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고려대 교수(철학)
■ 패널 |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 정리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87년 체제’ 극복 위한 모색
최근 한국 사회를 보면서 어떤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라 하고, 어떤 이는 지금만큼 민주주의를 누려본 적이 있었느냐고 한다. 하지만 어느 쪽에 동의하든 한국 민주주의의 정치적 상황을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아직도 극복의 대상으로 논의되는 것을 보면 한국 민주주의의 시계는 1987년에서 멈춰 서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 이루어낸 민주화는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한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군부독재를 타도하자는 물결에는 시민, 노동자, 학생이 모두 참여했지만,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구축은 정치인들에게 맡겨졌다. 일단 군사정권을 몰아냈으니, 정치는 민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맡기는 것이 순리라고 여겼다. 정치인들의 적당한 타협으로 ‘87년 식 대의민주주의 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깨닫기 시작했다. 대표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민의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지만, 선출된 그들이 이른바 민주정부 하에서도 민의를 대변하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빈번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민이 그것을 일상으로 체감하는 수준에 이른 것을 보면, 그 사안의 심각성이 점점 더 심해진다는 것이 좀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실 이것이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이른바 ‘대의민주주의’를 행하는 대다수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이다. 현재 민주주의 위기의 핵심에는 대의민주주의가 서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민이 주인이라는 이념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민은 나라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며 자신과 가족, 사회의 안위를 보장받기 위해 체제를 선택하고 변화시킬 책임과 의무를 진다. ‘대의제’란 여러 가지 방안 중에서 민이 선택한 방법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그것이 민의를 온전히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민은 그것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본래 민주주의란 민이 국가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직접’ 행사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체제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선택한 대의민주주의가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고 판단할 때, 그 대안으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논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의’를 ‘직접’으로 간단히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민이 국가 운영에 직접 참여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의 역량과 변화된 현실을 반영해 ‘대의’의 방식을 견제하고 보완할 대안을 논의하는 게 실질적일 것이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래전부터 제기됐지만, 최근의 비판은 이전과 다른 국면에 있는 듯하다. 우선 경제 규모는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데 비해 정치 체제의 발전이 정체되면서 민과 자본의 힘이 대의제에 의해 불균형하게 반영되는 현상이 심각하다. 그것은 바로 대기업의 자본 집중과 빈부격차의 심화로 나타나 국가의 주인인 민의 권리가 점점 축소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민주화 이후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장치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또한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은 소수가 독점하던 전문적 정보와 지식에 다수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고, 개개인의 의사를 광범위하게 전달하거나, 광범위한 다수의 의견이 소통되고 검증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있다.
나아가 통일 한반도를 전망한다면 현재의 대의민주주의가 한반도 주민의 민의를 온전히 대변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장점이 본래 다수결의 효율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또는 소수의 의견이 존중되는 데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흡수통일’이나 ‘적화통일’의 사고방식이 통일 한반도의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직접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반세기 이상을 나뉘어 살아온 남과 북의 주민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자신들의 손으로 구현하며 함께 살아갈 방안을 모색하고, 우리의 민주화를 한 단계 도약시킬 길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김형찬|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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