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호

풍수입문서 출간 박준모 변호사

“풍수의 정수 모르고 상업화 안타까워 책 출간”

  • 지재원 저널리스트

    입력2019-04-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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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수지리강론’ 출간, 부동산학 박사학위도

    • 선친 묘 이장하며 풍수에 관심, 30년 공부

    • 풍수와 법, 부동산, 웰빙의 관계 설명.

    [김광해 사진작가]

    [김광해 사진작가]

    [신동아=지재원 저널리스트] 2018년 11월 ‘풍수지리강론’이라는 풍수입문서가 나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저자는 부산고검 박준모(64) 부장검사. 그는 그 몇 개월 전 ‘부동산 계약실무’라는 책을 내 법조계에서 화제가 됐다. 현직 검사가 한 해에 2권의 책을 낸 것도 특기할 일이지만, ‘풍수(風水)’ 관련 책을 냈다는 사실이 더욱 관심을 끌었다. 풍수와 관련된 법 강의가 주 내용이 아닐까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책을 열어보면 풍수학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많다. 과연 그가 바쁜 검사 생활 와중에도 풍수 책을 낸 이유는 뭘까. 그는 한사코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왔지만 신동아 독자들을 위해 어렵사리 인터뷰에 응했다.

    아버지 묘 이장 계기로 풍수에 관심

    지난해 12월 29일 정년퇴임해 이제 그는 변호사 신분이다. 검찰청법에 따라 검찰총장의 정년은 65세, 그 밖의 검사 정년은 63세다. 이제까지 정년을 채우고 퇴임한 검사는 20명도 되지 않는다. 후배가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 경우 정년이 한참 남아 있어도 퇴직하는 것이 검사들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박 검사의 정년퇴임은 검사도 승진과 상관없이 정년까지 일하는 평생검사제의 정착 계기가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검사가 승진 등을 이유로 상사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원칙과 신념에 따라 일하는 문화가 필요한 요즘이 아닌가. 

    충남 천안고, 고려대 법대를 나온 그는 1982년 사법시험 24회(사법연수원 14기)에 합격해 법조인이 된 지 만 36년 만에 공직을 떠났다. 그는 공직 생활 틈틈이 ‘풍수’관련 원고를 써뒀는데, 2010년경에 이미 한 권 분량이 됐다고 한다. 공직 생활 중이라 출판할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용기를 낸 것이다. 그는 검사가 풍수에 관심을 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친께서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공직에 몸담을 무렵 선친 묘소 주변이 공업지역으로 개발된다고 해서 묘소를 이장하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때는 명당이니 풍수니 하는 데에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어요. 1987년 공주지청 검사로 발령이 났을 때 부친 묘소 이장을 위해 산을 보러 다니다가 적당하다 싶은 곳의 산을 좀 무리해서 샀습니다.” 

    그의 월급이 60만 원 정도이던 시절에 은행 대출과 저축한 돈을 다 털어서 2300여만 원을 들여 산을 샀으니 당시로선 큰일을 저지른 셈이다. 그런데 정작 더 큰 문제가 그 다음에 찾아왔다.



    고시 공부하듯 풍수 공부

    이장을 하기에 앞서 고향 선배가 "이장은 함부로 하면 큰일 난다"면서 지관 한분을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만난 지관이 이장 예정지를 살펴보면서 나경(패철)을 꺼내더니 ‘지리오결’ 등을 곁들여 지형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한문 지식이 있던 박 검사는 그 설명을 잘 이해했고, 설명을 듣고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그 자리는 이장하기엔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함께 간 어머니는 실망 끝에 주저앉으시고, 갓난아이를 업고 있던 아내도 얼굴빛이 사색이 됐다. 

    그런 일을 겪은 뒤 박 변호사는 지관으로부터 풍수 관련 책들을 소개받아 ‘고시공부’하듯 풍수 공부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주말이면 지관을 따라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이론과 실제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10년 정도 이론과 현장을 공부하다 보니 “최소한 속지 않을 수준은 되더라”라고 회고했다. 그에게 풍수의 ‘현장지도’를 해준 지관은 유철수 선생으로 지금도 교분을 이어오고 있다. 

    박 변호사는 “풍수는 이론만큼 현장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왕릉이나 유명인들의 무덤을 답사할 경우 그 후손들의 삶이 잘 알려져서 묏자리와 관련된 음택(陰宅) 풍수를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묘를 답사할 경우 후손의 삶을 추적해 풍수책의 이론이 맞는지 일일이 확인 작업을 해야 해서 풍수의 전반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고 한다. 그의 현장 답사는 그 후로도 이어져 교육부 초대 감사관으로 발령받던 2010년 무렵까지 근 30년간 계속됐다. 

    “어느 정도 공부가 되자 유명한 풍수가가 잡아놓은 묏자리에 가서도 흠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박 변호사는 나경(羅經·나침반과 함께 방위를 파악할 때 쓰는 그림)의 원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풍수지리를 얘기하거나, 풍수지리의 정수(精髓)도 모르면서 풍수지리가 인간의 모든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양 과장하는 사람들이 풍수를 상업화하는 실태를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풍수지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최소한 ‘풍수지리가 얼마나 위험한 학문인가’를 알게 하고 ‘풍수지리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밝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풍수지리강론’을 출간하게 됐다고 한다. 

    풍수의 상업화로 인해 주변에서 ‘묏자리 송사’가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다. 혹시, 지관이 명당이라고 해서 많은 돈을 주고 자리를 잡았는데 집안에 흉사가 생겼다면 명당을 잡아준 지관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명당이 아닌 걸 명당이라고 팔면 ‘기망행위’에 해당되지만, 명당에 대한 ‘절대 기준’이 없어서 법적으로 다투기는 어려운 편”이라고 한다.

    의뢰인 속인 지관은 망한다

    하지만 ‘고의가 아니어도 의뢰인을 속인 지관은 망한다’는 게 풍수지리 세계의 금언이다. 지관이 복채(보수)에만 관심을 갖고 좋지 않은 자리를 명당으로 소개해 남의 집안에 해악을 끼칠 경우 그 업보로 지관의 후손이 끊겨서 결국 절손(絶孫)된다고 한다. 

    “음택은 한 자를 올려 쓰느냐 내려 쓰느냐에 따라 발복 내용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나경 측정을 잘못하면 장소를 잘못 짚게 되고,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나지요. 이렇게 자그마한 실수를 하더라도 그 업보는 지관과 후손에게 미치기 때문에 풍수지리를 그만큼 위험한 학문이라고 합니다.” 

    실제 명당 터 사례가 궁금하다고 물었더니는 그는 전북 남원시 대강면에 있는 ‘황균비의 묘’를 소개했다. 묘의 정면에 문필봉이 확 들어오는 재상필(宰相筆)에다 앞에 놓인 안산과 조산이 8개 내지 10개의 층을 이루어 묘를 향해 절하고 있는 형상이다. 큰 인물이 나올 명당으로, 조선 태종에서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6판서를 두루 지낸 황희 정승의 할아버지(황균비) 묘다. 황희 후대에도 황수신 영의정 등 많은 명신과 현관이 배출되었으니 그 영광이 이 묘의 발복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자리는 고려 말 남원시장 장터에서 부잣집에 명당을 잡아주기로 했다가 사기꾼으로 몰려 죽도록 맞고 있던 스님을, 황균비의 아들(황군서)이 전 재산을 들여 구해준 뒤 그 대가로 받은 터였다. 황군서가 아버지의 묘소를 스님이 정해준 자리로 이장한 뒤 이 집안은 아들 황희부터 대대로 정승 판서를 배출한 명가가 됐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에는 공주 갑부 김갑순의 아버지(김현종) 묘가 있다. 이 자리 역시 조선 말 주막집을 하던 김갑순의 어머니(밀양 박씨)가 가난한 나무꾼에게 쌀 5가마를 주고 얻은 명당 터라고 한다. 이 자리에 남편의 묘를 이장한 후 당시 열두 살이던 김갑순에게는 성공 스토리가 줄지어 이어지기 시작했다. 40대에 이미 충청도에 1000만 평 이상의 토지를 보유하고 대전시내 전체 토지의 40%가 김갑순 소유였을 만큼 일제강점기 최고의 부를 이룬다.

    풍수의 제일 요소는 ‘덕행’

    일제강점기 충청도 제일 갑부로 알려진 김갑순 집터와 표지석. 충남 공주시 봉황로에 있다.

    일제강점기 충청도 제일 갑부로 알려진 김갑순 집터와 표지석. 충남 공주시 봉황로에 있다.

    김현종 묘는 공주 반포 청벽에서 갑사 방향으로 가다가 만나는 삼성암 근처에 있다. 이곳을 나경 원리에 맞춰보면 “내파(內波)는 수법에 맞으나 외파(外波)가 수법에 맞지 않아 1대 30년 발복하는 자리로 나온다”고 한다. 어머니 밀양 박씨의 후덕한 인심과 지혜로 얻은 자리인데, 그 자손이 발복해 대부호가 되었으나 1세대가 지나가자 후손들이 그 자리를 계속하여 지키지 못하고 파묘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나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조부 윤득실의 묘도 대표적인 명당자리다. 

    위에서 보았듯 명당의 기운으로 세가 일어나거나 인물이 나온 집안은, 대부분 선대가 덕을 쌓은 집안이다. 황희 정승과 공주 부자 김갑순을 배출한 명당 터의 공통점은 애초부터 ‘명당’을 찾으려다 잡은 게 아니다. 황희 정승 명당 터는 스님을 사기꾼으로 몰았던 부잣집에 주려던 터였고, 김갑순 명당 터는 쌀 두 가마니를 마련할 수 없어서 시름에 젖어 있던 가난한 나무꾼에게 인정을 베풀고 얻은 터였다. 

    하지만 위의 사례는 고려와 조선 시대 이야기이므로 요즘 시대의 명당 사례가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요즘 사례에 대해 물었더니 오래전 대통령 후보로 나왔다가 낙선한 사람의 선대 묘(충남 예산 소재)를 답사한 경험을 들려준다. 

    “묘의 전후좌우에 사신사(좌청룡 우백호 전주작 후현무)가 놓이고 앞에 당이 넓게 펼쳐졌으며 일월까지 놓였습니다. 용·수·향의 공식도 모두 맞게 썼더군요. 그러나 본봉의 위치를 보니 정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한 장 정도 올려다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런 경우 발복은 반밖에 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당진-대전 고속도로가 건설돼 주변이 상해 묘의 생명이 다했습니다. 이 경우는, 명당 대지에 선대를 모셨으나 재혈에 실패한 경우라 하겠습니다.” 

    현존하는 사람들의 명당 터와 관련된 이야기는, 후손들을 추적해야 하므로 시기적으로 시간도 더 필요하고 민감한 부분이라고 한다. 박 변호사는 “섣불리 말하지 않는 것이 도리”라면서 구체적인 얘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풍수지리에서 제일 중요하게 꼽는 요소는 ‘덕행’이다. 선대의 덕행이 후손들의 재산과 벼슬, 그리고 안녕과 영화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명당 터를 잡아준 옛 선인들은 대부분 우연히 만난 지사 또는 스님이거나, 집안에서 묵묵히 글을 읽던 선비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복채를 받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이나 재능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들은 왜 자신의 지식과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숨겼을까? 풍수지리가 한 가문의 융성과 멸문을 좌우할 수 있고, 자신의 자그마한 실수가 그 가문뿐만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확한 지식, 현장에 적용할 줄 알아야

    풍수의 세계에는 ‘명당자리를 구하기 전에 사람을 먼저 구하라’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풍수지리 원리에 맞는 좋은 자리를 구하려면 지식에 밝고 경험이 풍부하며 고매한 인격을 갖춘 풍수 전문가(풍수가, 지관)를 먼저 만나야 하는데, 좋은 자리를 구하는 것보다 훌륭한 풍수가를 만나는 일이 더 어렵기 때문이다. 훌륭한 풍수가는 어떤 요건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 박 변호사는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 풍수지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일부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비기(秘記)처럼 검증되지 않은 이론이나, 형국론(形局論)처럼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라지는 이론으로 풍수지리를 운운하는 풍수 전문가라면 믿지 않는 게 좋다. 

    둘째, 풍수가는 풍수지리 이론을 현장에서 정확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경의 용법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명당’에 대한 관심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있어왔다. 한때 미신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요즘엔 과학적으로도 입증이 되고 있고, 주택학이나 부동산학 등 관련 학문 문야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명당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부동산의 거래 가격처럼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없고, 감정평가의 요소로 작용할 수도 없다. 

    부동산을 거래할 때는 교통의 편리, 교육시설, 근린시설의 질과 문화적 배경 등이 중요한 선택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21세기에 ‘웰빙(Well-being)’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몇몇 연구 논문에 따르면 풍수지리도 부동산 선택의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이들이 늘고 있고, 특히 고소득층일수록 풍수지리를 신뢰하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묏자리와 관련된 음택 풍수와 함께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에 관한 양택(陽宅) 풍수에도 그만큼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신뢰 중시하는 변호사

    이러한 추세에 편승해 최근 관련 서적들이 활발하게 출간되고 있고, 몇몇 언론 매체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는 등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럴수록 이를 앞세워 돈벌이를 하려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풍수가 잡술로 변모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박 변호사는 풍수에 관심을 갖다 보니 ‘부동산’ 전반을 넓게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건국대 부동산대학원에서 부동산학 석사를, 서울벤처대학원에서는 부동산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창원지검 특수부 부장검사, 인천지검 강력부 부장검사, 서울북부지검 형사부 부장검사 등 주로 특별수사 분야에서 활약했다. 창원지검 특수부 부장검사 시절엔 7선의 황낙주 전 국회의장을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하기도 했다. 초대 교육부 감사관(2010~ 2015)으로 지낼 때는 학연 지연 등 외부 입김을 철저하게 차단해 지인들로부터는 오히려 원성을 샀을 만큼 강직한 공직자였다. 

    박 변호사는 3월 초 법무법인 강남 소속으로 변호사의 삶을 시작했다. 변호사로서 주로 어떤 분야를 맡을 생각이냐고 묻자 “검사 출신이니 형사소송은 기본이고, 부동산 분야도 전문성이 있어서 맡게 될 것 같다”고 한다. 뒤늦은 변호사로서의 각오를 묻자 “특별한 각오랄 건 없고 신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신뢰’를 강조했다.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 전경

    [박준모 제공]

    [박준모 제공]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다. 석문봉을 주산으로 하고 왼쪽으로는 가야봉과 원효봉이, 오른쪽으로는 옥양봉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 묘가 이 자리로 오게 된 데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는 이렇다. 야심가인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하에서 생존을 위해 파락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왕권 회복을 위해 제왕이 날 자리를 찾고자 유명한 지관을 찾아다녔다. 흥선군을 가야산으로 안내한 지관은 정만인이다. 정만인이 “이대제왕지지(二代帝王之地)와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이하응은 서슴없이 ‘이대제왕지지’를 골랐다. 우여곡절 끝에 남연군 묘를 이장한 후 7년 뒤에 둘째 아들이 황제 자리에 올랐는데 그가 고종이고, 그의 아들이 순종이었으니 ‘이대제왕지지’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윤보선 전 대통령의 고조부 윤득실의 묘소 전경

    조선 정조 때 벼슬을 한 윤득실은 사색당파의 정쟁을 피해 아산으로 낙향했다. 윤득실은 선비로서 백성을 일깨우고 선한 일을 해 자녀들에게 본받게 했다. 그러나 많지 않은 재산으로 선한 일을 하다 보니 가세가 기울었고, 윤득실 사후 자녀들은 생계유지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셋째아들 윤취동은 아버지의 유지를 따라 도리를 다하며 선하게 살기에 온 힘을 다한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어느 날, 이웃 둔포에 장을 보고 돌아오다가 길가에 쓰러져 죽어가는 걸인을 업고 와 수개월동안 정성껏 보살펴 살려냈는데, 이 걸인은 원래 수도승이었다. 그가 은덕에 보답하겠다면서 윤취동을 근처 산골짝으로 데려가 묘 자리를 하나 잡아 주었다. 스님의 권고에 따라 부친 윤득실의 묘를 이장한 후 후손들은 군부대신을 지낸 윤웅렬을 비롯해 학부대신 윤치호, 서울대 총장 윤일선, 윤치영 장관 등을 배출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도 윤득실의 고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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