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호

려명黎明

8장 회수작전(回收作戰)

  • 입력2014-09-18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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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기철은 조선족 브로커에게 돈을 주고 정순미의 은신처인 옌지의 시골로 향한다. 남북 비선이 끊기는 걸 원치 않는 국정원은 윤기철과 정순미를 체포하는 작전에 돌입하는데….
    려명黎明

    일러스트·박용인

    망설이던 윤기철이 휴대전화의 수신 버튼을 눌렀다. 무시할 수는 없다.

    “여보세요.”

    윤기철이 응답했을 때 이인수가 대뜸 물었다.

    “윤 과장님, 지금 어디 계시죠?”

    “예, 여기 옌지인데요.”



    주위가 관광객으로 소란했기 때문에 윤기철이 로비 구석으로 다가가 섰다. 저도 모르게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는 게 좀 뭣하지만 윤 과장님 휴대전화 누구한테 주셨습니까?”

    이인수가 물었을 때 윤기철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국정원이 회사 총무부도 아니고 이쯤은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윤기철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예, 그렇게 됐습니다.”

    “아니, 누구한테 주셨단 말입니까?”

    이인수의 목소리가 조금 굳어졌다.

    “누군데요?”

    “그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지요.”

    “그 휴대전화 위치가 조중 국경 쪽이던데 무슨 일 있습니까?”

    “그것도 조금 후에….”

    “지금 말 못할 사정이 있는 겁니까?”

    “좀 바빠서요.”

    “아니, 그것이….”

    “오늘 오후에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몇 시쯤 말입니까?”

    “2시쯤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럼 2시에, 죄송합니다.”

    먼저 통화를 끝낸 윤기철이 허리를 폈다가 벽에 붙어 서서 이쪽을 주시하는 안내원 최영수를 보았다.

    “어이구, 머리가 불덩이네.”

    이마에 손을 얹은 할머니가 혀를 찼다. 오후 1시 반, 긴장이 풀린 때문인지 깜박 잠이 들었던 정순미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깨어났다. 팔다리가 납덩이로 변한 것처럼 무거웠고 앓는 소리가 저절로 뱉어지는 바람에 놀란 할머니가 머리맡에 붙어 앉았다.

    “글쎄, 이런 날에 왜 강을 넘어?”

    얼굴의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면서 할머니가 혀를 찼다.

    “이거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여기서 누워 있으면 안돼.”

    “곧 저를 데리러 와요. 할머니,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세요.”

    정순미가 열에 뜬 목소리로 사정했다.

    “오늘밤까지만요, 할머니.”

    “오늘밤도 여기서 잔다는 말이야?”

    “아녜요, 할머니.”

    무거운 팔을 뻗쳐 옆에 놓인 배낭을 당긴 정순미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50달러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할머니, 이것 받으시고 오늘밤까지만 여기서 기다리게 해주세요.”

    “공안의 단속이 심해.”

    돈을 받아 쥐면서 할머니가 말했다.

    “윗동네에서는 탈북자한테 옥수수 몇 개 준 사람이 공안에 끌려가 며칠간 고생하고 나왔어.”

    할머니의 두 눈이 번들거린다. 처음에 10달러 주었다가 지금은 50달러다. 그러나 안 준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최영수가 빌린 승합차는 한국산 봉고였고 조선족 기사까지 딸렸다. 기름값 제하고 운전사 비용까지 하루에 120달러, 장거리를 뛰면 운전사 숙식비도 부담한다는 조건이다.

    “어디로 가십니까?”

    관광객이 빠져나간 로비 옆쪽 커피숍은 썰렁했다. 40대쯤의 운전사가 윤기철에게 물었다. 윤기철은 아직 안내원 최영수에게도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다. 양무현 미관을 지도에서 찾고 나서 얼버무렸다. 미리 운전사에게 알려준다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운전사는 물론이고 안내원 최영수까지 북한의 정보원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탈북자 안내단체를 통하는 것이 가장 무난했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숨을 들이켠 윤기철이 운전사를 똑바로 보았다.

    “양무현 미관까지 몇 시간이나 걸릴까요?”

    “양무현 미관이라.”

    그때 운전사의 시선이 최영수에게로 옮겨지려다 탁자 위로 떨어졌다. 최영수가 운전사에게 목적지를 말한 것 같다. 운전사가 머리를 들고 윤기철을 보았다.

    “지금 출발하면 다섯 시간쯤 걸립니다. 더 걸릴 수가 있고요.”

    “…”

    “근처에 독립군 묘지하고 고구려 때인지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성벽터가 있을 뿐인데, 관광객이 잘 안 가는 곳입니다.”

    “그곳까지 갔다가 오늘밤에 돌아올 수 있겠지요?”

    “그거야….”

    마침내 운전사의 시선이 최영수와 부딪쳤다가 돌아왔다. 반쯤 대머리인 사내의 얼굴에 개기름이 번질거린다. 눈동자가 흔들거렸고 구취가 풍겼다.

    “그런데 그곳까지 왜 가십니까?”

    운전사가 묻자 윤기철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금 전부터 각오는 했다.

    “왜요? 이상합니까?”

    되묻자 운전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 그렇게 물었을 겁니다. 모두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요.”

    “…”

    “지리도 모르시면서 대뜸 국경과 가까운 마을로 가자고 하면 탈북자 데리러 가는 것으로 알 겁니다.”

    “…”

    “만일 그렇게 하다가 공안에게 적발되면 우리 끝장입니다. 망하는 거죠. 우리만 망하는 게 아니라 가족까지 거지가 되는 겁니다.”

    그때 윤기철이 물었다.

    “얼마면 하겠소?”

    최영수와 운전사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윤기철이 의자에 등을 붙였을 때 최영수가 물었다.

    “몇 명입니까?”

    “한 명.”

    “남자인가요?”

    “여자.”

    “고위직입니까?”

    “이 사람들이 가격 올리려고 별걸 다 따지는구먼. 이보쇼, 고위직이면 내가 당신들 붙잡고 이러겠소? 기관에서 나섰지?”

    버럭 화를 낸 윤기철이 다시 의자에 등을 붙였다.

    “그냥 아는 여자요. 내가 엉겁결에 끼어들어서 지금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고 이러고 있다고요.”

    “우리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할 테니 우리 둘 몫으로 3000달러 내십시오.”

    최영수가 어깨를 부풀리며 말했다.

    “제가 1000달러, 여기 있는 장형이 2000달러 먹습니다. 물론 경비 다 포함해서 그렇습니다.”

    몸이 치켜 들려졌으므로 정순미는 꿈에서 깨어났다. 다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입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뱉어졌다. 그것을 들은 윤기철이 추어올려 업으면서 말했다.

    “아파? 조금만 참아.”

    뒷좌석을 펴서 정순미를 눕힌 윤기철이 점퍼를 덮어주었지만 정순미는 계속 떨었다. 오후 9시 40분, 차는 국도를 북상하는 중이다. 한동안 정순미를 내려다보던 윤기철이 정순미의 옆에 누웠다. 그러고는 정순미를 가슴에 안고 두 팔로 등을 감았다. 한쪽 다리로 정순미의 하반신을 감싸 안았더니 빈틈없이 몸 안에 안겼다. 정순미가 얼굴을 비비면서 윤기철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정순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뜨거운 입김이 윤기철의 턱에 닿는다. 숨결에 앓는 소리가 섞여 나왔는데 반쯤 잠이 든 것 같다. 덜컹거리는 차의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그때 정순미가 몸서리를 치더니 길게 숨을 뱉었다. 윤기철이 머리를 숙여 정순미의 귀에 입술을 붙였다.

    “잠든 거야?”

    “아뇨.”

    신음과 함께 정순미가 대답했다.

    “조금만 참아.”

    “네.”

    “나하고 같이 가자.”

    “네.”

    “나, 따라갈 거야?”

    “네.”

    “어디로?”

    “어디든지요.”

    윤기철이 입술로 정순미의 귀를 물었다. 정순미가 머리를 더 깊게 윤기철의 가슴으로 비비고 들어가는 바람에 입술이 귀를 놓쳤다.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박도영이 발신음을 듣는다. 발신음이 스피커로 상황실에 울린다. 벽시계가 오후 10시 5분을 가리킨다. 한정철은 뒤쪽 소파에 기대앉아 신문을 보는 시늉을 했지만 귀를 세우고 있을 것이다. 신호음이 네 번째 울린다. 상황실 안에는 모두 다섯 명, 한정철은 둘이 옌지 호텔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으므로 앞으로 서너 시간은 더 있어야 될 것이다. 신호음이 여섯 번째 울렸을 때 윤기철이 응답했다. 신호음이 다섯 번이 넘어가면 불안해진다.

    “예, 접니다.”

    “지금 어딥니까?”

    박도영은 스피커에서 울리는 제 목소리가 다른 사람 같았다.

    “절반 조금 못 왔는데요.”

    “검문은?”

    “임시 검문소 하나는 통과했는데 곧 고정 검문소가 나옵니다.”

    “정순미 씨는 괜찮아요?”

    윤기철의 목소리에 초조감이 묻어났다.

    “지금 누워 있는데 앓고 있습니다. 반은 잠이 든 상태예요.”

    “…”

    “온몸이 뜨거워서 수건을 물에 적셔 얼굴에 덮어줬습니다.”

    “검문소는 어떻게 통과할 겁니까?”

    “이번 검문소도 미리 내려서 정순미를 업고 돌아가는 수밖에 없는데요.”

    “…”

    “시간이 꽤 걸립니다. 아까 통과한 임시검문소를 지나는 데 한 시간 넘게 걸렸거든요.”

    “…”

    “그리고 정순미 컨디션이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아요.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야 될 것 같습니다.”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채 박도영이 머리를 돌려 한정철을 보았다. 할 말이 있느냐는 시늉이다. 한정철도 마침 이쪽을 보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외면했다. 어깨를 부풀렸다가 내린 박도영이 스피커에 대고 말했다.

    “조심하세요. 윤 과장님. 나는 윤 과장님이 잘 빠져나오리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박도영이 준비하지 않았던 대사다. 저절로 말이 나온 것이다.

    고정 검문소가 바라보이는 갓길에서 차를 세웠을 때 윤기철이 정순미를 안아 일으켰다.

    “순미, 나하고 잠깐 내리자.”

    “네.”

    정순미가 대답을 했지만 눈동자의 초점이 흐리다. 머리가 흔들렸고 반듯이 앉으려다가 다시 상반신이 의자에 붙여졌다. 그것을 본 최영수가 말했다.

    “안되겠는데.”

    머리를 내저은 최영수가 말을 이었다.

    “그냥 돌파해봅시다.”

    “내가 업고 갈 테니 걱정 마시고.”

    정순미의 몸을 안아 일으킨 윤기철이 최영수에게 말했다.

    “자, 내 등에 업혀주시오.”

    “저, 걸을게요.”

    두 발을 짚고 몸을 일으키던 정순미가 그대로 넘어져 의자 위에 상반신이 꺾였다. 놀란 최영수가 정순미를 잡아 앉혔고 운전석에서 그것을 본 장씨가 머리를 내저었다.

    “안되겠는데, 밀고 가는 수밖에.”

    “맞아. 돌파하는 것은 둘째고 병원에 빨리 가야 되겠어.”

    최영수가 맞장구를 쳤을 때 장씨가 윤기철에게 물었다.

    “공안에게 뇌물로 쓸 달러 있습니까?”

    “얼마면 됩니까?”

    윤기철이 묻자 머리를 기울였던 장씨가 최영수에게 물었다.

    “공안이 셋이면 300달러씩 주면 될까?”

    “난 잘 모르겠는데….”

    최영수가 망설이자 장씨가 버럭 화를 내었다.

    “돈 주고 사정하면 제 놈 물건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잡지는 않아. 너도 옆에서 도와줘야 돼!”

    “알았어.”

    결심한 듯 머리를 든 최영수가 윤기철을 보았다.

    “돌파합시다.”

    둘의 시선을 받은 윤기철이 말했다.

    “내가 2000달러 낼 테니 해봅시다. 그냥 돌파해도 돈 돌려달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원호

    려명黎明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전주고, 전북대를 졸업했다. (주)백양에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 무역 일을 했고, (주)경세무역을 설립해 직접 경영했다. 1992년 ‘황제의 꿈’과 ‘밤의 대통령’이 100만 부 이상 팔리며 최고의 대중문학 작가로 떠올랐다.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 스케일이 큰 구성,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그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매력이다. 기업, 협객, 정치, 역사, 연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지금까지 50여 편의 소설을 냈으며 1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주요 작품으로 ‘할증인간’ ‘바람의 칼’ ‘강한 여자’ ‘보스’ ‘무법자’ ‘프로페셔널’ ‘황제의 꿈’ ‘밤의 대통령’ ‘강안남자’ 등이 있다.


    “이 양반들이 부자 되겠구먼. 나, 부자 아닙니다. 2000달러로 합시다.”

    “안됩니다.”

    운전사가 자리를 차고 일어섰으므로 윤기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 시발, 잘됐어. 나 포기할래, 이것으로 끝내자고.”

    따라 일어선 윤기철이 지갑에서 20달러짜리 2장을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이걸로 나눠 쓰쇼. 그리고 공안에다 신고하려면 해. 증거는 하나도 없을 테니까. 내가 만만한 인간이 아냐.”



    오후 2시, 용성 본사에서 보내온 메일이 도착하자 이인수가 말했다.

    “입출 현황과 일일 생산량, 출퇴근, 휴가 내역이 왔습니다.”

    소공동 사무실 안이다. 뒤쪽 소파에 앉아 있던 박도영이 지시했다.

    “출퇴근과 휴가 내역을 체크해봐.”

    용성 본사에 자료 요청을 한 것은 윤기철의 이상 행동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의도였다. 이인수는 지금 개성공단 용성법인이 본사에 보낸 지난 두 달간의 보고서를 읽고 있다.

    “정순미가 병가를 냈는데요.”

    모니터를 보던 이인수가 불쑥 말했을 때 박도영이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인수가 머리를 돌려 박도영을 보았다.

    “닷새간 병가입니다. 그것이 닷새 전부터 오늘까지란 말입니다.”

    박도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깜박 잠이 들었던 정순미는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을 뜨지는 않았다. 인기척이 조금 수상했기 때문이다. 실눈을 뜬 정순미는 할머니가 배낭을 뒤지는 것을 보았다. 아까 손지갑을 넣었던 곳을 기억하는지 지퍼를 열고 그곳에 손을 넣는다. 이윽고 손지갑의 지퍼를 연다. 그러고는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으므로 정순미는 서둘러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손지갑에는 10달러짜리 2장, 5달러짜리 4장이 들어 있다. 나머지는 모두 빼내 지금 바지 주머니에 넣어놓았다. 이윽고 할머니가 손지갑에서 돈을 다 빼내고 원상태로 해놓았을 때쯤 해서 정순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거렸다.

    “어이구, 일어났어?”

    할머니가 웃음 띤 얼굴로 물었는데 배낭에서 조금 떨어져 있다. 정순미는 따라 웃었지만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화가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려야만 한다. 그런데 과연 전화가 올까?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으므로 윤기철이 바지에서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이인수, 벌써 2시 25분이다. 윤기철이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앞쪽에 앉은 최영수가 힐끗 뒤를 보았다. 봉고차는 덜컹거렸지만 빠른 속도로 달리는 중이다.

    “여보세요, 접니다.”

    ‘접니다’는 붙이지 않아도 될 것을 앞쪽 둘이 들으라고 의도적으로 붙였다. 이인수의 목소리가 울렸다.

    “정순미가 병가로 며칠 안 나오는데, 그것과 연결된 일입니까?”

    윤기철이 먼저 숨을 들이켰다.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다. 불안했고 도움이 필요하다. 안내원 최영수와 운전사와 실랑이 끝에 2300달러로 합의했지만 꺼림칙하다.

    “맞아요.”

    먼저 그렇게 대답한 윤기철이 말을 이었다.

    “미안합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니, 윤형, 어쩌시려고.”

    버럭 소리친 이인수가 말했다.

    “잠깐만, 전화 바꿔드리죠.”

    곧 박도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국경에 있는 건 정순미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윤기철이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어느새 땀이 배어나와 있다.

    “지금 윤형, 어디 계시오?”

    “그쪽으로 가는 중입니다.”

    “혼자?”

    “봉고차를 빌렸어요. 안내원, 운전사하고 셋입니다.”

    “정순미가 지금 어디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말해봐요.”

    “왜요?”

    “왜라니?”

    “이유를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혹시….”

    “혹시 뭐요?”

    “저쪽에다 말해서 데려가려는 건 아니죠?”

    그때 앞에 앉은 최영수가 몸을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지금까지 이쪽 말을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숨을 죽인 윤기철의 귀에 박도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를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합니까? 윤 과장, 차분하게 생각해보세요.”

    윤 과장이라고 부른 것도 의도적이다. 네 위치를 알라는 뜻이다. 박도영이 말을 이었다.

    “윤 과장과 정순미의 이탈로 지금까지 만들어진 관계가 깨질 것 같습니까?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거요.”

    “하지만 미리 알았다면 날 막았을 것 아닙니까?”

    “그랬겠죠.”

    가볍게 대답한 박도영이 다시 물었다.

    “위치를 말해요.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도와드릴 테니까.”

    “…”

    “이미 일이 저질러졌으니 잡히지는 말아야 된단 말요. 어디요?”

    “양무현 미관 아래쪽 운더라는 곳에 있습니다. 지금 민가에 있어요.”

    “민가라니? 조선족?”

    “중국인 집입니다. 할머니가 혼자서 산다는데 전화번호는….”

    전화번호를 불러준 윤기철이 덧붙였다.

    “정순미가 갖고 있는 내 휴대전화 배터리가 다 나가서 통화가 안 됩니다.”

    화장실 앞에 선 정순미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외딴집이다. 이집은 골짜기 안쪽의 산비탈에 세워져 있어서 삼면이 트였다. 뒤쪽은 낮은 산으로 막혔는데 경사가 낮아 산꼭대기까지 밭이다. 열은 조금 내렸지만 대신 온몸에 한기가 덮였고 설사가 자주 나온다. 한 시간 동안 세 번째 화장실에 온 것이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다. 할머니는 배낭 안의 손지갑에 남아 있던 40달러까지 다 가져갔으니 이제 공안에 신고할 것인가? 아니면 저녁때까지 기다려줄지 알 수 없었으므로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몸으로 이곳을 떠날 수는 없다. 비틀거리면서 방으로 돌아온 정순미가 벽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그때 부엌에서 꾸물거리던 할머니가 쟁반에 그릇을 받쳐 들고 들어섰다.

    “이봐, 쌀죽을 끓였어.”

    할머니가 죽 그릇을 정순미 앞에 내려놓았다. 주름진 얼굴, 손가락은 마디가 소나무 가지 같았고 손톱은 조개껍데기처럼 두껍다. 정순미는 문득 죽에 독약이 섞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금으로 간을 맞췄어. 먹어.”

    할머니가 죽 그릇을 정순미 앞으로 밀어주면서 말했다. 소금 대신 독약을 넣었는지도 모른다. 온몸에 다시 식은땀이 솟아오른 정순미가 머리를 내저었다.

    “배가 아파서 못 먹겠어요, 할머니.”

    검문소 앞에 도착하자 운전사 장씨가 면허증을 내보이면서 중국어로 떠들썩하게 말했다. 공안이 건성으로 면허증을 보더니 장씨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차단봉은 올라간 상태였고 도로 옆 벽돌로 지은 막사 앞에 공안 두 명이 담배를 피우면서 물끄러미 이쪽을 본다. 2차선 도로지만 좁다. 차량 통행이 드문 곳이라 공안 초소는 한가했다. 그때 앞쪽에 앉은 최영수가 윤기철에게 말했다.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오는 거라 미리 안면을 터놓는 겁니다.”

    윤기철이 머리를 끄덕였고 최영수가 말을 이었다.

    “저놈들은 밤 10시까지 근무한다는군요. 하루 2교대라고 합니다.”

    그때 반대편에서 트럭 한 대가 왔으므로 담배를 피우던 공안 둘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쪽 공안도 머리를 끄덕이며 물러섰고 그때 장씨가 말보로 한 갑을 내밀었다. 담배를 받아 든 공안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차가 다시 출발했을 때 장씨가 백미러를 통해 윤기철을 보았다.

    “아무래도 돌아올 때는 차에서 내려서 검문소 뒤쪽으로 돌아와야 되겠어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 윤기철이 시선만 주었을 때 최영수가 설명했다.

    “검문소 못미처 내린 후에 검문소 뒤쪽으로 빠져 다시 위쪽 길로 나오는 거죠. 차에 타고 있다가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거든요.”

    장씨가 바로 거들었다.

    “저놈들이 탈북자들을 많이 겪어서 사냥개가 다 됐거든. 국경에서 나오는 차는 그냥 보내지 않소.”

    “검문소가 몇 개나 있습니까?”

    윤기철이 묻자 장씨가 머리를 기울였다.

    “세 개던가? 이 길은 간 지가 오래돼 잘 모르겠는데.”

    “임시 검문소가 위험하다고.”

    이번에는 최영수가 거들었다.

    “차단봉 세운 검문소는 먼저 내려서 돌아갈 수 있지만 임시 검문소는 갑자기 길을 막고 검문한단 말입니다. 탈북자는 대부분 임시 검문에서 잡히지.”

    봉고는 다시 속력을 냈다. 그때 지도를 편 최영수가 혼잣소리로 말했다.

    “절반쯤 왔는데.”

    옌지를 떠난 지 3시간 정도 됐으니 절반쯤 왔다면 오후 6시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

    소공동 사무실에는 세 사내가 둘러앉았다. 박도영과 이인수, 그리고 원장특보 한정철이다. 한정철은 차장급으로 원장의 직접 지시를 이행하는 신분이다. 박도영과 이인수는 긴장하고 있다. 둘을 국정원으로 부르지 않고 한정철이 직접 이곳으로 찾아온 것도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옆쪽 회의실에는 한정철을 수행해온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숨소리도 나지 않는다. 한정철이 입을 열었다.

    “애국심 이전에 직무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인간이야. 일에 대한 보수까지 받았으면 그런 행동이 어떤 결과가 될지 생각이라도 해봐야 될 것 아닌가?”

    목소리는 낮았지만 둘은 선생님한테 꾸중을 듣는 초등학생처럼 탁자에 시선을 준 채 굳어 있다. 윤기철과 통화한 후 박도영은 바로 본부에 보고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정철은 본부의 결정을 말하기 전에 윤기철을 비난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이곳은 작전상황본부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먼저 대답은 했지만 박도영이 한정철을 응시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무슨 작전이냐고 묻는 것이다. 한정철이 한번 긴 호흡을 하고나서 대답했다.

    “회수작전이야, 윤기철과 정순미를 돌려받는다는 뜻이지.”

    “…”

    “본부장은 내가 맡는다.”

    어깨를 편 한정철이 말을 이었다.

    “내가 상황실 요원들을 데려왔어. 자네 둘이 주축이 돼 도와줘야 돼.”

    전화벨이 울렸을 때 정순미는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화장실이 마당 끝에 있어서 안방을 지나다가 벨소리를 들었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는다.

    “예, 누구요?”

    그렇게 대답한 순간 정순미는 안방 문을 열고 기척을 냈다. 할머니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입에 붙인 송화구에 대고 말했다.

    “예, 여기 있어요. 데리러 온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다시 정순미를 돌아보고나서 말을 이었다.

    “나도 불안해서 못살겠소. 그러니 빨리 오시오.”

    정순미가 다가갔을 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뭐, 사례를 해준다면야 고맙지. 그나저나 색시가 몸이 아파서 야단이야. 지금도 화장실에 다녀오는구먼.”

    몸을 돌린 할머니가 전화기를 정순미에게 넘겨주었다.

    “몸이 아프답니다.”

    전화기를 건네주면서 최영수가 말했다. 최영수가 할머니와 통화를 한 것이다. 중국어를 모르는 터라 최영수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윤기철이 정순미를 불렀다.

    “여보세요.”

    “네, 저예요.”

    먼저 전화를 귀에 붙인 정순미가 금방 대답했다.

    “지금 오시는 중인가요?”

    “그래, 두 시간쯤 뒤면 미관에 도착할 거야.”

    윤기철이 서두르듯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차를 빌려서 안내원하고 그쪽으로 가고 있어. 근처에 도착했을 때 다시 연락할 테니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몸이 아프다고?”

    “아녜요. 괜찮아요.”

    “그 할머니, 괜찮아?”

    “조금 불안해요.”

    한국어였지만 정순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돈을 두 번이나 주었는데도 제 가방을 뒤져서 지갑의 돈을 훔쳐갔어요.”

    “얼마나?”

    “40달러 정도. 인사로 두 번에 걸쳐 60달러를 주었는데도요.”

    “할머니 혼자지?”

    “네.”

    “사례를 한다고 했으니까 사례받을 때까지 기다리겠군. 오히려 안심이야.”

    정순미를 안심시킨 윤기철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10분 전이다.

    차 안에는 엔진 소음만 가득할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최영수나 장씨의 표정도 굳어졌다. 창밖으로 단조로운 농촌 풍경이 스치고 지나간다. 붉은 칠을 한 농가의 대문, 옥수수밭, 낮은 산, 그리고 다시 마을이 나오고 붉은 대문집, 끝없는 옥수수밭, 도랑을 건너가는 농부의 모습도 조금 전에 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때 앞에 앉은 최영수가 몸을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운더는 국도에서 3㎞쯤 떨어진 곳입니다. 차를 길가에 두고 저하고 둘이 걸어가야 되겠지요.”

    윤기철의 시선을 받은 최영수가 물었다.

    “뭐, 옌지까지 모시고 오는 것으로 제 일은 끝나게 돼 있지만, 그 후에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무슨 말인데요?”

    되물은 윤기철에게 운전사 장씨가 백미러에 대고 대신 대답했다.

    “중국을 빠져나가는데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은 겁니다.”

    “그건 아직….”

    입맛을 다신 윤기철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끌려가는 느낌이 들었고 불편해진 것이다. 약점을 보인 것 같다. 어금니를 문 윤기철이 물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십시다. 날 어떻게 도와주신다는 겁니까?”

    “탈북 안내인을 잘 알아요.”

    정색한 최영수가 말을 이었다.

    “물론 돈 받고 해주는 일이지만 수십 명을 남한으로 빼돌렸지요.”

    “…”

    “나하고 친척이 되는데 남한에도 여러 번 다녀왔지요. 돈 많이 벌었습니다.”

    윤기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다. 저절로 다 벗겨진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고 윤기철이 서둘러 꺼내 보았다. 그 순간 윤기철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임승근이다. 주간지의 민완기자, 특종감 기사를 눈앞에 두고 의리상 쓰지 못하게 됐으니 장이 꼬였겠지.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윤기철이 대뜸 말했다.

    “형, 나중에 써. 나중에 다 이야기해줄 테니까.”

    “알았다. 나중에 쓴다.”

    임승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우선 너나 그 여자의 안전이 우선이지.”

    “고마워, 응원이나 해줘.”

    “지금 어디냐?”

    “걔가 숨어 있는 민가로 가는 중이야.”

    “언제 도착하는데?”

    “어디? 민가에?”

    “응.”

    손목시계를 본 윤기철이 성실하게 대답했다.

    “한 시간 반쯤 걸리겠어.”

    “지금 4시니까 5시 반쯤?”

    “거기서 또 걸어야 돼. 6시 반쯤 만나겠어.”

    “그렇구나. 옌지로 돌아오는 거냐?”

    “그래, 돌아가는 것이 더 위험해. 시간도 더 걸리겠어.”

    “내가 도와줄 일 있어?”

    “없어. 응원이나 해달라니까.”

    “내가 지금 옌지에 있어서 그런다.”

    숨을 들이켠 윤기철이 몸을 굳혔을 때 임승근의 말이 이어졌다.

    “방금 도착했어. 내가 옆에서 지켜보면서 기사를 쓰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론 너희 둘의 여정이 다 끝났을 때 기사가 나가겠지만 말이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내가 방해는 안 될 거다.”

    려명黎明
    검문소 한 곳과 임시 검문소 하나를 더 지나고 나서 미관 버스정류장 근처에 도착했을 때는 5시 35분, 운전사 장씨와 봉고는 그곳에 두고 윤기철과 최영수는 곧장 국도를 벗어나 샛길로 들어섰다. 운더는 샛길로 3㎞, 산골의 저녁은 빠르다. 샛길로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위는 산 그림자로 덮였다. 흐린 날이다. 길가 웅덩이에 물이 많이 고였다. 어느덧 샛길에는 그들 둘뿐이었다.

    최영수는 32세로 옌지 시내에서 아내와 둘이 오토바이 수리점을 운영한다고 했다. 10년 동안 오토바이 수리점에서 기술자로 일한 후에 독립한 지 2년이 됐다는 것이다. 둥근 얼굴에 눈이 가늘고 입술이 꾹 닫혀져서 다부진 인상으로 키는 170㎝ 정도였지만 단단한 체격이다. 최영수가 제 휴대전화로 다시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이번이 세 번째다. 샛길을 걸으면서 최영수가 말했다.

    “할머니, 우리가 지금 샛길로 갑니다. 왼쪽으로 옥수수밭을 지나고 있어요. 맞지요?”

    “응, 맞아.”

    할머니가 대답하자 최영수가 옆에서 걷는 윤기철에게 재빨리 통역했다.

    “쭉 가면 됩니까?”

    “가다가 길가에 돌 쌓아둔 곳이 있어. 거기에서 오른쪽 길로 와.”

    “알겠습니다. 거기서 얼마나 돼요?”

    “조금만 걸으면 왼쪽에 사당이 보이고 민가 두 채가 보일 거야. 거기를 지나.”

    “거기를 지나 얼마나 더 갑니까?”

    “거기서 큰 나무가 있는 모퉁이를 지나면 내 집이 보여. 담 한쪽이 허물어져 있어.”

    “알겠습니다. 곧 뵙지요.”

    그때 윤기철이 어깨를 가볍게 쳤으므로 최영수가 서둘러 말했다.

    “할머니, 잠깐 바꿔주세요.”

    “별일 없지?”

    “네, 지금 샛길이에요?”

    정순미는 중국어를 아는 것이다. 대끔 되묻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집 앞에 나가 있을게요.”

    “아프다면서.”

    “괜찮아요.”

    “30분 정도 걸릴 거야.”

    “기다릴게요.”

    정순미의 목소리가 떨렸으므로 윤기철은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그때 정순미가 말했다.

    “꿈만 같아요.”

    “…”

    “이렇게 오실 줄 몰랐어요.”

    윤기철은 머리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낯선 땅이다. 숲도 밭도 다 다르다. 폐로 들어오는 공기의 맛도 다른 것 같다.

    “지금 어디 있나?”

    한정철이 물었으므로 박도영의 시선이 벽에 붙은 중국 지도로 옮겨졌다. 벽에는 중국의 동북3성(省)을 확대한 지도가 붙어 있다. 그리고 옌지와 양무현 미관, 운더에 붉은색 핀이 꽂혔다.

    “지금쯤 미관 근처에 닿았을 것 같습니다. 6시 넘어 도착할 것 같다고 했거든요.”

    박도영이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벽시계로 옮겨졌다. 오후 5시 45분이다. 서울보다 한 시간 늦은 중국 시간에 맞춰놓아서 지금 서울은 6시 45분이다.

    “좋아. 그럼 6시 반쯤에 A하고 통화를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A는 윤기철. 정순미는 B다. 보통 작전 타깃 인물은 가명으로 불렀는데 이번은 A, B다. 박도영이 한정철을 봤다.

    “특보님, 뭐라고 해야 됩니까?”

    “호텔로 데리고 가면 우리가 도와줄 것이라고 해.”

    “기다리라고 할까요?”

    “그러지. 5일만 기다리면 우리가 서류 만들어서 빼내든지 해주겠다고.”

    “알겠습니다.”

    힐끗 벽시계를 본 한정철이 몸을 돌렸으므로 박도영도 창가로 다가섰다. 창밖엔 이미 어둠이 덮였다. 퇴근 시간이라 거리에는 오가는 행인이 많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이인수다. 머리를 돌린 김에 뒤쪽을 보았더니 상황실은 비었다. 한정철은 옆쪽 회의실로 간 모양이었고 둘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하나는 화장실에 간 것 같다.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요?”이인수가 낮게 묻자 박도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 알면서 왜 묻는 거냐?”“저쪽에다 이미 연락을 했겠지요?”“했겠지.”뒤를 돌아본 이인수가 다시 물었다.

    “윤기철은 건드리지 않겠지요?”“그걸 내가 아나?”“우리 팀은 접근 안 합니까?”입을 벌린 박도영이 외면했으므로 이인수도 창밖만 보았다. 다 알면서 물었던 것이다. 이쪽은 이렇게 거창하게 상황실을 차려놓고 제2차 세계대전 영화 장면처럼 작전지에 붉은색 핀까지 꽂아놓았지만 실상은 허당이다. 상황실장 노릇을 하는 박도영이 한 일은 윤기철에게 통화하는 일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한정철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 어깨를 늘어뜨린 박도영이 소리 죽여 숨을 뱉었다. 5일 동안 호텔에서 기다리면 서류 만들어서 빼내주겠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이다.

    “과장님.”

    대문 밖에서 기다리던 정순미가 다가온 윤기철의 점퍼 깃을 움켜쥐고 울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정순미가 닦지도 않고 말했다.

    “과장님, 고맙습니다.”

    “얼굴이 왜 이러냐?”이맛살을 찌푸린 윤기철이 손바닥을 펴서 정순미의 이마를 짚었다. 정순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됐기 때문이다.

    “어이구, 불덩이네.”

    놀란 윤기철이 옆에 선 최영수를 보았다.

    “최형, 약 없지요?”“준비를 못했는데요?”

    최영수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순미를 보았다. 그때 할머니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윤기철과 최영수를 번갈아 보는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윤기철이 인사를 하자 최영수가 서둘러 통역을 했다. 다가선 윤기철이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사례를 하겠습니다. 200달러면 됩니까?”그때 최영수가 통역을 하지 않고 윤기철에게 말했다.

    “이 할망구한테 그렇게 줄 필요 없습니다. 한 50달러만 주세요.”

    최영수도 할머니가 정순미 가방에서 돈 꺼내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윤기철이 머리를 끄덕이자 최영수는 그렇게 통역을 하고나서 한국어로 말했다.

    “자, 어서 가십시다.”

    오후 6시 20분이 돼 있었다.

    집을 나와 100m가 되지 않았을 때 정순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멈췄다. 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죄송해요. 좀 어지러워서….”

    다가간 윤기철이 정순미를 보았다. 문득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더니 박동이 거세졌다. 정순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됐는데 열 때문일 것이다. 눈을 치켜떴지만 흐렸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물기가 가득 고였다. 반쯤 벌린 입술은 말라서 갈라져 있다. 그러나 아름답다. 그리고 안쓰러워서 가슴에 꽉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나한테 업혀.”

    윤기철은 제 목에서 나온 말이 남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아녜요. 아녜요.”

    당황한 정순미가 말했지만 윤기철이 등을 보이며 몸을 굽히고 재촉했다.

    “어서, 시간이 없어.”“자, 서둘러요.”

    정순미의 배낭을 메던 최영수도 재촉했다. 이미 사방은 어둡다. 모퉁이를 돌아서 할머니의 집은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 정순미가 윤기철의 등에 업혔다. 허리를 펴고 일어선 윤기철은 정순미의 몸이 예상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가슴에서 등으로 옮겨진 체온은 따뜻했다. 정순미를 추어올린 윤기철이 발을 떼면서 말했다.

    “조금만 참아. 가다가 약국이 있으면 세울 테니까.”그러나 오면서 보았지만 약국은 없다. 옌지로 가야만 한다. 윤기철의 가슴이 무거워졌다. 검문소가 2개, 임시 검문소를 1개 지났다. 그곳마다 먼저 내려 우회해서 걸어야 하는 것이다. 옌지에는 몇 시에나 도착할까? 아니, 잘 도착할 수나 있을까? 그때 정순미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마운틴 오더 배를 예약해놓고 오신 거지요?”

    윤기철이 숨을 들이켰다. 그렇구나. 배를 예약하지 않았다. 제품이 다 돼가는데 싣고 갈 배를 예약하지 않았다니. 아니, 그것보다 이런 상황에서 그 걱정을 하다니. 우리는 이제 업무과 팀이 아니다.

    “예약해놓고 왔어.”

    일단은 거짓말을 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회사로 돌아갈 일은 없다.

    6시 40분이 됐을 때 바지 속에 넣은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다. 샛길을 걷다 마침 쉬는 때여서 윤기철이 꺼내 보았다. 이인수다. 반갑다. 막막했던 가슴에 활기가 일어난 느낌이 들었다.

    “예, 접니다.”밝게 응답했더니 박도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는 이인수 전화기로 박도영이 전화를 한다.

    “윤 과장, 지금 어딥니까? 만났습니까?”“예, 지금 국도로 가는 중입니다.”“같이요?”“예, 근데 몸이 아파서요. 제가 업고 가느라 속도가 늦어지네요.”

    윤기철의 시선이 길 옆쪽 나무 밑에 앉아 있는 정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짙게 어둠이 덮여 있어 열 발짝쯤 떨어진 정순미의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박도영이 물었다.

    “어디가 아픕니까?”“몸에 열이 나서 뜨거워요. 식은땀이 나고 배탈이 나서 화장실을 자주 갔다고 합니다.”“돌아갈 때 검문이 까다로운데, 곤란하게 됐는데.” 박도영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려갈 때 검문소를 몇 개 거쳤습니까?”

    “고정 검문소가 둘, 임시 검문소 하나였습니다.”“검문소를 어떻게 통과할 작정이죠?”

    “가까운 곳에서 내려 검문소를 돌아간 다음에 다시 차를 타려고 하는데요.”

    “업고 다녀야 합니까?”“그것이 빠를 것 같아요.”“알았습니다.”수화구에서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박도영이 말을 맺었다.

    “세 시간 후에 다시 연락드리지요.”

    “임시 검문소가 저쪽 산기슭 뒤쪽에 있었던 것 같은데.”차를 서행시키면서 장씨가 말했다. 오후 8시 45분, 기다리던 차를 탄 지 30분쯤이 지났을 때다.

    “저기가 맞나?”

    최영수가 앞쪽을 보았고 차 안에 긴장이 감돈다. 뒤로 젖혀진 의자에 누워 있던 정순미도 상반신을 일으켰다. 차는 길가에 멈췄고 모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차량 통행이 뜸해 가끔 다가오는 차의 전조등 불빛이 차 안을 비추고 지나간다.

    “맞아, 저기야.”

    마침내 장씨가 자신 있게 말하고는 머리를 돌려 윤기철을 보았다.

    “내가 검문소에서 안 보이는 곳에서 기다릴 테니까 연락을 하라고요.”

    “자, 내립시다.”최영수가 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

    “나도 같이 갈 테니까. 이젠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윤기철이 손을 뻗어 정순미의 어깨를 쥐었다.

    “괜찮아?”“괜찮아요.”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정순미가 윤기철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차에 타고 나서도 정순미하고 이야기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밤 10시가 돼간다.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돌아온 박도영이 상황실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모아졌다. 안에는 한정철과 요원 셋이 상황판 앞에 둘러서 있었고 이인수는 구석자리에 앉아 있다.

    “언제 다시 연락하기로 했지?”한정철이 묻자 박도영의 시선이 중국 시간에 맞춰진 벽시계로 옮겨졌다. 8시 55분이다.

    “10시쯤 하기로 했습니다.”“그때까지 무사할까?”한정철의 손에는 커피잔이 들려 있다.

    누가 커피를 타준 것 같다. 숨을 고른 박도영이 한정철의 시선을 맞받았다.

    “전화해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한정철이 웃었다.

    “요즘은 참 편한 세상이야. 휴대전화로 다 알 수 있으니 말야.”

    “…”

    “검문소가 몇 개라고 했지?”

    “세 개를 거치고 내려갔으니까….”

    “세 개를 통과해야 되겠군.”

    커피를 한 모금 삼킨 한정철의 시선이 상황판으로 옮겨졌다. 그러더니 혼잣말처럼 말했다.

    “참, 요즘 세상에 저런 놈도 있다니.”

    수로에 발이 빠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엎어질 뻔한 윤기철이 몸을 세웠다. 업혀 있던 정순미가 놀라 윤기철의 목을 세게 조였다가 풀었다.

    “미안합니다, 과장님.”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이 걸린 윤기철이 재채기를 했다. 재채기 소리가 어둠을 타고 사방으로 번지는 것 같다. 발을 뺀 윤기철이 수로 위의 좁은 길로 올라와 다시 걷는다. 사방은 짙은 어둠에 덮여 겨우 사물 윤곽만 보일 뿐이다. 아마 시간은 20분쯤 됐지만 300m쯤밖에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길이 수로에 막혀 끊겼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임시 검문소가 있었다. 도로 오른쪽의 경작지다. 그러나 경사가 심한 땅인 데다 밭과 황무지, 수로와 바위더미에 가로막혀 도로 방향으로 나가지를 못한다. 앞장서 가던 최영수가 멈춰 서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했다.

    “장형, 어딥니까?”

    대뜸 그렇게 묻고 나서 장씨의 이야기를 듣는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진다. 통화를 끝낸 최영수가 다가온 윤기철에게 말했다.

    “임시 검문소를 지나서 300m쯤 떨어진 도로변에 서 있답니다.”

    다시 발을 뗀 최영수가 말을 이었다.

    “이제 국도 쪽으로 다가갑시다. 검문소와는 좀 떨어졌겠지요.”

    윤기철은 잠자코 정순미를 추켜 업었다. 이제는 업히는 것이 익숙한지 정순미는 가슴을 등에 딱 붙인다. 가슴의 온기가 등에 전해지면서 팔로 감아 안은 허벅지의 촉감도 느껴진다. 발을 떼던 윤기철의 눈앞에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내 꼴을 보면 뭐라고 할 것인가?

    정순미는 윤기철의 등에 업힌 채 꿈을 꾸었다.

    “어머니, 빨리 들어와.”

    적당히 뜨거운 목욕탕 안에서 정순미가 소리쳐 어머니를 불렀다. 주위는 환했다. 아파트 안인데 오늘은 전력 사정이 좋은 것 같다.

    “응, 지금 간다.”

    어머니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지 밥부터 차려주고 갈게.”

    “빨리 오라니까, 물이 식는단 말야.”

    괜히 초조해진 정순미가 다시 소리쳤다.

    “물이 너무 좋아.”

    “알았다.”

    목욕탕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므로 정순미가 머리를 들었다.

    “아앗!”

    소스라치게 놀란 정순미가 외침을 내뱉었다. 어머니는 머리를 풀어헤쳤고 온몸이 피투성이다. 얼굴은 해골처럼 말랐는데 손에 알을 다 떼어 먹은 옥수수를 들고 있다. 그런데 웃는다.

    “순미야 좋니?”

    다가선 어머니가 빈 옥수수를 내밀었다.

    “옥수수가 맛있다. 먹어봐.”

    “엄마, 왜 이래?”

    정순미가 몸서리를 치면서 물러났다.

    “당신이 우리 엄마야?”

    그때 윤기철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미, 순미, 다 왔다. 저기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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