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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秘史 2013~2017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김정은, 2년 전까지 新남침로 무인기 정찰

  •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 ● 3~5일 내 부산 점령 통일대전 침공로 점검
    ● 서해 기습 상륙, 김포·광덕산 루트로 수도권 포위 공격
    ● 천안함·연평도 공격 통해 상륙작전 체계 완성
    ● 박근혜, 한미일 안보공조로 연합방위체계 강화
12월 12일 한 군인이 강원도 철원의 철거된 감시초소에서 북측을 바라보고 있다.

12월 12일 한 군인이 강원도 철원의 철거된 감시초소에서 북측을 바라보고 있다.

2014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을 내놓았다. 보수진영은 북한 급변사태가 임박한 신호로 해석했으나 진보진영은 실제와 동떨어진 흡수통일 추진으로 간주했다. 그해 5월 남재준 국가정보원장과 김장수 대통령안보실장이 교체됐다.


통일대전 실체 밝혀낸 남재준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남재준 국정원장은 정보 수장으로 재직하면서 북한의 군사 준비 태세를 재평가하는 작업에 나섰다. ‘우리식 전면전’을 표방한 ‘통일대전’과 ‘3일 단기속결전’으로 이름 붙은 북한의 작전계획을 밝혀냈다. 

북한은 김일성 시대부터 핵전쟁을 준비했다. 1950년 12월 21일 김일성은 미군에 패퇴해 자강도 만포시 별오리에 은거했다. 김일성은 당시 ‘현 정세와 당면 임무’라는 연설을 통해 “미군 개입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못했다”고 고백했다. 이 연설은 김일성 최후의 자아비판이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미국의 군사력 증원과 지원을 차단하고 휴전선 이남을 점령하기 위한 속도전 전략 개발에 매진했다. 1960~70년대 핵개발 기초를 쌓았으며,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핵연료 주기를 완성했다. 2000년대에 접어들어 1~2개의 초보적 핵무기 생산능력을 보유했다. 서부·동부전선에서 동시에 공격에 나설 수 있도록 전차·기계화·포병 6개 군단, 항공기 800여 대, 특수전부대 10만 명, 공격 함정 및 잠수함 등의 전력을 구비했다. 기습 공격을 위해 평양-원산을 잇는 선 이남에 전력의 70%를 전진 배치했다. 

판가리 전략에서 ‘판가리’는 ‘생사존망을 결판낸다’는 뜻의 북한 말이다. ‘사생결단(死生決斷)식 전쟁으로 한국을 강점한다’는 게 김정일의 전쟁 철학이자 남침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노동신문과 국내외 언론을 통해 일부 알려져 있다가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망명 시 가져온 김정일의 연설 녹취록을 통해 전모가 드러났다.




김정일 : 판가리 전략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내가 주석께서 돌아가신 후 경제 부문을 경제 관료에게 전적으로 위임하고, 조선반도의 판세를 단번에 뒤집을 전략에 매진하고 있는데(…) 경제 분야의 성과가 매우 미흡하다(…) 군사 분야에 대한 검열도 강화하겠다.” 

이 녹취록은 김정일이 1990년대 중반 김일성대에서 군·당·정(軍黨政) 핵심 간부에게 행한 연설 내용을 담은 것이다. 김정일은 한미 연합전력에 대한 북한군의 구조적 열세를 단번에 뒤집고자 기존의 재래전 위주 전력 구조를 핵무기·기계화부대·특수전 위주 전략으로 완전히 개편했으며, 기습을 위해 군사력을 극단적으로 전진 배치했다.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은 2014년 군(軍)지휘관 회의에서 “2015년 조선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며 “통일대전을 위해 전략 물자를 최대한 마련하고 언제나 전쟁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하라”고 말했다. 김정은은 “3년 이내에 조국통일전쟁을 성사시킬 것”을 지시했으며, 김정일이 완성하지 못한 반(反)공격작전에 서명(2012년 8월)했다. 

반공격작전은 국군과 미군이 북침해 대응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용어다. 북한의 전사(戰史)는 6·25전쟁도 반공격작전으로 서술한다.


김정은, 남침로 따라 무인기 침투시켜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북한군은 2014년 3월~2017년 5월 11회에 걸쳐 통일대전의 주요 침공로를 무인기로 정찰했다. 무인기 정찰은 서해 5도와 문산, 화천, 동해안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2017년 5월 북한 금강에서 이륙해 경북 성주의 사드 기지를 촬영한 무인기 이동로와 2014년 4월 삼척에서 발견된 무인기 이동로는 통일대전의 핵심 남침로다. 

필자는 2014년 정보 당국에 북한의 통일대전에 관한 분석 보고서(북한 무인기 침투 도발로 드러난 김정은 통일대전의 실체, 2014년 5월)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북한군이 개전 3~5일 내 한국 강점을 목표로 한 강력한 속도전을 치밀하게 준비해왔으며, 무인기 침투 경로와 6·25 전사를 분석한 결과, 통일대전 핵심 침공로를 철원 축선의 광덕산 일대와 문산 축선의 김포 지역으로 제시했다. 

강원 삼척시에서 추락 후 발견된 무인기(2014년 4월 6일)의 비행 경로인 광덕산 지역은 3군과 1군(3군과 1군은 올해 1월 1일 지상작전사령부로 통합됐다)의 전투지경선이자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지역이다. 북한군이 광덕산 공략 후 가평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서부전선의 한미연합군과 충돌하지 않고 중부내륙고속도로를 통해 부산을 조기에 점령할 수 있다. 

2014년 경기 파주시(3월 24일)와 백령도(3월 31일)에서 추락 후 발견된 무인기는 북한군의 서해안 상륙작전과 연관돼 있다. 북한군은 1990년대부터 방어부대인 4군단에 상륙작전 임무를 부여해 훈련해왔다. 특수전 부대를 공기부양정·고속상륙정 등으로 실어 날라 인천과 남양만 일대에 상륙시켜 문산·김포 축선으로 남하한 북한군 2군단의 기계화·경보병 부대와 연결하는 대연합훈련을 반복해왔다. 

한국의 도로망은 6·25전쟁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확충돼 있다. 중부내륙고속도로는 북한군이 경기·강원의 전방 방어체계를 1~2일 내에 돌파하는 데 성공한다면 경북 상주를 거쳐 부산으로 가는 최단거리 남침로다. 북한군은 이러한 남침 작전을 성공시키고자 전쟁 개시 이전에 특수전 부대와 경보병 부대를 후방에 침투시켜 주요 시설을 장악함으로써 국군의 대응을 무력화하는 동시에 미군의 증원과 일본의 지원은 핵미사일로 차단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광덕산 축선 : 통일대전 부산 점령 침공로

광덕산 축선 : 통일대전 부산 점령 침공로 [조선중앙TV캡처]

광덕산 축선 : 통일대전 부산 점령 침공로 [조선중앙TV캡처]

6·25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 2사단은 춘천을 조기 점령한 후 경춘국도를 통해 서울 북방의 국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김종오 대령이 이끈 국군 6사단 7연대가 북한군 2사단을 춘천에서 격파했다. 춘천에서 거둔 승리를 기반으로 국군은 한강 이남으로 철수해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반면 중공군은 4월 공세(1951년 4월 22~30일) 때 광덕산 산악 접근로를 통해 가평을 점령하고 경춘가도를 통해 서울 측방까지 성공적으로 접근했다. 당시 한미연합군과 중공군이 ‘캔사스 라인’을 두고 대치한 것은 현재 휴전선의 대치 상황과 유사하다. 중공군은 4월 공세를 통해 한반도를 석권하려 했으며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의 경계, 즉 미군 1군단과 9군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이자 한국군 6사단 방어지역인 광덕산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중공군은 4월 22일 국군 6사단 방어지역을 공격해 2시간 만에 돌파하고 광덕산 줄기를 따라 병력을 이동했다. 4월 26일 가평을 탈취하고 경춘국도를 따라 서울의 측방으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군 2사단이 양수리 북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했다. 중공군은 50㎞ 산악 강행군으로 인한 피로와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서울을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김정일이 공들인 광덕산 축선

2010년 1월 조선중앙TV가 방영한 105 땅크사단 기동훈련 [조선중앙TV캡처]

2010년 1월 조선중앙TV가 방영한 105 땅크사단 기동훈련 [조선중앙TV캡처]

강원 철원군 오성산 일대는 휴전 직전 한미연합군과 북한군·중공군이 치열한 다툼을 벌인 곳이다. 백마고지, 아이스크림고지, 김일성고지 등에서 혈전이 벌어졌다. 6·25전쟁이 끝난 후 북한군은 오성산 지역을 완전히 요새화했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북한군 최고사령관에 취임하자마자 통일대전의 작전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1998년 8월 대포동미사일을 발사했다. 그해 9월 5일에는 2012년까지 북한을 핵무장한 강성대국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국방위원장에 재취임(1998년 9월 5일)했다. 김정일은 국방위원장 재취임 전인 1996년 3월과 1998년 8월, 취임 후인 11월 오성산을 방문했다. 김정일의 잦은 오성산 방문은 북한 무인기가 침투한 철원 축선의 광덕산 지역 및 화천 축선과 관련이 있다. 

북한군이 준비해온 통일대전이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2010년이다. 그해 1월 북한 조선중앙TV가 김정일·김정은이 함께 참관한 ‘105 땅크사단’의 기동훈련 모습을 보도했다. 이 영상자료를 통해 통일대전의 침공로가 서부전선의 경부고속도로가 아니라 동부전선의 중앙고속도로임이 드러났다. 또한 도하(渡河) 능력을 갖춘 PT-76전차가 북한의 땅크 및 기계화부대에 배치돼 있음이 확인됐다. 이렇듯 북한은 통일대전의 남침로로 철원 축선의 광덕산 지역에서 이어진 중부내륙고속도로와 화천 축선에서 이어지는 중앙고속도로를 선정했다. 

김정은은 2013년 6월 2일 중부전선 오성산의 까칠봉 초소를 시찰했다. 통일대전에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또다시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난해 남북이 맺은 9·19군사합의에 따라 20개 GP가 시범 철수됐다. 남북은 시범 철거 대상 GP를 각각 11곳 선정했지만, 역사적 의미 등을 고려해 각각 1곳씩 남기기로 합의했다. 남측은 369GP, 북측은 가칠봉GP를 남겼다. 

국군의 GP는 기계화부대 기동을 막는 최초의 장애물이자 방어 거점이다. 전시에 북한군 민경부대는 국군 GP를 제거해 기계화부대의 기동로를 확보해야 한다. 그런데 군통수권자의 지시에 따라 국군이 스스로 최전방 방어 거점을 허무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북한군의 통일대전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되는지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김포축선 : 통일대전의 서부전선 침공로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6·25전쟁 때 개성 축선을 공격한 북한군 6사단은 옹진반도의 국군 1사단 17연대와 개성의 12연대를 격파한 후 김포반도를 거쳐 7월 3일 인천을 점령했다. 낙동강 전선의 영웅 윌튼 워커 장군은 북한군 6사단의 서해안 기동과 5사단의 동해안 기동이 낙동강 방어선의 최대 위협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통일대전에서 북한군이 김포반도 지역을 핵심 침공로로 선정한 것은 6·25전쟁 때의 초기 전투에서 동·서해안을 성공적으로 공격한 북한군 5사단과 6사단의 전례를 반영한 것이다. 특히 한국의 도로망은 6·25전쟁 때와 비교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수도권 방어망을 3일 내 돌파하고 서해안과 동해안 축선을 통해 5일 이내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시나리오는 결코 허황된 것이 아니다.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도발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평시에 잠수함과 해안갱도 포병을 동원해 국군 함정과 해병대, 민간인 지역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과거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1968년 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1974년 8월 15일), 미얀마 아웅산 테러(1983년 10월 1일)의 주목표는 대통령 암살이었다. KAL기 폭파(1987년 11월 7일) 역시 국제선 여객기에 대한 테러 공작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주체는 정규군이 아닌 특수전 요원 혹은 공작원이었다. 

6·25전쟁 직후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남북 간 교전 상황을 제외하면 북한의 대남도발사(對南挑發史)에서 북한군 정규군이 국군이나 민간인을 직접 공격한 사례는 없다. 북한군은 6·25전쟁 개전 초기에도 옹진반도의 국군 수도사단 17연대에 대한 제한적인 공격만 했을 뿐 옹진반도 지역과 서해의 섬들을 점령하지 않았다. 전시의 도서 점령은 안정화 작전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군이 국지 도발을 목적으로 천안함·연평도를 공격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천안함·연평도를 공격한 까닭은 뭘까. 

이명박 정부는 천안함·연평도 도발을 대청해전의 보복, 북방한계선(NLL) 무력화 시도, 대북 강경책에 대한 보복 등이 목적이라고 봤다. 또한 군으로 하여금 전면 남침이 아닌 국지 도발과 급변사태에 집중해 대비하도록 했다. 이를 교정한 것이 박근혜 정부의 전면전 대비태세 강화 조치(2013년 12월 13일)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천안함·연평도 공격은 국지 도발이 아니라 북한군의 서해안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화력 계획과 잠수함 작전체계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서해안에 상륙한 병력은 김포·문산을 통해 남침한 주력 부대와 연계해 평택 지역에서 한미연합군을 공격한다. 이를 위해 북한군은 문산과 서해 5도 일대를 무인기를 이용해 정찰한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동해안 상륙작전을 위한 잠수함 작전체계를 완성했다. 이후 서해에서도 잠수함 작전체계를 구축했다. 전시에 서해5도 지역을 해안포로 통제하고 국군의 해상전력을 잠수함으로 격침한다는 게 천안함·연평도 공격이 가진 함의다. 쉽게 말해 북한 해상 침투전력의 서해 이동과 관련된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 북한군의 이 같은 서해 작전은 중국 해군의 서해 봉쇄 능력을 뒷배로 삼고 있다.


천안함·연평도 이후 강화된 한미연합 방위체계

김정일은 수시로 기계화부대를 방문해 통일대전의 추진을 독려했으며 사망(2011년 12월) 직전인 2011년 9월 김포지역을 겨냥한 육해공군의 합동훈련을 김정은과 함께 참관했다. 이 참관 모습은 김정일의 남침전쟁에 대한 의지와 이를 승계한 김정은의 각오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또한 김정일·김정은 부자는 연평도 포격 직전 4군단을 방문한 바 있다. 

이렇듯 천안함·연평도 공격은 서해안 상륙작전의 실현 가능성을 점검한 도발이었다. 2012년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2013년 2월 13일 핵실험, 2월 23일 항공 및 반(反)항공군과 제630대연합부대의 비행훈련, 3월 8일 우리식 전면전 발표는 통일대전 전략이 완성 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했다. 그러고 나서 북한은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무인기 침투를 통해 통일대전의 핵심 침공로를 정찰했다. 

북한군의 천안함·연평도 도발은 이명박 정부의 국방정책과 한미연합 방위체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국방 또한 경영의 관점에서 바라봤다. 국방비 절감 등 효율성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천안함·연평도 도발 이후 전작권 전환 연기, 상부구조 개편, 국방산업 선진화 전략 등 국방분야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여권 일부와 야권은 이를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라고 지적했다.


박근혜, 국가안보실·국방부 질타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이명박 정부의 이러한 정책 변화는 2012년 1월 발표된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새 국방전략과 맞물리면서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워싱턴은 중동·아시아 2개 전쟁 동시 수행 전략을 포기하되 중국 견제를 위해 아시아·태평양의 미군 전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해 누적된 재정적자를 해소하고자 국방비를 대규모로 삭감하면서도 주한미군 규모에는 변화를 주지 않았다. 한미는 2012년 4월 17일로 예정된 전작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 1일로 연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무인기 침투와 관련해 “북한제 추정 무인기가 우리나라를 전(全)방위로 정찰한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 군 당국이 관련 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방공망 및 지상 정찰(감시)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관계 수석은 국방부와 함께 면밀히 검토해 이른 시일 내에 (대비책을) 보고하라”(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 2014년 4월 7일)면서 안보 수뇌부를 질타했다. 

한미 군사 당국은 북한의 무인기 침투 대응 조치로서 연합방위 능력 강화에 나섰다. 국방부는 “북한이 2014년 초 2015년을 통일대전 완성의 해”로 선포했으며 “동계훈련 기간 전면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군사 당국은 포병화력과 전략미사일 능력 강화에 나섰으며 군복무 기간 축소 계획을 보류했다. 

한국과 미국은 제46차 한미안보협의회를 통해 2015년 12월 1일로 조정된 전작권 전환 시기를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으로 재조정했다. 전작권 전환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한 것이다. 한미는 2015년 6월 한반도 유사시 적용되는 새로운 작전계획(작계 5015)에 서명했으며, 그해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 때는 북한의 핵·미사일,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의 공격 능력을 제거하는 선제타격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사한 대남 공세에 180도 다른 朴·文 행보

박근혜 정부는 전작권 전환을 유보하고 전투준비 태세를 강화했으며 한미일 안보공조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또한 포병화력과 전략미사일 능력을 확충하고자 3축 체계(킬체인, 한국형미사일방어, 대량응징보복) 구축에 나섰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전작권 조기 전환을 추진하는 동시에 북한과 9·19군사합의를 맺었다. 전투 태세를 스스로 약화시켰으며 북한의 한미연합훈련 중단 요구를 받아들였다. 3축 체계는 약화시켰으며 한미일 공조는 일본과의 외교 갈등으로 유명무실해졌다. 

박근혜 정부가 밝혀낸 김정은의 통일대전은 문재인 정부의 전략기조인 남북 간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조속한 전작권 환수와 9·19군사합의에 따른 남북 간 지상·해상·공중 적대행위 중지, 비무장지대 내 GP철수, 공동경비구역(JSA) 비무장화, 공동 유해 발굴, 한강하구 공동 이용 등의 군사조치는 방어체계를 스스로 허무는 행위다.


文정부 9·19군사합의는 남침로 열어준 것
홍성민
● 1961년 서울 출생
● 육사 41기
● 국방대학원 국제관계학 석사
● 前 국군정보사령부대북분석관
● 조성태(前 국방장관) 의원보좌관, 디앤디 포커스 발행인
● 現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
● 저서 : ‘북한의 통일대전과대응책’ 등 비공개안보정책서, ‘이명박 정부의국방개혁안’




신동아 2019년 4월호

홍성민 안보정책네트웍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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