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호

인터뷰

우리 식물 지킴이 조민제 변호사

“무차별 왜색 식물이름 비판, 이제 그만 끝내자”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9-04-0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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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례행사처럼 반복되는 식물주권 찬탈 주장

    • 일제강점기 우리말 식물도감 펴낸 사람들이 친일파?

    • 조선인 과학 역량 키우려 했던 조선박물연구회의 정신

    • ‘조선식물향명집’ 저자들이 명명(命名) 대신 사정(査定)한 이유

    • 광대나물, 쑥부쟁이, 곰취는 우리 이름

    [김도균 기자]

    [김도균 기자]

    “시즌이 있다. 3·1절, 광복절…. 매년 이 무렵이면 ‘일제가 우리 식물주권을 빼앗아갔다. 친일파가 거기 협조했다’ 류의 이야기가 온·오프라인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된다. 기사가 나오고, 댓글이 달리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퍼져나가고…. 그 과정에서 ‘광대나물’ ‘쑥부쟁이’ ‘곰취’ 같은 우리 식물 이름에 ‘친일’ 딱지가 붙는다. 올해도 3·1절 직전 어김없이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보도됐는데, 이제는 좀 그만해야 하지 않나 싶다.” 

    조민제 씨가 목소리를 높이며 한 말이다. 그는 변호사다. 금융 및 M&A 분야를 중심으로 20년 가까이 경력을 쌓았다. 법학 논문도 많이 썼다. 그런데 이날은 식물 얘기를 같이 해보고자 마주 앉았다. 지난해 12월, 조 변호사는 한국과학사학회지에 불쑥 식물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조선식물향명집’ 사정요지를 통해 본 식물명의 유래’ 제목부터 어렵다.

    - ‘조선식물향명집’이 뭔가.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인 식물학자 4명이 펴낸 책이다. 우리 땅에서 자라는 식물 1944종의 학명, 일본 국명, 조선 국명이 실려 있다.” 

    - 학명, 일본 국명, 조선 국명은 또 뭔가. 

    “학명(scientific name)은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는 동·식물 이름을 뜻한다. 라틴어이고, 이탤릭체로 쓴다. 예를 들어 고양이 학명은 ‘Felis catus’다. 이 동물을 한국 사람은 고양이, 미국 사람은 ‘cat’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한 국가 또는 언어권에서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이름을 국명(common name)이라고 한다. ‘조선식물향명집’에는 우리 땅에서 자라는 식물의 학명과 일본 국명, 조선 국명이 나란히 적혀 있다. 일본 이름, 조선 이름이라고 해도 되겠다.”



    일제가 강제 이식한 근대 식물학

    - 변호사가 왜 그에 대한 논문을 썼나.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잡고 싶어서다. 식물을 좋아한 지는 꽤 됐다. ‘조선식물향명집’을 비롯해 관련 분야 책을 많이 읽고, 필명으로 글을 발표한 일도 있다. 그런데 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일제강점기에 우리 식물주권이 훼손됐다’며 ‘조선식물향명집’ 이야기를 한다. 이 책 저자들이 우리 꽃, 풀, 나무에 일본식 이름을 붙이는 바람에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된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거다. 식물을 사랑하는 분 중에 이런 주장을 사실로 믿는 분도 있다.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나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 ‘조선식물향명집’과 ‘식물주권’ ‘친일’이 어떻게 연결되나. 

    “얘기가 길다. 차근차근 풀어보자. 인간은 오랜 세월 식물과 더불어 살았다. 아주 먼 옛날부터 풀과 나무에 나름대로 이름을 지어 붙였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지역마다 다른 이 이름들을 표준화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우리나라의 경우 그게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 폭력적인 방식이라면? 

    “일제에 의해서 말이다. 일본은 우리 국권 침탈을 앞두고 한반도 식물 수탈 계획을 세웠다. 조선에 있는 나무를 가져가려면 인부한테 ‘뭘 베어 와라’ 해야 할 텐데 조선과 일본 이름이 서로 다르지 않나. 그래서 강제병합 직전인 1910년 5월, ‘화한한명대조표(和韓漢名對照表)’라는 걸 만들어 고시했다. 우리나라에 있는 주요 수목의 학명, 일본 이름, 조선 이름을 정리한 거다. 이걸 발표하고 사람들에게 일본 이름 사용을 강제했다. 그런데 이게 한 번에 되겠나. 당시 우리나라는 표준어도 제정되지 않았을 때다. 같은 나무라도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달랐고, 아예 이름이 없는 종류도 많았다.”

    조선 식물명을 찾은 학자들

    일제강점기 출간된 ‘조선식물향명집’ 속표지와 이 책을 공동 저술한 정태현, 이덕봉 선생(왼쪽부터). [동아DB]

    일제강점기 출간된 ‘조선식물향명집’ 속표지와 이 책을 공동 저술한 정태현, 이덕봉 선생(왼쪽부터). [동아DB]

    - 이름이 없었다는 건 또 뭔가? 

    “예를 들어보자. 어린 시절 우리 집에서 소를 키웠다. 아버지가 곧잘 내게 ‘꼴 좀 베어 와라’ 하셨다. 이때 ‘꼴’이 뭔가. 한 종류인가. 아니다. 소가 잘 먹는 풀을 두루 꼴이라고 했고, 농촌 사람은 그게 뭔지 다 알았다. 하지만 개별 식물을 각각의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았다. ‘김매러 가자’는 말도 마찬가지다. 농사짓는 사람은 ‘김’이 뭔지 다 안다. 하지만 그게 한 종류는 아니다. 여러 잡초를 뽑으며 ‘김맨다’고 했다. 식물 이름 표준화는 이렇게 뭉뚱그려져 있던 것을 종(種)에 따라 구별하고 각각에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작업과 같이 이뤄져야 한다. 

    스웨덴 식물학자 린네가 18세기에 이 작업을 시작했다. 라틴어로 속명(屬名)+종소명(種小名)+명명자(命名者) 이름을 적어 학명을 붙이는 방식도 린네가 창안했다. 이후 곧 세계로 퍼져나갔다. 일본은 18세기 후반부터 근대 식물학을 받아들였다. 19세기에는 이미 그 방식으로 자국 식물을 다 정리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식물을 식용, 약용 등 기능 위주로 분류하는 본초학(本草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일제가 수목 수탈 등을 목적으로 한반도 식물 연구 및 명명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 앞서 ‘조선식물향명집’은 조선인 식물학자가 펴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 일제가 우리 식물 연구를 독점하던 시절, 조선인 식물학자 4명이 이 책을 썼다. 제1저자 정태현 선생(1882~1971)은 지금으로 하면 산림청 하급직원이었다. 서울농대 전신인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산림국, 중앙임업시험장 등에서 일했다. 거기서 일본 식물학자 통역 등을 맡아하면서 어깨너머로 근대 식물학을 배웠다. 제2저자 도봉섭 선생(1904~?)은 도쿄제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약학전문학교(현 서울대 약대) 교수를 지낸 학자다. 제3저자 이덕봉 선생(1898~1987)과 제4저자 이휘재(1903~1986) 선생은 각각 배화여고, 중동중 교원이었다. 이분들이 3년여간 100여 회를 만나 협의한 끝에 한반도 식물의 학명과 일본 이름, 조선 이름을 기록한 ‘조선식물향명집’을 펴냈다.” 

    - 그 책이 왜 중요한가. 

    “우리 학자가, 우리 땅에 있는 식물을 근대 학문 체계에 맞춰 분류한 뒤, 우리말 이름을 적어 펴낸 사상 최초의 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 주제를 바꿔보기로 했다. 법률가가 식물학에 대체 왜 관심을 갖게 됐는지,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까지 성실히 연구했는지 아무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조 변호사는 1997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쳤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그에게 일이 쏟아졌다. 기업구조조정과 M&A가 빈번하게 이뤄지는데 관련 분야 전문가는 턱없이 부족하던 때다. 조 변호사는 “한 달 중 퇴근하는 날이 5일 정도밖에 안 될 만큼 바쁘게 일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을 정신없이 지내던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쓰러졌다. 과로였다. 병원 신세를 한참 졌다. 그때 한 지인이 등산을 권했다. 건강을 추스르려 산에 오르다 자연스레 나무를 보고 꽃을 보게 됐다고 한다. 2005년 무렵의 일이다. 

    - 그때부터 식물에 대해 공부한 건가. 

    “처음엔 그저 이름이 궁금했다. 눈에 띄는 풀, 꽃, 나무 사진을 찍어 식물도감과 비교해보곤 했다. 그러다 차츰 이름 유래에도 관심이 생겼다. 예를 들어 ‘바람꽃’이라는 꽃이 있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보니 학명에 ‘Anemone’라는 단어가 있더라. 그리스어로 ‘바람’을 뜻하는 ‘anemos’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 꽃의 영어 이름은 ‘wind flower’다. 학명과 국명에 전부 바람이 들어간다. 이런 걸 보면 또 궁금해지는 거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동시에 이런 이름이 생겨난 걸까, 아니면 한 이름이 먼저 생긴 뒤 그 영향을 받아 다른 지역에서도 같은 이름을 붙인 걸까.’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점점 더 많은 책을 뒤지게 됐다. 그 과정에서 ‘조선식물향명집’을 만났다. 일제강점기 책인데 라틴어, 일어와 함께 우리말 식물 이름이 적혀 있더라. ‘어떻게 이런 책이 나왔지? 그 엄혹한 시기에 우리 식물 이름을 찾아 정리한 사람은 대체 누구지?’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또 공부가 이어졌다.” 

    - ‘조선식물향명집’은 어떻게 출간된 건가. 

    “1933년 6월 27일 동아일보에 관련 기사가 있다. ‘조선박물연구회’ 창립을 알리는 내용이다. 조선인 과학자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었다며, 첫 사업으로 ‘조선에서 나는 동·식물의 지방별 명칭을 조사해 통일시키고, 조선 이름이 없는 동·식물 이름은 새로 정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 작업의 결실이 바로 ‘조선식물향명집’이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박물학회라는 연구단체도 있었다. 1923년 출범했고, 규모도 컸다. 그러나 회원 대부분이 일본인이었다. ‘조선식물향명집’ 저자들은 조선인만의 학술단체를 따로 꾸려 우리 이름 만들기에 나선 사람들이다. 

    식물에 대충 아무 이름이나 붙이지도 않았다. 이 작업에 ‘명명’ 대신 ‘사정(査定)’이라는 용어를 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조사하거나 심사해 결정한다는 이 말 뜻 그대로, ‘조선식물향명집’ 저자들은 우리 식물 분포지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 지역 사람 다수가 부르는 이름을 모으고 정리했다. 자작나무 사스래나무 거제수나무 물박달나무 같은 이름을 기록한 게 이분들이다. 제1저자 정태현 박사의 경우 1911년부터 이 일을 했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조선 식물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조선박물연구회에 모여 수많은 논의를 한 끝에 1937년 비로소 책을 펴냈다. 그런데 이분들을 보고 친일파라고….” 

    조 변호사는 이 이야기를 하다 잠시 목이 메었다.

    친일학자라는 낙인

    - 지금 갑자기 울컥한 것 같다. 

    “2015년 광복 70주년 무렵에 책이 한 권 나왔다. 우리 식물 이름이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 됐다고 주장한 책이다. 그 책 저자가 이렇게 썼다.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에 길들여진 식물학자들이 일제의 식민적 자원 착취를 등에 업고 자신의 학문적인 업적을 위해 조선의 식물을 조사하면서 일본어로 지은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번역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이 글을 읽고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모른다. ‘조선식물향명집’ 저자들이 ‘제국주의에 길들여졌다면’ 왜 굳이 조선 이름을 찾으려 노력했을까. ‘학문적인 업적’을 원했다면 왜 우리말로 책을 썼을까. 이분들은 당대 최고 엘리트로 일본어를 매우 잘했다. 그런데도 당시 조선어학회가 발행한 학술지 ‘한글’에 한글 논문을 발표하는 등 민족주의 활동을 했다.” 

    - 저자들이 일제강점기에 공무원, 교원 등으로 일했고, 일제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책을 펴낸 것은 사실 아닌가. 

    “맞다. 일제에 협력한 면이 있다. 목숨 걸고 항일운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억압된 상황에서 조선인의 과학 역량을 키우고 민족정신을 지켜내고자 노력한 부분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와 비슷한 시기 일제 지배를 받은 대만의 경우 ‘조선식물향명집’ 같은 책이 없다. 라틴어와 일본이름만으로 식물도감을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 학자들은 어떻게든 조선 이름을 살리려 노력한 것이다.” 

    조 변호사는 ‘조선식물향명집’ 제3저자인 이덕봉 선생이 1926년 배화여고 교지에 썼다는 글을 줄줄 읊다 또 한 번 목이 메었다. 코끝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가 소개한 글 내용은 이렇다. 

    “인왕산은 뒤뜰 되고 사직단은 앞뜰 되어 뒤뜰에는 자연 생태 그대로의 고산식물원을 만들고 앞뜰에는 조선산(産) 식물을 모아다가 식물견본원을 설치하는 한편 (중략) 휴가면 조선 산야를 편답하여 식물채집과 조선명칭 수집에 힘써 조선명으로 식물목록과 식물도감을 편찬하다가 학생들의 떠드는 소리에 놀라 깨니 남가일몽.” 

    - 이런 걸 어떻게 다 찾았나. 

    “이분들을 보고 친일파라고 하는 게 화가 나 이런저런 자료를 열심히 봤다. 이덕봉 선생이 이 글을 쓴 때가 ‘조선식물향명집’이 나오기 11년 전이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우리 이름으로 된 식물도감을 내고 싶다는 꿈을 품었을지 모른다. 국권을 빼앗긴 현실 때문에 겉으로는 ‘남가일몽이지’ 하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 끝에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과 힘을 모아 ‘조선식물향명집’을 펴냈다. 그게 징검다리가 돼 우리 식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앞서 이분들을 친일파라고 비판한 책을 쓴 사람은 ‘조선식물향명집’ 저자가 ‘일본어 식물 이름을 무비판적으로 번역’해 우리 이름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앞서 설명했듯 ‘사정’을 기본으로 삼아 전국 각지를 돌며 조선인이 실제로 사용하는 이름을 채록했다. 지역별로 이름이 다르면 주된 서식지 이름을 우리말 이름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큰쥐방울’ ‘등칡’ ‘통초’ 등으로 불리던 식물은 강원도에서 많이 자라는 걸 감안해 강원도 지역명 ‘등칡’이라고 적었다. 널리 쓰이는 우리말 이름이 없는 경우에만 부득이 새 이름을 지어 붙였는데, 학명을 참고해 붙인 ‘바람꽃’처럼 아예 새로 이름을 지은 ‘신칭(新稱)’ 사례는 매우 적었다. 

    정리하자면 ‘조선식물향명집’에 적힌 우리말 이름은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온 것이다. 그것 전체를 ‘친일학자가 마음대로 붙인 왜색 짙은 이름’이라고 낙인찍는 건 우리 선조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조 변호사는 이우철 강원대 명예교수가 펴낸 ‘하은 정태현 박사 전기’ 한 부분을 소개했다. 

    “(‘조선식물향명집’ 출간 과정에서) 내선일체로 일본과 조선이 한 나라인데 조선명을 새로 만들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며 당국의 심한 제재가 있었으나 당시 농촌에서는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으므로 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일본명을 번역하는 것이라고 무마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조선 식물학자들이 ‘일제의 식민적 자원 착취를 등에 업고’ 작업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을 위한 민족감정 선동인가”

    이정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교수도 ‘조선식물향명집’에 우리 과학자들의 민족의식이 반영돼 있다고 봤다. 2012년 발표한 논문 ‘식민지 조선의 식물연구(1919~1945); 조일 연구자의 상호 작용을 통한 상인한 근대 식물학의 형성’의 일부다.

    “근대 식물학의 보편어인 라틴어로 연구된 조선식물에, 향명 즉 한글 이름을 부여하여 조선의 전통 지식과 근대 식물학의 연결고리를 되살리는 작업이 이들의 첫 작업이었다. 피지배민의 언어와 전통을 복원함으로써, 근대적 연구로 대체되면서 사라져가던 조선식물의 조선적 성격을 살려내려는 시도였다. (중략) 조선인 연구자들은 인접한 제국 일본에 포섭될 수 없는 조선의 독자성, 조선인에 의한 근대적 조선식물 연구의 차별성을 드러내려 했다.” 

    바로 이것이 조 변호사가 하고 싶은 말이다. 

    - 이런 식물학자들의 노력이 저평가되는 게 가슴 아픈가. 

    “가슴 아프다고 하고 끝낼 문제가 아니다. 앞서 말했듯 70주년 광복절 무렵에 우리 식물 이름이 ‘창씨개명’ 됐다는 책이 나왔다. 잘못된 내용이 상당히 많았다. 그 책에서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거명한 식물 이름 중 상당수가 조선왕조실록 등 우리 옛 문헌에 등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제 지배를 받기 훨씬 전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 이름을 흉내 내 사용했다는 건가. 임금을 포함한 우리 조상 전부가 친일파인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화가 났지만 처음엔 그냥 넘겼다. 그 책 내용을 소개하는 기사가 곳곳에 보도되고, 민족적 분노를 느낀 누리꾼들이 ‘친일파’에 대한 비판을 쏟아낼 때도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포털 사이트가 이 책 내용을 온라인 지식백과에 무료로 공개하면서 이 주장이 마치 공인된 사실인 양 유포되기 시작했다. 한 초등학생이 ‘광복 70년이 되도록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하다니, 이게 나라냐’ 하는 내용의 독후감을 쓴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구나, 나라도 나서서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잡아야겠구나 싶었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해당 포털사에 편지를 보냈다. ‘조선식물향명집’ 저자의 유족들이 다 살아 계신데, 이렇게 잘못된 내용을 유통하는 건 그분들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는 걸 알렸다. 지식백과에 실린 내용 중 팩트가 틀린 부분도 일일이 지적했다. 포털사 대표이사, 법무팀장, 지식백과팀장한테 각각 편지를 썼더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A4용지 100장 분량쯤 되는 글을 써서 들고 갔다. 이후 3일 만에 해당 포털 지식백과에서 그 책이 사라졌다. 

    원래는 소송할 생각도 했다. 곳곳에 수소문해 ‘조선식물향명집’ 저자의 유족들을 만나 뵈었다. ‘소송을 원하시면 돈 받지 않고 돕겠다’는 말씀도 드렸다. 유족들도 당시 굉장히 분개하셨는데, 포털 사이트에서 곧 서비스를 중단하고 해당 저자가 이후 더 책을 쓰지 않아 소송까지는 가지 않았다.”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

    ‘조선식물향명집’ 본문. 한반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학명과 일본 이름, 우리말 이름이 적혀 있다. [김도균 기자]

    ‘조선식물향명집’ 본문. 한반도에서 자라는 식물의 학명과 일본 이름, 우리말 이름이 적혀 있다. [김도균 기자]

    - 식물학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그때부턴가. 

    “그렇다. 잘못된 정보로 민족감정을 선동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중의 관심이 쏠릴 시기가 되면 나타나 ‘우리 식물 이름을 일제에 강탈당했다’고 주장한다. 겉으로는 일제와 친일파를 비판하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자신을 모욕하는 행동이다. 우리 조상이 이뤄낸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고, 당시 조선인 전체를 무능하고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일제강점기 식물학자들이 일제에 협력한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일본을 통해 근대 식물학을 배웠고, 일본을 넘어설 만큼의 학문적 역량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조선식물향명집’에 실린 식물 이름 중 일부는, 극소수이기는 하나 일본 이름을 차용해 지은 것이 맞다. 그걸 찾아 바로잡자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걸 이유 삼아 그들의 작업 전체를 친일로 여기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우리 현실을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지는 말자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과학, 철학, 객관, 기계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한자어 상당수도 일본에서 왔다. 근대화 시기에 서양 문물을 우리보다 먼저 받아들인 일본이 번역어를 만들고, 한국과 중국이 그대로 받아들여 지금까지 쓰게 된 게 현실이다. 그러나 그 언어를 계속 사용한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일본의 지적 식민지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이제 와 용어를 바꾼다고 역사가 바로잡히고 민족적 자존심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조선식물향명집’에는 분명 여러 한계가 있다. 하지만 그 시절 조선 과학자들이, 자신이 선 자리에서, 조선인으로서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최선을 다해 한 점은 평가받아야 한다고 본다. 잘한 건 잘했다고 하고, 잘못한 부분은 잘못했다고 하는 게 정말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는 길이 아니겠나.” 

    조 변호사는 종종 “내가 일제강점기 조선에 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고 했다. 

    “일신의 안위를 좇아 친일 대열에 섰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때로는 욱하는 성질을 못 이기고 어딘가에 폭탄을 던진 뒤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절대 하지 못했을 일이 있다. 26년간 전국을 돌며 조선 식물을 채집하고 그 이름을 기록해 책으로 펴내는 일이다. 현실의 모욕과 굴욕을 감내하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나는 바로 이런 이유로 정태현 선생을 존경한다. 이런 내용의 글을 온라인 공간에 썼다가 ‘친일파’라고 욕을 먹기도 했는데, 나는 내가 친일파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 대목 한 대목 힘주어 말하던 그는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이렇게 흥분했지?” 하며 혼자 씩 웃음을 지었다. 

    - 감성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일할 때는 안 이렇다(웃음). 변호사는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지 말라’고 배운다. 본인이 당사자처럼 느끼면 사안에 객관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고객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도 일할 때는 냉정하다. 그런데 이건 일이 아니라서 이런가 보다(웃음).” 

    - 나무가 좋고 풀이 좋아 식물도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과학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할 수준이 됐다. 앞으로도 계속 공부를 이어갈 것인가. 


    “아니다. 나는 그냥 숲속에서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마음이 힘들 때면 집 앞 화단에 가서 풀 한 포기 자라는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다 사라진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이 문제에 매달리느라 정작 숲길을 걷고 풀 자라는 것 볼 시간을 잃어버렸다. 매일 밤 11시 퇴근해 새벽 2시까지 식물학 관련 자료를 뒤지고 휴일에도 서재에 틀어박혀 지냈다. 몇 달만 더 이렇게 공부하고, 그 뒤엔 다시 산과 들을 걸어 다니고 싶다.” 

    - 몇 달 더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뭔가. 

    “올해 광복절에 맞춰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를 펴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식물 1944종 이름 각각의 유래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또 이 책 저자들이 왜 식물도감을 만들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에 대해서도 소개하려 한다. 이 작업을 하느라 우리나라 고서부터 일본, 미국 등 세계 각국 자료를 산더미처럼 읽었다. 식물 분야를 오래 공부한 동료들과 같이 최선을 다해 공부했지만 부족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나오면 많은 분이 비판해주면 좋겠다. 그걸 계기로 논쟁도 벌어지기를 바란다.” 

    충북 단양지역에 활짝 피어 있는 단양쑥부쟁이. [단양군농업기술센터 제공]

    충북 단양지역에 활짝 피어 있는 단양쑥부쟁이. [단양군농업기술센터 제공]

    조 변호사가 진심을 담아 한 말이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꽤 많은 우리 식물 이름 유래를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광대나물, 쑥부쟁이, 곰취 등 왜색 논란에 휩싸인 식물 이름을 거론하며, 해당 이름이 고려 때부터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변모했는지, 왜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닌지 등을 세세하게 짚었다. 조 변호사가 집필하고 있는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에는 바로 이 내용들이 담길 것이다. 조 변호사의 바람은 아마추어가 연구하기엔 매우 전문적인 이 주제에, 해당 분야 학자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면 조 변호사는 식물학 책으로 뒤덮인 서재를 떠나 실제 식물의 세계로 다시 들어갈 작정이다. 그는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 있다”며 생태연구자 김태영 씨가 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이 아름다운 지구에, 의식 있는 존재로서 이렇게 잠시라도 왔다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숲에서 느낀다”는 말이다. 조 변호사는 “나는 이렇게 멋진 말을 못하지만 마음 깊이 공감한다”며 웃었다. 

    “황량한 겨울 벌판에 서 있는 벌거벗은 나무조차 가만히 들여다보면 봄을 준비하며 눈을 만들고 있다. 봄이 왔을 때 깨어나는 게 아니라 한겨울에도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느리고 묵묵하지만 일관되고 꾸준한 것, 나는 그런 게 좋다. 그래서 식물이 좋은가 보다.” 

    조 변호사의 식물을 향한 사랑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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