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에 야구가 도입된 건 언제일까. 1904년 미국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처음 야구를 전했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 그런데 그보다 5년 앞선 1899년 대구에 야구가 전파됐다는 관련 문헌이 발견됐다. ‘야도(野都)’ 대구의 전통이 처음 공개된 것이다.
그저 외국인의 눈에 비친 당시 대구 풍경이 어떠했을지 들여다보고 싶었던 나는,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샘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전문 분야도 아니면서 이 자료집의 번역과 해설에 손을 댄 이유다.
때론 지루한 개인사도 들어 있지만, 재미있었다.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재미가 어떤지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편지글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편지글로 읽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재미가 지나쳐 번역을 단숨에 끝내지 못하고 질질 끌어야 했지만, 독자를 위해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다. 숨어 있는 사건들을 찾아내 퍼즐 맞추기를 시작했다.
이 책을 그저 선교 역사의 일부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읽는다면 많은 걸 놓치게 될 것이다. 단순히 교회의 사실(史實)에 대한 집대성도, 내공 깊은 선교사들의 신앙 고백서도,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뤄낸 기적에 대한 보고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자료집엔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WASP(White Anglo-Saxon Presbyterian)의 정복담도 있지만, 당시의 비루했던 조선인들이 오므리지도 펴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맞닥뜨린 근대에 대한 내러티브가 담겨 있다.
한반도에 근대문명이 찾아온 건 주로 부산이나 제물포 같은 항구를 통해서다. 중국으로부터 육로를 통해 유입되기도 했지만, 그것이 내륙으로 전달되기까지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럼에도 한반도 ‘최초’의 사과나무가 유입된 곳이자 한반도 ‘최초’의 피아노가 유입된 곳이 대구라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반도 ‘최초’로 야구가 유입된 도시도 바로 대구다. 내륙지방의 대표적인 보수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는 그런 점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도시다.
우리는 고베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작은 일본 화물선을 타고 내륙의 바다를 지나갔는데, 여러 개의 예쁘고 작은 섬들을 거쳐서 지나갔소. 거기서부터 우리는 한국의 부산으로 가는 해협을 지났는데, 거친 바닷길이었소. 우리 ‘대구’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선교 연회에 참가 중이었소. 그래서 나는 호주 선교사 브라운 양에게 짐을 부탁했소. 해외 선교부에서 추천한 장비 외에도 텐트, 천으로 된 접는 의자와 간이침대, 총과 탄약, 낚싯대와 낚시도구, 그리고 방망이, 공, 마스크, 글러브 같은 야구 장비들, 테니스 라켓과 공, 캠프용 취사도구, 랜턴을 구입했고, 빅터 제품인 축음기, 카메라, 삼각대, 로체스터 램프, 정수기, 자전거, 그리고 캔버스보트를 가져왔소.
대구에 야구를 가르치다
브루엔이 미국에 남은 약혼녀 마사(Martha·이후 브루엔의 첫 부인)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인데, 1899년 9월 부산항에 도착하는 장면이다. 브루엔의 이삿짐에 이미 야구 장비가 포함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편지에선 제물포를 거쳐 서울로 입성해 선임 선교사인 마펫으로부터 야구와 관련한 질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브루엔이 야구광이란 사실을 동료 선교사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다시 인력거를 타고 서울시내까지 3마일을 달려 1899년 9월 29일에 도착했소. 여기서 아담스 씨와 마펫 씨를 만났소. 나는 마펫 씨가 나에게 아주 어려운 신학적인 질문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도 이렇게 물었소. “브루엔, 요즘 야구계에서는 누가 잘나가나요?”
그런가 하면, 브루엔이 1900년 1월 31일자로 마사에게 보낸 편지에도 설날 풍경을 그리면서 다시 한 번 야구 이야기가 언급된다. 이번엔 아이들에게 야구 게임을 직접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아이들과 우리는 서로 좋아하기는 했지만, 녀석들은 상당히 경계를 했소. 우리가 그 아이들의 옷을 좀 살펴보기 위해 잡는 시늉이라도 하면 아이들은 금세 흩어지고 말았소. 그들 중에 좀 자란 몇몇 용감한 녀석들을 잡기는 했지만 말이오. 아니 내가 잡혔던 게지요. 걔들은 내 손을 잡고 집까지 뒤따라왔소. 제법 먼 거리인데 말이오. 집에 오니 6명 내지 10명 정도가 더 있어서 당신의 테니스 라켓과 볼을 가지고 야구를 가르쳤다오. 그들은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공을 치고 나는 공을 잡고 감독을 했소.
1 1931년에 찍은 브루엔의 노방(路傍) 전도 광경. 2 한국에 야구를 처음으로 소개한 이로 알려진 미국 선교사 필립 질레트. 3 1914년 혹은 1915년에 찍은 미국 선교사 브루엔과 그의 첫 부인 마사 사진. 4 삼성라이온즈 선수들이 지난해 11월 1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우승한 뒤 단체로 우승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
의료선교사인 동료 존슨 박사의 부인도 이런 모습을 보고 같은 해 3월 25일자 글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놀랍게도 여기엔 기미년 만세운동을 이끈 33인 중 최연소자인 대구 출신 이갑성(1889~1981)의 이름도 등장한다.
브루엔이 대구에 처음 왔던 것은 미국에서 막 도착했을 때였으니 아직 한국말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직 어린 소년들(김학철, 이갑성, 김주호 등)에게 야구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년야구단을 시작했으니, 한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야구 하는 방법을 가르치려고 소년들을 처음 만났을 때, 브루엔은 운동복이랍시고 반바지와 헐렁한 셔츠를 입고 모자를 썼습니다. 먼저 한국어 선생님 집으로 찾아갔더니, 선생님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가 말하길, “이게 무슨 꼴입니까? 맨다리에다 긴 두루마기도 입지 않고, 체통 없이 모자를 그렇게 눌러쓰다니!” 그는 브루엔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서 예의를 갖추어 옷을 걸쳐 입으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브루엔은 그저 태연스레 미소만 지을 뿐, 그대로 야구를 하러 갔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미국인들의 이상한 옷차림은 으레 그런 것으로 차츰 사람들의 눈에 익숙해졌습니다. 한국인들은 예의범절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길게 흘러 내려오는 하얀 두루마기와 헐렁한 바지, 그리고 말총으로 빳빳하게 만든 갓을 써야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소년들은 방망이로 공을 치는데 버거워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의 기가 꺾이지 않도록, 아이들이 방망이를 쓰는 데 몇 가지 기술을 익힐 때까지 방망이 대신 테니스 라켓으로 대체하기도 했습니다.
3·1운동 주역 이갑성도 배워
브루엔이 1900년에 쓴 선교 보고서엔 실제로 야구팀이 구성돼 활동했음을 짐작게 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두 가지 야외 활동 가운데 하나는 주일학교 야구팀이고, 또 하나는 주일학교 소풍입니다. 먼저 내가 이렇게 하기로 한 것은 내 개인적 즐거움 때문만이 아니라 아이들을 더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저 야구를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때 이미 정식 야구팀을 조직했다는 말이다. 그 후 10여 년 동안 대구에서 야구가 유행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1906년 그 선교사들이 설립한 대구의 계성학교에선 1911년 테니스, 축구, 야구 등을 활성화하고 그 3종목의 운동기구를 구입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학교 설립 5년 만의 일이고 대구에 야구가 소개된 지 10년 만의 일이니 그 사이 대구에선 어떤 형태로든 야구가 계속됐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후 1914년 7월 말 동경유학생 야구팀이 대구를 방문해 대구의 청년단과 경기를 벌였고, 1920년엔 대구청년회가 결성되면서 야구부가 만들어져 원정경기를 다니는 등 대구 야구는 꾸준히 활성화되고 있었다.
1960~70년대 경북고와 대구상고 등이 고교야구에서 전국을 제패했던 일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듯하다. 지난해 삼성라이온즈가 프로야구 최초로 3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둔 것도 그런 전통의 재확인이라고 하겠다.
최근 ‘빠스껫볼’이라는 TV 드라마가 시작됐다. 1948년 올림픽대표팀 이야기다. 시대 고증이 훌륭해 준비가 잘됐다는 평이다. 야구의 경우 10여 년 전 영화 ‘YMCA 야구단’이 제작된 적 있고, 최근엔 KBS ‘역사스페셜’에서 ‘또 하나의 전쟁, 황성 YMCA야구단’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한반도에 최초로 야구가 소개된 것은 1904년 선교사 질레트에 의해서라고 내세웠다.
‘모던 뽀이’의 야구 방망이
아닌 게 아니라 야구가 한반도에 처음 도입된 시기가 1904년이냐 1905년이냐 하는 갑론을박은 의외로 뜨거웠다(홍윤표, ‘야구 도입 1904년이 옳다’, ‘근대서지’ 2012, 21~228쪽). 지난해 12월 17일엔 대한야구협회마저 나서서 야구 도입 연도가 1904년으로 바로잡혔다며 ‘한국야구의 기원 정정 선포식’까지 열었다. 그러나 1899~1900년 브루엔에 의해 대구에 야구가 유입됐다는 위 사료들은 지금까지의 이런 논쟁을 단번에 뒤집고도 남을 만하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최초의 야구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도입됐느냐는 것보다 야구를 아이콘으로 한 근대에 대한 담론이다. 1914년 10월 발행된 잡지 ‘청춘’ 창간호엔 필자를 알 수 없는 ‘뻬스뽈 설명’이라는 글이 재미있는 삽화와 함께 실려 있다. 마치 미국 보스턴의 어느 대학 캠퍼스를 연상케 하는 서양식 2층 건물 앞으로 어떤 학생이 걸어간다. 이 ‘근대적’ 도시를 걷는 학생은 교복과 교모로 짐작되는 검은 제복을 입은 채 한 손으론 책을 들고 읽고 있다. 다른 한 손엔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도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다. 이 오묘한 조합은 영락없는 ‘모던 뽀이’의 모습이다. 그리고 본문에선 뻬스뽈이 1910년대 학생계에서 성행하는 유희라고 소개했다.
“다른 경기는 흔히 하나하나가 한 편이 되어 겨루지만, 뻬스볼은 한 편 각 9인씩 단체로 승부를 겨루므로 그 방법이 주밀하고 절차가 번다하여 재미도 다른 것보다 더 많다”고 했다. 또한 “동작을 민첩하게 하며 시력을 굳세게 하며 또 결단력을 기르니…경기의 장쾌하고 활발함이 청년의 유희”로 추천할 만하다고 했다. 이 학생이 한 손에 펼쳐 든 책은 정신의 계몽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한 손에 거머쥔 야구 방망이는 신체의 계몽을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서 적의 보루를 함락하는 데 이 편 공격이 불선하면 아니 되는 셈으로 뻬스뽈도 점수를 얻자 하면 공격을 잘못하여서는 시원치 아니 하니라”고 하면서 경기 규칙과 방법을 자세히 일러주고 있다. 유희가 합리적 경기로 변모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체 계몽에서 조국애까지
1916년 발표된 ‘야구전’이란 응원가도 마찬가지다. 1910년 기독청년회(YMCA) 중학부에 입학해 1912년 졸업하고, 1915년에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를 마친 홍난파가 작곡한 것이다. 당시는 YMCA가 야구로 명성을 날리던 때였다. 조금은 유치하게 들리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활발하다 야수들은 쭉 둘러서서/ 엄파이어의 플레이 소리 뚝 떨어지니/ 저희들의 돌주먹과 쇠팔뚝으로/ 힘을 다해 싸운다.
2. 배팅 들고 썩 나서니 원 스트라이크/ 다시 한 번 갈겨 보아라, 홈런으로/ 세컨드야 주의해라 공 굴러간다./ 어화 홈인이로다.
8·15광복 이후 등장한 ‘야구노래’도 재미있다. 이 ‘전국중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가’의 작곡가 박은용은 이 노래를 ‘행진곡풍으로’ 부르도록 주문해놓았다. 대구 출신의 음악천재 박은용은 일찌감치 대구의 야구를 맛봤을 터이지만, 아쉽게도 6·25전쟁 직전에 월북하고 말았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슬기로운 靑年의 意氣를 모아/ 세워보세 새로운 歷史의 이날/ 한맘으로 던지는 공을 보아라/ 곳고도 바르고 빠른 이 공을/ 勝利로 달려가는 우리의 마음
2. 검고 붉은 입술에 담은 決意와/ 鐵杖가튼 두 팔에 힘을 모아서 / 우리들이 후려치는 공을 보아라/ 蒼空을 가르며 닷는 저 공에/ 千萬軍 물리치는 勇氣가 잇다
3. 우리들의 자랑은 靑春의 피와/ 죽엄에도 나서는 祖國의 사랑/ 이 사랑과 피로서 서로 뭉칠 때/ 大會의 꼿다발 우슴을 웃고/ 榮光의 優勝旗는 더욱 빛난다
야구의 내러티브는 어느덧 계몽에 머무르지 않고 승리, 용기, 청춘의 피, 조국의 사랑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가 되어 2013년 프로야구 경기 중계방송 시청률이 프로축구의 2배가 넘었다. 몇 달 전 열린 한국시리즈의 경우 최종 7차전에 이르러 시청률이 14%에 달했다니 웬만한 인기 예능 프로그램 못지않을 정도다. 류현진은 국내에선 신인으로서 ‘최초’의 200탈삼진 투수가 되더니 이번엔 ‘최초’의 메이저리그 챔피언십시리즈(CS) 선발 등판 승리 투수가 됐다. 그런가 하면 추신수는 아시아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1억 달러 연봉을 돌파했다.
이 ‘최초’라는 단어는 어느새 우리에게 성취를 안겨다주는 매우 자랑스러운 용어가 됐다. 그것은 실질적인 성취주의에 기반을 두는 근대적 가치와 관계가 있다. ‘최초’라는 단어가 유독 근대라는 시기와 관계있는 것은 근대야말로 새로운 문명이 무작위로 유입된 ‘최초’의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새로운 도구의 유입이 근대의 새로운 계몽정신을 깨우친 것인지, 아니면 인간정신의 새로운 깨우침이 새로운 도구의 발명을 가져온 것인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그러나 문명은 이 둘이 하나로 해석될 때 의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따로 그 가치를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근대로의 야구여행
계몽의 과정은 전근대로부터 근대로 이동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철도, 서양의술, 유성기, 우정국 등 한반도 최초의 유입물이나 제도들이 단순한 호기심이나 센세이셔널리즘에 머무르지 않고 근대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실마리가 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포츠다. 스포츠야말로 그 사회의 독특한 문화전통에 편입되면서 근대화과정을 거쳐 오늘날과 같이 고도로 조직된 경기 형태로까지 발전해왔다. 동시에 근대 산업사회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의 삶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
물론 사회적 관계의 합리화로 말미암아 스포츠가 갖는 놀이 요소가 훼손됐을 수도 있다. 특히 참여의 즐거움보다 관중의 즐거움이 중시되다보니 스포츠는 점점 상업화하고, 결국은 놀이가 일이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나아가 승리가 경기력의 우월성을 대변하게 됐으며, 경기의 가치는 절대적으로 경기장 전광판의 몫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스포츠가 근대로부터 오늘의 문명 현상을 읽는 도구가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근대문화 내러티브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도시 대구로 ‘근대로의 야구여행’을 한번 떠나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