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 3년 이상에게 국어사전 기부운동
- “학습·독해능력 향상 지름길”
- 서울·함평·원주에서 교육청·동문·독지가 동참
- 미국은 1995년 장학단체 탄생…연 240만 명 혜택
이 학교 박인화 교장은 “어휘력 증강을 통한 학력 향상과 인성교육의 지름길을 국어사전에서 찾았다. 무슨 과목이든 사전을 옆에 두고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바로바로 사전을 펴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도록 지도하겠다”며 “학부모운영회와 원로 동문 만남의 자리에서 이런 취지를 말씀드리니 반응이 좋았다. 특히 지역 어른들의 동참이 고마웠다. 앞으로도 쭉 이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1인 1사전
이에 앞서 지난해 10월 23일 강원도 원주 단구초등학교에서도 같은 행사가 있었다. 고향이 원주인 재미과학자 신승일 박사(74·서울대 국제백신연구소 대표를 지낸 생명의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미 알버트아인슈타인대 교수로 북한 어린이들에게 뇌염백신을 무상공급하는 데 앞장섰다)가 3~6학년생 351명에게 국어사전을 기증한 것.
여기에는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한국사전프로젝트’를 펼치는 사무국장 윤재웅(52) 씨의 숨은 공로가 있다. 윤 씨는 20년여 전 화가 오지호(1905∼1982)의 저서 ‘국어에 대한 중대한 오해’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한자교육과 사전 활용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윤 씨가 우연히 알게 된 신 박사에게 국어사전 기증운동 취지를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동감한 신 박사가 기꺼이 동참한 것. 한국로타리 강원지구 최준영 총재도 올해부터 사전 기부운동 후원을 약속했다.
사전 기부운동의 역사는 이보다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성동구 행현초등학교 원정환(59) 교장은 2008년 중랑구 신묵초교에 재직할 때 지역구청의 교육지원 예산을 받아 국어사전 700여 권을 구입해 3학년 이상 전 교실에 비치하고 학생들이 모든 교과과목 시간에 사전을 활용토록 했다. 학생과 학부모의 반응이 매우 좋아 3분의 1이 집에서도 같은 사전을 구입해 공부하는 습관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유별난 사전 사랑
미국은 사전 기부운동으로 한 해 240만 명이 혜택을 받고 있다.
국어사전 활용교육의 ‘원조’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전라남도 함평교육지원청 김승호(58) 교육장의 유별난 ‘사전 사랑’과 ‘사전 활용 교육’은 함평군 내 초등학교를 넘어 인근 군 지역으로도 확산되어 ‘꽃’을 피우고 있다. 그는 1987년 번스타인의 ‘언어사회이론’을 읽고 나라별 학력격차의 이유를 알게 되면서 사전 교육을 강화하는 것만이 ‘강한 나라를 만드는 길’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국어사전을 얼마나 가지고 있고, 교과서의 용어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달렸다고 본 것이다. 일선 학교 교사와 교장, 도교육청 정책기획담당관 등을 역임하면서 ‘국어사전 상시 보기’ 정책을 추진했다.
2012년 3월 함평교육장으로 부임한 이래, 가장 정열을 쏟은 일도 자기주도 학습력 신장을 위한 초등학교 사전보급운동이었다. 함평군 내 손불초교 등 초등학교 11곳과 중학교 8곳 학생 2000명에게 사전 한 권씩을 배부했다. 손불초교는 동문인 건설사 대표가 3학년 이상 후배 58명과 교사 10명에게 사전을 기증했다. 김 교육장은 “올해에는 로타리클럽 광주지구(총재 김보곤)에서 적극적으로 이 운동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며 “3학년 때부터 사전을 끼고 사는 교육은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강원도 단구초, 전남 손일초, 서울 재동초의 사전 기증식 광경(왼쪽부터).
이러한 사전교육의 효율성을 연구한 결과도 있다. 경인교육대학 부속초교 정주희 교사는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 현장교육연구보고대회 국어분과 초등부에서 ‘우리말 한자어 LBH 교수학습 프로그램 적용을 통한 창의적 어휘력 신장’이라는 연구보고서로 1등상을 받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LBH(Learning by Hint) 교수학습법은 전광진 성균관대 교수가 주창하는 이론으로, 2음절 이상의 한자어(복합어)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각각의 글자(형태소)에 담겨 있는 암시적 의미(hint) 정보, 즉 힌트를 최대한 분명하게 밝혀줌으로써 이해력·사고력·기억력 등을 높여주는 학습법을 말한다. 한마디로, 기존의 정의에 의한 교수법은 무작정 암기를 원칙으로 하지만, 힌트에 의한 교수법은 이해→사고→기억을 하게 하는 것으로 단순 주입식 설명을 지양하는 것이다.
딕셔너리 프로젝트
LBH 교수학습 프로그램을 적용한 후 평가결과를 분석하며 여러 가지 시사점을 얻었다는 정 교사는 “평소 학습능력이 보통 이하인 학생들이 어휘에 관심을 갖고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게임과 놀이를 즐기는 과정에서 어휘력이 많이 향상돼 스스로 만족해했다”며 “학생들이 우리말에 무지하다는 자각과 함께 앞으로 우리말 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적절한 학습준비와 학습 안내를 통해 학습훈련이 되면 3학년 학생들도 모둠별 협동학습을 훌륭히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사전기부운동’과 비슷한 일이 일찍이 미국에서도 벌어졌다. 1992년 한 할머니가 국어(영어)사전 50권을 기부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출범한 ‘딕셔너리 프로젝트’(www.dictionaryproject.org) 운동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지금까지 1825만여 명의 학생이, 2012년 한 해에만 239만여 명이 사전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참고로 미국의 초등 3년생은 417만여 명이다). 사실, 사전을 받은 우리의 꿈나무들이 공부에 재미를 느끼고 어휘력과 독해력 향상을 통해 학력이 크게 신장된다는데 어느 누가, 어느 기관이 후원을 꺼려하겠는가.
그들의 이론에는 초등교육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몇 번이고 되새겨 봐야 할 ‘그 무엇’이 있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16년 동안의 학업과정 중 초등학교 3학년이 분수령이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1, 2학년은 ‘Learning to read(읽을 줄 알기 위해 배우는 것)’ 단계이고, 3학년 이후 대학까지 ‘Reading to learn(지식 축적을 위해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 단계인데 이 단계에서는 ‘국어(영어)사전’이 가장 강력한 학습도구라는 것이다. 이 단체의 홈페이지 첫머리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강력한 학습도구’인 사전을 제공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며,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가장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이들은 이에 덧붙여 독해능력에 대한 네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말하고 있다. 첫째, 독해능력은 국가경제의 성공과 번영에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둘째, 범죄율과 실업은 독해능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셋째, 성인의 21∼23%는 글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낮은 수준의 추론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넷째, 초등학교 4학년 학생의 37%가 책을 읽을 줄 알아도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종이사전의 재미와 질감
여기에서 또 하나의 의문은 전자사전, 컴퓨터 사전, 스마트폰 사전 시대에 종이사전이 정말 인기를 끌 수 있을지다. 이에 대해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가 있는 학생도 종이 사전을 활용하면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종이 사전은 휴대가 편리할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들이 자기만의 책을 갖게 되면 뭔가 찾아보고 싶은 탐구심이 생긴다. 어떤 낱말을 찾아 뜻을 알게 되는 즐거움을 스스로 느끼고, 같은 페이지에 있는 또 다른 매혹적인 단어들을 덤으로 만날 수 있다.”
한마디로 디지털 사전과 종이 사전의 찾는 재미와 질감(質感)이 천지 차이라는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에는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는 탐구심이 극에 달한다는 통계조사 결과도 나와 있다. 스스로 뜻을 알아가는 즐거움과 같은 페이지에 있는 또 다른 매혹적인 단어들을 덤으로 만나는 희열을 맛보지 않은 학생들은 알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들은 결론적으로 “글을 읽고 뜻을 아는 독해능력은 특권이 아니라 기본권”이라고 단언한다. 그래서 독해능력을 조기에 그리고 적기에 기르기 쉬운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사전을 보급하는 일이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사전을 손에 끼고 산다는 것은 단어의 의미, 철자, 발음, 문법, 문맥을 익히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의사소통, 학업능력, 진로 및 자기계발과 자신감을 갖게 하는 장점이 있다. 고은 시인은 교도소에서 국어사전 한 권을 통째로 외우면서 ‘만인보’라는 시를 구상했다고 한다.
한편 이 프로젝트에 기부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세금 면제 혜택을 받으며, 기증 사전 안에 기부자 이름이 적힌 라벨이나 메시지도 넣을 수 있고, 자원봉사자들이 해당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직접 사전을 전달할 수도 있다. 또한 후원하고 싶은 사람들이 사전 선물을 받은 학교와 아직 받지 못한 학교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웹사이트에 자료를 제공한다.
현재 미국 로터리클럽이 전체 기부운동의 60%를 지원한다고 한다. 홈페이지에는 사전을 선물 받은 학생과 학부모의 감사편지가 넘쳐나는데, 한결같이 독해와 작문능력이 향상되었다는 등 장점을 나열하며 후원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그들의 최종 목표도 명시돼 있다. 모든 학생에게(student by student), 모든 지역에서(state by state), 모든 나라에서(country by country) 사전 프로젝트의 ‘꽃’을 활짝 피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국어사전 기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2008년부터 종이 사전 활용교육과 관련한 재능기부 특강을 100회 넘게 한 전광진 교수는 “지금까지 암기 위주의 교육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이해 위주의 교육이 되어야 우리나라 교육이 산다. 노벨상 수상자 같은 큰 학자를 키우려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사전을 활용한 교육법이 직효라고 생각한다.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이고, 모든 학문의 핵심 어휘가 한자어인 현실에 읽을 수는 있어도 뜻을 모르니 수학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초등학교 한자교육의 사교육 열풍은 하루빨리 공교육으로 대체돼야 한다. 방과후 학습이라는 또 하나의 굴레보다는 수업시간에 한자어가 나올 때마다 한자의 속뜻을 가르치는 게 교육입국(敎育立國)의 첩경”이라고 역설했다.
아무튼, 수년 전부터 겨자씨처럼 움트기 시작한 초등학교 3학년 이상 학생들에게 국어사전을 기부하는 운동이 이 글을 계기로 민간인의 후원을 넘어서기를 기대해본다. 장학기관이나 교육지원청 등 국가기관에서도 적극 나서 국어사전을 비롯한 교구(敎具)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국 6900여 개의 초등학교에 확산되기를 기원한다.
또한 한국로타리 등 사회봉사단체나 민간기관 등을 중심으로 사전기부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머지않아 전국의 초등학교 학생들이 국어사전을 학습에 활용하는 붐이 일면 좋겠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독해와 작문 능력 등 탄탄한 학습력을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탄생해 대한민국과 우리말과 글을 한층 빛낼 날이 이루지 못할 꿈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