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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없는 황장엽’ 北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서울에서 타계

  • 송홍근 기자|carrot@donga.com

‘얼굴 없는 황장엽’ 北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서울에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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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임시정부에서 백범 김구, 우사 김규식 귀여움 받으며 자라
  • ● 국군 초대 항공사령관 아들, 장택상 前총리 외손녀사위
  • ● 수리과학자로 北 서해갑문 설계… 무기 분야 테크노크라트
  • ● 2005년 한국으로 망명… 2년 암 투병 끝 별세
  • ● 북한 선진화 운동 투신… 통일 염원하며 삶 마쳐

‘얼굴 없는 황장엽’으로 일컬어져온 이◯◯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6월 2일 서울에서 타계했다. 2005년 5월 72세 나이로 한국으로 망명해 12년간 익명의 삶을 살았다. 북한 당국이 위해를 가할 것을 우려했으며 평양에 남은 가족의 안위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복수의 북한 노동당 출신 망명 인사는 “그가 한국으로 망명한 사실을 평양이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6월 4일 엄수됐다. 고인과 가깝게 지낸 법륜스님과 정토회 회원들이 장례를 도왔다. 상주는 고인과 함께 북한 선진화 운동을 해온 A씨가 맡았다. 고인은 “북한이 변화해야 한다”면서 2006년부터 북한 선진화 운동에 투신했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처럼 공개 활동을 하면 정부로부터 더 많은 지원과 혜택을 받았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 당국이 그의 망명 사실을 파악하고 있으나 이 글에서도 고인의 생전 뜻을 받들어 실명을 싣지 않는다.



구국전선 책임자 맡아

고인은 1997년 괴한의 총탄에 맞아 숨진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 씨를 논외로 하면 황장엽(1923~2010) 전 노동당 비서 다음으로 비중이 큰 망명 인사다. 전직 정보당국 고위 인사는 “탈북 인사 중 황장엽 비서를 논외로 하면 가장 고위직이 그분”이라고 했다.



그는 김일성에 반대하다 해외에 망명한 박갑동, 이상조, 정추 씨 등이 1991년 조직한 ‘구국전선’이라는 조직의 책임자를 2013년에 맡으면서 북한 선진화 운동의 외연을 넓혔다. 구국전선의 실제 활동은 계획보다는 활발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3~2014년에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적(籍)을 뒀다. 정부가 자문비 명목으로 활동비와 생활비를 보조해준 것이다. 2014년 6월 국정원장이 바뀐 후 자문비 지급이 종료되자 그와 가깝게 지낸 노동당 출신 탈북 인사는 “통일 과정의 자산인데, 정부 대접이 옹졸하다”고 꼬집었다.

고인은 군수산업 분야에서 일하다 망명한 B씨와 함께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진실 규명 과정에서 정부에 도움을 줬다. 청와대 고위 인사가 언론 인터뷰에서 이 같은 사실을 밝히면서 그가 망명한 사실이 공식화됐다.

“조사가 진행 중일 때 탈북인 한 명을 만났다. 북한 인민 대의원을 하다 5년 전 왔고 북한에서 해군 무기를 전문으로 한 과학자다. 만났을 때 놀랐다. 천안함 구조를 정말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의 말로는 천안함을 깨기 위한 준비를 했다는 거다.(…) 또 ‘인간 어뢰로 공격한 게 확실하다’는 거였다. ‘비날론 코팅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어뢰에 타고 가서 배 밑에서 터뜨린다는 거다. 그러면 폭발 때 옷은 녹고 그 사람들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어뢰 꼬리 부분이 남긴 하지만’이라는 게 그분 얘기였다.”(2010년 8월 12일자 중앙선데이 참조)

북한 당국이 ‘천안함 폭침’이라는 예민한 내용을 다룬 청와대 고위 인사 인터뷰 기사를 살펴보지 않았을 가능성은 0(零)에 수렴한다. 탈북 사실이 북한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그가 서울에 와 있음을 청와대가 평양에 확인해준 것이다. 고인은 당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인터뷰 기사가 나온 뒤에도 지금껏 나에게 일언반구도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유감이라는 말은커녕 이러저러한 이유로 밝히게 됐다는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한국 국회의원 격(格)

그는 북한에서 테크노크라트(과학적 지식이나 전문적 기술을 소유함으로써 사회 또는 조직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활약했다. 중국과의 군사기술 협력 업무를 맡았으며 북한과 중국을 오가면서 무기 생산 관련 일을 했다. 1990년부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2000년대에 들어선 후 담당 업무에서 문제가 발생해 중국 출장 후 복귀하지 않다가 한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국가원수는 명목상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다. 최고인민회의가 북한의 최고주권기관이면서 최고입법기관이기 때문이다. 최고인민회의는 형식적으로는 헌법과 법령의 제정 및 개정, 대내외 기본 정책 수립, 국방위원장·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내각 총리·중앙재판소장 선거 및 소환, 중앙검찰소장 임명 및 해임, 국가예산 승인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최고인민회의를 한국의 국회에 빗댈 수 있으므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한국의 국회의원 격(格)이라고 하겠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도 제111선거구에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다. 제111선거구는 백두산 인근에 주둔한 북한군 군부대로 알려졌다.

고인은 노동당 제2경제위원회에서 주로 일했다. 제2경제위원회는 군수 경제를 총괄하는 기관이다. 북한에서 민수 경제는 내각(총리 박봉주), 군수 경제는 제2경제위원회가 다룬다. 제2경제위원회가 핵, 미사일, 함선, 비행기, 전자장비 등과 관련된 군수공장을 통제한다. 제2자연과학원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ADD) 격으로 핵·미사일 등을 개발하는 곳이다.

그는 수리과학자로서 해군 무기체계 관련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했다. 제2경제위원회 책임심의원으로 군사 장비 개발 여부를 심사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에 제2경제위원회 같은 조직이 없기에 직위의 성격을 한국의 그것에 비견해 설명하기가 어렵다.

고인의 아버지는 한국의 초대 항공사령관, 장모는 장택상 전 총리의 딸인데도 그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것은 1986년 6월 준공된 대동강 하구 서해갑문 설계에 참여해 성과를 거둔 후 김일성, 김정일의 ‘접견자’가 된 덕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접견자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과 면담한 사람을 뜻한다. △접견자 △빨치산 유자녀 △전사자 자녀 및 영예군인 △남파공작원 자녀는 특별대우를 받는다.


탈북 北외교관은 태영호 외 5人

황장엽 전 비서 망명 이후 한국에 들어온 북한 출신 인사 중 직위가 가장 높다고 할 수는 있으나 북한에서 그가 최고위직에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황 전 비서는 북한에서 정치국 위원을 지냈다. 정치국 후보위원은 돼야 북한에서 최고위직으로 대접받는다. 한국에 망명한 인사 중 후보위원 이상을 지낸 이는 황 전 비서가 유일하다. ‘얼굴 없는 황장엽’이라는 표현도 과장된 측면이 있는 것이다.

언론이 망명 인사들에게 ‘최고위급’이라는 표현을 남발하면서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한국에 대거 들어와 있다는 오해가 생기게 한 측면이 있다. 정치국 후보위원을 비롯해 북한군 장성이나 당중앙위원회 부부장급 인사가 황장엽 전 비서 망명 이후 탈북해 한국에 들어온 경우는 없다. 

2016년 한국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으로 이주한 이정호 씨를 두고 언론은 ‘김정은의 금고지기’ ‘부부장급’ ‘최고위급 탈북민’이라는 수식을 붙였으나 그 역시 최고위급은 아니다. 39호실이 김정은의 금고지기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39호실 업무의 일부일 뿐이다. 이정호 씨의 마지막 직함은 노동당 39호실 산하 중국 다롄 주재 대흥총회사 지사장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로스앤젤레스 무역관장에 빗댈 수도 있는 직위지만 한국으로 망명한 이들 중에서는 북한 외교관들과 함께 한 손에 꼽힐 만큼 고위직에 속한다. 

한국으로 망명한 북한 외교관 출신 인사는 5명으로 확인된다.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를 지낸 태영호 씨는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적을 둔 전직 북한 외교관이 4명이나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공개된 망명 외교관으로는 고영환(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현성일(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씨, 비공개 인사로는 K, H씨가 있다. 태 전 공사는 K씨를 보고는 “여기 와 있었습니까” 하면서 놀랐다고 한다. 



장제스 군대 출신의 조종사

‘얼굴 없는 황장엽’으로 일컬어져온 생전의 그를 여러 차례 만났다. 북한 군수산업과 관련한 내용을 취재하면서 견해를 듣고자 이따금 통화도 했다. 그가 들려준 가족사(史)는 기구하기 짝이 없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 조종사 출신의 선친이 대한민국 공군 창설 멤버 중 한 명이다.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외손녀사위이기도 하다. 독립운동을 한 부친 덕분에 김구, 김규식 선생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전직 정보당국 고위 인사는 “가족사와 관련한 그의 얘기는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영무 초대 항공사령관이다. 그는 한국의 지인들에게 “선친은 임시정부에서 일했고 6·25전쟁 때 납북돼 북한에서 돌아가셨다”면서 “선친이 유언으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해 반세기 넘는 시간이 흐른 후 탈북해 한국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 말년의 그는 8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선진화와 통일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려고 애썼다고 한다.
 


“효선이 남편이 왔단 말이냐”

‘신동아’ 2006년 1월호에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제하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가 정보당국의 보호를 받을 때 작성된 것으로 망명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상황에서 게재됐다. 이 기사는 포털의 ‘뉴스’ 카테고리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당시 기사의 도입부를 읽어보자. 

“한국의 초대 외무장관과 3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의 셋째 딸 장병혜 씨는 2005년 10월 말 신분을 밝히지 않은 한 젊은 남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1964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 40여 년간 외국에서 생활하면서 다양한 일을 겪었지만, 그처럼 묘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당신의 조카사위, 그러니까 월북한 당신 언니의 사위가 남한에 왔다.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장씨가 ‘효선이 남편이 왔다는 말이냐’고 되묻자 남자는 ‘그렇다’고 답했다.  

장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고 말한다. 자신이 아직 성인이 되기 전에 헤어진 큰언니의 딸, 그러니까 불과 여섯 살 때 마지막으로 본 조카 효선이의 남편이 서울에 있다는 이야기였다. 장씨가 ‘조카는 어디 있나, 그 아이도 함께 탈북했느냐’고 묻자 남자는 ‘그건 아니다. 남편 혼자 내려왔다’고 답했다.

평소 자주 가던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은 후 장씨는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1970년대 말 최은희·신상옥 부부 납치사건으로 뒤숭숭하던 무렵 일본에서 생활하던 장씨는 납치 미수를 경험한 적이 있다. 갖가지 걱정이 앞선 장씨는 이런 일에 정통한 지인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했다. 결국 나가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전화를 걸어 온 남자는 자신의 연락처를 남기지 않았다.

고민 끝에 장씨는 약속 장소에 아들을 내보냈다. 아들에게도 이들과 접촉하지는 말고 먼발치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오는지 지켜보라고 당부했다.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은 ‘젊은 남자와 노인 한 명이 와서 한참을 기다리다 가더라’고 전했다. 노인은 큰 키에 서울말씨를 썼다고 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노인이 이번에 작고한 인물이고, 젊은 남자는 국정원 관계자다. 고인이 정보당국의 힘을 빌려 한국의 핏줄을 찾은 것이다. 

장씨는 ‘신동아’에 “언니 가족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10년 동안 극도의 분노를 겨우겨우 억누르며 살아왔다”면서 “설령 그가 조카사위라고 해도, 자신이 망명을 택하는 순간 아내와 자식은 엄청난 고초를 겪으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혼자 빠져나온 사람이라면 만날 이유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신동아’는 6월 2일 그가 타계한 후 장병혜(1932년생) 씨의 미국 연락처를 수소문해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공군 창설 7人 간부 중 1人

이영무 전 사령관의 아들과 장택상 전 총리의 외손녀는 어떻게 만난 걸까.
 
공군은 1948년 미군에게 간부교육을 받은 후 육군 내 항공부대를 조직한 7명을 ‘공군 창설 7인 간부’라는 이름으로 기록한다. 7인 간부 중 한 사람이 이 전 사령관이다. 이 전 사령관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추천을 받아 1925년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한 후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했다. 1948년 조선경비대 보병학교,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산하 항공부대 조직 작업에 참여했다. 이 전 사령관과 관련해 한국에서의 행적은 여기까지만 확인된다. 

‘신동아’ 2006년 1월호는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 이후 대대적으로 불었던 군내 좌익소탕 바람에 희생됐다는 소문이 있다”고 전했으나 이는 작고한 그의 설명과 다르다. 그는 지인들에게 “선친은 6·25전쟁 때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선생과 함께 납북돼 고초를 겪다 돌아가셨다”고 말하곤 했다. 이 전 사령관을 기억하는 군 원로를 찾아보려 했으나 거의 모두 작고한 상황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군대에서 활약한 그의 이력을 볼 때 월북보다는 납북일 소지가 상대적으로 크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장택상 전 총리의 맏딸 장병민 씨의 삶도 파란만장하다. 장씨는 1940년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계리부장으로 일하던 채항석 씨와 결혼했다. 채씨는 청주고보와 도쿄대를 나온 인재였는데 광복 후 남로당에서 활동했다.

남로당 당수 박헌영의 비서 출신으로 월북했다 남로당 숙청 때 가까스로 살아남아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한 박갑동 씨의 수기 ‘서울 평양 북경 동경’에는 채씨 부부가 서울의 남로당 아지트를 제공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채항석 씨의 장인인 장택상 전 총리가 수도경찰청장으로서 좌익 일소의 최전선에 서 있었을 때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 전 총리의 회고록과 자서전에는 자녀들 중 장녀와 관련한 언급이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통일은 곧 온다”

채항석 씨 부부는 6·25전쟁 때 월북했다. 월북 직전 1남 1녀를 뒀는데 딸이 고인의 아내인 채효선 씨다. 장병혜 씨는 “언니 가족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으나 채씨 부부가 북한의 남로당계 숙청 때 어떻게 됐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박갑동 씨의 책에는 “채항석 씨가 중앙당 간부부장이던 박금철의 도움으로 지방으로 추방당하지는 않고 신분이 강등된 채 평양에 남았다”고 적었다. 

본가와 처가가 대한민국 건국의 핵심 역할을 한 가문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의 귀여움을 받고 자랐지만, 북한에서 50년 넘게 살다가 한국으로 망명한 그는 죽을 때까지 끝내 통일을 보지 못했다. 고인은 타계하기 직전까지도 “통일은 곧 온다”고 말해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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