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3월 첫선을 보인 팟캐스트 팟빵의 ‘꼴통쇼’ 열풍이 거세다.
- 개그맨 오종철과 ‘총각네 야채가게’ 이영석 대표가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쇼다.
- ‘꼴찌들의 통쾌한 승리’를 함께 나눈다는 취지로 ‘정신무장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꼴통쇼 시즌2 녹화 현장을 찾았다.
‘꼴통쇼’ 공개 녹화 현장. 초대손님인 헤어디자이너 김현태 원장과 MC인 개그맨 오종철, ‘총각네 야채가게’ 이영석 대표(왼쪽부터).
번호를 부르며 경품을 나눠주던 MC의 갑작스러운 ‘협박’에 덤덤히 선물을 받아 챙기던 방청객들 사이에 폭소가 터졌다. 오프라인 전단지 시장을 최초로 온라인화한 (주)우아한형제들 김봉진 대표가 특별히 만든 신발 증정식이 끝나자 무대 위의 두 MC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이크를 잡고 동시에 외쳤다. “대한민국 최초!”
‘꼴찌들의 통쾌한 승리’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방청객들이 “와~” 함성을 지르며 화답한다. “우주 최초!” “세계 최초!” MC들의 외침이 이어질 때마다 방청객은 목이 터져라 박수와 환호를 내질렀고, 실내는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무대와 객석은 죽이 착착 맞아 돌아갔다.
9월 7일 늦은 오후, 직장인의 발길이 끊기고 적막감이 감도는 도심 빌딩 숲을 들었다 놨다 들썩이게 만든 요란한 소음의 진원지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인근 대웅제약 본사 지하 베어홀. 토요일인데도 초등학생부터 40대 직장인, 주부 등 80여 명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개그맨 오종철(에이트스프링스 대표)과 ‘총각네 야채가게’ 이영석 대표가 기획, 진행하는 쇼를 보기 위해서다.
‘꼴찌들의 통쾌한 승리’를 함께 나눈다는 취지의 ‘꼴통쇼’가 팟캐스트 전문 포털 사이트 ‘팟빵’을 통해 첫선을 보인 건 올 3월. ‘실업계고 최초의 골든벨 소녀’로 10대 때부터 유명세를 탄 김수영 씨의 ‘꿈꾸는 유목민, 김수영처럼 떠나라’를 시작으로 꼴통쇼는 그간 ‘트랙터로 세계여행, 강기태처럼 몰아라!’ ‘여행박사 신창연 대표처럼 자유롭게 생각하라’ ‘극지마라토너 최규영처럼 모험하라’ ‘공짜로 세계여행 하는 법-류시형’ ‘인생의 사막을 달리는 방법-오지레이서 유지성’ 등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꼴통’ 기질로 인생의 승리를 거머쥔 24명의 ‘마스터’(초대손님)를 출연시켜 파란만장한 삶 이야기를 쏟아내게 만들었다.
이날은 25회 방송으로 ‘시즌2’가 막을 올렸다. 초대받은 ‘꼴통 마스터’는 헤어디자이너 김현태 원장과 가수 장혜진 씨.
오후 5시 35분, “정신무장 버라이어티 꼴찌들의 통쾌한 승리, 꼴통쇼!” MC들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공개방송 녹화가 시작됐다. 하얀 면바지에 감색 재킷을 입은 김 원장이 첫 손님으로 무대에 오르자 MC들이 김 원장의 재킷 윗주머니를 보고 호기심을 드러낸다. 포켓치프 대신 번쩍이는 ‘장식’에 먼저 눈길이 갔기 때문. 김 원장이 “언제든 자를 준비가 돼 있다”며 주머니에서 꺼내 든 건 헤어 커트 가위. 해외 세미나 참석 때 직접 주문해 특수 제작한 황금가위다.
“사람의 일생은 한순간의 여유마저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한순간 한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다”는 셰익스피어의 명언으로 말문을 연 김 원장이 자신의 과거사를 풀어낸다.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 품을 떠나 할머니 손에 맡겨져 ‘깡촌’으로 가게 됐다. 영화 ‘집으로’의 소년과 같은 상황이었다. 서너 살 무렵,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서 어른들이 밤에 담배 사와라, 술 사와라 심부름을 시키면 캄캄한 밤길을 30분씩 걸어가야 했다. 그땐 정말 살기 싫었는데 돌아보니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려는 순간, MC 오 대표가 끼어든다. “그때 너~무 걸어서 키가 안 자랐어요?” 김 원장은 “못 먹어서”라고 바로 맞받았다. 대여섯 살 무렵 활터에서 목숨을 건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김 원장의 얘기가 이어졌다.
“과녁 옆에 깃발을 들고 서 있다가 화살이 꽂힌 자리를 알려주는 일이었는데, 날아다니는 화살을 요리조리 피해 다녀야 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받은 돈이 1000원이었다.”
지독한 가난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할머니에게 보탬이 되고 싶었던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유흥업소로 진출해 웨이터와 나이트클럽 DJ 생활을 거치며 잘나갔다. 거의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이제 돈 좀 벌겠구나 싶어 희망에 부풀었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자정 이후 유흥업소 영업 금지령이 내려졌다, 전력 낭비라며. 졸지에 삶의 터전이 날아가고 백수 신세가 돼서 생계마저 끊겼다.”
화살 줍기 → ‘커트 100만 원’
화려한 밤 생활에 빠져 지내다 사회로 나오니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일거리를 찾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인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그때 오 대표가 ‘인부’를 잘못 알아듣고 “인분이요?”라고 되묻자 김 원장 얘기에 몰입하던 방청객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모집한 인부들을 버스에 태워 데려간 곳은 산이었다. 거기서 하루 종일 전봇대를 묻기 위해 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그땐 굴삭기가 없었으니까. 구덩이를 파내려가다보면 어느새 내 키를 넘겨 나중에 올라오기도 힘들었다.”
한동안 일용직 노동일을 전전하다 DJ 출신이라는 전력을 내세워 카지노에 스카우트된 김 원장은 ‘장기’를 살려 고객이 계속 베팅을 하도록 부추기는 내레이션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카지노에서 일하다보니 점점 조직폭력배 세계로 휘말리는 상황이 됐다. 조직원들 간 패싸움으로 피가 낭자한 장면도 목격했다. 계속 그 세계에 있다간 언젠가 나도 칼침을 맞겠구나 싶었다.”
살벌한 세계에서 발을 빼려 한 달여 고민하던 어느 날, 미용실 유리창 너머로 비친 헤어디자이너의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가 “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삽질(일용직)하고 판 돌리다(DJ) 찾아갔더니 미용실 원장이 뭐래요?” 오 대표의 질문에 김 원장이 짧게 답한다. “일하래요.”
이후 남다른 성실함과 고객을 세심히 관찰하는 눈썰미와 센스, 실력으로 쟁쟁한 헤어디자이너들의 눈에 든 그는 여러 차례 스카우트를 거쳐 수억 원의 연봉을 받으면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됐다고 했다. 지금 그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본점 외에도 전국에 13개 헤어숍을 거느리고 ‘커트 100만 원’을 받는 대한민국 최고 몸값의 헤어디자이너다. 한국관광공사와 손잡고 헤어 한류 ‘K스타일’을 해외에 알리려고 활동 중인 그는 “아시아의 랜드마크가 될 뷰티 칼리지를 세우고 싶다”고 했다.
‘꼴통 마스터’와 ‘챌린저’
도전과 역경, 성공에 이르는 50여 분 간의 김 원장 얘기가 끝나자 두 MC가 꼴통쇼의 트레이드 마크인 구호를 외쳤다. “즉시, 반드시, 될 때까지!” 이어 객석 여기저기서 방청객들이 “저요” “저요” 소리치며 손을 들었다. 김 원장의 미션을 받을 ‘챌린저(방청객)’로 뽑히기 위해서다.
그중 대학 4학년인 김아혜 씨는 정·재계 인사와 톱스타 등 VIP를 고객으로 둔 김 원장의 ‘사람 마음을 얻는 비결’을 궁금해했다. 김 원장은 “고객을 애인으로 여기고 진심으로 다가가 서비스하려고 노력한다”며 “좀 더 알려면 직접 몸으로 부딪쳐봐야 한다. 우리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보라”는 ‘꼴통 미션’을 던졌고, 김 씨는 즉석에서 수락했다.
‘꼴통 미션’은 초대손님이 방청객에게 내는 ‘숙제’다.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계기는 숙제를 통해서다”라는 MC 오 대표는 “미션을 통해 ‘내가 이것도 할 수 있구나’ 하는 작은 성공을 경험케 함으로써 스스로 도전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첫 방송 때 미션을 받은 사람은 장교 전역 후 취업을 준비 중이던 20대 중반의 윤준우 씨였다. 그는 방송에서 “전역 후 혼자 해외여행으로 한 바퀴 돌고 와서 취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주변에선 ‘취업부터 해야지 무슨 소리냐’며 말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놨다. 그런 그에게 주어진 미션은 ‘사흘 내로 여권을 만들고, 항공 티켓을 끊고, 일본에 가서 기모노 입은 여성과 사진을 찍어 꼴통쇼 페이스북에 성공 스토리를 올릴 것’이었다.
오 대표는 “나중에 올린 사진을 보니 기모노 입은 일본 여성이 둘이었다. 길에서 무작정 여자들을 붙잡고 와이파이를 어떻게 쓰는지 물었다가 친해지게 됐다고 했다. 그 친구가 해외여행을 경험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 후로 해외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을 거다. 안 그랬으면 버킷 리스트에 ‘해외여행 하기’가 평생 올라 있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녹화가 끝난 뒤 방청객들이 김 원장을 둘러싼 채 기념사진을 찍고 사인을 받느라 소동이 벌어졌다. 그 사이 무대 위에선 깜짝 이벤트가 펼쳐졌다. “지금 당장 ‘팟빵’ 가서 방청 소감을 댓글로 올리면 추첨해서 김 원장님의 황금 빗과 가위로 머리를 자를 수 있도록 해주겠다.” 오 대표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경쟁적으로 댓글을 올리기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고 잠시 뒤 MC들이 댓글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꼴통 마스터와 사진 찍고 연락처도 받고, 여러분이 먼저 들이대야 한다니까 이 분은 곧이곧대로 쓰셨네. ‘원장님한테 머리 자르고 싶어요~’라고.” 이 대표는 “김 원장님은 역시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네요. 나도 다시 태어나면 미용사로 태어나야지”라고 분위기를 돋운다.
無대본, 無콘티, 無대책
초대손님인 가수 장혜진 씨가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고 있다.
대학 1학년 때 평균대 위에서 텀블링을 하다 바닥으로 떨어져 크게 다친 장 씨는 졸업 후 노래로 진로를 바꿔 MBC합창단에 들어갔다. 이후 2명의 동료와 함께 독립해 ‘코리아코러스’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다. 1980~90년대 최고 스타였던 조용필, 김완선, 이승철, 소방차 등 유명 가수들의 공연 무대에서 코러스로 활동했다.
“코러스를 하면서 나도 가수로 저 무대의 주인공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었느냐”는 오 대표의 질문에 “그럴 생각도, 욕심도 없었다”는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코러스를 하면서 화음이 한데 어우러지는 희열을 처음 느꼈기에 나를 악기의 하나로 여겼다. 코러스로 조용필 씨 무대에 선 건 내 생애에 있을까말까 한 행운이었다.” 떠들썩하던 객석이 일순 고요해졌다.
“최고의 무대 말고 최악의 무대는?”
“없었는데요.”
“그럼, 오늘을 최악의 무대로 만들어주겠습니다. 그전에 노래 한 곡 듣고 가죠.”
MC와 초대손님 사이에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졌다. 한 시간 넘게 이어진 녹화 도중 장 씨는 네 번에 걸쳐 자신의 히트곡 ‘키 작은 하늘’ ‘술이야’ ‘1994년 어느 늦은 밤’ 등을 불렀다. 그때마다 토크쇼 무대는 콘서트 현장을 방불케 하는 열기로 달아올랐고, ‘떼창’과 ‘앵콜’을 연호하는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오늘밤 그대에게 말로 할 수가 없어서 이런 마음을 종이 위에 글로 쓴 걸 용서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부를 땐 객석에 숙연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첫딸이 태어나자마자 백일해 증후군으로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20일간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그때 녹음한 노래가 ‘1994년 어느 늦은 밤’이다. 병원에 살다시피 하다 어느 날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갔는데, 주인 없는 아기 방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다 나왔다. 노래 중반부에 ‘외로이 텅 빈 방에 나만 홀로 남았을 때~’라는 가사가 있는데 음반 녹음을 하면서 그 느낌이 고스란히 살아났다. 가사가 늦게 나와서 녹음실로 가던 차 안에서 받았는데 한 번에 녹음을 끝내서 스태프들이 다 놀랐다. 아마 그때 심경이 노래에 잘 실렸던 것 같다.”
녹화 끝 무렵,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노래는 ‘마주치지 말자’였다. “나가수(MBC ‘나는 가수다’)에 나가 꼴찌해서 수렁으로 빠진 얘기는 다음 회에서 듣기로 하자”는 MC들의 말에 장 씨는 “그냥 가볍게 생각하고 나왔더니 목이 잠기도록 시시콜콜 별별 얘기를 다 묻고, 오늘 하루 출연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다음에 또 나오라고 하고, 콘서트도 아닌데 노래도 여러 곡 부르라고 하는 정말 이상한 프로그램”이라며 두 MC를 향해 “우리 더 이상 마주치지 말자”고 응수했다.
가사에 담긴 본래 뜻은 헤어진 연인과 우연히 마주치길 바라고 그리워하는 내용이지만 ‘대본도 콘티도 정해진 시간도 없는 대책 없는 꼴통 방송’을 제목에 빗댄 선곡이었다. 객석에 조명이 꺼지고 전주가 흐르자 3시간 넘게 이어지는 공개방송에도 지친 기색 없이 방청객들은 목이 터져라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열정을 불살랐다.
양산되는 ‘꼴통 마니아’
공개녹화 후 만난 이상훈(48) 씨는 “일주일 전 인터넷에서 꼴통쇼를 접하고 공개녹화에 참석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인터넷에서 보고 ‘참 특이한 것도 있구나’ 하고 궁금했는데, 와서 보니 두 MC가 좋은 일을 하는 것 같아 더 관심이 간다. 현재 마케팅 일을 하는데 평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없을까 고민해왔다. 생각만 있고 막상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크게 도움이 됐다”고 했다. 가족과 친구 등 7명을 이끌고 대전에서 왔다는 랑주(필명·42) 씨는 “토크쇼에 나온 분들의 얘기에 공감이 가고 배울 게 많다. 세일즈 업종에서 중간간부를 맡고 있는데 팀원이 20명이다.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얘깃거리와 일에 필요한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어 공개녹화에 여러 번 참석했다”고 했다.
방송 시작 5개월여 만에 ‘꼴통 마니아’를 양산하고 MC와 초대손님, 방청객이 함께한 4박5일간의 일본여행 ‘꼴통투어’까지 성사시킨 쇼가 만들어진 계기가 궁금하다. 자타공인 ‘별꼴(별난 꼴통, 오종철)’, ‘완꼴(완전 꼴통, 이영석)’ 두 MC는 “나약한 젊은이들을 일깨우고 마음에 안 드는 요즘 세태에 ‘돌직구’를 날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오 대표는 “요즘 사람들은 너무 똑같아지려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정해준 길, 남과 똑같은 길로만 가려고 하지 않나. 부모와 사회가 정해준 길이 아닌 자기만의 스타일로 남과 다르게 가도 얼마든지 삶에서 승리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걸 마스터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 대표는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를 강타한 ‘힐링’ 열풍에 딴죽을 걸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데 멈추면 뭐가 보이나, 죽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데 아프면 병원 가야지 청춘은 무슨…. 종철 씨하고 죽이 맞아서 그런 말도 안 되는 풍조에 돌직구를 날리는 쇼를 하자고 의기투합했다.”
이들이 방송에서 ‘정신무장 버라이어티’를 강조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이 대표의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모험을 하지 않는다. 절벽에서 떨어져보고 깨져보고 실수도 해봐야 하는데 안전한 길만 찾고 절벽 근처엔 아예 안 간다. 우리 쇼의 콘셉트는 그들을 살살 꼬여 절벽 끝으로 데리고 가서 뒤에서 확 밀어버리는 거다. 그래도 ‘절대 죽지 않는구나’ ‘내 등 뒤에 날개가 있구나’ 하는 걸 스스로 느끼게 해주려는 것이다.”
‘등 뒤에 날개가 있다’
회를 거듭할수록 MC들이 예상치 못한 파급효과도 나타났다. 오 대표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자살을 생각하던 분이 미션을 수행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라고 했다. 43세 미혼여성 김현희(가명) 씨는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받아줄 가족도 직장도 없었다. 생을 마감할 결심을 하고 대학졸업장 등 자신의 흔적들을 불태우며 주변 정리를 하던 중 오 대표의 전화를 받고 공개방송 녹화에 참석했다.
오 대표는 “초기엔 녹화 도중 미션 수행자를 뽑지 않고 미리 인터넷으로 사연과 함께 신청을 받았다. 그때 김 씨의 나이가 너무 많아 망설이다 전화를 걸었는데, 자기가 뽑힐 줄은 생각도 못하고 인터넷에 신청한 것도 잊고 있었다”고 했다. 김 씨에게 주어진 미션은 ‘43세의 내가 50세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쓰기’였다. 이후 그는 인터넷 쇼핑몰을 창업해 사업가가 됐다.
이밖에도 꼴통쇼에 출연했던 20대 젊은이가 방송 직후 1억 원의 유학자금을 지원받아 영국왕립미술학교로 유학가게 된 사례, 꼴통투어에 참가했다 여행박사 신창연 대표와 이 대표에게 스카우트돼 취업하게 된 방청객 2명의 사례 등 화젯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9회 방송에 출연했던 여행박사 신 대표와 분기별로 꼴통투어를 기획해 돈이 좀 모이면 가난해서 여행을 못 가는 분들을 도울 생각”이라는 두 MC는 “우리는 방송에서 ‘직접광고’도 해주고 협찬도 받는다. 또한 ‘꼴통’ 브랜드로 다양한 이벤트를 벌여 수익이 생기면 남을 더 많이 돕고 싶다”고 했다.
공개 녹화가 끝난 후 40여 명의 방청객과 가진 뒤풀이에서 이들은 “즉시, 반드시, 될 때까지, 쭈욱!” 방송을 밀고 나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