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호

단독

‘얼굴 없는 황장엽’ 北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서울에서 타계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입력2017-07-20 21:5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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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 우사 김규식 귀여움 받으며 자라
    • 국군 초대 항공사령관 아들, 장택상 前총리 외손녀사위
    • 수리과학자로 北 서해갑문 설계… 무기 분야 테크노크라트
    • 2005년 한국으로 망명… 2년 암 투병 끝 별세
    • 북한 선진화 운동 투신… 통일 염원하며 삶 마쳐

    ‘얼굴 없는 황장엽’으로 일컬어져온 이◯◯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6월 2일 서울에서 타계했다. 2005년 5월 72세 나이로 한국으로 망명해 12년간 익명의 삶을 살았다. 북한 당국이 위해를 가할 것을 우려했으며 평양에 남은 가족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복수의 북한 노동당 출신 망명 인사는 “그가 한국으로 망명한 사실을 평양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6월 4일 엄수됐다. 고인과 가깝게 지낸 법륜스님과 정토회 회원들이 장례를 도왔다. 상주는 고인과 함께 북한 선진화 운동을 해온 A씨가 맡았다. 고인은 “북한이 변화해야 한다”면서 2006년부터 북한 선진화 운동에 투신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처럼 공개 활동을 하면 정부로부터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받았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이 그의 망명 사실을 파악하고 있으나 이 글에서도 고인의 생전 뜻을 받들어 실명을 싣지 않는다.



    구국전선 책임자 맡아

    고인은 1997년 괴한의 총탄에 맞아 숨진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씨를 논외로 하면 황장엽(1923~2010) 전 노동당 비서 다음으로 비중이 큰 망명 인사다. 전직 정보당국 고위 인사는 “탈북 인사 중 황장엽 비서를 논외로 하면 가장 고위직이 그분”이라고 했다.

    그는 김일성에 반대하다 해외에 망명한 박갑동, 이상조, 정추 씨 등이 1991년 조직한 ‘구국전선’이라는 조직의 책임자를 2013년에 맡으면서 북한 선진화 운동의 외연을 넓혔다. 구국전선의 실제 활동은 계획보다는 활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3~2014년에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적(籍)을 뒀다. 정부가 자문비 명목으로 활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준 것이다. 2014년 6월 국정원장이 바뀐 후 자문비 지급이 종료되자 그와 가깝게 지낸 노동당 출신 탈북 인사는 “통일 과정의 자산인데, 정부 대접이 옹졸하다”고 꼬집었다.

    고인은 군수산업 분야에서 일하다 망명한 B씨와 함께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진실 규명 과정에서 정부에 도움을 줬다. 청와대 고위 인사가 언론 인터뷰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히면서 그가 망명한 사실이 공식화됐다.

    “조사가 진행 중일 때 탈북인 한 명을 만났다. 북한 인민 대의원을 하다 5년 전 왔고 북한에서 해군 무기를 전문으로 한 과학자다. 만났을 때 놀랐다. 천안함 구조를 정말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천안함을 깨기 위한 준비를 했다는 거다.(…) 또 ‘인간 어뢰로 공격한 게 확실하다’는 거였다. ‘비날론 코팅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어뢰에 타고 가서 배 밑에서 터뜨린다는 거다. 그러면 폭발 때 옷은 녹고 그 사람들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어뢰 꼬리 부분이 남긴 하지만’이라는 게 그분 얘기였다.”(2010년 8월 12일자 중앙선데이 참조)

    북한 당국이 ‘천안함 폭침’이라는 예민한 내용을 다룬 청와대 고위 인사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지 않았을 가능성은 0(零)에 수렴한다. 탈북 사실이 북한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가 서울에 와 있음을 청와대가 평양에 확인해준 것이다. 고인은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인터뷰 기사가 나온 뒤에도 지금껏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유감이라는 말은커녕 이러저러한 이유로 밝히게 됐다는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한국 국회의원 격(格)

    그는 북한에서 테크노크라트(과학적 지식이나 전문적 기술을 소유함으로써 사회 또는 조직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활약했다. 중국과의 군사기술 협력 업무를 맡았으며 북한과 중국을 오가면서 무기 생산 관련 일을 했다. 1990년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2000년대에 들어선 후 담당 업무에서 문제가 발생해 중국 출장 후 복귀하지 않다가 한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국가원수는 명목상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다. 최고인민회의가 북한의 최고주권기관이면서 최고입법기관이기 때문이다. 최고인민회의는 형식적으로는 헌법과 법령의 제정 및 개정, 대내외 기본 정책 수립, 국방위원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내각 총리·중앙재판소장 선거 및 소환, 중앙검찰소장 임명 및 해임, 국가예산 승인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최고인민회의를 한국의 국회에 빗댈 수 있으므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한국의 국회의원 격(格)이라고 하겠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제111선거구에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제111선거구는 백두산 인근에 주둔한 북한군 군부대로 알려졌다.

    고인은 노동당 제2경제위원회에서 주로 일했다. 제2경제위원회는 군수 경제를 총괄하는 기관이다. 북한에서 민수 경제는 내각(총리 박봉주), 군수 경제는 제2경제위원회가 다룬다. 제2경제위원회가 핵, 미사일, 함선, 비행기, 전자장비 등과 관련된 군수공장을 통제한다. 제2자연과학원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ADD) 격으로 핵·미사일 등을 개발하는 곳이다.

    그는 수리과학자로서 해군 무기체계 관련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했다. 제2경제위원회 책임심의원으로 군사 장비 개발 여부를 심사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 제2경제위원회 같은 조직이 없기에 직위의 성격을 한국의 그것에 비견해 설명하기가 어렵다.

    고인의 아버지는 한국의 초대 항공사령관, 장모는 장택상 전 총리의 딸인데도 그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것은 1986년 6월 준공된 대동강 하구 서해갑문 설계에 참여해 성과를 거둔 후 김일성, 김정일의 ‘접견자’가 된 덕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접견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과 면담한 사람을 뜻한다. △접견자 △빨치산 유자녀 △전사자 자녀 및 영예군인 △남파공작원 자녀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공군 창설 7人 간부 중 1人

    이영무 전 사령관의 아들과 장택상 전 총리의 외손녀는 어떻게 만난 걸까.
     
    공군은 1948년 미군에게 간부교육을 받은 후 육군 내 항공부대를 조직한 7명을 ‘공군 창설 7인 간부’라는 이름으로 기록한다. 7인 간부 중 한 사람이 이 전 사령관이다. 이 전 사령관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5년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했다. 1948년 조선경비대 보병학교,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산하 항공부대 조직 작업에 참여했다. 이 전 사령관과 관련해 한국에서의 행적은 여기까지만 확인된다. 

    ‘신동아’ 2006년 1월호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불었던 군내 좌익소탕 바람에 희생됐다는 소문이 있다”고 전했으나 이는 작고한 그의 설명과 다르다. 그는 지인들에게 “선친은 6·25전쟁 때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선생과 함께 납북돼 고초를 겪다 돌아가셨다”고 말하곤 했다. 이 전 사령관을 기억하는 군 원로를 찾아보려 했으나 거의 모두 작고한 상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한 그의 이력을 볼 때 월북보다는 납북일 소지가 상대적으로 크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장택상 전 총리의 맏딸 장병민 씨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장씨는 1940년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계리부장으로 일하던 채항석 씨와 결혼했다. 채씨는 청주고보와 도쿄대를 나온 인재였는데 광복 후 남로당에서 활동했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비서 출신으로 월북했다 남로당 숙청 때 가까스로 살아남아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박갑동 씨의 수기 ‘서울 평양 북경 동경’에는 채씨 부부가 서울의 남로당 아지트를 제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채항석 씨의 장인인 장택상 전 총리가 수도경찰청장으로서 좌익 일소의 최전선에 서 있었을 때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 전 총리의 회고록과 자서전에는 자녀들 중 장녀와 관련한 언급이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통일은 곧 온다”

    채항석 씨 부부는 6·25전쟁 때 월북했다. 월북 직전 1남 1녀를 뒀는데 딸이 고인의 아내인 채효선 씨다. 장병혜 씨는 “언니 가족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으나 채씨 부부가 북한의 남로당계 숙청 때 어떻게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박갑동 씨의 책에는 “채항석 씨가 중앙당 간부부장이던 박금철의 도움으로 지방으로 추방당하지는 않고 신분이 강등된 채 평양에 남았다”고 적었다. 

    본가와 처가가 대한민국 건국의 핵심 역할을 한 가문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지만, 북한에서 50년 넘게 살다가 한국으로 망명한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통일을 보지 못했다. 고인은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통일은 곧 온다”고 말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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