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에서 경복궁 근정전 내부에 연산군이 서 있는 장면.
스코틀랜드의 정신과 의사 로널드 데이비드 랭은 광기를 이렇게 평했다. “광기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돌파구다.” 조선왕조 역사상 성군(聖君)의 길을 가장 극렬히 역주행한 광기의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 그를 바라보는 좌표는 바로 어머니다. 연산군을 ‘있어선 안 됐던 임금’으로 매도하는 것보다 그의 광기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이야말로 ‘왕의 한의학’이 추구하는 지향점이 아닐까.
어머니와 아이 사이의 애착을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이론가는 영국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존 보울비다. 그는 신생아는 완전히 무력하기에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어머니에게 애착을 느끼도록 미리 설정돼 있으며, 어머니와 아이를 떼어놓는 상황은 아이에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형성한다고 규정했다. 연구 결과, 어머니가 결손된 아이들은 훨씬 거칠게 놀았고 과도하게 흥분할 때가 많았으며, 감동결여성 인격장애를 앓은 것으로 밝혀졌다.
동물실험에서도 이런 관점은 증명됐다. 미국 위스콘신대 심리학과 해리 할로 교수팀은 원숭이로 실험을 했다. 그때까지의 정설은 갓 태어난 새끼원숭이가 젖을 먹으려 어미에게 달라붙는다는 것이었다. 실험 결과 새끼원숭이는 엄마와의 ‘접촉’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온몸을 철사로 두르고 우유병을 든 가짜 원숭이와 젖병은 없지만 따뜻한 헝겊으로 몸을 감싼 가짜 원숭이를 우리에 놓아뒀다. 그러자 새끼원숭이들은 후자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나 헝겊 인형 대리모와 함께 있던 새끼원숭이들도 정상적인 원숭이로 크지는 못했다. 그 원숭이들은 우울했고, 다른 원숭이들과 친밀감을 느끼거나 교류하는 등의 행동을 발달시키지 못했다. 마치 자폐증에 걸린 것 같았다. 할로 교수는 그것이 부모와의 상호작용 부족 때문이란 걸 밝혀냈다. 중요한 건 엄마가 아기에게 반응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와 불행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燕山君·1476∼1506, 재위 1494∼1506)은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폭군으로서 연산군의 행보는 이전부터 시작됐다. 일화를 보자. 성종이 세자인 연산군을 불러 다가가려 하는데,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세자의 옷과 손등을 핥아댔다. 세자는 사슴이 옷을 더럽힌 것에 화가 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성종은 화를 내며 세자를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연산군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쏘아 죽여버렸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 있으면서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馴鹿)을 쏘아 죽여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하였다.”
연산군이 내린 형벌은 전례가 없는 잔인한 것들이었다. 손바닥 뚫기, 불에 달군 쇠로 당근질 하기, 가슴 빠개기, 뼈 바르기, 마디마디 자르기, 배 가르기,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연산군이 특히 좋아한 유희는 탈놀이인 처용무다. 기록을 보자. “소혜왕후가 늘 왕의 행동이 무도함을 근심하니, 왕이 하루는 얼굴에 처용 탈을 쓰고 처용 옷차림으로 칼을 휘두르고 처용무를 추면서 앞으로 갔다. 그러자 소혜왕후는 크게 놀랐다.” “왕이 풍두무(?頭舞·풍두라는 탈을 쓰고 추는 춤)를 잘 췄으므로, 매양 궁중에서 스스로 가면을 쓰고 희롱하고 춤추면서 좋아하였으며, 사랑하는 계집 중에도 또 사내 무당놀이를 잘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모든 총애하는 계집과 흥청(興淸) 등을 데리고, 빈터에서 야제(夜祭)를 베풀었는데, 스스로 죽은 자의 말을 하면서 그 형상을 다하면 모든 사랑하는 계집들은 손을 모으고 시청하였다. 왕이 죽은 자의 우는 형상을 하면 모든 흥청도 또한 울어, 드디어 비감하여 통곡하고서 파하였다.”
흥청은 연산군 10년에 나라에서 모아들인 기녀를 말한다. 탈과 가면은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나 그로 인해 알아차릴 수 있는 마음속 인격체를 숨긴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어릴 적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경우가 많다. 그때의 상처는 자기보호 기질을 발동시켜 스스로 마음을 닫게 한다. 종종 마음을 열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서둘러 자신을 꽁꽁 감추고 만다는 게 심리학적 분석이다. 연산군은 어쩌면 마음속 깊이 어머니의 부재와 불행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천리(天理)보다 인욕(人慾)
본격적인 폭정의 계기가 된 것은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다. 그 중심엔 어머니 폐비 윤 씨 문제가 있다. 사실 실록의 관점은 사관의 관점이고, 사관의 관점은 성리학이란 틀 속에서 유학적 성군을 기준으로 정립된 것이다. 조선의 왕도는 근본적으로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추구했다. 내부적으론 성인의 마음가짐을 배워야 하고 밖으론 왕 노릇을 하라는 뜻이다. 중국 북송의 유학자 주돈이의 저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성인(聖人)의 기준을 이렇게 규정한다. “성인은 중정(中正)과 인의(仁義)를 본성으로 삼고 마음이 고요하면서 욕심이 없게 함으로써 사람이 걸어가야 할 도리를 세우는 것이다.”
중국 원나라 주진형이 편찬한 의서 ‘격치여론(格致餘論)’에선 욕심을 음식남녀(飮食男女)라고 말한다. “남녀의 욕정은 인간에게 관계된 바가 크고 음식에 대한 욕심은 몸에 있어 더욱 절실하다. 세상에는 이 둘에 빠진 사람이 적지 않다.”
일부 사가(史家)들은 연산군의 잘못에 대해 패자의 기록으로 진실을 은폐한다고 하지만 조선 왕이라는 통념적 기준에서 본다면 연산군은 확실히 패륜적인 왕이다. 주자(朱子)의 어록을 집대성한 책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음식에 대한 기준은 엄격하다. 주자는 제자들이 “음식에서 무엇이 천리(天理)이고 무엇이 인욕(人慾)이냐”고 묻자 “음식은 천리이지만 좋은 맛을 찾는 것은 인욕”이라고 대답했다.
실록 2년 2월 19일 연산군은 “사당(沙糖), 채단(綵緞), 술독을 푸는 빈랑(檳?)·괘향(掛香)·각양의 감리(甘梨), 용안(龍顔) 등속의 물건을 성절사(聖節使)의 내왕편에 사가지고 오게 하라”고 명한다. 실록 8년 12월 4일엔 중국에 가는 사신을 보고 수박을 구해오라고 시킨다. 이에 장령(掌令·사헌부에 속한 정사품 벼슬) 김천령이 아뢴다. “지금 듣건대, 북경에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박을 구해오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 종자를 얻으려고 한 것이겠으나, 대체로 먼 곳의 기이한 음식물도 억지로 가져오는 것이 불가하온데, 하물며 중국에서 구하는 일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북경에 갔을 적에 들으니, 중국의 수박이 우리나라 것과 그다지 다른 점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수개월이 걸리는 여정에 반드시 상하게 될 것이니, 우리나라에는 이익이 없고 저쪽 나라에서 비방만 받을 것입니다.”
이후 김천령은 능지처참을 당한다. 연산군은 가감 없이 수박에 대한 보복임을 명시한다. “이는 오로지 곧 천령의 짓인데, 전일에 재주를 믿고 마음을 오만하게 한 자다. 내가 일찍이 중국의 수박을 보고 싶어 하였거늘, 그때 천령이 크게 주장하여 막았다. 과연 임금이 다른 나라의 진기한 물건을 구하면 말하여 막아야 하는가? 이것이 어찌하여 그르다고 감히 말하는가? 아뢴 대로 능지·적몰(籍沒·중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 처벌하던 일)하고, 그 자식은 종을 만들고, 그 나머지 민휘 등은 처음부터 사수(死囚)로 가두라. 또 천령·덕숭은 효수하여 전시(展屍)하고, 권헌 등의 소는 삭제하여 버리라.”
실록 11년 4월엔 “이번 성절사 가는 길에 용안(龍眼)·여지(枝)를 많이 사오고, 수박, 참외 및 각종 과일을 많이 구해오라”고 명한다. 여지는 양귀비가 좋아한 과일로 당나라 현종이 남방에서 생산되던 것을 장안성까지 실어오느라 백성들의 원망을 들었던 대표적 과일이다. 연산군은 거리낌 없이 여지를 구해올 것을 주문한다.
기생 뽑아 흥청망청
연산군은 탈놀이인 처용무를 좋아했다.
연산군은 완전히 역주행한다. 실록 11년 4월 20일 잔치마다 쇠고기를 쓸 것을 전교한다. 실록의 기록이다. “이로부터 여느 때의 흥청을 공궤(供饋·음식을 줌)하는 데에도 다 쇠고기를 쓰니, 날마다 10여 마리를 잡아 수레로 실어 들였다. 노상에서 수레를 끌거나 물건을 실은 소까지도 다 빼앗아 잡으니, 백성이 다 부르짖어 곡하였고, 또 군현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바치되, 가까운 도에서는 날고기로, 먼 도에서는 포를 만들게 하였다. 또 왕이 소의 태를 즐겨 먹으므로 새끼를 낳은 배부른 소는 태가 없을지라도 잡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연산군은 여색에 관한 한 색골로 악명 높다. 실록 9년 6월 13일 기록을 보자. “이에 앞서 왕이 미행하여 환자(宦者) 5, 6인에게 몽둥이를 들려 정업원으로 달려 들어가 늙고 추한 여중을 내쫓고, 나이 젊은 아름다운 자 7, 8인만 남기어 음행하니, 이것이 왕이 색욕을 마음대로 한 시초이다.”
이후 ‘흥청망청’이란 신조어의 유래가 된 흥청이 등장한다. 연산군은 음률을 아는 전국의 기생을 골라 궁궐로 불러들인다. 처음에 불러들인 이 기생들은 운평(運平)이라고 불렸다. 하지만 연산군은 이에 성이 안 차는지 벼슬아치의 첩, 창기 가운데서도 운평을 추가한다. 처음에 온 운평은 가흥청(假興淸)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 가흥청을 한 등급 올려 흥청망청의 주인공인 흥청(興淸)으로 승격시켰다. 이때 뒤에 들어온 자들은 속홍(續紅)이라고 했다.
흥청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임금 곁에서 모시는 자는 지과(地科)흥청, 잠자리를 같이하는 자는 천과(天科)흥청으로 구분했다. 실록 11년 6월 18일 기록이다. “왕이 금중(禁中)에 방(房)을 많이 두어 음탕한 놀이를 하는 곳으로 삼았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서 언제나 밖으로 나가 즐길 때면 사람들을 시켜서 들고 따르게 하여, 길가일지라도 흥청과 음탕한 놀이를 하고 싶으면, 문득 이것을 설치하고서 들어갔는데, 그 방을 이름 붙여 ‘거사(擧舍)’라 하였다.”
실록 11년 9월 16일 기록은 이렇다. “그때 장악원에 있는 운평은 천으로 헤아리는 수였으되, 한 순(旬)에 한 번 간택하고 두 순에 두 번 간택하니, 얼굴이 아주 못났을지라도 두어 순이 지나지 않아서 반드시 뽑혔다. 이것을 순간택(旬揀擇)이라 하였다. 밖에서 임신한 흥청은 따로 질병가에 두어 출산하기를 기다려서 곧 묻게 했다. 만약 영을 어겨 묻지 않는 자가 있으면 오작인(·#53700;作人·지방 관아에 속하여 수령이 시체를 임검할 때 시체를 주워 맞추는 일을 하던 하인)을 중죄에 처하였으므로, 낳는 대로 묻으니 젖먹이의 울음소리가 서로 잇달으매, 듣고 이마를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본인의 노골적 경험도 숨기지 않고 전교한다. 흥청 악인 완화아를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난다는 이유를 들어 운평으로 지위를 깎아내리라 명했다. 운평은 장악원의 고친 이름인 계방원(繼芳院)에서 관리하고, 흥청은 원각사에 둔 연방원과 궁궐 안에 둔 취홍원에서 거처했다.
백모까지 겁탈
중국에서 수박을 구해오라고 시킨 연산군의 명에 반대했던 김천령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심지어 큰아버지의 부인까지 겁탈했다. 연산군의 성욕은 결국 백모이자 박원종의 누이인 월산대군 부인 박 씨를 겁탈한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후 2개월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록 12년 7월 기록은 “월산대군 이정의 처 승평부 부인 박 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연산군의 질병 기록은 소변이 찔끔거리는 증상으로 시작한다. 실록 1년 1월 8일 “전하께서 소변이 잦으시므로 축천원(縮泉元)을 드리라 하시는데,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전하께서 오래 여차(廬次)에 계시고 조석으로 곡위(哭位)에 나가시므로 추위에 상하여 그렇게 된 것이오니, 만약 바지 안쪽이나 버선에다 모피를 붙여서 하부를 따뜻하게 하면 이 증세가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기록했다.
남자가 소변을 보기 위해선 양기(陽氣)가 있어야 한다. 소변을 자주 보는 증상은 양적인 면에서 생긴다. 방광에 고이는 소변은 혈관 밖의 물이다. 물은 온도가 4℃에 불과하다. 항온동물인 인간의 몸은 어떤 경우에도 36.5℃를 유지해야 세포가 병드는 걸 막을 수 있다. 소변을 36.5℃로 부글부글 끓이면서 유지하지 못하면 세포는 병든다. 자기방어 측면에서 자주 소변을 배출해야만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이 야간 빈뇨의 원인이다. 이렇게 부글부글 끓이는 전기적 힘을 한의학에선 양기라고 규정한다.
소변은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압축된 힘으로 짜내는 것이다. 물총을 쏘면 물이 발사되는 것과 같다. 짜내는 힘이 약하면 나가던 물이 다시 밀려들어와 잔뇨감이 생기면서 화장실을 자주 들락거려야 한다. 소변을 데우는 힘과 짜내는 힘, 발기력을 합쳐 양기라고 하며, 남성이 오줌발에 신경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양기의 통로는 척추 안쪽을 흐르는 독맥(督脈)이다. 힘 있는 사람이나 득의양양한 사람은 등을 뒤로 젖힌다. 반면 양기가 줄어들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앞으로 푹 숙여진다. 바로 고개 숙인 남자가 되는 것이다. 남자들이 정력제에 목숨 거는 이면엔 이런 이유가 있다. 실록의 기록처럼 연산군이 하복부를 따뜻하게 데우고 난 후 증상이 호전됐다는 건 양기가 약하다는 의미다.
백마로 양기 보충
사실 연산군은 패륜적으로 성에 집착했던 것치곤 자식 농사가 신통치 않았다. 왕후 신 씨에게서 2남1녀, 후궁에게서 2남1녀로 성종이 16남12녀를 둔 것과 비교할 때 사뭇 왜소해 보이는 건 그의 찔끔거리는 소변 기능과도 관련이 깊다. 실제 양기가 모자랐던지 연산군 9년엔 양기를 보충하려고 백마를 골라 내수사로 보낼 것을 명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엽색적인 행각을 벌인 것으로 기록된 사람은 고려시대의 신돈이다. 성현의 ‘용제총화’엔 신돈의 엽색 행각이 적나라하게 적혀 있다. “신돈의 권세가 커지자 사대부 중에 얼굴이 어여쁜 아내와 첩을 둔 자가 있으면 매번 허물을 씌워 감옥에 넣었다. 그러고는 만약 주부가 찾아와서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면 죄를 면한다고 말하였다. 신돈이 매번 찾아온 주부를 상대로 엽색 행각을 벌였다. 양기가 쇠약해질까 두려워 백마의 음경을 잘라 먹고 지렁이를 회쳐 먹었다.”
연산군도 마찬가지였다. 실록 9년 2월 8일 기록은 “백마 가운데 늙고 병들지 않은 것을 찾아 내수사로 보내라고 하였다. 흰 말고기는 양기에 이롭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자오선(子午線)의 ‘오’는 말을 뜻한다. 자는 북쪽 차가운 것을 의미하고, 오는 남쪽 뜨거운 것을 상징한다. 말은 뜨거운 양기의 상징이다.
‘본초강목’에서 소와 말을 음양으로 대조한 대목은 음양론을 읽는 또 다른 재미다. 말발굽은 둥글어서 하나로 있으니 양이고 소의 발굽은 갈라져 둘로 있으니 음이다. 말이 병들면 앉아 있고 소가 병들면 서 있는 것, 말이 일어설 때 앞발을 먼저 일으키고 소가 일어설 때 뒷발을 먼저 일으키는 것 모두가 말이 양이고 소가 음이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이 사납게 날뛸 때 쇠고기를 먹이면 온순해진다는 지혜까지 기록했다. 본초강목은 백마의 음경을 얻는 방법까지 상세히 안내한다. 암말과 교미할 때 세력 강성의 발기된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산군 12년 5월엔 “각사의 노복 가운데 총명한 자를 골라 궐문 밖에서 번을 나누어 교대로 근무시키되 이름은 회동역습소라 하고, 이전으로 통솔하게 하되 이름은 훈동관이라고 하여 귀뚜라미, 베짱이, 잠자리 등 곤충을 잡아오게 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린다. 그 속엔 메뚜기도 포함됐다.
“곤충을 잡아오라”
잠자리 종류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크고 청색인 것을 청령(??)이라고 한다며, 동쪽의 이(夷)인들은 잠자리가 푸른 새우가 변해 생긴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것을 먹는다고 설명한다. 날개와 발을 떼고 볶아서 먹으라고 했다. 실제 효능도 양기를 돕고 신장을 데우는 것으로 설명했다. 메뚜기는 책맹(??)으로 위장을 돕고 소화를 잘 시켜주는 약으로 여겨졌다. 뒷다리가 튼실한 메뚜기가 정력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기록은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대목이다. 인간의 체온은 40% 이상이 근육에서 만들어진다. 그 근육의 70% 이상은 허리와 허벅지 등 다리근육에 분포한다. 나이 들어 하반신의 활동량이 줄고 근육이 부실해지면 체온을 만드는 힘이 줄어든다. 야간에 소변을 자주 보고 발기부전의 노화 증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반신의 든든한 근육 힘이 바로 양기를 발생시키는 근원인 셈이다. 미사일을 쏠 때 발사대가 좋아야 하듯 하체가 튼튼해야 오줌발이 세지고 양기도 개선된다. 양기는 찾기 힘든 백마나 물개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베짱이는 저계(樗鷄)라 한다. 주로 수컷을 사용하며, 효능에 대해서는 성기가 시들어 위축된 것을 크게 만들며 정액을 더하고 자식을 생기게 한다고 기록했다.
실록 11년 8월 7일 기록을 보면, 연산군은 새로 조제한 홍원룡, 흑원룡, 홍갈호, 흑갈호 250환을 재상에게 선물한다. 원룡, 갈호는 도마뱀과 개구리를 약재로 쓴 것으로 양기를 돕는 약이다. 도마뱀은 본래 색을 잘 바꾸는 동물이다. 주역의 역(易)자는 바로 도마뱀을 형상화한 글자다. 동양철학의 기본전제는 변화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뿐이다”라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동물이다. 하루 열두 차례씩 때의 변화에 맞춰 색깔이 변한다는 카멜레온의 속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대부분의 뱀 종류가 성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봤듯, 도마뱀도 정력제로 사용됐다.
재미있는 건 처녀성 증명에 도마뱀이 사용됐다는 사실이다. 중국 고전 ‘박물지(博物志)’에 보면 처녀성을 증명하는 수궁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수궁사의 재료가 되는 것은 도마뱀이다. 도마뱀을 그릇에 넣어 기르면서 주사를 먹이면 도마뱀의 몸이 온통 붉은색이 된다. 계속 먹여서 일곱 근이 되었을 때 아주 여러 번 절구질을 해서 여자의 지체에 바르면 죽을 때까지 색깔이 변하지 않게 된다. 오직 성관계를 가질 때만 없어지기 때문에 자궁을 지킨다고 해서 수궁(守宮)이라고 한다. 한무제가 시험해보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공부 빼먹으려 꾀병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면창(面瘡)을 앓았다. 성종 23년 10월 기록은 이렇게 전한다. “그렇다. 요사이 세자가 면창을 앓아 강(講)을 멈추었다.” 즉위 후에도 중국에 가서 웅황해독산과 선응고라는 처방을 구해와 만덕이라는 종에게 실험한 다음 의관의 동의를 얻어 치료했다.
이후로 기록된 질병은 대부분 경연을 피하기 위한 꾀병으로 짐작된다. 본래 연산군은 세자 시절부터 공부를 빼먹기로 유명했다. 위와 같은 날의 기록이다. “세자는 마땅히 학문에 근면하여 나아가 덕업을 닦아야 할 것인데, 요사이 강(講)을 폐한 날이 많으니, 심히 작은 일이 아닙니다.”
잠자리, 메뚜기, 귀뚜라미, 베짱이 등 곤충도 연산군의 정력제로 쓰였다.
연산군 2년 11월 8일과 22일엔 기침, 감기로 경연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그 사유를 밝히면서 신하들이 자신을 게으르다고 나무란다는 이야기로 자책한다. 재위 3년엔 안질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이유로, 10월엔 혓바닥 통증으로 또는 눈썹 위가 가려워서, 더위 때문에, 두통을 호소하면서 경연을 피한다. 경연에 나갈 수 없는 이유로 한결같이 질병을 꼽은 걸로 미루어 진짜 아픈 게 아니라 꾀병일 개연성이 높다. 의관 아닌 본인 스스로 질병을 거론하는 점은 더욱 분명한 방증이다.
중종 1년 11월 8일 연산군이 31세 되던 날 실록은 그의 죽음을 기록했다. 교동 수직장 김양필, 군관 구세장이 와서 아뢰기를, “초 6일에 연산군이 역질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죽을 때 다른 말은 없었고 다만 신 씨를 보고 싶다 하였습니다.”
역병은 면역력이 약해지면서 생기는 대표적 질환이다. 중국의 고전 ‘소녀경’이나 ‘옥방비결’ 등의 방중서는 과도한 성욕이 심신을 지치고 쇠약하게 만들어 면역력을 약화시켜 병을 초래하고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강조했다. ‘동의보감’은 정력(精力)의 정(精)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은 유기즉생기 시인즉생인(留己則生己 施人則生人)이다. 자신에 정기가 머물면 자기를 살리고 남에게 정기를 베풀면 아이가 생긴다.”
마왕퇴 한묘에서 발견된 양생방(養生方)은 정기를 누설하지 말 것을 이렇게 강조한다. “한번 정기를 누설하지 않으면 이목이 총명해지고, 두 번 정기를 누설하지 않으면 목소리에 탄력이 생긴다. 아홉 번에 이르면 신명에 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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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란 인생의 한때처럼 한번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인체에서 흐르는 체액도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나오는 정기를 최대한 아끼고 참으면 신선이 된다고 강조한 점은 정기의 중요성을 간절히 강조한 것이다.
광기의 남자, 시대의 색골이라 불린 연산군을 거친 수많은 여자가 있었겠지만, 그가 죽음의 문전에서 보고 싶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 자신의 부인이었다. 어머니의 부재로 시작된 광기는 부인을 그리는 것으로 마감됐다. 태어난 순간이나 죽는 순간은 보통의 사람과 똑같았던 인간이 바로 연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