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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전투 도발하고 질 수 없는 도발에 당했다, 왜?

서해에 수장된 남북교전의 진실

  • 김종대 | 군사평론가, ‘시크릿파일 서해전쟁’ 저자

이길 수 없는 전투 도발하고 질 수 없는 도발에 당했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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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전투 도발하고 질 수 없는 도발에 당했다, 왜?

3월 27일 백령도에서 열린 천안함 46용사 3주기 추모식.

필자가 최근 펴낸 ‘시크릿파일-서해전쟁’은 청와대라는 정치권력과 합참-2함대사령부로 연결되는 작전 지휘계통이 서해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상호작용했는지를 추적한 기록물이다. 전·현직 장성과 영관급 장교들을 인터뷰하고, 청와대, 국가정보원, 국회 주요 인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5차례 교전에 얽힌 비사(秘史)를 재구성했다. 이 책에서 강조하려 한 것은 합리성이 붕괴되는 순간 남북한 간에 분쟁이 발화된다는 점이다.

북한의 경우 경비정으로 NLL을 도발한 제1, 2 연평해전과 대청해전, 즉 3차례 교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자동화한 사격통제와 속사포로 무장한 현대식 우리 함정에, 구식 함포에다 속도도 느린 북한 경비정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불리한 줄 뻔히 알면서 왜 그처럼 무모한 도발을 세 번이나 반복했는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 모든 교전이 북의 계획된 도발로 시작됐다는 건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그런데 무슨 계획된 도발이 할 때마다 패전이란 말인가. 만일 북한이 우리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려면 자신들이 열세인 수상함 전력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우세한 지상화력을 동원하는 게 옳다.

북한의 군사적 합리성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북한이 비밀리에 기습공격한 것이라면 어뢰 추진체에 버젓이 ‘1번’이라는 표기를 함으로써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까닭이 뭘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조직의 일상적 업무수행’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대입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이 캄차카 반도 부근에서 소련 영해에 비밀리에 들어가 작전을 하면서 해상에 부이(buoy)를 설치한 일이 있다. 그 비밀작전이 소련에 의해 발각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미군이 설치한 부이에 ‘미국 정부의 재산(The property of U.S government)’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방법령에 따라 모든 미국 장비에는 의무적으로 이런 글귀를 새겨 넣어야 했다. 조직의 일상적 업무수행은 아무리 중차대한 비상사태라 하더라도 기존의 행동절차나 규정을 준수하느라 더 큰 목적을 간과하는 속성을 보인다.

이런 조직 행태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제1 연평해전 당시 사태가 급격하게 악화된 배경에는 “NLL 선상에 대형 함정이 일렬로 늘어서서 지켜라”는 합참의 어처구니없는 지시가 있었다. 큰 배들이 NLL 선상에 늘어서 버티라는 건 지상군 문화의 산물이다. 못 보던 큰 배가 전투해역에 나타나니까 북한도 어뢰정을 출동시키기 시작했고, 이에 우리 해군은 어뢰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선체 충돌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것도 엉뚱한 발상이었다. 선체로 충돌하는 해전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왜 합참은 현대식 함정으로 고대의 전술을 답습했을까. 여기에는 청와대와 합참, 2함대 사이의 이상한 의사소통이 작용했다. 이후 통제하기 어려운 분쟁으로 치달았다. 제2 연평해전도 “북 함정과 3km 거리를 유지하라”는 2함대사령관의 지침과 “근접차단기동을 하라”는 합참의 지시가 충돌하면서 빚어진 비극이다. 서로 다른 지시가 전투 현장에 하달되면서 2함대 지휘체계는 붕괴 조짐을 보였고, 이는 현장에서 전투원의 희생이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싸움이 끝난 후 책임 소재를 두고 또다시 힘의 논리가 작동했다. 고속정 침몰과 희생자 6명을 낳은 이 비극적 전투와 관련해 합참 지휘라인 관계자들 중 누구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반면 해군 2함대사령관은 보직해임의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해라”

이길 수 없는 전투 도발하고 질 수 없는 도발에 당했다, 왜?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에 포격당한 연평도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천안함 사건 때는 우리 합참이 거의 공황상태가 된다. 사건 발생 후 청와대, 국방부, 합참, 민군합동조사단으로 나뉜 행위자들이 각기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언론에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통제불능 상태가 됐고 극심한 혼선이 빚어졌다. 안보 위기는 원래 선거에서 보수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거꾸로 야당이 그 반사이익을 얻었다.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평도 포격사건 때는 합참과 주한미군 사이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해도 되느냐”고 묻는 합참에 주한미군은 “우리에게 묻지 말고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라”고 답변해 갈등을 겪는다. 항공기로 북한의 포격 도발 원점을 때려도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우리 장성들의 의견이 양분돼 대혼란이 초래됐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 진입하는 문제로 한미동맹은 또 한 번 시련을 겪는다. 2010년 6월까지는 “항공모함을 보내달라”는 한국 정부 요청에 미국이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8월에는 미국이 “항공모함을 서해로 보내겠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가 “보내지 말라”고 했다. 두 달 사이에 한미의 방침이 정반대로 바뀐 이유가 뭘까. “보내겠다”는 미국과 “오지 말라”는 한국 정부가 옥신각신하면서 이미 서해로 진입하던 조지워싱턴호가 두 번이나 되돌아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결국 11월 말로 연기됐는데 그 사이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다. 그 직후 서해에 진입한 조지워싱턴호는 연평도 포격사건 때문에 들어온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이런 소동은 서해에서 미·중 대결이라는 강대국 정치 논리가 작동한 탓에 빚어졌다. 천안함 사건은 미국과 중국이 개입하지 않은 남북한 간 문제였다. 그런데 막상 조지워싱턴호의 서해 진입으로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겪자 한반도의 두 당사자인 남북한은 조역으로 밀려나고 서해는 국제분쟁의 무대가 된다.

연평도 사건 때의 공군 전투기 출동 문제도 미스터리다. 사건 당시 부근 해역에서는 F-15K 전투기 3대가 비행하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광판에 표기된 전투기를 가리키며 “저걸로라도 쏘라”고 했다. 문제는 이들 전투기가 공대지미사일을 장착하지 않은 사실을 청와대 지하벙커에 앉아 있던 참모 누구도 몰랐다는 것. 미사일을 달지 않아 때릴 수 없는 전투기였는데, 엉뚱하게도 때릴 수 없는 이유가 유엔사령부의 정전 교전규칙 때문이라고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에 합참의장은 자기 권한으로 공대지 임무를 띤 F-15K 전투기 출격을 명령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나고 2시간이 지나서야 전투기들이 떴다. 합참의 출격 지시가 늦었던 데다, 공군 전투기가 후방기지에서 공대지미사일을 달고 출격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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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대 | 군사평론가, ‘시크릿파일 서해전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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