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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유물 3점이 ‘보물’ 된 사연

고분 발굴로 밝혀진 찬란한 가야 문화

  • 이광표 서원대 문화기술산업학과 교수 kpleedonga@hanmail.net

가야 유물 3점이 ‘보물’ 된 사연

  • 문화재청은 3월 초 금동관, 청동 칠두령, 철제 갑옷 등 가야시대 유물 3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모두 고대 가야왕국의 흔적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가야 유물 3건이 동시에 보물로 지정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경남 김해시는 가야사 복원 5대 사업에 올해 565억 원을 투입한다고 2월 7일 밝혔다. 사진은 대성동고분군. [김해시 제공]

경남 김해시는 가야사 복원 5대 사업에 올해 565억 원을 투입한다고 2월 7일 밝혔다. 사진은 대성동고분군. [김해시 제공]

역사나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최근 문화재청의 가야 유물 보물 지정 소식을 듣고 모두 한마디씩 했다. “아, 가야 유물이 한꺼번에 3점씩이나” “저 금동관, 모양이 참 특이하다. 신라 금관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등이다. 우리나라 국가 지정문화재 가운데 보물로 지정된 것이 모두 2020건. 이 가운데 ‘보물 3건’을 추가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그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이 아니라 가야 유물이기 때문이다.


왜 가야인가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562년까지 한반도 남쪽 낙동강 유역에 존재했던 연맹 왕국이다. 경남 김해의 금관가야, 경북 고령의 대가야, 경남 함안의 아라가야, 경남 고성의 소가야, 경북 성주의 성산가야, 경남 진주의 고령가야 등 여섯 나라가 있었다(12개 이상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가야는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중앙집권형 고대국가로 이르지 못한 채 신라에 통합됐다. 그렇기에 가야 역사는 600년 동안 이어졌음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 가려 있었고 ‘사국시대’가 아닌 ‘삼국시대+가야’로 존재해야 했다. 

이런 홀대 속에서 가야사(史)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삼국에 비해 척박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가야의 영역에 관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 등에 의거해 그동안 우리는 경남 지역과 경북 일부를 가야의 영역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발굴 성과가 축적되면서 낙동강 동부(부산 양산 창녕), 섬진강 서쪽(광양 순천), 전라도 동부(무주 진안 장수)까지도 가야의 영역이었음이 확인됐다. 이 지역들에서 가야 양식의 고분과 유물이 지속적으로 발견된 것이다. 가야라는 역사의 실체를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일깨워주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는 현재 가야사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한 가야사 복원을 위해 현재 민관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가야 유물 3점의 보물 지정은 이 같은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모든 길은 고분으로 통한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유물 3건은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보물 제2018호), ‘부산 복천동 22호분 출토 청동 칠두령’(보물 제2019호), ‘부산 복천동 38호분 출토 철제갑옷 일괄’(보물 제2020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가야만의 독특한 유물이라는 점, 모두 고분에서 출토됐다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리 가야 관련 자료는 철저하게 고고학적 발굴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문헌 기록이 거의 없는 데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교 사찰이나 석탑 등의 건축문화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야의 실체를 이해하려면 고분 발굴이 가장 중요하다. 

가야 땅에는 크고 작은 고분이 도처에 산재한다. 그 고분엔 가야 사람의 인골과 그들이 사용했던 물건이 묻혀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가야 고분은 도굴된 것이 상당수다. 식민지 시절, 일제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증거를 찾고자 가야 고분 발굴에 열을 올렸다. 그 가운데는 도굴에 가까운 발굴도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1918~1919년 경남 창녕 지역의 대형 봉토분 9기를 발굴했다. 당시 마차 20대, 화차 2대 분량의 유물이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총독부는 2기를 제외하곤 발굴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 상당수 유물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게 됐다. 대부분 일본으로 빼돌리거나 악덕 골동상에게 넘겼을 것이다. 

광복이 된 뒤에야 우리 손으로 발굴이 시작됐다. 특히 1980년대 전후 금관가야 고분인 경남 김해 대성동 고분군, 대가야 고분인 경북 고령 지산동 고분군, 아라가야 고분인 경남 함안 도항리 고분군 등 대형 고분을 중심으로 발굴이 활성화됐다. 1990년대 이후엔 대형 고분뿐 아니라 주변의 작은 고분에 대한 정밀조사까지 이뤄져 가야에 관한 많은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가야 고분에서는 철제 무기류, 토기류, 금관 금동관, 장신구류, 마구류(馬具類) 등 다양한 유물과 가야인의 인골이 출토됐다.


순장과 가야인의 일상

가야 고분에서는 놀랍게도 순장(殉葬) 흔적이 다수 발견됐다. 신라 황남대총에서도 순장 흔적이 보이지만 가야의 순장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 금관가야의 김해 대성동 고분군, 아라가야의 함안 도항리 고분군,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모두 순장 인골이 발견됐다. 

대가야의 왕족들이 묻힌 고령 지산동 고분군 44호분은 36명의 순장 인골이 나온 국내 최대 규모 순장 고분이다. 44호분은 중앙의 대형 석실(石室) 3개와 그 주변의 소형 석곽(石槨·돌덧널무덤) 32개로 이뤄져 있다. 석실 가운데 가장 큰 것에는 주인공이 묻혔고 그 옆의 작은 석실 2개에는 껴묻거리(부장품)를 넣었다. 석곽 32개는 주인공을 호위하듯 빙 둘러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했다. 이 35개의 무덤을 하나의 커다란 봉분으로 덮어놓은 것이 바로 지산동 44호분이다.
 
지산동 44호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인공이 묻힌 석실에서 2명, 나머지 두 개의 석실에서 각 한 명, 32개의 석곽에서 한 명씩 순장 인골이 발견됐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순장자가 하인이나 노비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층민부터 무사, 시녀, 창고지기, 마부 등 지배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이 왕족 무덤에 순장됐다. 

순장 고분은 가야인의 일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2007년 발굴된 창녕 송현동 15호분이 그런 경우다. 여기에서는 4구의 순장 인골이 나왔다. 무덤의 봉분 지름이 20m에 달하는 것을 보아 무덤 주인공은 비화가야의 최고 권력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굴꾼이 휘젓고 지나간 뒤라서 주인공의 인골은 확인할 수 없었다. 

발굴을 실시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 후 2년 동안 컴퓨터 단층촬영, 3차원 정밀 스캔, DNA 검사,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을 통해 인골을 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순장자는 남자 2명, 여자 2명이었다. 사망 연대는 6세기 초. 여성 한 명은 16세 정도, 나머지 세 명은 20대였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잡곡보다는 쌀, 보리, 육류 등을 섭취해 영양 상태가 양호했다. 외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사가 아니라 중독 또는 질식에 의해 사망시킨 뒤 순장한 것으로 추정했다. 

16세 소녀는 금동 귀고리를 착용한 채 발굴됐다. 키가 152cm였고 사랑니가 아직 턱 속에 남아 있었다. 뒤통수 뼈에서 다공성 뼈과다증이 나타난 것으로 보아 빈혈을 앓았으며 정강이와 종아리뼈 상태로 보아 무릎을 많이 꿇는 생활을 했음이 드러났다. 앞니에 반복적으로 끊은 흔적이 남아 있어 무언가를 만드는 작업을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소녀는 노예나 전쟁 포로가 아니라 무덤 주인공의 시녀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모시던 권력자가 세상을 떠나자 강제로 죽임을 당한 뒤 함께 묻힌 것이다. 연구소는 16세 가야 소녀의 인체를 복원해 모형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토기에 담긴 가야인의 내면

경남 창원시에서 출토된 집 모양 토기.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 가형토기 가운데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로 평가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경남 창원시에서 출토된 집 모양 토기. 지금까지 발견된 가야 가형토기 가운데는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로 평가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가야 고분에서는 발굴을 할 때마다 토기가 대량으로 출토된다. 언뜻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토기와 가야 토기 사이에 큰 차이가 없지만 유심히 관찰하면 가야 토기만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 오리, 배, 집, 수레바퀴, 말 탄 사람, 짚신, 새, 등잔, 뿔 모양처럼 특정 대상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상형(象形) 토기라고 하는데, 대상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런 형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토기와 확연이 구분되는 점이다. 이 상형토기는 가야인의 내면과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가야의 오리 모양 토기. 제례(祭禮) 용구이거나 물과 관계 있는 의식 용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가야의 오리 모양 토기. 제례(祭禮) 용구이거나 물과 관계 있는 의식 용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대표적인 건 오리 모양 토기다. 가야 사람들은 오리를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무사히 인도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리 모양 토기를 만들어 무덤에 묻은 것이다. 국보 275호 토기 기마인물형 뿔잔도 마찬가지다. 죽은 자가 말을 타고 편안하게 저승에 가길 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게 죽은 자가 배나 수레를 타고 또는 짚신을 신고 무사히 저 천상으로 올라가 영생을 누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가야인들은 열심히 토기를 만들었다. 

집 모양 토기도 있다. 이것은 곡식을 담는 창고를 형상화한 것으로, 저승에서도 풍요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고양이가 지붕에 올라가 쥐를 노려보는 모습의 토기도 있다. 이 토기는 일상을 포착해 기원을 표현한 것으로 가야인의 익살과 낭만을 기막히게 보여준다. 

이렇듯 가야인들은 일상의 모습과 생활용품을 토기의 형태로 구현했고, 거기에 자신의 종교적 심성까지 담았다. 가야 토기를 보면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이 넘치고 자유분방함과 상상력이 돋보인다. 가야 토기가 일본의 스에키(須惠器)에 영향을 미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 (왼쪽)과 국보 87호인 신라 금관.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 (왼쪽)과 국보 87호인 신라 금관.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유물들을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 이들은 모두 가야 고분 출토 유물이다. 보물 2018호 가야 금동관(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1978년 고령 지산동 32호분에서 발굴됐다. 가야 시대 금동관은 출토된 사례가 매우 적어 이 금동관의 가치는 매우 크다. 

이것은 얇은 동판을 두드려 판을 만든 뒤 그 위에 도금을 해 금동관 모습으로 꾸몄다. 그런데 이 금동관은 우리가 흔히 봐온 신라, 백제의 금관 금동관과 모양이 확연히 다르다.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금동관 형태인 ‘출(出)’자 형식을 탈피했다. 정면 중앙을 넓적한 판으로 구성하고 거기 X자형 문양을 점선으로 새겨 넣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하고 우직하다. 독특하고 이국적이며 또 힘이 넘친다. 단순함과 절제 속에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을 보는 듯하다. 

가야의 금관, 금동관은 신라 금관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더욱 두드러진다. 신라 금관은 화려하고 고풍스럽다. 하지만 가야의 금관, 금동관은 단순 명쾌하다.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국보 138호 가야 금관을 봐도 장식이 적고 단순하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발견할 수 없는 가야만의 독특한 미감이라고 할 수 있다.


‘철의 왕국’ 면모 보여주는 철제 갑옷 세트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마갑총 말 갑옷(왼쪽)과 보물 제2020호 부산 복천동 38호분 출토 철제 갑옷.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문화재청 제공]

경남 함안 말이산 고분군 내 마갑총 말 갑옷(왼쪽)과 보물 제2020호 부산 복천동 38호분 출토 철제 갑옷. [국립김해박물관 제공, 문화재청 제공]

‘철의 왕국’답게 가야 고분에서는 철제 투구, 철제 갑옷, 철제 말 갑옷 등 각종 철제 무기류가 대량 출토됐다. 이번에 보물 2020호로 지정된 4세기 철제 갑옷은 1995년 부산 복천동 36호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철제 갑옷은 재료의 특성상 부식으로 인해 원형을 파악하기 어려운데 이 유물은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이것은 투구, 목가리개, 갑옷이 완벽한 세트로 구성돼 있어 가야 철제 갑옷의 전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만큼 학술적 가치가 크고 시기적으로도 가장 일러 고대 갑옷의 편년(編年)에 기준이 되는 유물이다. 

가야의 철제 갑옷은 한반도 고대의 철제 갑옷 가운데 가장 견실하다. 가야의 철제 갑옷을 보면 비늘처럼 엮어 만든 비늘갑옷과 넓적한 철판을 연결해 만든 판갑옷이 있다. 판갑옷은 여러 장의 얇은 철판을 가죽으로 엮거나 못으로 고정해 만든다. 복천동 갑옷 또한 철판을 두드려 가늘고 길게 만든 뒤 부재에 구멍을 뚫어 가죽으로 연결해 머리나 신체의 굴곡에 맞췄다. 철을 노련하게 다루지 못하면 만들 수 없는 방식이다. 복천동 갑옷은 군데군데 보수해서 사용한 흔적까지 남아 있어 가야 군사의 생생한 생활상도 엿볼 수 있다. 귀중하고 흥미로운 갑옷이 아닐 수 없다. 

철제 갑옷과 투구가 무덤에서 나왔다는 건 이것들이 가야 수장의 중요한 위세품(威勢品) 즉 권력의 상징물이었음을 의미한다. 군사용 무기로서의 기능에 그치지 않고 갑옷을 무덤에 함께 묻음으로써 죽은 자의 권력을 과시한 것이다. 따라서 복천동 36호분 주인공은 당시 무인 계열의 상당한 권력자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철제 무기류 가운데에는 말이 착용했던 것도 있다. 1992년 함안 도항리 마갑총에서 국내 최초로 발굴된 철제 말갑옷(마갑·馬甲)이 대표적이다. 이 말갑옷은 1992년 아파트 공사 도중 주차장 부지에서 신문배달 소년에 의해 우연히 발견됐다. 공사장을 지나던 소년이 독특한 모양의 녹슨 쇳조각을 발견해 신문지국장에게 말했고 지국장이 이를 신고해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현재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긴급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온전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말갑옷은 쇠를 비늘처럼 잘라 연결한 찰갑이었다. 형태가 다른 쇳조각 450여 개를 연결해 길이 226~230㎝, 너비 43~48㎝의 갑옷으로 만들었다. 보호 부위에 따라 비늘 조각의 크기는 서로 달랐고 비늘의 연결 상태는 질서정연했다. 줄을 꿰는 구멍도 정교했다. 철의 나라, 아라가야의 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철제 유물이었다.


최고 수장급이 쓴 청동 칠두령

국보 143호인 청동기시대의 청동 방울(왼쪽)과 부산 복천동 22호분 출토 청동 칠두령.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제공]

국보 143호인 청동기시대의 청동 방울(왼쪽)과 부산 복천동 22호분 출토 청동 칠두령.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청 제공]

7개의 방울이 달린 청동 칠두령은 1980~1982년 부산 복천동 22호분 발굴 때 출토됐다. 팔두령(八頭鈴), 쌍두령(雙頭鈴) 과 같이 고조선 시대(청동기 시대) 의례에 사용된 청동제 방울은 여러 점 전해오지만, 삼국시대 유물로는 이것이 유일하다. 

청동을 녹여 속이 빈 상태로 본체와 방울을 주조했고, 둥근 본체의 자루 부분에 나무로 손잡이를 끼울 수 있도록 했다. 이 칠두령은 4~5세기 가야의 최고 수장급이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주인공은 살아 있을 때 이것을 들고 흔들면서 의식을 주재했을 것이다. 청동기시대엔 샤먼적 종교의식을 거행할 때 이런 청동 방울을 사용했다. 따라서 복천동 22호분 출토 칠두령은 가야시대까지 관련 신앙과 제례가 계속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가야에서는 권력 지배자가 종교의식까지 주재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는 이러한 종교의식용 청동 방울이 확인되지 않고 가야에서만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 칠두령의 가치는 더욱 크다. 가야인의 종교적 내면, 정치와 종교의 관계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3건의 유물은 가야의 생활문화사를 보여주는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문화유산이다. 가야만의 특징이 두드러진 유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보물은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이다. 가야 유물의 보물 지정은 가야사 복원의 일환으로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문화재청은 금동관, 철제 갑옷, 청동 칠두령 외에도 가야 유물의 문화재 지정 작업을 추가로 진행할 계획이다. 때맞춰 부산 복천박물관에서는 보물 지정을 기념해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 칠두령과 철제 갑옷을 4월 14일까지 특별 전시한다. 가야의 실체를 좀 더 깊이 있고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울러 고분이야말로 가야사의 보고(寶庫)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식하고 가야 고분을 적극적으로 보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가야사의 진정한 복원은 우리의 인식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신동아 2019년 4월호

이광표 서원대 문화기술산업학과 교수 kpleedong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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