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가몬의 아스클레피온.
갈레노스는 철학에도 해박해 수백 권의 책을 남긴 교양인이었다. 그는 130년 소아시아 반도 북서부에 있는 페르가몬(지금은 ‘베르가마’로 불린다)에서 태어났다. 당시 도시들은 대개 해안에 있었는데, 페르가몬은 해안에서 20여 km 들어간 내륙에 있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에우메네스 1세(재위 기원전 263~기원전 214) 때 독립한 이 도시는 에우메네스 2세(재위 기원전 197~기원전 159) 시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됐다. 학문이 크게 번성했고, 최전성기에는 에게 해에서부터 카파도키아 지역까지 지배했다. 그러나 기원전 130년경부터 쇠퇴해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게 됐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페르가몬을 유명하게 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페르가몬 도서관으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견줄 정도였다고 한다. 장서가 20여만 권이었다니 놀라운 규모였다. 경쟁을 꺼린 알렉산드리아가 종이의 재료인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갈레노스가 태어났을 때 이 도서관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이것으로 상징되던 그리스 문화 전통은 유지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기리는 신전 아스클레피온이다. 기원전 4세기 무렵 세워진 이 신전은 페르가몬의 발전에 따라 명성을 더해가다가 갈레노스가 청소년일 때 루피누스에 의해 새로 단장됐다. 페르가몬의 대지주이며 뛰어난 건축가인 니콘의 아들로 태어난 갈레노스가 의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는 아스클레피오스에 있었다.
아버지의 교육열 덕분에 철학을 비롯해 문학과 기하, 산수 등 여러 학문을 공부한 갈레노스가 진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니콘의 꿈에 아스클레피오스가 나타나 ‘아들에게 의학을 가르치라’는 계시를 준 것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페르가몬은 물론 소아시아 전역과 인연이 깊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의 18세 혹은 19세 직계후손이라고 한다. 이러한 관계는 서양 고대 의학의 성립과 발전 계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신화에 따르면 아스클레피오스는 ‘치료의 신’ 아폴론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사랑했던 테살리아의 코로니스가 이스퀴스라는 남성을 사랑해 떠나자 분노한 아폴론은 누나인 아르테미스에게 복수를 요청했다. 아르테미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코로니스는 아폴론의 아이를 가졌다고 밝혔다. 아폴론은 죽어가는 그녀에게서 아이를 꺼냈는데 그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였다.
아폴론은 이 아이를 켄타우로스인 케이론에게 데려가 의술을 가르쳐줄 것을 부탁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훌륭한 의사가 됐다. 그는 사람을 죽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도 살려낼 수 있게 됐기에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죽고 만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 아스클레피오스와 그의 두 아들은 실존인물이고 훌륭한 의사였다고 밝혀놓았다. 두 아들 포달레이리오스와 마카온이 트로이 전쟁에 참가해 마카온은 사망하고 포달레이리오스는 고향 그리스로 돌아가지 않고 이오니아 연안에 정착했다는 것.
포달레이리오스의 자손은 크니도스 반도와 코스 섬, 로도스 섬에 살았는데 그 후손에게서 700여 년 후 히포크라테스가 태어났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의학이 소아시아 반도에 자리 잡는 과정을 보여준다. 히포크라테스의 등장은 신앙과 계시에 의존하는 종교적 치료에서 합리적인 의학적 치료로 옮겨감을 의미한다.
기원전 460년경 그리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코스 섬의 명문 의사 가문에서 태어난 히포크라테스는 여느 귀족 아이들처럼 일반교양과 의학, 수사학 등을 공부했다. 고향에서 진료와 의학교육을 하던 그는 부모가 죽은 후 선조들의 고향인 그리스 북부 내륙의 테살리아로 옮겨가 이곳저곳에서 환자를 보다가 라리사 지방에서 생을 마쳤다.
그는 종교적 치료를 부정하고 자연철학에 근거한 합리적인 의학을 주창했다. ‘히포크라테스 전서’ 중 하나인 ‘신에 기인하는 질병에 관하여’에서 그는 주술사나 신앙으로 치료하는 요법사 등을 강하게 비판한다. 간질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이를 치료하지 못하는 요법사들이 자신의 부족함은 숨기고 ‘신에 기인하는’ 용어를 이용해 경건함으로 속인다고 지적했다. 이는 질병의 원인을 신에게서 찾는 종교적 질병관에 대한 부정이었다.
그는 질병의 원인이면서 치료의 근거가 되는, 신을 대체하는 그것을 자연에서 찾았다. 건강은 자연과 같이 보편적이며 균형 있게 움직이는 상태라고 이해한 것이다. 그는 인체는 혈액, 점액, 황담액, 흑담액의 4개 체액으로 이뤄져 있다고 봤다. 이 ‘4체액설’은 만물이 공기, 물, 불, 흙의 4원소로 이뤄졌다는 그리스의 철학적 전통을 따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와 4체액설
히포크라테스는 이 체액들 사이의 불균형을 질병 원인으로 보았다. 따라서 치료는 체액의 불균형을 해소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의사는 어떤 체액에 문제가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진찰 과정과 진단, 예후에 대한 내용을 충실히 다뤘다. 환자의 얼굴과 눈, 호흡, 대변, 소변, 가래 등을 면밀히 검사하게 했다. 진단이 끝나면 치료법을 제시했는데, 음식 조절과 운동이 가장 기본적인 요법이었다.
체액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으로는 체액을 뽑는 사혈(瀉血)과 대소변으로 빼내는 설사와 이뇨, 그리고 구토 등을 이용하라고 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자연철학을 근거로 해서 제시한 의학 이론은 그리스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때문에 그가 타계한 후에도 소아시아 반도의 연해(沿海)는 그리스 의학의 중심이 됐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를 서양 의학의 근원으로 칭송하고 추종했다. 그러나 해부학적 전통을 포함한 다른 학파들의 업적도 계승했다. 헤로필로스(기원전 335~기원전 280)와 에라시스트라토스(기원전 310~기원전 250?)가 다른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스탄불 맞은편인 보스포루스 해협 동부 해안의 해상도시인 칼케돈 출신인 헤로필로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했다. 그는 해부학적 관찰에 근거해 뇌가 ‘인간의 지성이 위치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는 동맥과 혈관을 뚜렷이 구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아나톨리아 남서해안 카리아 반도에 있는 크니도스 출신이었다. 그는 대뇌와 소뇌가 다르고 인간 뇌의 표면 주름이 동물 뇌의 표면 주름보다 복잡하므로 주름은 지능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동맥과 정맥의 근원은 심장이라고 했다. 혈관에 있는 반월판과 이첨판을 발견할 정도로 그는 해부학에 정통했다.
이들의 의학 체계는 히포크라테스와는 크게 달랐다. 히포크라테스는 자연철학 기반 위에서 인체를 이해했으나 두 사람은 해부에 중점을 줬다. 에라시스트라토스가 태어난 크니도스는 히포크라테스의 고향 코스 섬과 좁은 만을 사이에 두고 접해 있다. 그런데도 크니도스학파는 히포크라테스와 달리 환자보다는 질병에 초점을 맞췄다. 해부학과 장기의 기능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였다.
130년, 페르가몬에서 갈레노스가 태어났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이후의 학파 간 학설 논쟁을 논리적 사고와 정확한 관찰을 통해 하나로 묶어냈다. 또한 체액론과 프네우마에 근거한 생기론(生氣論)을 결합해 고대 의학을 완성시킴으로써 의학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됐다.
‘계승자’ 갈레노스의 탄생
갈레노스의 초상.
이러한 공부를 통해 갈레노스는 정확한 관찰인 해부의 중요성을 통감했다. 그는 ‘신체기관의 사용에 관하여’란 저서에서 이전 학자들의 학설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의학 이론의 전문가이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체액론을 바탕으로 인체론과 병인론을 견지했다. 이를 생기론의 관점인 프네우마와 결합해 육체와 생명을 이해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라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페르가몬으로 돌아가 의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3년간 검투사 주치의를 맡았는데 이것이 소중한 경험이 됐다. 거친 싸움으로 늘 부상에 노출돼 있는 검투사들을 통해 다양한 임상경험을 축적한 것이다. 페르가몬의 정정(政情)이 불안해지자 그는 제국의 중심인 로마에 입성해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로 인해 시기를 받아 로마를 떠나기도 했지만, 곧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초청으로 황실 의사가 되어 자신의 진가를 후대에 전할 기회를 얻게 됐다.
갈레노스는 의학 연구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정력가였다. 19세기 초반 독일 의사 카를 퀸이 정리한 갈레노스 전집에는 122편의 저술이 실려 있다. 이 저술을 모두 갈레노스 저작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상당한 분량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의학 이론은 16~17세기에 이를 때까지도 비판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내용이 탁월해 권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갈레노스의 위대함은 근대 해부학을 개척했다는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서적인 ‘파브리카’의 출판과 근대 생리학의 문을 연 하비의 혈액순환설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난다. 베살리우스와 하비가 주목받게 된 것도 갈레노스처럼 해부학과 혈액 생리학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갈레노스는 정밀한 관찰과 이론화로 빼어난 설명을 제시했으니 베살리우스와 하비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부와 관찰을 중시한 갈레노스는 인체 기관에 대한 정밀한 기록을 남겼기에 해부가 금기시된 고대와 중세에는 가장 신뢰할 만한 해부 지식으로 이해됐다.
생리학에서도 그는 동맥에 혈액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선배 학자들은 동맥은 ‘프네우마’라고 하는 생기(生氣)가 통과하는 관이며, 동맥에서 피가 나오는 것은 혈액이 흐르는 정맥과 연결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살아 있는 동물의 동맥을 묶고 실험을 해 동맥 안에 혈액이 존재함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환부를 꿰맬 때 쓰는 봉합사(縫合絲)로 주요 동맥을 묶고 맥을 관찰해 동맥의 맥박이 심장에서 전해진다는 결론을 얻었다. 철저히 계획된 실험으로 자신의 논리를 입증한 것이다.
그밖에도 흉부의 근육과 횡격막이 흉강을 확장시켜서 허파로 공기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봉합사를 이용해 소변이 방광이 아닌 신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증명해냈다. 신경에 대한 실험과 관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목에서부터 횡격막으로 이어지는 신경을 잘라 횡격막 신경이 호흡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규명했다. 척수를 차례로 제거하면서 어느 척수가 어느 근육에 영향을 미쳐 마비를 가져오는지를 파악해 척수신경과 근육의 연관성을 밝히려 했다.
이슬람에서 부활한 갈레노스
중세 유럽 의과대학의 해부학 수업 광경. 상단에 앉아 있는 교수가 갈레노스의 책을 놓고 강의를 진행한다.
그로 인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동물 해부만 주로 했기에 동물과 인체의 차이점을 통찰력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들었다. 둘째, 통찰력의 근원인 그의 사고는 그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가치관을 투영했다. 베살리우스의 해부로 인해 비판받은 갈레노스 해부학 지식의 결함은 이러한 것 때문에 일어났다. 하비가 수학적 추정으로 혈액순환에 대한 판단의 객관성을 확보하려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럼에도 갈레노스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남긴 의학적 성취를 하나로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그리스 전통을 잇는 의학이 로마 제국의 중심에 서게 함으로써 서양 고대 의학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4세기 이후 쇠퇴한 로마와 그 뒤를 이은 동로마 제국에서는 갈레노스가 이룩한 의학적 전통이 학술적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그의 연구 성과는 이슬람 제국의 탄생과 함께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의학의 발전을 견인했다. 이로써 그리스 의학은 문명사 전개의 중요한 키워드가 됐다.
5세기경부터 시리아와 터키의 국경에 해당하는 소아시아 동남부 지역에서 서양 고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리스 의학이 이슬람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중심지는 350년 오늘날의 대학과 유사한 학교가 설립된 니시비스(터키 누사이빈)였다가, 페르시아 침공 후에는 아랍어의 방언인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동방기독교의 중심지 에데사(터키 우르파)로 옮겨갔다. 그곳의 학자들은 그리스 서적들을 시리아어로 번역했고, 9세기 이후 100여 년간에 걸쳐서는 이를 아랍어로 중역(重譯)해, 갈레노스 의학을 이슬람으로 전파시켰다.
6세기 말 메카에서 태어난 무하마드가 계시를 받고 코란을 저술해 설파함으로써 형성된 이슬람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를 석권하며 세력을 넓혀나갔다. 영토의 확장과 동시에 종교의 전파를 꾀한 이슬람은 제국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국가 체제 정비라는 새로운 요청에 직면했다. 유목을 기반으로 하는 전사 귀족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시켜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집권국가를 만들려면 다양한 지적 경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주목한 것이 그리스 학문이었다.
그리스 학문을 수용하려면 번역이 필요했다. 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그리스어나 시리아어로 된 그리스 저술의 아랍어 번역은 9세기 초반 알 마문(813~833)의 시대에 이르러 본격화했다. 그의 치세 때 후나인 이븐 이샤크를 중심으로 바그다드에 ‘지혜의 집’이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그리스의 여러 저술을 번역했다. 핵심은 의학이었다. 의학이 지닌 실용성 때문이었던 듯하다. 후나인은 갈레노스의 저술은 100여 편 이상,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은 15편 번역했다.
번역을 거치면서 갈레노스의 의학은 아랍 의학의 중심에 놓이게 됐다. 아랍 의학에서도 갈레노스의 해부학적 견해와 체액론에 근거한 생리학적 의학 이론이 우세해진 것. 그러나 갈레노스 이론을 추종하지만은 않았다. 세계 최초로 천연두와 홍역을 임상적, 과학적으로 구별한 의사 알 라지(865~925)는 저서인 ‘갈레노스에 관한 의구심들’에서 “갈레노스는 대가이며 존경할 만한 사람이지만, 그의 오류는 지적돼야 하며 그것이 갈레노스가 내게 맡긴 사명”이라고 했다. 그는 체액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체의 다른 조절 기능을 구체화하려고 했고, 체액과 관련된 4가지 원소 이외에 다른 특성을 갖는 여러 물질을 제시했다.
이븐 시나의 기여
이러한 비판과 임상 경험의 확대로 갈레노스를 잇는 이븐 시나(980~1037)가 등장했다. 이븐 시나의 대표 저술인 ‘의학정전’은 중세 유럽에서도 번역 출판돼 의과대학의 주 텍스트로 쓰였다. 그는 “지식이란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며, 의학 역시 증상들을 연구해 건강과 질병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러한 견해에 따라 결핵이 전염병임을 밝혀냈으나 전염의 매체는 흙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400여 년간 결핵이 전염병임을 부인한 것을 감안한다면 결핵이 흙을 통해 전염된다고 한 그의 판단은 큰 흠이라고 보기 어렵다.
‘여유당전서’에 실린 의령의 육기론. 인체 구성으로써 4원소설을 지지했다.
갈레노스의 체액 이론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지만, 나름의 과학적 방법론을 제시하고 해부학적 의학적 원리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는 갈레노스의 의학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그러한 저술이 12세기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으로 수입되면서 유럽 주요 의과대학에서 교재로 이용됐다. 중세 유럽에서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갈레노스의 위대함이 이븐 시나를 통해 재발견된 것이다.
조선에 전해진 갈레노스
갈레노스 의학은 이슬람을 거쳐 다시 유럽에 소개돼, 16~17세기까지 명성을 이어나갔다.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멀리 중국에까지 전해졌고, 18세기 후기엔 조선의 실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런 점에서 갈레노스는 유럽과 아랍을 넘어 ‘세계의 의사’가 된 최초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기하원본’ ‘천주실의’ 등을 저술해 서양 문물을 본격적으로 전한 이래 많은 선교사가 경쟁적으로 서양 지식을 전파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을 소개한 테렌츠의 ‘태서인신개설(泰西人身槪說)’과 롱고바르디의 ‘인신도설(人身圖說)’, 갈레노스의 생리학을 소개한 아담 샬의 ‘주제군징(主制群徵)’이 대표적이다.
‘주제군징’은 인체 생리작용의 중심으로 혈액, 열, 감각과 운동기능을 들었고, 이를 주관하는 기관으로 간, 심장, 뇌를 제시했다. ‘주제군징’은 조선에도 전해져 ‘실학자’로 명명된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수용됐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과 ‘서국의(西國醫)’에서 “서양 의학이 중국 의학에 비해 매우 자세하니 무시할 수 없다”며 ‘주제군징’의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 그러나 뇌가 인체의 중추가 된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고, 성리학적 입장에서 뇌는 단지 감각의 중심일 뿐이며 심장이 인식의 토대가 된다고 구분했다.
‘주제군징’에서 제시된 갈레노스의 의학 이론은 인성(人性)의 근거를 심(心)에서 찾았던 성리학적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라 조선 후기 주류 사상계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웠다. 서학(西學)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비난하던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이익의 저술을 정리한 안정복은 ‘서국의’를 ‘성호사설’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갈레노스의 의학에 담긴 인체와 자연에 대한 이해는 실학자들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정약용의 전통의학 비판
이는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러 분명하게 드러났다.‘여유당전서’에 실린 ‘의령’의 육기론, 인체 구성으로써 4원소설을 지지했다.
철학과 국가운영 등에 관해 많은 저술을 한 정약용은 의학에 관한 저술로 ‘마과회통(麻科會通)’ ‘촌병혹치(村病或治)’ ‘아언각비(雅言覺非)’ ‘의령(醫零)’ 등을 남겼다. 그는 서양의 의술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 ‘약로기(藥露記)’에서 서양 의사는 내과와 외과로 구분되며, 약종상과 약제사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서양의 초목과 금석 약재, 병의 진단법과 치료법 등도 언급했다. 서양 의학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의령’인데, 정약용은 ‘육기론(六氣論)’ ‘뇌론(腦論)’ ‘근시론(近視論)’ 등에서 전통의학에서 말하는 인체와 자연관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이 가운데 “삭제할 것”으로 되어 있는 ‘뇌론’은 아마도 이익이 언급한 ‘주제군징’의 내용이었던 듯하다.
정약용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4체액설이다. 이는 전통의학에서 질병의 원인으로 제시한 풍(風) 한(寒) 서(暑) 습(濕) 조(燥) 화(火) 6가지를 비판한 ‘육기론(六氣論)’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는 6기가 동등한 범주의 것이 아니라는 한계를 지녔다면서 기본적인 요소는 한(寒) 열(熱) 조(燥) 습(濕)이라고 했다. 몸안의 4개의 체액과 그것의 속성인 한·열·조·습의 부조화로 질병이 생긴다는 이론이다.
이는 4체액설을 단순히 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사상의 기초로 삼아 전통의학을 비판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치료에 서도 4원소 혹은 4체액에 입각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중풍으로 인한 구안와사를 전통적인 치료 원칙인 습열(濕熱) 제거가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방법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본격적인 의사가 아니었다. 당시에는 서양의 문물이 충분히 유입되지 않았던 만큼 그는 서양 의학에 정통할 수 없어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열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열역학법칙과 마찬가지로 문명도 높은 데서 낮은 데로 움직이는 것 같다. 열은 평균에 도달하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지만, 문명은 새로운 창조력을 얻기에 동력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갈레노스 의학이 형성되고 전파되는 과정은 바로 그와 같은 문명 교류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