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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대특집|역사의 대전환, 남북화해시대

北의 낚시전술 vs 南의 그물전술

국내외 인사 20인이 말하는 통일게임의 전망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北의 낚시전술 vs 南의 그물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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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은 북한 사정에 정통한 탈북자 A씨의 설명이 적절하다. 설명에 앞서 A씨는 “기자 선생님,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단 두 사람만이 만난 단독 정상회담이 없었다고 보십니까?”라는 물음부터 던졌다. 배석자 없는 단독정상회담은 양 정상간에 ‘밀약이 있지 않았는가’ 혹은 ‘두 정상 간에 승패가 갈리는 치열한 기 싸움이 있지 않았는가’하는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가 있다.

배석자 없는 단독정상회담은 김정일의 카리스마가 확고부동한 북한에는 별 문제가 없겠지만, 여야 정당을 비롯한 여러 정파 사이의 견제가 자심한 한국에서는 큰 오해를 부를 수가 있다. 이런 이유로 평양을 방문한 김대통령은 단 둘 만의 단독 정상회담은 응하지 않으려고 했다(6월14일 이후의 정상회담에는 배석자가 있었다). 그런데 탈북자 A씨는 단 두 사람만의 단독 정상회담이 있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의 말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김대통령은 단독정상회담에는 응하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배석자를 앉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부인 이희호 여사를 동석시켜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오해를 피해 가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김정일은 역으로 그것을 노렸다. 한국 언론은 순안공항에 김정일이 나와 영접한데 대해 놀라워했는데, 허점은 깜짝 놀랄 때 노출된다.

김정일은 공항 행사가 끝난 후 바로 김대통령의 차에 동승했다. 1호 차 상석에는 김대통령을 앉히고, 자신은 그 왼쪽에 앉아 외견상 최대한 예우를 갖추며 단독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배석자는 물론이고 이희호 여사, 찰거머리 같은 남한 기자를 완벽히 따돌린 것이다. 한국 언론은 두 정상이 한 차에 탄 50분 동안 덕담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1호 차는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 유리를 올리면 완벽하게 둘만의 공간이 된다. 그 자리에서 김정일은 여러 이야기를 김대통령에게 했을 것이다. 김대통령이 도저히 수락할 수 없는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을 받아들여야 당신을 믿을 수 있다’고 퍼부었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어이가 없어 대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순안공항에서의 김대통령 표정과 김정일과 함께 1호 차를 타고 백화원 영빈관에 도착한 후의 표정을 비교해 보라. 백화원 영빈관에 도착한 후의 얼굴이 훨씬 더 어둡고 수심에 쌓여 있다.

단 둘만의 이야기는 입밖에 내기 곤란하다는 것을 계산하고 김정일은 의도적으로 1호 차에 동승한 것이다. 그리고는 일없었다는듯이 백화원 영빈관에서는 농담을 하며 김대통령한테서 반격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이다.

김대통령은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라,

열정적으로 말을 쏟아붓는 김정일을 처음 대화에서는 이겨 낼 수가 없다. 김정일은 김대통령과 단 둘이 차안에서 대면할 수 있는 50분을 위해 공항에 나간 것이다.

한국 언론은 김정일이 공항 영접한 것을 대단한 예우로 평가했지만, 북한 쪽 해석은 전혀 다를 것이다. 그날 김정일은 점퍼 차림에 선글라스처럼 색깔이 들어간 안경을 쓰고 공항에 나왔다. 그 다음날 백화원 영빈관에서 김대통령을 만났을 때는 ‘닫긴 깃 양복’이라고 하는 북한 판 정장에 맑은 안경을 썼다. 이러한 복장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점퍼에 선글라스형 안경은 김정일이 군부대나 공장에 현지 지도 나갈 때 입는 것이고, ‘닫긴 깃’ 양복과 맑은 안경은 중국의 장쩌민(江澤民)주석을 만날 때 입는 정장이다. 순안공항 영접을 통해 김정일은 한국 사람들 과 김대통령에게는 감동적인 ‘깜짝 쇼’를, 북한 주민들에게는 김대통령을 지도한다는 이미지를 보여준 것이다. 김정일은 용의주도한 사람이다.”

기막힌 역전극 연출한 DJ의 협상술

1호 차에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는 두 정상만이 아는 일이다. 하지만 A씨의 분석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러한 북한 공세에 대해 김대통령은 ‘그물 작전’으로 나갔다.

그물 작전을 펼치기 위해 그는 김정일이 던진 낚시 바늘을 꿀꺽 삼켜주었다. ‘그래 낚시 바늘을 삼켜 줬으니 그물을 던질 수 있는 거리로 좀더 가까이 다가와 봐라’ 김대통령이 들고 간 그물은 30여 명의 ‘한국 기자단’과 남북 정상이 합의한 ‘공동선언문’이었다.

6월14일의 백화원 영빈관에서 벌어진 2차 정상회담 때까지만 해도 김대통 령은 KO패에 가까울 정도로 김정일한테 밀린 듯한 분위기였다. 한국 방송에 비춰진 김정일은 카리스마를 갖춘 영웅인데, 김대통령은 북한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평양 관람객’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일찌감치 일부 북한 전문가들은 김대통령의 방북이 김정일만 영웅화하고 실질적인 성과물은 없는 ‘평양 투어’가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2차 정상회담 때였다. 이날의 TV 화면을 유심히 살펴 보면 김정일은 기분이 매우 좋은 듯 웃으면서 덕담을 베풀고 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힐끔힐끔 김대통령을 쳐다볼 뿐 빳빳한 눈길로 김대통령을 정시하지 못했다. 반면 김대통령은 얌전히 미소를 띄며 고개를 끄덕이며 김정일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김대통령 눈길은 김정일 눈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역시 정치 9단”

이때 김대통령은 무심결에 코를 만졌다. DJ가 코를 만지는 것은 일이 풀리지 않거나 뭔가로 긴장하고 있을 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자들이 나간 후 열린 3시간 40분 동안의 마라톤 회담에서 김대통령은 집요하게 김정일을 설득했다. “합의서를 만들고 당신과 내가 사인하자” “내가 평양에 왔으니 당신도 서울에 와야 한다”로 시작된 김대통령의 그물 던지기가 성공한 것은 이날 밤 자정이었다.

양 정상은 5개항의 합의문에 서명하고 자정을 넘겨 발표했다(6·15 선언). 이러한 장면은 한국 방송을 통해 전세계로 방영됐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때 국정원에서는 “와! 역시 DJ다. 과연 DJ는 협상의 명수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고 한다.

합의문 작성은 특보 자격으로 평양에 간 임동원 국정원장과 북한 아태평화위 위원장이자 노동당의 대남담당 비서인 김용순이 맡았다. 국정원에서는 합의문에 임동원과 김용순이 사인하면 평작이고 양 정상이 서명하면 홈런일 것으로 보고 있었는데, 결과는 홈런이 된 것이다.

그물 던지기에 실패하고 서울에 돌아왔다면 ‘레드 컴플렉스’에 시달려온 김대통령은 심각한 정권 위기에 봉착했을 것이다. 한 수행원은 “김대통령에게 6월14일은 도쿄에서 납치됐을 때와 80년 신군부로부터 사형을 언도 받았을 때를 제외하곤 아마 가장 긴 하루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소식통의 말이다.

“DJ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말 바꾸기 때문에 그를 싫어했다. 정치를 그만두겠다고 해놓고 다시 대선에 나와 ‘대세론’을 펼쳐 대통령에 당선되고, 내각제를 한다고 해놓고 이를 뒤집는 것이 싫어서 미워했는데, 지금은 그런 능력 때문에 김정일을 옭아매게 되었다. 한 면만 보고는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김정일은 첫날 승리에 도취돼 흥분한 것 같고, 김대통령은 계속 말을 아끼며 연장자의 이점을 이용해 승리를 낚아챈 것 같다. 그는 역시 정치 9단이다.”

그물을 던져라

6월14일 밤 만찬장에서 보여준 김정일은 카리스마의 사나이가 아니라 ‘재미있는 아저씨’였다.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겠네”라고 촌평할 사람이 있을 정도로 쉬워 보이는 사내였다. 그만큼 김정일은 긴장이 풀려 있었다.

양 정상이 서명하고 그 내용이 전세계로 중계된 이상 김정일은 전세계로부터 ‘왕따’가 될 것을 각오하지 않는 한 이 합의를 어길 수도 개방하지 않을 수도 없게 되었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5개 항에 관한 남북 정상 합의를 국민들이 추인하는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남북정상회담은 우리 내부 문제로 다가왔다. 김대통령이 합의하고 온 사항, 그리고 김대통령이 끌고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과연 우리 사회가 동의할 수 있느냐란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내부 합의에 실패해도 김대통령은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고, 우리 사회는 북한이 적화통일을 실현하기 좋은 대상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 신동아는 이 문제를 짚어보고자 우리 사회의 지도적 인사 22명에게 10개 항의 질문을 던졌다.

일부 인사에게는 서면으로 답변을 받았고 일부는 전화를 통해 대화식으로 ‘속내’를 들어보았다. 다양한 의견을 듣겠다는 취지로 북한 전문가와 비전문가는 물론이고, 탈북자와 한국을 잘 아는 외국인까지도 조사 대상에 포함했다. 자유로운 답변을 유도하기 위해 솔직한 답변을 피하려는 사람에게는 익명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답변은 객관식이 아니라 전부 주관식으로 수집했다.

6·15 공동선언 서문에서 양 정상은 ‘평화통일 실현하자’, 제1항에서는 ‘자주적으로 통일하자’, 제3항에서는 ‘8·15에 즈음하여 이산가족을 교환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러한 타협은 평화정착-통일추구-이산가족 교환 순으로 양 정상이 합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신동아 설문에 응한 인사들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 의제는 무엇일까(제1번 질문). 사람에 따라서는 3~4개 의제까지 거론했는데 가장 많이 나온 것은 ‘남북한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자’는 평화체제 구축(13명) 제의였다.

두 번째로는 ‘이산가족 문제부터 거론해야 한다’(5명)였고 ‘6·25전쟁 발발에 대한 사과부터 받아야 한다’는 대답이 세 번째로 많았다(4명).

소수 의견으로 눈에 띄는 것은 ‘남북 만남을 정례화해 계속 만나게 하자’(2명)와 ‘NGO 교류를 활성화하자’(2명)가 있었다. 이러한 결과는 6·15합의문과 크게 차이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제2번 질문으로는 ‘평양 시민의 환영 의도가 무엇이고, 김정일이 서울에 오면 이를 반기겠는가’였다. 평양시민 환영에 대해서는 ‘동원된 것이다’라는 답변이 9명으로 가장 많고, 두 번째가 ‘김대통령 환영이 아니라 김정일 찬양’ (7명)이었다. 세 번째는 ‘통일에 대한 북한 주민 의지를 보여준 것 같다’는 류의 답변(5명)이었다. ‘동원된 것이다’와 ‘김정일 찬양이지 김대통령을 환영한 것이 아니다’라는 대답이 많은 것은 북한 주민의 환영 행사를 ‘쿨’하게 보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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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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