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2월호

조선시대 궁중음식 A to Z

날고기 스토커연산군, 불고기 마니아 광해군

  • 글: 한복진 전주대 교수·문화관광학 hanbokjin@yahoo.co.kr

    입력2003-11-27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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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하는 궁중요리가 화제다.
    • 드라마에 나오는 궁중음식은 사실 그대로를 재현한 것일까.
    •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상궁 한희순으로부터 궁중요리를 전수받은 황혜성 교수의 막내딸이자 전통문화음식을 전공한 한복진 교수가 말하는 하루 다섯 끼의 식사, 임금이 물린 음식을 먹는 궁녀들, 남자들이 만드는 연회음식 등 조선시대 궁중요리의 모든 것.
    조선시대 궁중음식 A to Z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가 날로 치솟고 있다. 그 비결은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매회 등장하는 새롭고도 진귀한 궁중음식이다. 궁중 수라간 나인(內人)들이 선보이는 궁중음식은 재미를 더하기 위해 꾸민 부분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문헌과 고증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라 음식을 실제로 만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현장감이 생생하다.

    드라마 ‘대장금’은 장금이가 천민 신분으로 다섯 살에 궁녀로 들어와 최고 주방상궁이 되고, 급기야 숱한 남자 의관(醫官)들을 제치고 임금의 주치의에 올라 중종의 사랑을 받는다는 스토리로 전개된다. 드라마에서 장금은 뛰어난 의술과 높은 학식으로 당시 엄격했던 신분제도를 뛰어넘어 최고 자리에 오르는 전문직 여성으로 그려진다.

    장금은 의녀였을 뿐

    장금(長今)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수백 명의 의녀(醫女) 중 유일하게 임금의 주치의에 오른 실존 인물이다. 중종(1506~44) 때 왕족의 병환 치료에 큰공을 세웠다 하여 이름 앞에 큰 대(大)를 붙여 대장금이라 불렸다.

    ‘조선왕조실록’ 중 ‘중종실록’에 장금에 대한 기록이 10여 차례 나온다. 중종 10년(1515) 3월에 왕이 말씀하기를 “대저 사람의 사생(死生)이 어찌 의약(醫藥)에 관계되겠는가? 그러나 대왕전에 약을 드려 실수한 자는 논핵하여 서리(書吏)에 속하게 함은 원래 전례가 있었다. 왕후에게도 또한 이런 예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니, 전례를 상고하여 아뢰라. 또 의녀인 장금은 호산(護産)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마침내는 대고(大故)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상은 베풀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형장을 가할 수는 없으므로 명하여 장형(杖刑)을 속바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 양단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는 뜻이다.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장금이 약을 잘못 올려서 벌을 내려야 하는데 이전에 대비가 해산할 때 공을 세우고도 미처 상을 내리지 못하였으니 이를 참작하여 벌을 줄여 장형을 내리라는 분부이다.



    중종 17년(1522) 9월에는 대비의 병세가 호전되자 의녀 장금에게 쌀과 콩을 각각 10석씩 내렸다. 또 중종 19년(1524)에는 장금에게 대내(大內)에 출입하며 간병을 전속으로 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이밖에도 대전과 대비전의 병 회복에 공을 세운 기록 등이 나온다. 장금은 15세부터 45세까지 활약했고, 25세 때 왕가의 전속 의녀로 공을 인정받았다. 기록으로만 보면 장금은 의녀일 뿐 수라간 나인이었거나 중종의 사랑을 받은 여인이었음은 전혀 확인할 수가 없다.

    드라마 ‘대장금’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궁중음식에 대해 알아보자. 궁중음식에 대한 문헌이나 기록은 조선시대 전기까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궁중음식은 단군 이래 조선왕조까지 왕권국가가 이어졌던 4000년 역사와 그 세월을 같이한다.

    궁중음식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왕권이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식품과 조리법이 다양해진 고려시대부터다. 개성음식이 전국에서 가장 맛난 향토음식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은 고려왕조의 도읍지였던 개성이 궁중음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의 사대부가에서 궁중과의 빈번한 교류를 통해 궁중음식과 유사한 음식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궁중은 당대 최고의 부와 권력이 집중된 곳이기는 하지만, 그 음식이 민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이는 동성동본과 결혼하지 않는 우리 조상들의 혼인 관습에서 연유한다. 왕족은 사대부가와 인연을 맺어 궁중의 생활양식을 비롯한 모든 문화를 사대부가와 교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식생활 풍습이 궁중에서 민가로, 민가에서 궁중으로 자연스레 전해지게 된 것이다. 궁중 잔치가 열리면 궁 밖의 고관이나 인척 집에 음식을 하사하고, 왕족에 축하 드릴 일이 있을 땐 민가에서 음식을 궁중에 진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궁중에는 전국 각 고을에서 올라온 온갖 진귀하고 질 좋은 재료들이 모였고, 조리 기술이 뛰어난 주방 상궁들과 대령숙수들이 대대로 그 솜씨를 후손에게 전했기 때문에 궁중음식은 한국 음식의 정수(精髓)라고 일컬어진다. 한편 궁중에서는 국가적 행사나 외국 사신의 방문, 왕족의 탄일 및 가례 때마다 큰 잔치를 벌였기 때문에 연회음식이 유난히 발달했다. 궁중 잔치나 의례 때 차리는 고임상차림과 예법들은 민가에 전해져 혼례나 회갑 등 민가의 잔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왕족들의 일상적인 식생활은 어땠을까? 아무리 왕족이라 해도 매일 먹는 식사가 백성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임금의 진지는 ‘수라’라 했는데, 이는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사위의 나라)이었던 고려 말기 몽골어에서 전해진 말이라고 한다.

    궁중의 일상식에 대한 문헌 자료는 연회식 자료보다 훨씬 부족한 형편이라 실제로 어떤 임금이 무엇을 들었는지는 거의 알 수 없다. 궁중의 일상식을 전해주는 문헌으로는 유일하게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가 전해진다. 이는 정조 19년(1795)에 모후인 혜경궁 홍씨의 갑년(甲年·회갑)을 맞아 화성(華城)의 현융원(顯隆園)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푼 기록이다.

    이 의궤 찬품조에는 왕과 자궁(慈宮)과 여형제들이 한성 경복궁을 출발하여 화성에 가서 진찬(進饌)을 베풀고 다시 환궁하는 8일 동안 왕족들에게 올린 음식과 공궤(供饋), 진찬, 양로연 등 잔치에 쓰인 음식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행행(行幸)하는 도중에 이동식 소주방에서 마련한 반수라상, 죽수라상, 응이상, 고임상, 그리고 다과상에 해당하는 다소반과(茶小盤果)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다.

    ‘영조실록’은 ‘대궐에서 왕족의 식사는 고래로 하루 다섯 번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른 아침의 초조반(初早飯)과 아침저녁 때의 두 차례에 걸친 수라상, 점심때의 낮것상, 그리고 야참(夜食)까지 총 다섯 번의 식사를 말한다. 이른 아침 초조반으로는 미음, 응이, 죽 등을 가볍게 먹었고, 아침수라(朝水剌)는 오전 10시경, 저녁수라는 5시경에 들었다. 낮것상에는 간단한 장국상이나 다과상을 올렸고, 야참으로는 면, 약식, 식혜 또는 우유죽 등을 올렸다.

    그러나 왕 자신의 인생관에 따라서는 사치스러운 산해진미(山海珍味)를 즐기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검박(儉朴)함을 몸소 실천하는 현주(賢主)도 있었다. 연산군은 날고기를 좋아하여 한 고을에서 하루 7마리의 생우를 잡게 했고, 광해군은 불고기만 즐겼다고 ‘계축일기’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영조는 하루 세 차례만 식사하였고, 정조는 찬품(饌品)을 서너 그릇 이외에는 더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나온다.

    궁궐 안에는 대전, 대비전, 세자전, 대왕대비전 등 전각이 각각 따로 있었고, 각각의 전각마다 수라간이 딸려 있어 제각기 딸린 주방에 수라간 나인들이 배속되었다. 임금은 평소 침전에서 수라를 들었으니 경복궁에서는 교태전에서, 창덕궁에서는 대조전에서 수라를 들었을 것이다. 마지막 임금인 순종과 윤비는 겨울에는 대조전의 등온돌(순종의 침실)에서, 여름에는 대청마루에서 수라상을 받았다. 순종과 윤비는 겸상이 아니라 나란히 일자로 앉아 각각 독상을 받아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드라마 ‘대장금’에는 여러 궁녀가 둘러서 있는 가운데 임금이 수라상을 받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드라마에서는 붉은 상 두 개, 전골상 3개가 한자리에 차려진 12첩 수라상이 나온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종 임금 당시의 수라상에 대한 문헌적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아 300년 후인 1800년대 고종 임금의 수라상차림을 재현한 것이다.

    수라상은 12첩 반상차림으로 수라와 탕 두 가지씩과 김치, 조치, 찜 등 12가지 찬물로 구성된다. 백반(白飯)과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밥인 붉은 빛의 홍반(紅飯) 두 가지를 수라기에 담는다. 탕은 미역국(藿湯)과 곰탕 두 가지를 모두 탕기에 담아 올려 그날그날 먹고 싶은 수라와 탕을 고를 수 있게 한다. 조치는 토장조치와 젓국조치 2가지를 준비하고 찜, 전골, 침채 3가지와 청장, 초장, 윤집(초고추장), 겨자집 등을 종지에 담아 차린다. 쟁첩(반찬그릇)에는 12가지 찬물을 사용해 육류, 어패류, 채소류, 해초류 등 다양한 식품재료로 조리법을 각각 달리하여 만든 반찬을 담는다. 더운 구이, 찬 구이, 전유화(전유어), 편육, 숙채(나물), 생채, 조리개(조림), 장과(장아찌), 젓갈, 마른찬 그리고 별찬으로 회와 수란 등을 올린다.

    언제부터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수라상에는 쌀밥과 팥밥 두 그릇을 함께 놓는 풍속이 있었다. 그러나 고종과 순종은 팥수라는 뚜껑도 열어보지 않았다 하고, 윤비는 팥수라를 좋아했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흰밥만 먹었다고 한다.

    수라는 화로에 숯불(白炭)을 담아놓고 새옹이라고 하는 곱돌솥에 꼭 두 그릇씩만 지었다. 이름난 지방에서 진상된 쌀로 지어 밥 끓는 냄새가 마치 잣죽 끓이는 냄새같이 고소했다고 한다. 팥수라는 팥 건더기를 뺀 팥 즙만 가지고 쌀을 물들여 고운 분홍빛이 도는 밥이었다. 팥 건더기를 쓰지 않는 것은 꺼칠꺼칠한 것이 입안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조선시대 궁중음식 A to Z

    신선로(위)와 구절판(아래)는 평소 수라상과 연회 진어상에 자주 올랐던 궁중음식이다.

    밥과 찬을 담는 그릇을 반상기라고 한다. 수라상의 식기는 모두 은그릇(銀器)이었는데 고종과 순종 때 쓰던 것은 ‘이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수저는 연중 은수저를 사용했다. 반상기는 추석부터 다음해 단오 전까지는 은기를 쓰고, 단오에서 추석 전까지는 사기(砂器)를 썼다고 한다.

    수라상은 큰 원반, 곁반인 작은 원반, 그리고 모반 등 3개 상에 차려진다. 왕과 왕비가 앉는 대원반은 붉은 색의 주칠(朱漆)을 하고 중자개로 문양을 넣거나 다리에 용틀임 장식을 조각했다. 작은 원반은 별찬과 차수, 그리고 기미(氣味)할 공기와 젓가락 등을 올려놓는 곁반이다. 모반에는 전골과 기름, 장 등을 담아놓는다.

    반상기에 올라가는 것 중 은그릇인 수라기가 가장 큰 주발이었다. 탕은 수라기보다 한 둘레 작은 갱기(羹器)에 담고, 조치는 갱기보다 한 둘레 더 작은 조치보에 담았다. 찜은 조반기(朝飯器·꼭지가 달린 뚜껑이 있는 대접)나 합에 담고, 침채(김치)류는 쟁첩보다 큰 보시기에 담았다. 열두 가지 찬품은 뚜껑이 있는 납작한 쟁첩(錚貼)에 담고 청장, 초장, 젓국, 초고추장 등은 종지(鍾子)에 담는다. 차수는 숭늉도 쓰지만 대개 곡차를 대접에 담고 쟁반을 받쳐서 곁반에 올렸다.

    점심은 간소하게

    아침 수라는 보통 10시경에 올려지므로 보약을 들지 않는 날에는 유동식으로 보양이 되는 죽이나 응이, 미음 등을 이른 아침에 드린다. 죽으로는 흰죽, 잣죽, 타락죽(우유죽), 깨죽, 흑임자죽, 행인죽 등을 올렸다. 미음으로는 차조와 인삼, 대추, 황률 등을 한데 고아 만든 차조미음이나 찹쌀과 마른 해삼, 홍합, 우둔고기로 만든 삼합미음을 올렸다. 응이는 율무, 갈분, 녹말, 오미자 등으로 만들어 초조반상에 올렸다.

    초조반상의 상차림은 아주 간단하다. 죽이나 미음은 합에 담고, 찬품은 마른 찬(어포, 육포, 암치보푸라기, 북어보푸라기, 자반 등) 두세 가지와 국물김치(나박김치나 동치미)와 소금이나 새우젓국으로 간을 한 맑은 조치가 전부이다. 그리고 죽의 간을 맞출 소금, 꿀, 청장(간장) 등을 종지에 담고, 따로 덜어먹을 빈 공기를 놓았다.

    순종 승하 후 윤비는 5개월 동안 조미음, 쌀미음, 흑임자죽으로만 끼니를 때웠다. 윤비를 모시고 있는 상궁, 나인, 찬시까지 죽만 먹었는데, 미음은 양반집에서 번갈아가며 만들어보냈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평소에 조석으로 수라상을 차리는 대신, 낮것(점심)으로는 간단한 응이나 미음, 죽 등을 내어놓았다. 순종은 오후 2시쯤 낮것으로 간단한 간식을 들었는데,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오늘 간식은 참외와 제호탕을 먹어볼까’ 하는 식으로 주문했다고 한다.

    탄신일이나 명절 등 특별한 날에는 낮것으로 면상을 차린다. 궁 밖에서 친척이나 손님이 점심시간에 방문하면 국수장국을 차려 대접한다. 진찬이나 진연 등 궁중의 큰 잔치 때는 병과, 생실과, 찬물 등을 고루 갖추어 높이 고이는 고임상을 차린다. 실제로 먹는 음식으로는 주로 국수와 찬물을 차린다.

    주식으로는 온면, 냉면 또는 떡국, 만두 중 한 가지를 차리고, 찬물로 편육, 회, 전유화, 신선로 등을 차린다. 면상에는 반상에 오르는 찬물인 장, 젓갈, 마른찬, 조리개 등을 놓지 않으며, 김치로는 국물이 많은 나박김치, 장김치, 동치미 등을 놓는다.

    고종이 즐기던 냉면에는 국수 가운데에 십자 모양으로 편육을 얹고 나머지 빈 공간에 배와 잣, 그리고 황백지단채를 얹었다고 한다. 국물은 육수 대신 동치미 국물을 넣었는데 이 동치미는 배를 많이 넣어 담가 국물이 무척 달고 시원하였다고 한다.

    드라마 ‘대장금’에는 임금이 사냥할 때 중식으로 냉면을 만들면서 광천수를 동치미에 섞어 장국이 더욱 시원한 냉면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광천수에는 발포성이 있는 탄산가스가 들어 있어 쏘는 물맛으로 냉면국물을 더욱 시원하게 만들 수 있다.

    드라마에서 중종은 수라를 들 때도 곤룡포와 입석관을 쓴 상복(常服) 차림을 하고 있다. 중전과 대비도 원삼으로 성장을 하고 수라상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왕족들은 편안한 복장을 하고 수라를 받았다고 한다. 순종의 비인 윤비는 수라를 들 때 평상복으로 송화색(누른빛) 소고의에 남색 치마를 입었는데, 휘건(揮巾·냅킨)을 두르지 않고 식사한 날에는 식사를 마친 후 또 다른 송화색 소고의와 남치마로 갈아입었다고 한다.

    가장 나이가 많은 상궁이 기미(氣味)를 담당했다. 기미상궁이란 왕보다 앞서 음식 맛을 보는 상궁을 말하는데,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검사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으나 거의 의례적인 절차로 간주됐다. 기미상궁은 곁반에 놓인 여벌의 수저와 빈 그릇을 이용해 음식을 덜어 손으로 집어먹었다고 한다. 수라와 탕은 기미를 보지 않았고, 기미를 본 후에는 왕이나 왕비께 ‘잡수십시오’라고 아뢴다. 또 두 명의 상궁이 식사 중 시중을 드는데, 되도록 젊은 나인이 시중을 들게 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임상과 진어상

    궁중에서는 1년 내내 행사와 잔치가 빈번하게 열렸다. 정월, 단오, 추석, 동지 등 명절과 궁내의 왕족들의 탄일과 같은 연중 행사를 비롯하여, 궁 밖에 사는 종친들의 생신에도 잔치가 열렸다. 왕손의 관례나 가례, 병 회복 등 경사가 있을 때에는 비교적 규모가 적은 잔치가 베풀어졌다.

    왕, 왕비, 대비 등의 회갑과 탄신, 사순(四旬), 오순(五旬), 망오(望五·41세), 망육(望六·51세) 등의 특별한 날이나존호(尊號)를 받는 날, 왕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날, 왕세자 책봉이나 가례, 외국의 사신을 맞는 날, 이 밖에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왕의 윤허(允許)를 받아 큰 잔치가 열렸다.

    큰 잔치가 열리기 전에는 임시관청인 진찬도감, 진연도감, 진작도감 등을 설치해 제반 사항을 진행했다. 큰 규모의 잔치인 진찬, 진연, 진작 등의 설행 전모를 기록한 의궤(儀軌)와 등록(謄錄)은 오늘날에도 많이 전해진다. 간혹 남아 있는 계병(契屛)의 그림이나 연회도 등을 통해서 그 장려한 광경을 짐작할 수 있다.

    진연과 진찬 때는 도감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의식 절차와 정재(呈才·궁중의 무용과 음악)를 여러 차례 습의(習儀·예행연습)한다. 큰 규모의 잔치는 이틀 또는 삼일에 걸쳐서 네 차례에서 여섯 차례의 연회를 베푼다. 연회를 설행하는 전각이 정해지면 반차도(班次圖)에 의거하여 여러 가지를 차비하여 배설한다.

    큰 잔치 때는 연회 일자별로 차리는 찬안(饌案)의 규모, 종류, 음식의 이름을 적은 찬품단자(饌品單子·메뉴)를 만든다. 찬품단자란 한 상에 차리거나 한번에 사찬하는 전품목, 또는 한끼에 대접하는 음식을 모두 모아 두루마리 종이에 정연하게 적은 것으로 음식건기(飮食件記)라고도 한다.

    잔치를 하는 동안에는 대전, 대왕대비께 고임상과 진어상을 여러 차례 올리고 참석한 왕족이나 제신, 친척, 좌우명부 등과 수고한 악공, 정재여령, 군인 등 참석자 전원에게 차등을 두어 수십 가지의 상을 마련한다.

    잔치 때 왕이 받는 상은 진어상(進御床) 또는 어상(御床)이라고 불린다. 진어상에 차리는 음식의 종류, 품수, 높이 등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정해진 규정은 없다. 현존하는 진찬의궤의 찬품조를 보면 시대에 따라 음식의 종류, 품수, 고임의 높이에 약간씩 차이가 있었으나 기본적으로 병과류·생과류·찬품류·음청류 등 대개 50가지 이상의 음식을 마련했다. 큰상인 고임상은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아무도 먹지 못한다. 실제로 먹는 상은 별도로 마련하는데, 별찬안(別饌案)이나 술잔을 함께 올리는 진어미수(進御味數), 진소선(進小膳), 진대선(進大膳), 진탕(進湯), 진만두(進饅頭), 진과합(進果?) 등이다.

    고임상은 음식에 따라 높이를 달리한다. 떡과 과자·생과류는 1자3치에서 1자7치 정도로 가장 높이 고인다. 숙실과는 이보다 조금 낮게, 전유화·편육·화양적·회 등의 찬품은 조과류보다 더 낮게 고인다. 고임 음식 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화려한 꽃으로 장식하는데 이를 상화(床花)라고 한다. 그리고 화채·찜·탕·열구자탕·장류 등 물기가 많은 음식은 고일 수 없고, 국물이 있는 음식은 상화를 꽂지 못한다.

    남은 잔치음식 민가로 보내

    상을 물린 후에는 진찬에 올렸던 음식을 종친이나 신하에게 하사했다. 대개 한지로 한 가지씩 음식을 싸서 보냈기 때문에 종친마다 받는 음식이 달랐다. 이 음식들은 음식을 나르는 데 쓰는 들것인 가자(架子)에 실려 교군이 앞뒤로 끌고 다니며 나눠주었다.

    궁중 주방은 화재의 염려가 있어 반드시 침전과 떨어져 있는 건물에 배치한다. 수라를 만드는 곳을 수라간(水剌間) 또는 소주방(燒廚房)이라고 하는데, 소주방은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뉜다. 궁중 연회 때는 임시로 가가(假家)를 지어 설치한 주방을 숙설소, 또는 내숙설소(內熟設所)라고 하였다.

    안소주방(內燒廚房)에서는 왕과 왕비의 평상시 조석 수라상과 낮것 때 주식에 따르는 각종 찬품(饌品)을 맡아 한다. 식전의 자리조반, 낮것, 야참 등은 생과방과 협조하여 올린다. 밖소주방(外燒廚房)은 주로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 때의 음식을 장만하는 곳이다. 궐내 잔치는 물론 탄일 잔치상과 차례, 고사 등도 담당한다. 왕자녀의 백일이나 탄일에는 백설기를 몇 십 시루씩 쪄서 궁내의 각궁과 종친, 외척에 골고루 돌리는 일도 담당하였다.

    생과방(生果房)은 수라 이외에 후식에 속하는 것, 즉 생과, 숙실과, 조과, 차, 화채, 죽 등을 만들었다. 조석 수라상은 소주방 나인을 도와 거행했고, 잔치음식 다과류를 관장했다. 궁 안 여러 곳에 염고(鹽庫)와 장고(醬庫)가 있어서 동궐도에도 여러 곳에 장독들이 즐비한 장독대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장뿐만 아니라 김치나 젓갈 등도 저장하였다.

    퇴선은 상을 물린다는 뜻이지만, 지밀(至密)에 위치한 퇴선간은 수라상을 차려서 올리는 중간 부엌 역할을 했다. 수라는 곱돌솥이나 새옹에 백탄을 피워서 짓고, 안소주방에서 만들어온 음식 중 국이나 구이 등을 다시 데워서 상을 차린다. 제조상궁이 수라 시간을 알리면 수라상을 들이고, 물린 수라상을 이곳에서 처분한다. 수라상 물림이 나오면 지밀상궁과 나인들이 상머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이때 노상궁부터 차례로 먹는데, 부족한 찬이나 밥은 안소주방에서 갖다 먹었다고 한다.

    사옹원(司饔院)은 임금의 식사(御饍)와 대궐 안 음식물의 공급(供饋)을 맡아하는 관청으로, 세조 13년(1467)에 실무직·자문직·잡직의 녹관을 두었다. 고종 때에 전선사(典膳司)로 개편하였으며 일명 주원(廚院)이라 하였다. 고종 19년(1882) 내자시(內資寺)가 폐지된 뒤 내자시에서 맡던 쌀·국수·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및 내연(內宴)과 직조 등의 일도 함께 맡았다. 사옹원은 어물이 많이 잡히는 한강과 해안가 여러 곳에 어소(魚所)를 두고 관망을 쳐서 어물을 잡아 공상(供上)하였다. 행주·안산 등의 어소에서 잡은 위어(葦魚)·소어(蘇魚)는 별미로 꼽혔으며, 광주(廣州)에는 관요(官窯)인 자기요를 설치하여 좋은 자기를 구워 궁궐에 공급하였다.

    잔치 음식은 대령숙수가 담당

    궁녀는 왕의 사생활이 영위되는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의식주에 사역되는 여성들이다. 궁인들은 내명부에 속하는데 가장 낮은 직급은 종9품이고, 가장 높은 궁녀는 정5품인 상궁으로 귀하신 분을 모시는 소임을 갖는다. 궁녀 중 음식과 관련된 직무를 맡는 이는 상궁(尙宮·정5품)이 가장 높고, 그 아래로는 상식(尙食·종5품), 전선(典膳·정7품)이 있다. 세자궁에는 장찬(掌饌·종7품), 장식(掌食·종9품)이 속했다. 궁인직은 세종 10년(1428)에 내관을 정비하면서 사선(司膳)으로 설정된 것이 칭호만 변경되어 법으로 정해졌다. 이들은 궁중의 소주방이나 수라간에서 왕과 왕족의 일상 식사와 잔치의 찬품을 맡아보았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평상시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을 조리하는 일은 주로 주방 나인들이 담당했다. 주방 나인은 다른 처소의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13세에 입궁하여 궐 안에서 윗 상궁을 스승처럼 모시며 견습한다. 관례는 입궁 후 15년이 지나서 치르는 것이 원칙으로 일종의 성년식이자 결혼식이나 다름없다. 관례 후 정식 나인이 되며 다시 15년이 지나야 상궁의 봉첩을 받는다.

    나인은 연주와 직분에 따라 종5품에서 종9품까지의 지위를 받는다. 이러한 지위체계 때문에 대개 40세가 지나야 주방상궁에 오르는데, 이때는 조리경험이 30년 이상이나 되는 전문 조리인이 된다. 주방 나인들은 다른 나인들과 같이 옥색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는다. 작업할 때는 소매를 올려 접고 보라색의 홑적삼을 겹쳐 입으면서 흰색 앞치마를 산뜻하게 둘렀다고 한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최상궁과 한상궁이 최고 상궁의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 하지만 실제로 궁녀의 직급 중에 ‘최고 주방상궁’이란 명칭은 찾아볼 수 없다. 또 장금이가 입고 나오는 흰색 작업복은 드라마에서 새로이 고안한 앞치마이다.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주방상궁들이 평상시의 수라상 음식을 만들었고, 궁중 잔치 때는 대령숙수(待令熟手)라는 남자 조리사들이 음식을 만들었다. 솜씨 좋은 숙수는 대부분 대를 이어가며 궁에 머물렀고, 그 중엔 왕의 총애를 받은 이도 많았다. 조선말, 나라가 망한 후 숙수들이 시중의 요정(料亭)으로 빠져나가 일하게 되면서 궁중의 연회음식이 일반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 대령숙수인 강덕구가 집에서 만든 술을 궁중에 대는 일을 한다. 그러나 궁중에서는 술을 담당하는 관청인 사온서가 별도로 있었다. 숙수란 음식을 만드는 사람이지 술을 빚는 사람이 아니었고, 더구나 궁중에 식품재료를 대는 일을 맡지는 않았을 터인데 극중에서는 다양한 역할을 도맡고 있는 것이다.

    무형문화재로 이어지는 궁중요리

    조선시대의 마지막 주방상궁은 한희순(韓熙順, 1889∼1972)이다. 그는 서울 왕십리에서 출생하여 광무 5년(1901)인 13세 때 덕수궁으로 입궁했다. 1907년 경복궁에서 수라상궁으로 일하기 시작해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금곡릉에서 3년상을 받들었다. 1965년까지 창덕궁 낙선재 윤비전의 수라상궁을 지내다가 윤비의 3년상을 지낸 후 1968년 사저에 돌아와 지내다 1972년 작고했다. 한희순의 궁중요리는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한 황혜성 교수에게 이어졌다. 황교수는 30여 년간 한희순을 모시면서 궁중음식 기능을 전수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보유자가 되었다. 현재 드라마 ‘대장금’의 음식 자문을 맡고 있는 한복려 원장은 황교수의 장녀로 그 뒤를 이어 궁중음식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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