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본 사람만 아는 피 튀기는 티케팅 ‘피케팅’
워너원 콘서트 티켓 1500만 원, BTS 무료 공연 티켓 150만 원
진화하는 매크로 프로그램 ‘플미충’ 양산, 소속사는 ‘나 몰라라’
정부 늑장 대응, 입법 발의안 대부분 타당성 부족
대형 엔터테인먼트가 팬·관람객 의식 개선 촉구해야
예매 개시 후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티켓 중고 거래 사이트에는 ‘에릭의 팬미팅 암표를 판다’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격은 순식간에 30만 원까지 치솟았다. 당황한 에릭은 방송에서 “이 정도면 표를 어떻게 사요? 이건 너무 심한데?”라며 팬들에게 되물었다. 오죽하면 ‘피케팅(피 튀기다+티케팅)’이란 신조어가 생겨났을까.
19년 넘게 신화를 지지해온 팬 박소은(37) 씨도 끝내 에릭 팬미팅 표를 구하지 못했다. 박씨는 “이참에 플미충(프리미엄+충(벌레))을 강력하게 단속해주면 좋겠다”며 불편한 속내를 밝혔다. 플미충은 티켓에 높은 가격(프리미엄)을 붙여 되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동안 플미충의 인터넷 거래 화면을 여러 장 캡처해뒀다는 박씨는 “소속사 측에 아무리 문제 제기를 해도 개선되는 게 없다. 소속사가 강력 대응하지 않고서는 개선되기 힘든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이 단 몇 초 만에 티켓을 대량 구매할 수 있는 건 온라인 자동화 프로그램 ‘매크로(macro)’ 덕분이다. 매크로는 특정 명령을 반복 입력하는 자동 프로그램으로 공연 일시와 좌석, 결제 방식 등 각 단계에 따른 입력을 자동으로 한 번에 처리해 입력 시간을 크게 단축시킨다. 하나하나 마우스를 움직여 예매하는 일반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게, 그것도 대량으로 좌석을 선점할 수 있다. 최근 정치권에서 논란이 된 ‘드루킹 댓글 공작 사건’에도 바로 이 매크로 프로그램이 사용됐다.
‘플미충’ 암표 거래 실태
플미충의 암표 거래는 주로 SNS(소셜미디어)와 티켓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이뤄진다. 지난해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실 등에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5만5000원짜리 아이돌 그룹 ‘트와이스’ 팬미팅 티켓은 90만 원에, 11만 원이던 ‘세븐틴’ 콘서트 티켓은 150만 원에 거래됐다. 암표 가격은 날이 갈수록 상식을 벗어나 더욱 높아지고 있다. 올 초 열린 ‘워너원’ 마지막 콘서트 티켓은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호가가 1500만 원까지 치솟았다. 당시 가장 비싼 좌석(스탠딩R석·지정석R석)은 11만9000원이었지만, 암표 사이트에서는 1000만 원이 넘는 표가 수두룩했다. 이 표들이 실제 얼마에 거래됐는지는 확인하기 힘들다.공연기획사 한 관계자는 “중국인 등 ‘큰손’으로 불리는 한류 팬들을 겨냥해 암표상들이 호가를 높게 부르곤 하는데, 실제로 1000만 원 넘은 가격에 거래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며 “해외 팬은 물론 국내 팬들도 티켓을 구하지 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100만~200만 원을 주고 공연을 보는 경우가 꽤 있다”고 설명했다.
온라인 암표 거래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나 스타 배우가 출연하는 뮤지컬, 국민적 관심을 모으는 대형 스포츠 경기 등에서 주로 이뤄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팬미팅을 비롯한 영화시사회, 심지어 무료 입장 공연에서도 암표가 기승을 부린다. 지난해 무료로 배포된 ‘2018 대중문화예술상’ 티켓은 방탄소년단(BTS)이 출연한다는 이유로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150만 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플미충의 암표 거래는 일부가 아닌 공연계 전반에 걸쳐 일어나고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표한 ‘2019년 공연계 6대 키워드’에도 ‘플미충’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업계 내에서 자체 개선 작업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다. 대표적 티켓 거래 사이트인 ‘중고나라’는 정상 판매 가격보다 높거나 가격을 표시하지 않은 티켓이 적발될 경우 해당 거래 게시물을 삭제하고 판매자에게 30일 동안 활동 정지 처분을 내리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암표 거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매크로 프로그램 1만5000원에 구매 가능
매크로 프로그램 판매자의 홍보글.
보안문자를 넣어야 예매가 가능하게끔 대책을 세워도 이를 우회하는 새로운 매크로 프로그램은 계속 출시된다. 공연 예매 사이트 양식에 맞춰 제작된 매크로 프로그램은 일반인도 인터넷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 3월 4일 기자는 SNS를 통해 한 매크로 프로그램 판매자와 접촉했다. 이 판매자는 “시중에 나온 매크로 프로그램 중 가장 빠르다”며 구매 가격으로 1만5000원을 불렀다. 매크로 프로그램과 함께 사용법을 찍은 동영상을 e메일이나 SNS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 프로그램으로 아이돌 그룹 워너원 멤버 하성윤 팬미팅 티케팅에 성공한 사례가 있다”며 “‘이선좌(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팝업창이 뜨면 자동으로 인터넷 페이지가 새로고침 되고 영구적으로도 사용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매크로 프로그램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이들이 늘어나는 만큼 인터파크나 예스24, 옥션 같은 티켓 예매처는 매크로 프로그램 사용을 제한하는 페널티 규정을 두고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티켓을 구매한 것으로 추정되는 예매자에게는 소명의 기회를 주고, 사유가 합당하지 않을 시에는 예매표 취소 절차를 밟는다”며 “다만 공연기획사나 티켓 예매처가 단독적으로 제재할 수는 없고, 반드시 소속사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소속사가 무통장 입금 막지 않는 이유
티켓 예매가 빨리 마감되는 공연일수록 이용자들은 구매 지불 방식으로 ‘무통장 입금’을 선호한다. 신용카드는 일일이 카드번호와 유효기간, 비밀번호 등을 입력해야 하고, 모바일 간편결제 서비스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느라 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우선 좌석 표를 잡아둔 다음 대금은 차후에 계좌 이체로 지불하는 것이 빠르다는 판단이다. 암표상들 또한 무통장 입금을 택한 뒤 대개 하루 안에 웃돈을 붙여 표를 팔고,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해당 좌석 표는 자동 취소되도록 놔둔다. 결제 방식에서 무통장 입금을 막는 등 강력한 대책을 강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소속사가 이를 기피하고 있다.한 아이돌 소속사 관계자는 “콘서트 날짜에 맞춰 한국 여행을 오는 해외 팬들이 여행사를 통해 공연 티켓을 확보하는데, 해외 팬들로부터 미리 티켓 값을 받은 여행사가 이를 무통장 입금으로 지불한다. 해외 팬들이 아이돌 공연 관객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암표상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무통장 입금을 막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이라고 털어놓았다.
곪을 대로 곪은 암표 거래 문제
기자가 매크로 프로그램 판매자와 오픈카톡 채팅방에서 나눈 대화 내용.
업계 관계자들은 온라인 암표 문제가 이미 수년 전부터 지속됐다는 점에서 정부의 늑장 대응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동안 일부 소속사들이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했지만 이렇다 할만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온라인 티케팅은 공연기획사와 티켓 예매처의 고유 업무라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한 온라인 암표 실태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주장을 펴왔다.
한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1월 초,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는 티켓 예매처와 공연기획사 관계자들을 불러 문체부 서울사무소에서 ‘온라인 암표매매 대응 합동회의’를 했다. 이날 현행 공연법을 개정해 별도 처벌 조항(1000만 원 이하 과태료 부과, 부정거래 적발 시 예매 취소 조치, 1인당 구매 티켓 수 제한 등)을 마련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였는데, 정작 매크로 프로그램 사용행위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다고 한다. 매크로 프로그램 사용을 금지할 것인지, 재판매 행위(온라인 암표 거래)를 금지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의견이 여전히 엇갈린 탓이다.
이에 대해 문체부 관계자는 “온라인상에서의 재판매 행위와 이용권 선점을 위한 행위를 규제해야 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매크로 프로그램은 물론 온라인 암표에 대한 개념조차 불분명해 무엇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에 대해 관계기관 간의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고 해명했다.
이처럼 정부가 암표 거래 문제에 대해 사태 파악도 하지 않고 있는 사이 온라인 예매로 인한 피해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아이돌 공연의 경우 예매 개시 후 표가 순식간에 매진돼 전석이 매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인 경우가 허다하다. 업계 관계자는 “플미충 암표상들은 인기가 좀 있다 싶은 공연은 일단 다 좌석을 잡아두는데, 팬덤 규모가 작은 아이돌의 경우에는 비싼 값에 암표가 나오면 잘 팔리지가 않는다. 결국 티켓의 80%가 취소표로 돌아올 때도 많다. 소속사 입장에서는 금전적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군다나 연예인 이미지를 생각해 어디 가서 문제 제기도 제대로 못 한다”고 털어놓았다.
타당성·실효성 떨어지는 의원안
법적 처벌 규정이 없다는 점도 온라인 암표상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다. 현행법상 공연장에서 암표를 팔다 적발되면 범칙금을 내야 하지만 온라인으로 거래하고 티켓을 우편으로 보낼 경우에는 마땅한 처벌 규정이 없다. 결국 암표상이나 암표를 구매한 관객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방법은 법안을 마련하는 것뿐이다.‘매크로 프로그램을 통한 티켓 구매를 금지하자’는 내용으로 발의된 법안은 현재 총 9건이다. 상습적 또는 영업 목적의 티켓에 웃돈을 붙여 판매하는 것을 규제하는 공연법 개정안, 매크로를 이용한 사재기·판매를 금지하는 경범죄 처벌법 개정안, 전자상거래에서 매크로를 금지하자는 전자상거래법 개정안, 재산상 이득을 위한 매크로 금지를 내용으로 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등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법안들이 대부분 실효성과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거세다.
지금껏 발의된 법안들은 크게 ‘매크로 프로그램 사용 금지’와 ‘재판매 행위 금지’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들 법안의 핵심은 티켓을 구하지 못한 개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암표를 구하는 것은 용인하되, 인터넷에서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한 사재기와 재판매는 규제하자는 것이다. 이마저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업계 자율적 규제 선행돼야”
그룹 ‘신화’ 멤버 에릭이 직접 자신의 팬미팅 티켓 예매에 도전하는 모습.
또한 이미 현행법으로 일정 부분 규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발의된 법안들이 ‘중복 규제’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해당 내용은 지난해 10월 한남대학교 과학기술법연구소가 발간한 학술지 ‘과학기술법연구’에 게재된 논문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티켓 등 이용권을 예매하는 행위의 가벌성 검토’에도 수록돼 있다. 매크로 프로그램 사용 규제가 정보통신망의 안전성 및 정보의 신뢰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면 기존 정보통신망법(제48조 제1항)의 ‘침해죄’를 적용하면 되고, 이용권 예매 시스템 제공자의 업무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형법상 ‘업무방해죄’를 적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논문은 ‘의원안이 벌칙 규정을 밝히고 있는 만큼 규제와 입법의 필요성에 대해 신중한 논의가 선행돼야 함에도 현행법의 적용 가능성은 물론, 해당 행위에 대한 규제의 필요성과 그 불법 정도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뤄졌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업계 관계자들은 사법적 개입 이전에 소속사와 공연기획사, 티켓 예매처의 자율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팬덤 규모가 큰 인기 아이돌일수록 소속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팬들이 온라인 암표를 사고팔지 않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온라인 암표 문제와 관련해 가장 발 빠르게 조치를 취한 곳은 가수 아이유의 소속사 카카오M이다. 카카오M은 지난해 10월 아이유 데뷔 10주년 기념 콘서트에서부터 부정 티켓 거래(▲매크로 프로그램을 통해 예매한 티켓 ▲티켓 거래 사이트에서 임의로 판매되는 티켓 ▲웃돈을 붙여 판매되는 개인 거래) 12건을 적발했다. 소속사는 이들에 대해 공식 팬클럽 영구 제명, 추후 팬클럽 모집과 유료 공연 티켓 구매 불가, 멜론 티켓 ID 1년간 이용 제한 조치를 내렸다. 소속사는 앞으로도 부정 티켓 판매를 수시로 모니터링해 불법 거래와 관련해 단호하게 대처할 방침이다.
인터넷 티케팅은 2000년대 들어 보편화됐다. 당시 활동하던 2세대 인기 아이돌 소속사들은 비싼 암표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를 소속 연예인을 ‘띄우는’ 마케팅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 한 관계자는 “‘5분 만에 전석 매진’ 하면 연예인 몸값이 더 올라간다는 생각에 암표상들의 불법행위를 일정 부분 방관한 게 사실이다. 대형 소속사들부터 나서 암표 거래 근절을 위한 캠페인을 펼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팬과 관람객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김승주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암표상들이 재판매를 통해 부당한 이익을 추구할수록 소속사와 아티스트, 공연기획사, 티켓 예매처들은 재산권을 침해당하게 된다. 정부의 강력한 단속과 함께 공연 업계의 자정 노력, 팬과 관람객들의 의식 개선 등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