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자율성, 인센티브 없이는 비효율, 무사안일 못깬다”

  • 이형삼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03 13: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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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년 5월, 갓 출범한 새 정부의 행정·재정개혁 임무를 맡은 기획예산위원회(현 기획예산처)는 민간 출신의 전문인력을 계약직 공무원으로 대거 발탁, 개혁의 밑그림을 맡겼다. 각계의 추천과 엄정한 심사를 거쳐 대학교수 변호사 회계사 연구원 등 14명의 민간 전문가들이 2∼5급직에 채용됐고, 이들은 ‘정부개혁실’에 소속되어 정부 경영진단과 조직개편, 공기업 민영화, 정부 출연기관 정비 등 핵심적인 개혁작업을 추진했다.

    이들의 활동은 두 가지 면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지금껏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을 다짐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개혁의 칼이 정작 정부 조직을 향하면 용두사미가 되고 말았다. 개혁의 주체가 곧 개혁의 대상이기도 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행정개혁과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민간 인력에게 칼자루를 쥐어준 이상 전에 없던 성과를 기대할 만했다. 당시 정부개혁실은 민간 계약직과 일반 공무원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 있었으나 민간 출신들이 공공기획단장과 주요 팀장을 맡아 실무를 이끌었다.

    또한 이들은 국가고시 중심의 경직된 공무원 충원시스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됐다. 공무원 주요 보직에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는 개방형 임용제는 공직 사회의 저항과 새 제도 실시에 따른 위험부담 때문에 몇 년째 제자리 걸음을 걸어왔다. 따라서 이들의 성공 여부는 개방형 임용제가 뿌리내리는 데 의미있는 영향을 끼칠 전망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다른 정부 부처나 지방자치단체에 별정직으로 채용되어 통상, 외자 유치, 공보 분야 등에서 활동하는 민간 계약직과는 달리 정조직의 의사결정 라인에서 공무원이 하던 일을 대신하는 최초의 계약직이었다. 전문가의 역량뿐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에 일반 공무원들과 부대끼며 싸우고 설득하고 타협하고 절충하는 능력도 발휘해야 하는 자리인만큼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시선이 쏠린 것은 당연했다.

    14명중 9명 중도하차



    그로부터 2년. 이들의 ‘현주소’는 뜻밖이다. 14명 가운데 9명이 공직을 떠났다. 지난해 5월 전원이 1년간의 연봉 재계약에 동의했지만 그후 서너 달을 더 버티지 못하고 그만뒀다. 정부개혁실의 민간 출신 팀장(서기관) 5명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이들이 민간으로 복귀한 데는 물론 개인적인 이유들도 있었다. “적은 보수는 각오하고 들어갔지만, 막상 민간에서 받던 연봉의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1년 넘게 생계를 꾸려간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힘겨웠다”거나 “25명 남짓한 인력으로 모든 개혁업무를 챙기다 보니 업무량이 워낙 많아 체력적으로 견뎌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어차피 직업공무원으로 진로를 바꿀 것도 아닌데, 1년이면 충분한 경험을 쌓은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을 근본적으로 좌절케 한 것은 개인의 인내와 노력만으로는 뛰어넘기 어려웠던 높은 ‘벽’이었다고 한다. 공무원 사회, 나아가 공직 사회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그 견고한 벽 앞에서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이들뿐 아니라 다른 정부 부처와 지자체에서 자리를 잡은 민간 전문가 출신 공무원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들의 눈에 비친 공무원 사회는 과연 어땠을까.

    개혁작업을 주도했던 기획예산처 계약직 공무원들은 정권 초기에만 해도 기세 등등했던 정부의 개혁의지가 불과 몇 달만에 급속하게 퇴색하는 것을 보고 일할 맛을 잃었다고 한다. 정부에 대한 경영진단을 토대로 조직 개편작업에 들어가자 이곳저곳에서 ‘비 새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 당정협의, 장관협의회 등을 거치면서 조직개편 초안은 누더기로 변해갔다. 정부개혁실 행정3, 4팀장과 재정3팀장으로 정부 경영진단과 조직개편을 담당했던 박개성 회계사(34)의 말.

    “초안에서 칼을 많이 댔던 곳들이 공교롭게도 과학기술부, 보건복지부 등 대개 자민련 몫이었어요. 그랬더니 당장 힘을 빼놓더군요. 더욱이 대통령 직속기관이던 기획예산위가 예산청과 통합하면서 총리 직속이 됐으니 날개가 꺾일 수밖에요. 그 무렵 진념(陳) 장관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조직개편을 신속히 시행하겠다’고 하자 대통령은 ‘신속한 것도 좋지만, 총리를 중심으로 협의해가며 신중하게 하라’고 주문했습니다. 이 시점부터 분위기가 반전됐어요. 그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관련부처들이 노골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동정권의 한계가 드러난 이상 이제 개혁다운 개혁은 어렵겠구나 싶었어요.”

    여당의 지원도 얻지 못했다. 지원은커녕 그때부터 총선을 들먹이며 이해집단의 반발을 추스르는 데 급급했다. 일부 중진 의원들은 까놓고 “표 떨어지게 하지 마라”며 제동을 걸었다고 한다. 경기가 되살아나면서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도 이완됐다. 사면초가(四面楚歌), 개혁의 기수를 자처했던 기획예산처가 ‘왕따’ 신세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신속’에서 ‘신중’으로

    박회계사는 “집권 초기 DJ의 개혁의지는 확고했고, 어디를 어떻게 손대야 하는지도 제대로 알고 있었던 같다”고 말한다.

    “98년 6월 DJ가 국무회의에서 ‘졸속이라도 좋으니 신속하고 과감하게 개혁하라’고 지시한 적이 있어요. 이건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정부 전 부처의 경영진단을 민간에 맡긴 것도 초유의 일인데, 이것도 DJ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던 DJ가 겨우 몇 달이 지나서 ‘총리와 협의해서 신중하게 개혁하라’고 태도를 바꿨어요. 공동정권의 파트너인 JP(김종필 당시 총리)에게 발목을 잡혔다는 얘기죠.”

    이런 일도 있었다. 초기 정부개혁실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한 공기업 민영화 방안 가운데 민영화로 가닥이 잡힐 것으로 예상됐던 한 공기업에 대해 민영화안 대신 구조조정안만 제시해 놓은 항목이 있었다. 진념 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던 DJ는 이 대목에 이르러 세 차례나 보충설명을 요구했다고 한다. 사실상 ‘당연히 민영화해야 할 기업을 왜 민영화하지 않느냐’는 질책이었다. 이렇듯 개별 기업의 속사정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로 DJ는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정통했다는 것이다.

    정부개혁실 개혁기획팀에서 법무부 검찰 경찰 등 주로 ‘힘있는’ 기관의 경영진단을 맡았던 경제연구소 출신 배현기 전 사무관(34)은 “협의 과정에 현상 유지 압력이 거세지면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 자치경찰제 같은 핵심 목표가 모두 실종됐다”며 “자민련이 총리실을 압박하고 총리실은 기획예산처를 흔들면서 정부개혁실도 눈에 띄게 침체됐다”고 한다.

    이후 개혁기획팀의 업무도 권력기관 개혁에서 공기업과 재정개혁, 생활개혁 등 상대적으로 소프트한 분야로 옮겨갔다. 그나마 공무원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은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었다.

    배씨는 공무원 연금 수급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적게 내고 많이 받아가는 구조’를 ‘조금 더 내고 조금 덜 받아가는 구조’로 개선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가 대뜸 간부로부터 “배박사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일을 그처럼 가볍게 생각하느냐”고 면박을 당했다.

    과감한 개혁 바람을 몰고온 30대 중반 전후의 젊은 민간 인력들은 주변의 직업공무원들로부터 ‘세상 물정을 모른다’ ‘과격하다’ ‘비현실적이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정부개혁실 관계자는 “개혁은 명분만 갖고 하는 게 아니다”며 “개혁으로 피해 보는 사람을 설득하다 보면 어느 정도 양보해야 될 때도 있다. 그런 ‘70점짜리 개혁’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데 이들은 100점짜리 개혁만을 고집했고, 그것이 뜻대로 안 된다고 뛰쳐나가 버렸다”고 허탈해했다.

    현재까지 남은 유일한 민간 출신 팀장인 박진 행정2팀장(36·전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개혁 과제의 규모가 초기보다 줄어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개혁의 의미가 퇴색한 것은 아니다”고 했다.

    처음 1년간은 방대한 업무를 짧은 시간 안에 끝내야 했기 때문에(가령 공기업 민영화 작업은 4개월 안에 해치워야 했다) 대여섯 개 팀이 공조해 급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후로는 시간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두 팀 이상이 함께 달려들 일이 드물게 됐다는 것. 시각에 따라서는 이런 변화를 두고 개혁의 강도가 낮아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박개성 회계사는 “미흡한 부분이 많지만 과거 정권에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범위한 개혁이 이뤄진 게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반박했다. “100을 얻어낼 생각이면 처음엔 150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나중에 마지못해 50을 양보하는 척했다. 이렇게 하면 많이 달라고 했다고 욕 먹고, 많이 양보했다고 또 욕을 먹는다. 그렇다고 30을 달라고 했다가 5를 양보하면 욕은 덜 먹겠지만 얻는 게 25뿐이다. 이것이 개혁의 속성이다.”

    경직된 의사결정 과정

    의사결정 권한이 제도적, 관행적으로 상부에 집중되어 있는 것도 민간에서 온 전문가들에게는 쉽게 적응하기 어려운 문화였다. 웬만한 사안은 팀장급의 중간관리자가 자기 재량권 안에서 책임지고 처리해 성취감을 느끼도록 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사회적 파급효과가 예상되거나 집단의 이해관계와 연관되면 층층의 결재를 밟아 올라가게 했다는 것.

    정부개혁실 공공2팀장으로 공기업 민영화 업무를 추진했던 김한주 변호사(40)는 “모든 일을 혼자 책임지고 이끌던 변호사 출신에게는 이런 분위기가 몹시 답답하게 여겨졌다”고 돌이켰다.

    “유연하고 리버럴한 경제기획원 출신 공무원들이 주축을 이룬 기획예산처는 상대적으로 많은 업무를 하부로 위임했고, 특히 정부개혁실은 절반이 민간인으로 채워지다 보니 어느 부서보다 활발하게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산청과 통합되어 조직이 커지자 점차 관료주의 경향이 짙어지더군요. 그저 ‘웃분의 뜻’만 받들어 챙기고 있다는 생각에 갈수록 보람이 작아졌어요.”

    개혁팀으로서는 자신들이 애써 만들어 올린 개혁안이 안팎의 기나긴 의사결정 과정을 거치며 곳곳에서 칼질을 당했던 데 대한 불만이 컸다.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임엔 틀림없지만 여기에는 투명성이 전제돼야 했다는 것. 관련부처, 당, 청와대 등과 수없이 협의하는 가운데 정식 절차를 통해 공론화하기 보다는 ‘위로 압력 넣고 뒤에서 타협하며’ 개혁안을 뜯어고치는 것이 어떻게 ‘민주성 확보 과정’이 될 수 있느냐는 뜻이다.

    그래도 내부 논의 과정에 젊은 팀장들이 장관의 의견을 반박하며 소신을 펼 수 있었던 기획예산처는 예외적인 경우에 든다. 구조조정 대상이 된 공기업 사장이 장관을 찾아와 하소연하면 장관은 그 자리에서 담당과장을 불러 올려 사장과 논쟁을 벌이게 했다. 과장이 장관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여느 중앙부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논의 과정에 실무자의 소신이 꺾이는 일은 어느 조직에서나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개진할 기회가 있느냐의 여부다. 이런 기회가 없으면 실무자는 장관의 눈치부터 살피다 소신과 어긋난 기안을 하게 된다”는 게 박진 팀장의 지적이다.

    언론인 출신으로 서울의 한 구청에서 구청장을 보좌하고 있는 민간 계약직 A씨는 이와는 대조적인 사례를 들려준다.

    “간부회의 때 구청장말고는 입을 여는 사람이 없어요. 누군가 좀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구청장이 의자를 홱 돌려 앉는 분위기니 누가 소신껏 얘기를 하겠어요. 그나마 우리처럼 사이드에서 마음 비우고 있는 계약직들이나 할 말을 좀 하는 편입니다. 구청장도 웬만한 간부들보다는 늘 지근거리에 있는 우리를 더 신뢰하는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실무과장들이 구청장에게 건의할 일이 있으면 우리한테 가져옵니다. ‘우리 입으로는 이런 얘기 못하겠으니 대신 좀 말씀드려달라’면서. ‘라인’이 뒤죽박죽으로 얽힐 수밖에 없죠.”

    ‘튀지마, 다쳐!’

    공직 사회에 첫발을 디딘 외부 전문가들은 직업공무원들의 몸에 밴 ‘안전제일주의’와 갈등을 빚게 마련이다. 어지간하면 새로운 일은 벌이려 들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책임 소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논리보다는 관행을 더 중요시하는데다 융통성없고 소극적이기만 한 공무원들의 본능적 처신을 보고 답답하다 못해 분통이 터진다. 98년 7월 서울시 시정개혁위원회의 외부 전문가 영입계획에 따라 서울시 교통관리실장(1급)에 특채된 차동득(55) 전 교통개발연구원 부원장도 처음엔 그런 심정이었다.

    “와서 보니 시내버스업계의 구조조정이 시급했습니다. 서울시내에 버스회사가 90개쯤 됐는데, 3분의 1 정도는 경영상태가 엉망이었어요. 이런 회사들은 법규도 예사로 위반했어요. 배차간격도 제멋대로고, 돈이 안 된다 싶으면 시민이 기다리든 말든 노선도 마음대로 바꿔댔습니다. 과태료를 부과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더군요. 하도 기가 막혀서 사업자면허를 취소하랬더니 직원들이 법령을 들이대면서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회사들에 대해 시가 할 수 있는 처벌은 가장 무거운 게 감차(減車)였다. 모법인 운수사업법에는 면허취소가 가능하게 되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시행령에서 이 규정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 차실장은 “법에 문제가 있다면 법을 고쳐서라도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것 아니냐”며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건설교통부에 시행령을 손질해달라고 건의했다.

    결국 한 해 3회 이상 중요 법규를 위반하면 면허를 취소한다는 조항을 살려냈고, 이에 따라 지금까지 6개 회사의 면허를 취소했다. 서슬퍼런 ‘시범케이스’ 덕분인지 이후 버스회사들의 노골적인 불법운행은 많이 줄었다고 한다.

    버스 터미널 용도변경 문제도 비슷한 경우였다. 그동안 서울시는 상봉터미널과 용산터미널 등 이용자가 급감해 사실상 터미널 기능을 상실한 터미널용지에 대해 용도변경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멀쩡한 땅이 아무 대책없이 방치되고 있었지만, 공무원들은 터미널용지를 상업용지로 풀어줄 경우 특혜 시비에 휘말릴 것을 우려, 불허원칙을 고수했다.

    차실장은 “우리만 떳떳하면 된다. 상식대로 일하자. 용도변경까지 해결하진 못하더라도 ‘더 이상 터미널로선 안된다’는 판단은 우리가 내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직원들을 설득, 전문기관에 서울시내 전체 터미널 용지에 대한 정비 용역을 의뢰해놓고 있다.

    차실장은 “처음엔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는데 왜 자꾸 일을 벌이느냐’는 공무원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차차 생각이 변해갔다”고 털어놨다.

    “처한 상황이 다르다고 봅니다. 내게는 분명한 목표가 부여됐고 나는 그것에 얼마나 도달했느냐 하는 실적에 따라 평가를 받습니다. ‘대과(大過)는 없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바에야 우리 같은 전문가가 공무원으로 올 필요가 없죠. 하지만 만일 내가 안정된 직업공무원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다면 생각이 달랐을 겁니다. 내 일이 불을 지르는 것이라면 그들에겐 마찰없이 일을 진행하는 노하우가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가 잘 조화를 이뤄야겠죠.”

    서울 모 구청의 공보과에서는 구정(區政) 신문을 발간한다. 취재와 송고, 인쇄를 거쳐 초판을 짤 때까지 사흘이 걸리는데, 초판 제작 후 이를 회람시켜 결제받는 데만 꼬박 사흘이 더 소요된다. 공보과가 만일의 경우 책임을 면하기 위해 기사 하나하나마다 관련 과의 결재를 받도록 하기 때문이다.

    신문제작에 관여하는 한 전문직 공무원은 “어차피 관련 과에서 받은 자료로 신문을 만드는 거니 뒤에 문제가 생길 경우 자료가 잘못됐다면 담당 과에서 책임을 지고, 자료에 잘못이 없는데 오보가 나갔다면 공보과에서 책임을 지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책임을 확실하게 회피하려다 보니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다”며 혀를 찼다.

    지난해 이 구청 총무과에서는 “아르바이트 대학생 채용공고를 ‘보일 듯 말 듯하게’ 신문에 내달라”고 주문했다. 공고를 크게 내자니 학생들이 많이 몰려 총무과의 일거리가 늘 것 같고, 그렇다고 이 구청에서만 채용공고를 안 낼 수도 없으니 나중에 ‘한 줄이라도 냈다’고 생색낼 수 있는 ‘면피용’ 공고를 부탁했던 것.

    박개성 회계사가 기획예산처 팀장으로 갔을 때 보조직원이 없어 애를 먹었다. 서류 입력 업무가 많은데다, ‘MS워드’와 ‘파워포인트’밖에 써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글’로 전혀 다른 양식의 공문을 작성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빠듯한 일정에 서류 작성법을 익히느라 몇달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담당공무원에게 여직원을 뽑아달라고 했더니 “예산이 없어 불가능하다”고 했다. 정부조직 경영진단을 맡겨놓고 팀장에게 여직원 한 명 붙여줄 예산이 없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이 안 통하겠다 싶어서 자신이 봉급을 줄 작정으로 여직원을 뽑았다.

    “당장 ‘안 된다고 했는데 왜 뽑았느냐’고 하기에 ‘내 돈으로 뽑았는데 뭐가 문제냐’고 했죠. 그랬더니 그때 와서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 보안이 문제다. 제대로 신원조회나 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랬어요. ‘우리는 팀제로 일한다. 팀에서 하는 일은 팀장이 최종 책임을 진다. 그러니 보안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그러고 나니 처음부터 분위기가 좀 서먹서먹해지겠다 싶어 그날 저녁식사를 그 담당자와 함께 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나말고도 다른 팀장 두 명이 보조직원이 없어 고생하고 있다’고 했죠. 그랬더니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생색을 내면서 며칠 후 보조직원 두 사람을 뽑아줬어요. 결국 자기 선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는 얘기 아닙니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었던 거죠. 처음 한두 달은 이런 식으로 안에서 승강이하느라 다 흘려보낸 것 같아요.”

    직무분석 서둘러야

    중앙인사위원회 박기준(35) 직무분석과장은 이렇듯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시스템’의 원인을 공무원 직무분석의 부재에서 찾는다. 공인회계사인 박과장은 회계법인에서 기업 경영전략 컨설팅을 주로 담당하다 지난해 8월 중앙인사위의 개방형 임용 공개채용에 응시, 4급 계약직으로 공직에 몸을 담았다.

    “우리의 공무원 조직은 계급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사도 사람 중심으로 행해집니다. 예컨대 ‘4급 몇 명, 5급 몇 명’ 하는 식으로 사람부터 뽑아놓고, 어느 자리가 비면 그 급의 인력풀에서 사람을 끌어와 끼워넣는 거죠. 직무 중심의 인사와는 정반대로 이뤄지기 때문에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요. 과학적인 방법으로 직무를 측정하고 그 직무가 조직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을 따져보는 일을 서둘러야 합니다.”

    특정 보직에 대한 구체적인 직무 내용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중앙인사위의 경우를 보자. ‘중앙인사위원회직제’는 사무처장의 직무를 ‘위원장의 명을 받아 사무처의 사무를 처리하고 소속공무원을 지휘 감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직무분석과장의 직무는 ‘개방형 임용제 및 그 운영, 직위분류제도 도입에 관한 사항, 공무원 직급체계의 개편’이다. 직무를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전혀 일을 안 할 수도 있다. 어차피 1년 안에 평가가 가능한 직무도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일을 안 해야 감사에 안 걸린다’는 무사안일주의가 싹튼다.

    공무원 직무분석이 정착된 외국의 경우 대개 1인당 7개 안팎의 고유 직무를 부여한다고 한다. 그 아래에 다시 구체적인 세부 목표를 설정하고 해마다 얼마 만한 업무목표치를 세울 것인지를 결정한다. 중앙인사위 직무분석과장의 경우 위에서 보듯 세 가지의 직무가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2명의 과원들이 이를 함께 처리하므로 1인당 0.25개의 직무를 맡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행정업무의 특성상 그 범위를 자로 재듯 나누고 업무 하중과 목표치를 계량화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예컨대 직무 분석을 위해서는 먼저 대상 부처로부터 보직별 업무내용 및 업무량과 관련된 기초자료를 제출받아 근거로 삼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부정확한 정보가 입력될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자체 업무량 분석 프로그램을 개발, 이를 바탕으로 인력을 재배치하려 했던 한 지자체의 경우 기초 데이터베이스 수집 과정에 부서마다 경쟁적으로 업무량을 부풀리는 바람에 신뢰도가 크게 훼손됐다.

    이같은 우려에 대해 박기준 과장은 “직무분석은 인푸트가 아니라 아웃푸트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하며, 직무분석의 근거도 아웃푸트 위주로 요구하면 그런 위험을 덜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그저 ‘한강다리 22개의 유지 및 보수를 책임진다’고 막연하게 직무를 규정할 게 아니라 ‘1년 안에 한 개의 한강다리에라도 문제가 발생할 경우 책임을 진다’는 식으로 아웃푸트 부분을 강조하면 감당할 수 있는 업무범위를 넘어선 ‘근거’를 내놓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국장 평균 재임기간 11개월

    직무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인사는 필연적으로 잦은 보직 이동을 초래, 공직의 전문성을 떨어뜨리고 부서 업무의 연속성을 저해한다.

    중앙인사위가 지난해 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정부 부처 국장급의 평균 재임기간은 11개월 21일, 과장급은 13개월 23일에 불과했다. 산업자원부의 경우 국장급 재임기간이 6개월 안팎이었다. 한 보직에 기껏해야 1년 정도 머무르다 보니 첫 반 년은 새 업무를 파악하면서, 나머지 반 년은 다음 보직으로 옮겨갈 준비를 하면서 날려버리기 십상이다.

    이런 상황에는 대개 3년 계약(실적평가 및 연봉조정은 1년 단위)을 맺고 들어오는 민간 계약직들이 업무 전문성 제고 측면에서 오히려 일반 공무원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과학기술부 같은 부처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한국기계연구원 선임연구부장으로 근무하다 96년 과기부에 특채된 전의진(54) 과학기술정책실장은 “원자력 우주개발 생물 환경 분야 등의 국제회의에 참가해 말발이 서려면 한 분야에서 적어도 4∼5년은 체계적으로 일해봐야 하는데, 우리의 인사 관행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고 아쉬워한다.

    “국장급만 봐도 그래요. 과기부에 국장이 모두 아홉 명인데, 국장을 대상으로 하는 공무원 교육이 연 2회 있으므로 두 명의 인사 요인이 생깁니다. 또한 8개 해외과학관의 관장 임기가 3년인데, 이 중 매년 한두 명이 임기를 끝내고 국장급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또 인사가 있습니다. 여기에다 장·차관이 바뀌면 또 국장급 인사가 없을 수 없으니 한 사람이 한 파트에서 4∼5년 근무하기가 어려울 수밖에요.

    한미 미사일회담 같은 데 가보세요. 두 나라 대표들이 나란히 마주보고 앉았는데, 책상 위엔 자료 하나 놓여 있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로만 회의를 진행합니다. 영어 구사능력은 기본이고,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꼼짝없이 바보 취급당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경험이 짧은 공무원들은 국제회의에 갈 때 국책연구소 연구원들을 동반합니다. 과기부에 박사들은 수두룩하지만 보직이 하도 자주 바뀌다 보니 능력을 키울 기회가 없어요. 중앙 부처라 나라 안팎에서 유용한 자료와 정보가 홍수처럼 밀려드는데 이걸 제대로 소화할 인력이 모자랍니다.”

    전실장은 그 대안의 하나로 현재 실·국장급 고위 보직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개방형 임용제를 4∼5급 보직 중심으로 개편, 젊은 인재들을 일찌감치 영입해 전문 분야에서 수년간 커리어를 쌓게 하자고 제안했다.

    머리는 없고 손발만 있다

    지난해 한국행정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공무원들은 업무시간의 30%를 각종 보고서 작성에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중 18%는 구두 보고가 가능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민간 출신들은 이런 업무여건에 특히 민감했다. 배현기 전 기획예산처 정부개혁실 사무관은 “한 프로젝트를 일관되게 추진하기를 바랐는데, 비슷한 기안을 몇차례나 반복하면서 자료 취합과 보고를 거듭하다 보니 루틴한 행정업무에 허덕이느라 정작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볼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중앙 부처 인력들이 고유의 정책수립 업무를 제쳐놓고 집행기능에 집중하다 보니 ‘머리’는 간 데 없고 손발만 비대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일은 만드는 것보다 챙기는 것이 더 힘들었다. 입안→집행→피드백 과정에서 단계별로 수많은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고 이와 관련된 언론 인터뷰, 국회 답변 자료 등을 마련하느라 품을 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배씨는 “정부개혁실이 태스크포스의 성격을 띠었던 만큼 일단 일을 터뜨리면 뒤처리는 전담부서에 맡기고 우리는 서둘러 다른 일로 넘어가는 게 바람직했지만, 이 경우 행정파트에서 ‘왜 우리가 벌이지도 않은 일을 우리에게 떠넘기느냐’며 반발할 게 뻔했다”고 한다. 일을 터뜨리면 이렇듯 안고 있느라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나중에는 일 만드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게 됐다는 것.

    김한주 변호사는 “공무원 사회에선 한쪽은 일이 넘쳐 며칠씩 밤을 새우는 반면 다른 쪽은 한가하게 소일하고 있는데도 일을 나눠 해결하려는 시도가 없었다”며 부처와 부처 간은 물론, 같은 부처 안에서도 국과 국, 과와 과 사이 협조체제가 원활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박진 팀장은 “중앙 정책부서의 잡무를 줄이고, 민간 전문직은 가급적 단순 집행업무가 집중된 곳보다는 정책 지향적인 곳에 배치해야 한다”면서도 “그렇다고 전문직들이 ‘내 손에는 흙을 묻히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일한다면 불필요한 갈등과 비능률을 야기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러 민간 전문직들이 호소하는 또다른 어려움이 바로 이 ‘불필요한 갈등’이었다. 이들은 “민간 출신이 일을 잘 해내면 기존 공무원들이 지금껏 일을 잘 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에 지나치게 우리를 경계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민간 출신이 정원 외 스태프가 아니라 정식 보직으로 들어올 경우 공무원의 자리 하나가 줄기 때문에 ‘박힌 돌 빼내려고 굴러온 돌’ 쯤으로 여겨져 불이익을 당했다는 것. 1년 남짓 중앙 부처에서 계약직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B씨의 말이다.

    “행여 구설에 오를까봐 민원인들과는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피치못해 두어 번 밥을 먹었을 때는 내가 밥값을 냈어요. 볼 일을 마치면 사무실 문 밖까지 나가서 깍듯이 배웅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가서 ‘중앙 부처에 가서 그런 대접 받아보기는 처음이었다’고 했대요. 그랬는데도 뒤에서 ‘민간에서 온 놈들이 공무원보다 더 권위적이다’는 말이 들리더군요. 과거에 경제부처 공무원을 지낸 일부 민원인들이 현직 간부와의 친분을 들먹이며 엉뚱한 소리를 하기에 좀 쌀쌀맞게 대한 적은 있었어요. 이건 원칙의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밖에 나가 떠든 말을 듣고 간부가 우리에게 주의를 주더군요.”

    물론 이것은 어느 한편만의 시각일 수도 있다. 공무원들도 민간 인력들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지금껏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일해온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같은 지붕 아래 책상을 마주하고 일하다 보면 초기엔 별별 오해와 갈등이 빚어지는 게 당연하다. 길게 보면 그것은 융화의 과정에서 어차피 치러야 하는 ‘수업료’다.

    ‘유능하고 헌신적인 집단’

    공무원사회를 체험한 외부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공무원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을 많이 바로잡았다”고 털어놨다.

    차동득 실장은 “우리 직업관료들의 능력과 생산성은 국내 최일류 수준”이라며 “일을 시킨 뒤 나오는 결과물을 보면 민간 연구소의 고급 인력에 하나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김한주 변호사도 “내가 만난 공무원들은 대부분 열악한 보수와 갖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책임감이 대단히 높았다. 야근이나 휴일 근무를 해야 될 상황이면 두 말 없이 이에 따랐다. 중립적인 위치에서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이런 면모는 외부 전문가들도 배울 만하다”고 치켜세웠다.

    이때문인지 민간 인력들은 공직을 떠난 뒤에도 공무원사회와 계속 인연을 맺고 있다. 김한주 변호사가 기획예산처 법률자문을 맡고 있고, 박개성 회계사가 공공부문 컨설팅을 해주고 있는 게 그 예.

    다만 잘못된 제도와 관행, 부당한 정치적 입김 때문에 이런 인재들이 적재적소에서 효율적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이 갖는 아쉬움이었다. 침체된 공무원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무엇보다 자율성과 인센티브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임상’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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