 1을 쓴 거예요. 하지만 사실은 첫 문장이 소설의 절반을 결정지어요. 첫 문장이 잘되면 그다음부터는 자연스럽게 끝없이 파도를 타넘으며 이야기가 진행되는 거죠. 보통 소설 한 장을 쓸 때 파지가 한두 장이 나온다면 첫 장은 50, 60장씩 나와요. 쓰는 동안 혼자서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을 걸어 들어가는, 암담하고 절망적인 느낌에 사로잡히죠. 안 해본 사람을 몰라요. 그래서 첫 장을 완성하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버려요.”

    ▼ 집필 중에 쌓이는 스트레스는 어떻게 풀었습니까.

    “방법이 없어요. 견디는 거지. 잘 써질 때보다 안 써질 때가 더 많아요. 그럼 문장이 나올 때까지 앉아서 버티는 거야. 안 써질수록 책상 앞에 앉아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싸워야 해요. 그러다보면 죽어도 떠오르지 않던 문장이 꽃이 피듯 떠올라요. 고통 속에서 황홀함이 밀려오는 거죠. 해냈다는 성취감에 희열이 느껴져요. ‘역시 넌 천재야’ 하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그래서 그 고통을 참아내고 이겨낼 수 있어요. 고통과 희열이 계속 교차하면서 소설이 완성되는 거죠.”

    ▼ 그런 생활을 20년 반복했는데, 후회는 없나요.

    “‘태백산맥’을 시작할 때가 딱 마흔이었는데, ‘한강’을 끝내니까 육십이야. 그때 이렇게 머리가 다 빠져버렸잖아요. 내가 집사람에게 그랬어. ‘여보, 난 지금도 내가 마흔인 줄 알았어, 그런데 육십이라니. 내 인생 20년이 어디로 날아가버렸지?’ 그러니까 집사람이 ‘여보 그런 생각하지 마, 책이 저렇게 쌓여 있잖아, 남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놓고 왜 이래’ 하고 위로했지만 그건 집사람 생각이고, 뭔가 박탈당해버린 느낌이 6개월 이상 가더군요.”

    ▼ 그 긴 시간을 대하소설에 매진하다보면 가족들 불만도 많았겠어요.

    “제가 대하소설 쓸 때 집사람도 함께 대하시를 썼어요. 사랑굿 연작시와 어머니 연작시를 썼죠. 얼마나 재미있어요, 부부가 따로 앉아서 창작을 한다는 게. 아들한테는 미안하죠. 시끄러우면 안 되니까 집에 친구 한 번 못 데리고 오고, 아빠와 대화할 시간도 거의 없었으니까. 아들에게 못한 걸 손자에게 하려고 해요. 옛말에 ‘열 애첩이 한 손자 못 당한다고(웃음).”

    좌우의 균형

    ▼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어떻게 구상하게 된 건가요.

    “처음부터 함께 준비했어요. 우리 민족 100년사를 함께 엮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우리 민족처럼 서럽게 산 민족도 없어요. 특히 일본에 나라를 뺏긴 절통한 설움을 잊어선 안 돼요. 소설에서 일본인의 입을 통해 ‘36년을 협박당한 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대해 360년은 갈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걸 잊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죠. ‘태백산맥’은 분단이 우리를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문제니까 먼저 썼고, ‘아리랑’은 구한말부터 광복까지를 알아야만 분단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고, ‘한강’은 경제발전이 50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잖아요. 국민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 만든 기적이죠. 덩샤오핑이 개혁·개방할 때 우리를 모델로 삼았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큰일을 해낸 것을 문학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뭘로 기록하겠어요.”

    ‘태백산맥’ 집필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 권 마칠 때마다 형사들이 찾아와 검열했고, 집을 폭파하겠다는 등 협박이 이어졌다. 국가보안법,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해 11년간 조사를 받은 끝에 2005년에야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민족 최대 비극인 분단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학적 소재였어요. ‘태백산맥’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딱 두 가지예요. 하나는 반공주의에서 전부 악마요, 나쁜 놈들이라고 되어 있는 빨치산, 사회주의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까지는 군인, 미국, 보수들은 잘못한 게 없고 다 옳다고 했는데 그들도 나쁜 짓 했다는 거예요.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한 건데 나를 빨갱이로 몰더라고. 그런데 다른 한쪽에선 그동안 숨죽이고 살았던 좌익 인사의 자식들이 울먹거리면서 내게 전화를 해요. ‘우리 부모님을 사람으로 인정해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태백산맥’은 작가 개인 체험과도 관련이 있다. 그의 부친은 전남 순천 선암사의 부주지였다. 사답(寺畓)을 소작인들에게 분배해준 일로 주지와 충돌을 빚은 후 절을 떠났다. 그런데 소작인들을 배려한 부친의 행동은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순사건 때 고초를 겪는 빌미가 됐다. 당시 여섯 살이던 조 씨는 부친이 서북청년단원들에게 몰매를 맞고 피를 흘리며 끌려가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한다.

    ▼ ‘태백산맥’에 대해 “좌익은 다 좋은 사람, 우익은 다 나쁜 사람으로 왜곡해서 그렸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그런 말 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잘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우익이든 좌익이든 나쁜 짓 한 거 똑같이 나와 있어요. 좋은 우익도 나오고, 나쁜 좌익도 나와요. 페이지 수를 세어보면 분량도 똑같아요. 무엇보다 ‘태백산맥’은 이데올로기 소설이 아니에요. 첫 장면이 소화와 정하섭이 무당 집 신방(神房)에서 사랑을 나누는 건데, 극한 상황에 몰려 있으면서도 사랑을 나누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시작한 거죠. 그런데 다들 졸면서 읽었는지 어떤 평론가도 이걸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더라고.”

    ▼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나요.

    “작가는 항상 객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누구 편을 들어서는 안 돼요. 치우치면 작품 균형이 깨지죠.”

    낯 뜨거운 노벨상 열망

    ▼ 요즘 젊은 작가들 글 중엔 역사를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 드문데요.

    “젊은 작가 중에 ‘선배들은 6·25 등 역사적으로 겪은 일이 많아서 쓸거리가 많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기변명이에요. 투철한 의식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면 인식이 생기고, 그 인식이 축적돼 작품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는 건데, 그런 노력 없이 쉽게만 쓰려고 하니까 안 보이는 거죠. ‘정글만리’만 해도 그래요. 중국이 급성장하고 있다는 건 신문에 매일 나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걸 다루질 않아요. 환갑이 훨씬 지난 나는 그 문제를 인식하고 직접 중국에 가서 취재하고 소설로 썼잖아요.”

    그는 해마다 10월이면 고은 시인과 함께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에 오르내리곤 한다. 노벨상 이야기를 꺼내자 그가 말을 막았다.

    “노벨상 이야기가 나오면 굴욕을 느껴요. 우리나라 작가들이 노벨상을 타려고 서구 사회에 얼굴을 알리려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문학이 노벨상을 타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니잖아요. 10월만 되면 왜 이렇게 난리를 쳐. 너무 유치하고 졸렬해요. 낯 뜨겁고 창피스러워.”

    그는 ‘정글만리’ 서문에 “이제 세 권의 소설을 마친다. 다시 새 작품을 향해 새 길을 떠날 짐을 꾸려야겠다”고 적었다. 그는 앞으로 10년 동안 장편 1권짜리 2편, 3권짜리 2편, 단편집 하나, 산문집 하나를 펴낼 구상을 해놓고 있다고 했다.

    “10, 20년 전부터 준비해서 곰삭히고 있어요. 다음 작품은 2년 후쯤 나올 텐데 파탄 상태가 되어버린 교육 문제에 대한 거예요.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등인데, 그 절반 정도가 청소년이라고 해요. 누가 이들을 죽이는 거죠? 1차는 부모, 2차는 그걸 문제화하지 않는 사회예요. 그런데 아무도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 내 새끼가 아니니까. 사회가 각성해야 해요. 그 문제를 다룰 겁니다.”

    그의 열정은 끝이 없어 보였다. 기자 앞에는 여전히 마흔 살의 조정래가 앉아 있는 듯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