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대선주자들의 이미지 따라잡기

링컨·케네디에서 블레어·고이즈미까지

  •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입력2004-11-01 17: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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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태우의 ‘보통사람들’, 김영삼의 ‘신한국 건설’, 김대중의 ‘준비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선거를 승리로 이끈 탁월한 이미지 전략이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미지 메이킹은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결정적 변수가 될 전망이다.
    현대 선거에서 이미지메이킹(Image making)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선거운동 방식이 군중집회에서 TV토론으로 바뀌면서 이미지마케팅(Image marketing)은 승패를 좌우하는 변수로 등장했다. 1992년 대통령선거와 1995년 지방자치선거 당시 민주당캠프에서 이미지 전략을 담당했던 차영(車英) 전 광주MBC 아나운서는 자신이 펴낸 ‘나는 대통령도 바꿀 수 있다’(1997년, 디자인하우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권자들은 지지자를 결정할 때 딱딱한 선거공약이나 정책보다는 후보 개인의 이미지가 좋고 나쁘냐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크다.”

    우리나라에서 이미지마케팅이 선거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1987년이다. 이때부터 정치광고를 전문으로 하는 회사들이 생겼고, 특정 후보의 코디와 이미지 관리를 담당하는 전문가들이 대통령후보의 선거캠프에 참여했다.

    1987년 대통령선거는 1971년 이후 18년 만에 실시된 직접선거였다. 판세는 1노3김. 민정당 노태우 후보가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민주당 김영삼 후보와 평민당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여부가 선거의 최대 승부처였다. 하지만 광고전문가들은 노태우 후보의 이미지 전략이 대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한다.

    당시 노후보의 캐치프레이즈는 ‘이 사람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였다. 이에 따라 노후보는 원탁에서 회의를 열고, 손수 가방을 들고 비행기 트랩에 오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반면 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백발을 휘날리며 ‘군정종식’을 부르짖었고, 한복 차림의 김대중 후보는 쉰 목소리로 ‘평민은 평민당, 대중은 김대중’이라고 외쳤다.



    노태우와 조순의 성공

    결국 노후보는 양김씨를 여유있게 누르고 당선됐다. 노후보는 양김씨의 분열이라는 ‘호재’를 만나 당초 불리할 것으로 보였던 선거판을 승리로 이끌었다. 혼란스런 정치상황에서 ‘보통사람’임을 내세워 서민층을 공략한 것이 주효했음은 물론이다.

    1992년 대통령선거는 민자당 김영삼 후보와 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맞대결 양상으로 치러졌다. 김영삼 후보는 ‘젊고 패기있게 한국병을 고쳐 신한국을 건설하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당연히 김후보의 이미지도 ‘젊음’을 한껏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흰머리를 검은색으로 물들이고, 강한 톤으로 연설한 점이 대표적인 케이스.

    김대중 후보도 1987년 선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른바 ‘뉴DJ플랜’이 그것이다. 당시만 해도 김대중 하면 ‘과격하고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대중 후보는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가정주부가 다림질을 하면서 부담없이 들을 수 있는’ 컨셉트에 따라 연설문을 만들었다. “주부 여러분, 김장하시느라 바쁘시지요”로 시작되는 DJ의 TV연설은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결과론이지만 1992년 선거는 영호남 대결구도로 치러졌기 때문에 김영삼 후보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김대중 후보측은 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영남표를 잠식해줄 것으로 믿었지만,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지 마케팅 차원에서 보자면 양 김씨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한 셈이다.

    정치광고업계에서 최대의 성공사례는 1995년 서울시장 선거로 알려져 있다. 당시 민주당이 영입한 조순 후보는 탁월한 이미지 마케팅으로 대역전극을 펼쳤다. 조후보는 연출에 익숙하지 않은 학자 출신이지만, 그의 순수한 이미지는 엄청난 효과를 냈다. 조후보는 넥타이를 풀고 와이셔츠 바람으로 청중들을 만났으며, TV토론에서도 어눌하지만 믿음직한 모습을 선보였다. 때마침 시청률 1위를 다투던 ‘판관 포청천’에서 빌려온 ‘서울 포청천’ 이미지는 조후보의 ‘강직하고 소신에 찬 서울시장’ 전략에 힘을 실어주었다.

    1997년 봄, 신한국당에서는 이른바 ‘8룡’들의 대권경쟁이 한창이었다. 선두주자는 역시 이회창씨. 그는 1996년 제15대 총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해 정치권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정치인 이회창의 트레이드마크는 ‘소신’과 ‘대쪽’이다.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 등을 지내면서 쌓아온 이미지가 정치에 입문한 뒤에도 그대로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회창 대세론’에 도전장을 내민 주자들의 이미지 경쟁도 치열했다. 김영삼 대통령이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를 언급하면서 급부상한 이인제 경기지사는 이때까지만 해도 가는 곳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를 치켜세웠다. 1997년 1월, 43세의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영국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자 당시 49세이던 이지사가 맞장구를 치고 나온 것.

    실제로 이지사와 토니 블레어는 비슷한 점도 있었다. 같은 40대이고, 고향이 아닌 지역에서 정치적 ‘거물’로 성장한 데다, ‘세대교체론’을 들고 나온 점까지…. 아무튼 이지사는 자신이 주창한 ‘젊은 일꾼 대통령론’과 ‘토니 블레어 효과’의 화학적 결합을 시도했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

    ‘민주계 적자론’을 들고 나온 김덕룡 의원의 슬로건은 세대교체와 개혁이었다. 그는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을 예로 들면서 “한국에서도 젊고 개혁적인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클린턴이 들고 나온 ‘21세기를 잇는 열차론’과 김의원이 주장한 ‘21세기 젊은 희망열차’도 일맥상통하는 구호였다.

    또한 이홍구 고문은 미국의 윌슨 전대통령을 자주 인용했다. 윌슨 전대통령은 미국정치학회 회장을 지낸 뒤 대통령에 당선됐는데, 이고문이 바로 윌슨연구소 1기생이다. 이고문은 빌리 브란트 전서독 총리도 높이 평가했다. 브란트 전총리가 독일 통일의 기틀을 다졌다면, 자신은 통일원 장관을 지냈다는 것.

    한편 뇌졸중으로 쓰러져 정치행보가 불투명했던 최형우 의원의 측근들은 미국의 닐슨 전대통령을 주목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닐슨 전대통령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건강을 회복한 집념의 사나이다. ‘최형우계’ 의원들은 내심 닐슨의 ‘기적’을 기대했지만, 결국 최의원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대권경쟁에서 밀려났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 후보는 이미지 전략에서 경쟁자들보다 몇 발짝 앞선 정치인이었다. 1995년 7월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만델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제목은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왜 이때 만델라 자서전이 나왔을까. 70대로 접어든 김이사장이 6·27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서두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당시 기자는 아태재단에서 ‘만델라 자서전’ 출간을 준비한 사람들을 인터뷰한 일이 있다. 그들은 만델라의 정치적 업적보다도 대통령에 당선된 나이를 중시했다. 만델라는 1994년, 그러니까 76세에 대통령이 됐다. 똑같은 이유로 70대로 접어든 김이사장도 충분히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김대중과 만델라

    물론 만델라와 김대중은 정치적으로 닮은 점이 많다. 두 사람은 민주화를 위해 오랫동안 싸웠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수감생활을 했다. 정치적 한계를 ‘연정’으로 극복한 뒤 집권에 성공한 것도 똑같다. 만델라가 집권한 당이 ‘아프리카민족회의’였고, 김이사장이 정계에 복귀할 때 만든 당이 ‘새정치국민회의’였다.

    그래서였을까. 김이사장은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쓰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둘이 얼마나 같은 길을 걸어왔는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집권한 뒤에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만델라는 백인정권의 대통령이었던 데 클레르크를 부통령에 앉혔고, 김대통령은 과거의 정적 김종필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또한 만델라가 주도한 연정은 집권 3년이 지나면서 고비를 맞았고, DJP 공조도 4년 만에 깨졌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한때 ‘만델라를 보면 DJ의 정치를 예감할 수 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만델라 대통령에 관한 또 하나의 에피소드. 두 사람은 대통령에 당선되자 곧바로 ‘대사면’을 단행했는데, 김대통령은 김영삼 전대통령이 구속시킨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풀어주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감옥에서 나온 노전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김대통령은 ‘한국의 만델라’가 돼야 한다.”

    정치인들이 이미지 마케팅에 성공하려면 ‘실체’와 ‘이미지’의 차이가 적어야 한다. 자신이 아무리 좋아하는 인물이라 해도 서로를 연상시키는 공통점이 없다면 이미지 효과를 내기 힘들다. 정치인들은 흔히 ‘모델’과 ‘자신’을 연결하는 고리가 없을 경우 ‘가공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눈속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밑천’이 드러나는 순간 정치인의 인기는 거품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최근 여야의 대선주자들은 본격적인 대권 레이스를 앞두고 이미지 전략을 짜느라 고심하고 있다. 특히 대선에 처음 도전하는 후발주자들이 이미지 메이킹에 적극적이다.

    2001년 12월10일 저녁 서울 힐튼호텔에서는 민주당 노무현 상임고문의 출판기념회를 겸한 후원회가 열렸다. 노고문은 이날 차기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것을 공식 선언했는데, 그에 앞서 진행된 ‘노무현이 만난 링컨’ 출판기념회도 눈길을 끌었다. 노고문이 이 시점에서 링컨 평전을 내놓은 것은 1995년 당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만델라 자서전을 출간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링컨처럼 자신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그렇다면 링컨과 노고문은 얼마나 닮았을까. 우선 중도에 포기한 학력을 들 수 있다. 링컨은 초등학교를 중퇴했고, 노고문은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다. 똑같이 변호사를 지냈으며, 각종 선거에서 수차례 패했다는 점도 같다. 링컨은 하원 상원 부통령 선거에서 잇따라 떨어졌고, 노무현도 국회의원과 부산시장 선거에서 거푸 낙선했다. 또한 두 사람은 광범위한 정치세력을 형성하지 못한 채 대권에 도전했다.

    우리나라 정치인 중 십중팔구는 백범 김구를 존경한다.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명분을 포기하지 않았던 민족의 지도자…. 적어도 국민들 가슴 속에 김구는 그런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노고문도 인터뷰 때마다 ‘존경하는 인물’로 김구를 꼽았다. 하지만 그는 ‘우리 역사에서 존경할 만한 인물이 왜 패배자여야 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고, 역사에서 승리한 링컨을 주목하게 됐다고 한다. ‘링컨의 리더십을 거울삼아 개혁정치를 이루자.’ 그것이 노고문이 링컨에게서 빌려온 정치철학이다.

    노고문이 링컨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이유가 또 있다. 링컨은 남북전쟁까지 치르면서 지역통합에 힘을 기울인 사람이다. 또한 링컨은 미국 정치사에 최초로 민주적 대통령제를 정착시킨 인물이다. 노고문은 자신이야말로 지역갈등을 극복하고, 민주적 리더십을 구현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링컨은 1860년 5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3차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대통령후보에 선출됐다. 링컨은 1차투표에서 71표, 2차투표에서 3표를 뒤졌지만, 3차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었다. 노고문측은 2001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도 결선투표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는 링컨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처럼, 자신도 한국의 제 16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김중권 전민주당 대표도 한때 링컨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민주당 대표 시절 “모 재벌회장이 나에게 ‘링컨의 이미지를 접목하라’고 충고했다”고 소개한 일이 있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고, 변호사를 지냈으며, 지역화합에 노력했다는 점이 닮았다는 것. 하지만 김고문은 이후 특별한 ‘링컨 마케팅’을 시도하지 않았다.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했던 유명한 말이다. 한국 정치인 가운데 이 대목을 가장 자주 인용하는 사람은 아마도 정동영 민주당 상임고문일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정고문이 정치스타일은 물론 헤어스타일과 연설모습까지 케네디 대통령을 따라간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이인제 고문도 정고문의 후원회에 참석해 ‘정동영 의원은 한국의 케네디’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케네디를 꿈꾸며

    정고문과 케네디도 몇 가지 점에서 유사하다. 우선 두 사람 모두 40대에 정치적으로 성공했다. 직접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두 사람의 가정환경도 비슷하다. 정고문의 부친이 도의원과 면장을 지내 일찍부터 정치에 익숙했다면, 케네디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치집안이다. 비주류로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치행보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 통한다.

    정고문이 케네디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발상의 전환’ 때문이다. 케네디가 대통령직에 머물렀던 기간은 불과 1000일이다. 하지만 케네디는 오늘날까지도 미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남아 있다. 할리우드가 끊임없이 케네디 영화를 만들고, ‘케네디 정신’이 오래도록 미국을 움직이는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케네디 집권 당시 미국은 쿠바를 사이에 두고 소련과 지루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케네디가 ‘우주로 가자’고 선언하면서 미국은 ‘차원이 다른’ 시대로 접어들었다. 정고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도 케네디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야 한다. 좁은 땅에서 정쟁에 휘말릴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고문은 15대 국회 상반기까지 국방위와 교육위에 몸담았지만 후반기부터는 과학기술정보통신위로 옮겼다. 한국사회의 미래가 정보산업에 달려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 그는 2001년 한해 동안 두 차례에 걸쳐 ‘IT산업 보고서’를 냈다. 이 또한 ‘케네디식 발상의 전환’에서 나온 행보로 볼 수 있다.

    정고문은 조만간 대권도전을 공식화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그가 실제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은 드물다. 정고문측은 얼마전 ‘정동영의 e-campaign’이라는 문건을 작성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기본컨셉트는 ‘서울시장’이었다. 정고문이, 선거에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제시 벤추라 미네소타 주지사나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독자노선으로 부시에 맞섰던 존 멕케인 상원의원(애리조나주)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미래를 위한 포석으로 봐야 할 것이다.

    민주당 한화갑 상임고문은 흔히 ‘리틀DJ’로 통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동향인데다, 정치에 입문한 뒤 오랜 기간 동교동 비서를 지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닮는다던가. 한고문을 보고 김대통령의 이미지를 느끼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인터뷰할 때 오른손을 칼질하듯이 내린다거나, 깨알같은 글씨체까지 한고문은 김대통령을 빼닮았다. 또한 한고문은 연설 도중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묻는 김대통령 특유의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하는 몇 안되는 정치인이다.

    김대통령의 인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한고문이 ‘리틀DJ’라는 이미지에 부담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최근 한고문이 김대통령과의 차별화를 부쩍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하지만 한고문측 사람들은 “한고문은 아무리 힘들어도 DJ와 갈라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고문은 DJ에게 정치를 배웠기 때문에 DJ가 어렵다고 해서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는 게 그들의 해석이다.

    한고문 진영에서는 얼마전 자체적으로 이미지 심층면접조사(FGI)를 벌였다. 그 결과 한고문에게서 ‘충성심’과 ‘비합리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한고문측 이용범 공보특보는 “동교동의 부정적 이미지를 한고문이 그대로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한고문의 최종학력을 목포상고로 아는 사람까지 있었다. 사실을 정확하게 알리면 이미지는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고문측은 최근 ‘탈 DJ이미지’의 방향을 구체화했다. 여기서 핵심은 DJ의 개혁방향과 철학은 계승하되, 의사결정 과정과 추진방식은 보완한다는 것. 다시 말해 한고문은 3김시대의 리더십을 투쟁적·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규정하고, 자신은 정책적·합리적 리더십을 지향하겠다는 얘기다.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은 오랫동안 짧고 단정한 머리를 고집했다. 그런데 2001년 대권행보를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그의 헤어스타일이 갑자기 바뀌었다. 뒷머리를 장발에 가깝게 기른 것. 김고문의 머리카락은 태어날 때부터 반곱슬이어서 뒷머리의 웨이브가 두드러져보일 수밖에 없다. 사실 김고문은 서울 강남의 한 미용사가 “머리를 잘 손질하면 영국의 블레어 총리 이미지를 살릴 수도 있다”고 적극적으로 권하는 바람에 변화를 주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김고문 진영에서는 개혁성과 세대교체 이미지를 갖춘 블레어 총리를 선거전략에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중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 김고문이 직접 블레어의 리더십을 언급한 일은 없었다. 다만 원론적 수준에서 “우리나라에도 블레어, 슈뢰더, 클린턴처럼 40∼50대의 젊은 지도자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김고문의 머리 모양을 보고 일부 기자들이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를 닮았다”고 평가한 것. 김고문은 “누구를 따라한 것이 아니라 긴 머리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길렀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정치권에서는 곧잘 그의 외모를 고이즈미와 비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고이즈미식’ 드라이브가 ‘반일감정’을 증폭시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김고문이 주변의 얄궂은 시각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김고문 캠프는 2001년 7월 외부 홍보업체로부터 이미지 전략에 대해 자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결과 김고문은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보다 기존의 이미지를 잘 살리는 것이 유리하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한다. 즉 투명성, 도덕성, 신뢰 등이 김고문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소라는 것. 더욱이 김고문은 체질적으로 꾸미는 것을 싫어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김고문은 TV토론을 앞두고 코디네이터의 의견을 듣는 것조차 사양하고 있다.

    하지만 김고문도 ‘정치지도자는 국민에게 최소한의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원칙에 공감하고 있다. 진실한 모습을 보이되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한다는 게 김고문 캠프의 이미지 전략인 셈이다. 물고문의 후유증 때문에 생긴 비염을 지난 여름 치료한 것이나, 코 수술 직후 담배를 끊은 것, 그리고 틈나는 대로 집에서 연설연습을 하는 것 등을 보면 김고문도 조금씩 변신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회창의 ‘부드러운’ 변신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1, 2위를 달리고 있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이인제 민주당 상임고문은 다소 느긋한 편이다. 무엇보다 199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미지 마케팅의 허와 실을 절실하게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1997년 당시 이회창 캠프가 구상한 이미지 전략의 핵심은 ‘대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후보는 두 아들의 병역문제가 이슈화하면서 ‘대쪽‘의 강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1997년 이회창 캠프에서 뛰었던 진영 변호사는 “한마디로 우왕좌왕이었다. 남들은 ‘대쪽’을 전략이라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내부에서는 아무런 프로그램이 없었다. ‘대쪽’이 좋으냐, 나쁘냐를 놓고 싸움만 하다가 끝난 선거였다”고 말했다.

    이회창 캠프의 홍보담당 실무자였던 A씨도 “총제적으로 실패한 캠페인이었다. ‘도덕성’이라는 상품은 병역문제가 터지면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A씨는 “예나 지금이나 이총재의 강점은 ‘부패척결 의지’이며 선거는 강점을 얼마나 잘 살리냐가 관건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최근의 ‘SOFT 이회창 전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SOFT 이회창 전략’, 다시 말해서 이총재를 부드럽게 만들어서 친근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살리자는 주장이다. 이총재가 청바지를 입고 영화배우를 만나고, 주부들과 농담을 주고받는 프로그램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할 것이다.

    이와 관련 A씨는 “젊게 보이는 것으로 하자면 이인제나 노무현이 훨씬 우세하다. SOFT 전략은 오히려 보수층의 반발을 살 수 있다”고 우려했다. A씨는 또한 “이총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략을 끝까지 밀어붙여야 하며, 공조직과 사조직의 역할을 확실히 구분해야 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경재 한나라당 홍보위원장의 생각도 A씨와 비슷하다. 이위원장은 “이총재의 장점은 여전히 ‘법대로’와 ‘대쪽’”이라고 말한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컨셉트가 잡히지는 않았지만, 기본방향은 그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위원장은 “이총재가 1997년과는 분명히 다른 이미지로 어필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모꼴의 사진을 둥근 모양으로, 반사가 되는 옷보다는 질감이 좋은 옷으로, 줄무늬 넥타이보다는 선이 없는 넥타이로, 화장은 최대한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쪽으로, 악수할 때는 환하게 웃고, 술자리에서는 덕담을 던지고…. 확실히 최근 이총재가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는 예전과 차이를 느끼게 한다.

    이인제 민주당 상임고문은 1997년 대통령선거 당시 ‘박정희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키와 얼굴모양이 박 전대통령과 유사하다고 판단한 이후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점퍼차림으로 TV토론에 출연한 일까지 있었다. 또한 이후보는 영남지역 유세에서 박정희 정권의 업적을 한껏 치켜세웠다. 이 무렵 한국경제는 IMF 위기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보의 전략은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997년 선거에서 이인제캠프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후보가 의식적으로 박정희 마케팅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보도했고, 국민들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이후보는 국민들이 박정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분위기에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박 전대통령의 이미지가 ‘젊고 당차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됐지만, ‘민주적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고문이 다른 정치인에 비해 박정희 정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이고문의 역사관과 관련이 깊다. 이고문은 기본적으로 ‘나쁜 역사도 우리의 역사’라고 본다. 그래서 박정희 시대도 공과를 따져서 긍정적인 면은 적극적으로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계승할 점은 ‘빈곤타파’와 ‘조국근대화’다.

    이인제캠프의 김충근 특보는 “국민들이 이인제를 보면서 박정희를 생각하고, 또 그것 때문에 지지를 보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인제는 누구를 흉내내는 방식이 아니라, 이인제 고유의 색깔을 갖고 대선에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고문은 1997년 당시 자금과 조직의 열세를 절감했다. 그래서 돈이 안드는 ‘공중전(TV토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비해 지금은 상황이 엄청나게 좋아졌지만, 이고문은 여전히 TV토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이고문은 얼굴과 순발력, 논리력과 말솜씨 등에서 자신이 가장 유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한동 국무총리는 1997년 신한국당 경선 때부터 ‘왕건론’을 내세웠다. 중부권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듯이, 중부권에서 태어난 자신이 지역통합의 적임자라는 주장이었다. 이총리는 최근까지도 ‘태조 왕건’이 방영되는 토요일과 일요일 밤이면 TV를 시청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과 자민련의 공조가 깨진 뒤 그의 입지는 현저하게 좁아졌다. 이총리의 한 측근도 “정치판에 획기적인 모멘트가 생겨야만 기회가 올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부총재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닮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특히 박부총재의 ‘한복용 올린 머리’를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박부총재 자신도 “어머니는 정치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내가 어머니와 비교된다면, 그 자체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박부총재는 육여사로부터 사람에 대한 배려와 성실성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자신은 어느 누구를 만나더라도 따뜻하게 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주지사로서 행정경험을 쌓은 뒤 대권에 도전하는 이른바 ‘미국식’ 정치문화를 이미지 마케팅에 활용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에서는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등 주지사 출신이 잇따라 대통령에 당선됐다. 현재 한국에서 대권출마를 선언한 지방자치단체장은 유종근 전북지사가 유일하다. 그는 “지방정부에서 검증된 사람이 국정을 맡는다면, 한국의 정치문화도 한 단계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출사표를 던지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대권도전을 저울질하고 있는 고건 서울시장과 김혁규 경남지사의 의중도 유지사와 별 차이가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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