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北은 중국 안보 목구멍 미국 물러나도 포기 안 해

베이징서 본 북중 관계

  • 장량 │외교안보전문가·정치학 박사

    입력2014-01-22 13:5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北-中 ‘전략적 이해관계의 불일치하의 일치’ 계속될 듯
    • 中, 고비 때마다 한반도에 병력 파병… “역사에서 배워야”
    • 한반도가 中 영향권에 빨려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 한국의 북핵 정책 재고해야
    北은 중국 안보 목구멍 미국 물러나도 포기 안 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2011년 12월 19일 조선중앙TV와 조선중앙방송은 정오(正午) 방송을 통해 김정일이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급사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은 방송을 전후해 후진타오 당시 국가주석이 포함된 특별소조를 구성하는 등 긴박한 움직임을 보였다. 중국은 그날 오후 양제츠 외교부장을 통해 주중국 북한 대사대리 박명호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공동명의의 조문을 전달했다. 같은 날 저녁 장즈쥔 외교부 수석부부장은 베이징에 주재하는 한국, 미국, 일본, 러시아 대사를 불러 북한을 자극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다음 날 환구시보는 사설을 통해 ‘중국은 북한에 가해지는 외부 압력을 막아주는 방패 구실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날 오전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직접 베이징 차오양구 소재 북한대사관을 방문해 김정일의 사망에 조의를 표했다. 원자바오 당시 총리,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 리커창 당시 수석부총리 등 여타 정치국 상무위원 8명도 모두 조문차 북한대사관을 방문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중국은 김정은 체제 및 북한의 안정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뜻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렸다. 러시아 측에 따르면 중국은 북한 급변사태에 대비해 43만여 명에 달하는 선양군구 소속 신속대응부대를 북한과의 국경에 배치하고, 조기경보기 정찰도 강화했다고 한다.

    한반도 개입은 필연

    시곗바늘을 64년 전으로 되돌려보자. 1950년 6월 25일 남침 이후 일방적으로 남진을 계속하던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발이 묶이는 등 패퇴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8월 20일 저우언라이 당시 중국 총리는 유엔에 “중국은 이웃나라 조선의 상황 전개를 우려하고 있으며, 조선반도 문제에 개입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제3국을 통해 미국에도 “중국의 안보를 위해 조선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은 국민당과의 30여 년에 걸친 내전에서 승리한 끝에 정부를 수립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생국가였다.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국군과 유엔군이 일패도지(一敗塗地) 상태이던 북한군을 압록강-두만강 유역으로 거세게 밀어붙이자 인민지원군을 빙자한 중국군 30만여 명이 그해 가을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다. 낭림산맥과 적유령산맥, 개마고원 골짜기 깊숙이 매복해 있던 중국군은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의 측면과 배후를 기습공격해 격파하고 12월 5일 평양을 점령했으며 이듬해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밀고 내려왔다.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는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의 끊임없는 침략과 ‘태평천국의 난’ ‘염군(捻軍)의 난’ 등 농민반란으로 인해 멸망의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음에도 신흥 일본에 맞서 1894년 6월 대군을 조선에 파병했다. 그러나 청나라군은 천안과 평양, 랴오둥반도 등 육상과 압록강 하구, 산둥반도의 웨이하이(威海) 앞바다 등의 해상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연전연패했다. 그 결과 청나라는 일본에 대만을 넘기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도 상실했다.



    지금으로부터 422년 전인 1592년에 시작된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몽골족의 거듭된 침공과 만주족 누르하치의 흥기(興起), 농민반란이라는 국가적 위기상황 하에서도 이여송이 이끄는 4만여 명의 육군과 진린이 지휘하는 5000여 명의 수군을 조선에 파병하는 등 1598년 종전 무렵에는 10만여 명의 대군을 조선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처형 후폭풍 미미할 듯

    北은 중국 안보 목구멍 미국 물러나도 포기 안 해

    지난해 2월 7일 중국 단둥시의 압록강단교 앞에서 중국 군인이 근무를 서고 있다. 중국은 2011년 김정일 사망 직후 북한 쪽 국경에 병력 43만 명을 배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1950년 6·25전쟁, 1894년 청일전쟁, 1592년 임진왜란 때 등 역대 중국 정권은 한반도가 해양세력의 영향력하에 들어갈 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주저 없이 대군을 파병했다. 이들 역대 정권은 내란 상태에 있거나 내란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국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벗어난 대규모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국가 안보라는 관점에서 중국에 대한 북한의 비중은 미국에 대한 멕시코의 비중보다 높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때 중국이 취한 일련의 조치도 중국의 국가 안보라는 시각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중국으로서는 김정일의 사망이 야기할 수 있는 북한의 불안정이 자국 안보에 미칠 파급효과를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지난해 2월 감행된 북한의 제3차 핵실험과 12월에 자행된 장성택 처형 이후 중국의 대북 정책 변화를 예상하거나 기대하는 한국과 미국, 일본, 서유럽 국가의 외교관, 군 장성, 학자, 언론인의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3차 핵실험 실시 이후 일부 한국 언론은 중국이 한반도의 안정보다 ‘북한의 비핵화’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해나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최근에는 중국이 한국 주도의 통일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다는 보도도 나왔다.

    실제로 중국이 대외개방을 지향하고 경제 발전을 계속해나가는 반면, 북한은 폐쇄 ·고립 정책을 고수하며 경제난이 심화하는 데다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권력을 구축함에 따라 북한에 대한 중국인들의 실망감을 넘어선 혐오감은 점점 더 커졌다. 장성택 처형은 안 그래도 북한에 멀어지던 중국인의 마음을 더욱 더 멀어지게 했다. 저우펑안 안후이성 우후시 정협위원은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장성택의 처형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문화혁명의 광기를 떠올리게 한다’고 썼다. 그만큼 장성택의 처형은 중국인들에게 북한체제에 대한 혐오와 동시에 북한 주민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상당수 중국 지식인은 북한을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로 간주하며, 자국의 대북 정책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 정부로서도 장성택을 처형하면서 석탄을 포함한 자원 수출입 계약 문제와 함께 나선항 임대차 문제 등을 제기한 김정은 정권이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다.

    그럼에도 중국 외교부 훙레이 대변인은 “이것(장성택 처형)은 조선의 내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추수룽 칭화대 교수를 포함한 중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중국통(中國通)이던 장성택의 처형에도 북 ·중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북한이 향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중국이 달리 대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1인자인 수령 김정은이 외교 업무도 주관하는 터라 장성택의 전격 처형이 중국과의 관계에 미칠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보인다.

    잔물결 아닌 심층 들여다봐야

    한국의 시각에서 볼 때 베이징의 북한 정권에 대한 태도는 불가사의하지만 중국의 처지를 역지사지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관점에서 북한은 면적 12만3000㎢, 인구 2400만 명, GDP(국내총생산) 230억 달러의 소국이기는 하지만 육지로는 만주, 바다로는 발해만과 연접하고 숙적 일본을 직접 공격할 수 있는 동해로의 출구를 담보하는 요충 중 요충이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북한은 베이징과 톈진을 포함한 수도권의 안보를 확보하는 수단이면서 미국과 일본 등 해양세력을 공격할 수 있는 발판인 반면, 그것을 잃어버리면 만주와 발해만 나아가 수도권이 위협을 받게 되는 그야말로 사람의 목구멍(咽喉)과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더구나 미 ·일에 비해 해·공군력이 약한 중국 육지로 연결된 북한의 군사전략적 가치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한국과 미국, 일본 등의 외교관, 군 장성, 학자 중 일부가 특히 장성택 처형 후 중국이 과거와 다르게 북한을 전략적 자산(assets)이라기보다는 부채(debts)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으나 이는 호수의 표면에 이는 잔물결만 보고, 심층도 그럴 것이라고 오해한 데서 비롯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국의 진심은 국가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러시아가 북한을 포기한 후 영향력을 상실한 사례에서 얻은 교훈’이란 제목이 달린 보고서를 극찬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중국이 국가 안보에 꼭 필요하기 때문에 북한을 중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중국을 믿지는 않지만 정권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한다. 북 ·중 관계는 ‘전략적 이해관계의 불일치하의 일치’ 상태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월 6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밝히면서 국정과제의 하나로 ‘통일을 위한 기반조성’을 제시했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는 독일 통일이 가져온 부정적 측면을 부각한 각종 보고서와 언론보도 등의 영향으로 남북통일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경제적 부담을 가져올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 발언은 통일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통일의 길은 멀고도 먼 것이 현실이다. 통일을 위한 국내외적 여건이 조성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을 대하는 방식 등과 관련한 한국 사회 내부의 극단적 분열은 문제 삼지 않더라도 국제정세도 결코 통일에 유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제가 잘못된 한국 대북정책

    北은 중국 안보 목구멍 미국 물러나도 포기 안 해

    지난해 12월 8일 중국의 중요 대외무역 통로로 떠오른 북한 나진항에서 한 근로자가 자전거를 끌고 가고 있다. 중국의 동북3성은 나진항을 통해 동해 진출로를 확보했다.

    미 ·중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견해는 이율배반적이다. 미국은 친중국적인 통일한국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며, 중국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한국 주도의 통일을 결코 수용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 ·중 가운데 어느 일방을 배제하고 다른 나라와만 협의 ·협력해 통일을 달성할 수도 없다. 한국을 미국의 방위 목표에서 빼버린 1950년 애치슨라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극단적인 경우 미국 처지에서 한국은 상실해도 어쩔 수 없는 위치에 있지만, 중국 처지에서 북한은 미국이 태평양에서 괌 동쪽으로 후퇴하더라도 숙적 일본이 버티고 있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활의 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은 중국으로 하여금 안보 불안을 느끼지 않게 만들고 난 다음에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 ·중의 처지가 이렇듯 서로 다르기에 통일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한국이 강한 인내심을 갖고 실패한 국가이자 깡패와 같은 행태를 보이는 북한을 선도해나가야 할 것이다.

    통일 문제 등과 관련해 청와대 등 정부 내외의 많은 인사가 핵무기를 가진 북한과는 진정한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북한이 먼저 진정성과 신뢰를 보여주어야 한국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한국은 정권 2인자였던 장성택을 잔인하게 처형하고, 약속을 수시로 뒤집는 북한 정권이 도대체 믿을 수 있기나 한 존재인지 다시 한 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믿을 수 없는 상대가 믿을 만한 행동을 취할 때에만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정책은 전제부터가 크게 잘못됐다고 할 것이다.

    지난해 6월 말 이뤄진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이후 한중 관계가 괄목할 만하게 개선된 것은 중국의 대(對)북한, 미국, 일본 등 관계와 관련해 한국이 과거보다 중요해진 데다 급부상하는 중국이 가능한 한 한국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와 20세기 전반 미국, 일본, 독일 등이 이미 보여주었듯 국력이 급격히 증강된 국가는 무력 ·비무력적 여러 방법을 동원해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공격적 현실주의(offensive realism)적 경향을 보인다. 아직도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7.5%에 달할 정도인 중국의 국력 증강 속도에 비추어볼 때, 미국 세력이 퇴조하는 상황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가 중국의 영향권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로 판단된다. 한국에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김정은 올해 방중 가능성 낮아

    북한 정권은 핵무기를 정권 생존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핵 문제는 바로 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북한 핵 문제는 북한 문제가 해결돼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중국의 급부상과 일본의 재무장 추구로 인해 ‘초가집 지붕에 매달린 제비집 근처에 불이 붙은 연작처당(燕雀處堂)’의 위기상황에 처한 한국 정부가 ‘해결할 수 없는 북한 핵 문제를 우선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정책을 갖고 있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지 심각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미 ·중 모두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이 아닌 ‘확산 방지(non-proliferation)’로 초점을 옮기는 상황에서 한국이 기존 방침을 언제까지 고수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북 ·중 관계에서 공산혁명동지(共産革命同志)라는 이념적 유대는 형해화한 지 오래이며 남아 있는 것은 믿을 수 없고, 밉살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전략적 이해관계의 불일치하의 일치’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장성택의 피를 묻힌 지 얼마 안 된 김정은이 올해 안에 방중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북한이 급격하게 불안요소를 보이지 않는 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손에 피를 묻힌 어린아이 김정은과 악수하고 건배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무 차원에서의 북 ·중 간 대화나 협력은 지속될 것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자국 역대 왕조의 멸망이 대부분 만주와 한반도에서 일어난 작은 파동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현 정권을 포함한 역대 중국 정권이 자국 자체가 내란 상황이거나 내란을 막 끝낸 상태에 처해 있는데도 한반도에 대군을 파병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다만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를 처벌할 뿐’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누구보다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경구가 아닐까 싶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