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널 |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정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87년 체제’ 극복 위한 모색
최근 한국 사회를 보면서 어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라 하고, 어떤 이는 지금만큼 민주주의를 누려본 적이 있었느냐고 한다. 하지만 어느 쪽에 동의하든 한국 민주주의의 정치적 상황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아직도 극복의 대상으로 논의되는 것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의 시계는 1987년에서 멈춰 서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이루어낸 민주화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군부독재를 타도하자는 물결에는 시민, 노동자, 학생이 모두 참여했지만,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구축은 정치인들에게 맡겨졌다. 일단 군사정권을 몰아냈으니, 정치는 민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라고 여겼다. 정치인들의 적당한 타협으로 ‘87년 식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민의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선출된 그들이 이른바 민주정부 하에서도 민의를 대변하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빈번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민이 그것을 일상으로 체감하는 수준에 이른 것을 보면, 그 사안의 심각성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 좀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이른바 ‘대의민주주의’를 행하는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이다. 현재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에는 대의민주주의가 서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민이 주인이라는 이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은 나라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며 자신과 가족, 사회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체제를 선택하고 변화시킬 책임과 의무를 진다. ‘대의제’란 여러 가지 방안 중에서 민이 선택한 방법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이 민의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민은 그것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본래 민주주의란 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직접’ 행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선택한 대의민주주의가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그 대안으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논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의’를 ‘직접’으로 간단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민이 국가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의 역량과 변화된 현실을 반영해 ‘대의’의 방식을 견제하고 보완할 대안을 논의하는 게 실질적일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됐지만, 최근의 비판은 이전과 다른 국면에 있는 듯하다. 우선 경제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데 비해 정치 체제의 발전이 정체되면서 민과 자본의 힘이 대의제에 의해 불균형하게 반영되는 현상이 심각하다. 그것은 바로 대기업의 자본 집중과 빈부격차의 심화로 나타나 국가의 주인인 민의 권리가 점점 축소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민주화 이후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또한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소수가 독점하던 전문적 정보와 지식에 다수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고, 개개인의 의사를 광범위하게 전달하거나, 광범위한 다수의 의견이 소통되고 검증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다.
나아가 통일 한반도를 전망한다면 현재의 대의민주주의가 한반도 주민의 민의를 온전히 대변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장점이 본래 다수결의 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또는 소수의 의견이 존중되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흡수통일’이나 ‘적화통일’의 사고방식이 통일 한반도의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직접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반세기 이상을 나뉘어 살아온 남과 북의 주민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자신들의 손으로 구현하며 함께 살아갈 방안을 모색하고, 우리의 민주화를 한 단계 도약시킬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1월 3일 ‘신동아’ 회의실에서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가운데)의 사회로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왼쪽),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직접민주주의를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란 게 도대체 무엇이고, 왜 이 시대에 직접민주주의가 요구된다고 생각하는지 하승수 위원장부터 말해 달라.
하승수 직접민주주의는 대표자에게 권력을 위임해 그 대표자가 정책을 결정하게 하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이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일컫는다.
최근 스위스에서 1인당 월 300만 원 가까운 돈을 기본소득으로 국민에게 제공하자는 안건이 시민들에 의해 발의됐다.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되면 스위스 헌법에 그 내용이 반영되고 부결되면 없던 일이 된다.
이렇듯 시민이 정책을 제안하는 것을 주민발의(주민발안), 혹은 국민발의(국민발안)라고 한다. 일정 사람들의 서명을 받으면 주민투표나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도록 돼 있다. 발의된 특정 정책에 대해 투표하는 것을 주민투표, 국민투표라고 칭한다. 선출한 공직자를 해임할지, 말지 투표할 때는 주민소환, 국민소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한국에도 지방자치 단위에서 주민투표와 주민소환, 국가 단위에서 국민투표가 도입돼 있기는 하다.
‘민’이 소외된 민주주의
김형찬 지금 말씀한 제도는 예전부터 있던 것 아닌가.
하승수 그렇다. 유럽, 미국에서는 이런 제도가 꽤 발전해 있다. 한국도 헌법 개정 때 국민투표가 필요하다. 또 국가 안위와 관련한 사항에 한해 대통령이 국민투표에부칠 수 있도록 돼 있다.
한국에서 그간 헌법 개정과 관련해 국민투표가 여러 차례 실시됐지만 그것은 모두 위부터 아래로의 방식 아니었나. 제안이 나와 있는 상황에서 찬반을 묻는 형식의 투표에만 국민이 참여한 것이다. 제안을 만드는 과정에 국민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주민투표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다.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후 주민투표제가 도입돼 여러 차례 투표가 이뤄졌으나 안건은 모두 중앙정부나 지자체 장이 제안한 것이었다. 스위스의 사례처럼 국민이 안건을 제안해서 투표한 적은 없다. 국민발의 제도가 없기 때문이다.
지방자치 차원에서도 주민투표 제도가 도입돼 있으나, 사정은 비슷하다. 수차 투표가 이뤄졌으나 안건은 모두 중앙정부나 지자체 장이 제안한 것이었다. 주민이 주민투표를 발의할 수는 있게 돼 있지만, 발의요건이 까다로운 데다 지방자치단체장이 거부한 사례도 있었다.
주민소환 제도도 갖춰놓기는 했다. 지방자치단체장을 소환하려는 주민소환 투표가 몇 차례 있었으나 투표율이 낮아 개표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요컨대 한국의 직접민주주의는 아직까지 일천한 수준이라고 하겠다.
김형찬 최근 직접민주주의와 관련한 논의가 많은 까닭이 뭐라고 보나.
하승수 대의제가 불신을 받으면서 직접민주주의가 조명을 받는 것 같다. 국회의원 총선거, 대통령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자가 정책을 결정하는 게 대의제다. 대표자에게 ‘알아서 판단하라’고 의사결정권을 무기속위임(자유위임)하는 것이다.
대통령,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 정책에 대해선 국민이 제각각 의견을 표시할 수 없지 않은가. 결국 사람을 보거나 정당을 보고 특정인을 지지하게 된다. 딜레마는 선출된 사람이 국민의 의견과 상반되는 정책을 추진하거나 집권 세력의 사적인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정책이 수립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덧붙여 위임을 받은 이들이 부패하는 경우도 많다.
대표자에게 의사결정권을 무기속위임하는 대의제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늘어나게 된다. 쉽게 말해 대통령, 국회의원이 굉장히 잘못하고 있는데,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이다.
외국에서도 부패가 심각하거나 선출된 공직자가 잘못된 정책 결정을 연거푸 내놓을 때 직접민주주의가 강조됐다. 20세기 초 미국 여러 주에서 주민투표, 주민소환을 도입하는데, 당시는 사적 이해에 따른 정책 결정이 만연한 데다 부패마저 심각할 때였다.
한계에 도달한 정당정치
정성헌
정성헌 대의제 민주주의가 올바르게 작동하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지 않을 것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원론적으로 민주주의는 직접민주주의여야 한다. 위임을 받은 소수보다는, 다시 말해 한두 명의 엘리트보다 다수의 판단이 옳다는 믿음에서 나온 게 직접민주주의다. 어떤 사람들은 선출된 소수가 더 나은 결정을 할 수 있다면서 탁월성의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옳다고 본다. 민이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민주주의 원리에 가장 부합한다. 민은 공동체의 주인으로서 ‘말을 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발의’를 얘기한 것이다. 민은 ‘말을 해야 하고’, 선출한 사람이 잘못하고 있으면 끌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
어제 4·19 묘소를 참배하면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떠올랐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만 육성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반민주적 방법으로는 육성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커가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점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주인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의식을 가진 시민이 존재해야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하겠다.
요즘 정치가 어수선하고, 사회는 복잡해지고, 문명이 파탄할 징조까지 보인다. 한 개인이 혹은 선출된 소수가 복잡다단한 상황을 판단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게 무리인 시대가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정책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시민의 주인됨을 더 많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압축 성장을 했다. 민주화 역시 압축 쟁취를 했다. 그러다보니 교육 생활 문화 분야에서는 성취가 더디다.
정당 정치가 한계에 봉착한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미국, 영국을 보라. 정당이 합리적으로 연대하는 독일은 사정이 조금 낫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당인데, 정당 대부분이 한계에 부딪혀 있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해결책을 찾으려면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민주주의에서는 직접민주주의가 근본 아니겠는가.
자본주의 말기 현상이 나타나는 데다 한국의 경우는 이른바 ‘87년 체제’의 약효가 다했다. 개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정권이 들어선 후 소통이 안 된다는 얘기가 계속 나온다. 사회는 점점 갈라진다. 정권 자체의 문화뿐 아니라 한국 전체의 틀 자체가 한계에 직면해서다. 틀이 낡은 것이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하승수 독일,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처럼 정당 정치가 일정 수준에서 잘 작동하는 나라, 다시 말해 특정 정치세력이 독주하기보다는 연합이나 연립할 수밖에 없는 정치 시스템 아래서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덜할 수 있다. 정성헌 이사장 말씀대로 미국이나 한국처럼 정당이 민의를 수렴하는 기능을 잘 못하는 구조에서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한국은 미국보다 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다. 정당 정치도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는 데다 직접민주주의 제도도 꾸려지지 않은 게 한국의 현 상황이다. 헌법 개정 시 가장 먼저 고민할 부분이 권력구조다. 정치세력 간 타협, 조정이 이뤄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고안해내야 한다. 국민발안 제도를 도입하는 등 직접민주주의적 권력구조를 만드는 것 또한 고민해야 한다.
“대의-숙의-직접 융합해야”
정성헌 87년 체제가 들어선 후 참여민주주의와 관련한 논의는 많았다. 그런데 참여민주주의는 사실상 관객민주주의에 가깝다. 구경꾼 비슷한 것으로 스스로는 참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질로는 참여한 게 아닐 수 있다. 평등한 참여가 바로 직접민주주의의 핵심 아닌가. 또한 타협하려면 충분히 얘기해야 한다. 숙의민주주의 혹은 심의민주주의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대의제의 효용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대의제가 한계를 나타내고 있으니 그것과 직접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를 융합해 함께 가자는 것이다.
김형찬 정리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면서 정당 정치 중심인데, 그것이 한계에 이르렀으니 근본으로 돌아가자,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근본적인 것이니 새로운 틀을 만들 때 직접민주주의를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 같다. 그렇다면 직접민주주의가 어떤 방식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 말씀해줬으면 좋겠다.
하승수 대부분의 민주국가가 발의, 소환, 투표를 지방자치 영역에서 많이 도입해놓은 상황이다. 국가 차원에서 이 셋을 도입한 나라는 사실 별로 없다. 스위스의 경우만 국민발안, 국민투표가 활발하게 이뤄진다.
한국은 지방자치 차원에서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 제도가 도입돼 있으나 허점이 많은, 굉장히 미진한 시스템이다. 미국의 경우 서부에 있는 주는 제도도 잘 도입돼 있고, 활용도도 높은 편이다.
직접민주주의라고 표현하긴 어렵지만 숙의민주주의, 심의민주주의도 각지에서 실험되고 있다. 유럽과 캐나다에는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충분한 공부, 학습, 토론을 거쳐 의사결정을 한 사례가 있다. ‘시민회의’라고 불리는 시도가 그것인데, 캐나다의 사례를 살펴보자. 브리티시컬럼비아, 온타리오 주의 선거제도 개혁 방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앞서 말한 대로 추첨으로 뽑힌 시민들이 시민회의를 구성해 1년 동안 학습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밟아 대안을 마련했다. 시민회의에서 만든 안은 최종적으로 주민투표에 부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민들의 숙의가 이뤄졌고 훌륭한 개혁 방안이 나왔다고 한다. 숙의민주주의의 대표적 사례라고 하겠다.
정성헌 직접민주주의를 더욱 살찌우는 것이 숙의민주주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사례를 자료로만 봤는데 대단하더라. 추첨된 사람 중에 딱 한 사람만 빠졌다고 한다. 회의 참석 때마다 150캐나다달러를 줬다는데, 돈을 받으려고 온 게 아니라 선거제도가 나의 문제, 가족의 문제,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해서 참여한 것이다. 매우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 비록 부결됐지만….
한국의 경우 국가단위, 지역단위 개발사업이 많다. 그런데 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의견은 별로 반영되지 않는다.
“숙의 없는 직접은 의미 약해”
내가 사는 강원도를 예로 들면 강원발전연구원이 계획을 짠다. 컨설팅 회사, 대학에 맡기기도 한다. 주민 상대로는 형식적 여론 수렴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인제군에서 지역개발 계획과 관련해 의미 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인제군은 작은 고장이다. 인구가 3만2000명, 마을이 84개에 불과하다. 내가 관여한 일이어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내용을 소개해보겠다.
인제군민들이 ‘생명사회실천운동’을 만들어 지역발전 계획을 수립한다. 1년 차 때는 사람들이 모여 공부를 했다. 2년 차 때는 공무원이 참여했다. 3년 차인 올해부터 인제군 발전10개년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군민이 만든 초안이 나오면 전문가가 검토하고 조언을 한다. 처음부터 전문가에게 맡기면 지역을 잘 모르는 터라 엉뚱한 계획이 나오게 마련이다. 나는 우리가 아주 훌륭한 발전계획을 내놓으리라고 믿는다. 이러한 시도가 직접민주주의의 흐름이라고 본다. 이런 것이 ‘민회’라고 할 수 있는데, ‘시민회의’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승수 직접민주주의로 대의제가 가진 문제점을 보완하거나 해결할 수 있는 부분 중 하나를 말씀해주셨다. 정보나 지식을 독점한 소수가 의사결정을 하는 게 현재의 시스템이다. 관료, 정치인, 전문가가 독점적으로 의사 결정을 한 대표적 사례로 4대강 사업을 들 수 있겠다. 정보, 지식을 공개한 후 시민이 참여했다면 전혀 다른 결정이 나왔을 수도 있다. 직접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면 정보가 모두 공개되고 토론이 이뤄져 의사 결정의 독점이 깨지는 장점이 있다. 어떤 제안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는 공개된 곳에서 토론해 검증받아야 하는데, 한국의 정책 결정은 비공개적인 곳에서 독점적으로 이뤄진다. 이탈리아는 지난해 원자력발전소를 지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국민투표를 했다. 투표 과정에서 원전에 찬성하는 사람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 정보를 총동원해 논리를 펼 것이고 반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권자인 국민은 굉장히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게 되는데, 그것 또한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성헌 최근 복지 담론이 많이 거론된다. 복지를 공부한 사람들이 주가 돼서 토의한다. 실제로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은 뭔 얘기인 줄 모르고 국가가 뭔가 주나보다 이렇게만 생각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깊이 있는 얘기가 이뤄질 수 없다. 숙의 없이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의미가 적다. 유신헌법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가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됐는데, 숙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김형찬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은 훌륭하지만 정치제도를 바꾸지 않고는 현실에서 구현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대통령 5년 단임제하에서 숙의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성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빠른 속도로 일을 끝내려는 사고는 한국 사회에서 일종의 관성이다. 정치 시스템을 바꿔나가면서 직접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 제도를 갖춰나가는 것을 도모할 단계인 듯싶다.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전통
하승수
정성헌 스위스를 보면 대단하더라. 내가 농사를 지어서 그런지 스위스 헌법에 식량 안보 조항이 있는 것에도 눈길이 간다. 스포츠 교육을 장려해야 한다는 조항도 헌법에 담겨 있더라. 헌법에 ‘음악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는 국민발안에 대해 투표했는데, 부결됐다고 한다. 국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헌법이 받아들이는 그런 시스템을 갖고 있는 것이다. 취리히처럼 개인발의가 가능한 곳도 있다. 직접민주주의 경험이 축적된 스위스인은 그렇게 사는 게 자연스러운 삶인 것으로 보인다.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일천한 우리는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제도를 바꿀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주력해야 할 것은 우선 대의민주주의를 정상화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서 중앙정치, 지방정치에서 직접, 숙의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번 정권과 다음 정권 임기 안에 이 같은 작업을 마무리하지 못하면 우리 사회는 아마도 퇴행할 것이다. 쇠퇴기로 들어갈 소지가 크다. 분열이 쇠퇴기의 징후 아닌가. 사정이 이러니 무엇보다 대통령과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새누리당, 민주당이 잘해야 한다. 가까운 민주당 사람들에게 ‘정권 교체 생각을 버리고 10년 동안 나라를 구한다는 관점에서 해봐라. 그러면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정권 교체에만 매몰돼 있으니 근본적 모순이 안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해주곤 한다. 앞으로 5~8년 사이에 정치 구조를 바꿔내야 한다. 시민사회나 학계에서 견인해야 할 것 같다.
김형찬
정성헌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치권이 압박을 받는다. 앞서 말했듯 근본으로 되돌아가 제도를 바꿔야 할 때다. 나는 3권 분립의 유효성까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본다. 4권 분립, 5권 분립으로 가야 옳은 게 아닌지 고려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기에 부지런히 생각해야 한다. 잘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해내는 기세가 있다.
김형찬 요즘 정치권의 모습을 보면 많은 분이 목소리를 내야 발동이 걸릴 것 같다. 설명을 들어보니 직접민주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하는 곳은 스위스인 것 같다. 캐나다 지방정부의 사례도 나왔다.
추첨제 민주주의 실험
하승수 캐나다와 유럽에서 숙의민주주의를 시도한다. 앞서 언급한 캐나다의 사례는 추첨제 혹은 추첨제 민주주의라고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숙의 과정을 거치는 이 제도는 캐나다와 유럽 각국의 지방자치 영역에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직접민주주의가 가장 발전한 곳은 앞서 말했듯 스위스다. 스위스의 제도가 미국으로 건너가 주 및 지방정부 단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정당 정치가 한계에 부딪히면서 전 세계적으로 숙의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의 흐름이 번져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서울시가 도입한 주민참여예산제는 원래 브라질에서 시작한 것이다. 브라질에서 유럽, 미국으로 건너간 뒤 한국에 들어왔다. 정성헌 이사장이 서두에 말씀한 대로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원래 시민의 자기 통치 아닌가. 민주주의의 기본이 구현되지 않는 상황을 극복하려는 방법으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중요한 다른 문제는 분권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다. 스위스는 국가 단위에서도 직접민주주의를 하지만 미국의 주와 비슷한 칸톤, 더 작은 코뮨 단위에서도 직접민주주의가 활성화돼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분권이 잘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웬만한 사안은 중앙정부가 결정하게 돼 있어 지역에서 투표로 결정할 만한 사안이 적다. 지역이 권한을 많이 갖고 있으면 주민이 의사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 활성화할 수 있다.
김형찬 정치권이 법과 제도를 바꿀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승수 제도를 바꾸려면 정치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국 정치는 중앙이나 지역이나 참여에 대해 폐쇄적이다. 시민에게 참여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교육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의제를 통해 권한을 갖게 된 선출직 탓에 주민투표를 하지 못한 사례를 보자. 얼마 전 삼척 시의회에서 원전 건설과 관련해 주민투표에 부치자는 안건이 발의됐다. 주민투표법에 따르면 시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주민투표를 시행할 수 있다. 시의회 표결 결과 찬성 인원 1명이 모자라 주민투표가 성사되지 않았다. 반대한 시의원의 상당수는 시민 참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진주의료원 폐쇄 문제가 논란이 될 때도 주민투표를 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경남도가 주민투표 신청을 접수하지 않아 소송까지 갔는데, 경남도가 패소했다. 그런데 판결이 났을 때는 진주의료원이 폐쇄된 상황이었다. 주민투표의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미흡하긴 하더라도 직접민주주의 제도가 도입은 돼 있으나 이렇듯 활용이 어려워 시민이 경험을 쌓을 기회가 적다.
선거도 마찬가지지만 직접민주주의가 잘되려면 시간을 들여 참여하려는 시민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무관심한 분이 많은 것 같다.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만들어져도 참여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각성이 필요한 일이다. 소득 물질 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고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혼자서 잘살려고 해봐야 잘 안되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개인이 공적인 일에 참여하고 공동체가 문제를 해결해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정 나누면서 깊이 얘기해야”
정성헌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관심이 별로 없다. 관심 두는 것은 돈과 자식이다. 이상교육 열풍이 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믿을 게 돈과 자식밖에 없어서 이 모양이 된 것이다. 세태를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소수가 꼭 있게 마련이다. 깨어 있는 소수가 상당한 인내심을 가지고 얘기를 계속하면 바뀌기 시작한다.
내 경험으로 보면 마을 단위에서는 변화가 시작되는 데 3, 4년이 걸린다. 군 단위에서는 4, 5년 넘게 걸린다. 그렇다면 누가 촉성을 해주느냐? 지식인, 언론이 해줘야 한다. 또한 종교가 나서야 한다. 그런데 지식인, 언론, 종교가 민망할 만큼 시장에 종속돼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깨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 아닌가. 학계, 언론계, 종교계에서 깨어 있는 사람들이 네트워크까지는 아니더라도 연결돼야 한다. 깨어 있는 사람들이 노력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치 개혁을 촉성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할 시점이다. 나는 해낼 수 있는 일이라고 본다.
시민운동 또한 중앙집권적인 게 현실이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이 세미나 같은 것 좀 안 하면 좋겠다. 발제하고 지정토론하고 질문 받고 끝인데, 지방정부가 하는 공청회 모습이랑 비슷하다. 고민하는 사람들이 1박2일, 2박3일 모여 얘기해야 한다. 세미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사안이 복잡할수록 시간을 확보해 정을 나누면서 깊이 얘기해야 한다. 지금 시민운동은 전혀 그렇지 않다. 모여서 얘기하고 함께 자면서 숙의해야 한다.
김형찬 마지막 주제는 통일이다. 직접민주주의는 통일과는 상극인 주제일 수도 있다. 과거에 우리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지 못하는 이유와 관련해 적들과 대치하고 있는데 무슨 민주주의냐는 식의 궤변을 내놓던 때도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고가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북한에 지금 남한에서 하는 민주주의를 그대로 이식한다? 될 일도 아니고 올바른 일도 아닌 것 같다. 분단, 통일 문제와 관련해 직접민주주의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말해달라.
정성헌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분단은 자기 내부가 분열돼 있는 것이다. 사회 내부뿐 아니라 자기 내면이 분열된 것이다.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분단이 되고 전쟁을 한 후 오래 대결했기에 내면의 분열은 더욱 심각하다. 온전한 인간이 되려면 통일은 꼭 필수적이다. 사회 분열을 보자. 진영으로 좍좍 갈라져 다투기만 한다.
통일은 남북이 공히 우리 민족의 자율 공간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성사 여부가 달려 있다고 본다. 외부조건은 활용하는 것일 뿐이다. 통일은 우리가 스스로 해내야 한다.
내부통일→소통일→대통일
직접민주주의의 요체는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자유라고 하겠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고, 내가 말하고, 내가 행위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게 민주시민 아닌가. 통일은 온전한 인간, 자율적 인간이 민족의 자율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통일은 민주시민이 주도할 수밖에 없다. 북에서도 잘하고 우리도 잘하면 통일은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질 것이다. 북은 잘할 소지가 낮다. 그래서 우리가 잘해야 한다. 잘하려면 우선 내부 통일이 필요하다. 우리의 통일은 내부통일, 소통일, 대통일의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내부 통합의 정도에 따라 우리의 자율 공간을 넓힐 수 있는 힘이 커진다. 내부통일을 이루려면 토론 내내 강조해온 숙의가 요구된다. 소통일은 분권화한 지방연합 형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지만 정형화된 형태를 고집해서는 안 된다. 대통일은 지구촌 한민족의 경제, 문화적 연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통일을 엮어나갈 힘은 민주주의에서 나온다. 깊이 숙의하고 직접 해봐야 힘이 생긴다. 통일은 남북의 통일이면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까지 겨냥한 것이어야 한다.
하승수 정성헌 이사장과 같은 생각이다. 우리가 통일 후 한반도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려면 남한의 민주주의가 더욱 성숙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의민주주의의 혁신뿐 아니라 직접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가 발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남북통일, 더 큰 차원의 통일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 이후의 비전과 관련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과정을 거쳐 통일이 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어쨌든 우리가 한반도 차원의 민주주의를 할 때는 지금 남한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발전한, 성숙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 하나가 분권이고 다른 하나가 직접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동서독은 초기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통일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독일은 연방제 국가다. 서독에 위치한 주와 동독에 위치한 주가 동등한 처지에서 권력을 분점할 수 있기에 통일 후 부작용을 줄일 수 있었다. 현재처럼 중앙집권화한 형태로 통일 이후의 권력 구조가 짜여져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이 직접 의견을 낼 수 있는 구조를 형성해놓지 않으면 통일 이후에도 민주주의를 한반도 차원에서 제대로 해내기는 힘들 것이다.
김형찬 현재뿐 아니라 통일 이후를 위해서도 민주주의가 한 단계 도약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직접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를 구현해가는 방식으로 틀을 새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토론을 정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