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호

이회창의 보수인가, 노무현의 진보적 중도인가

2002년 대선과 지역·세대·이념

  •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 kimhoki@yonsei.ac.kr

    입력2004-09-09 18: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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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한국사회의 화두는 대선이다. 민주당 경선으로 달궈지기 시작한 대선레이스는 이른바 ‘노풍’을 만나 가속도가 붙기 시작해 노무현씨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고, 역시 경선을 통해 이회창씨가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로 결정되기까지 국민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곧이어 월드컵이 열리면 대선레이스는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가겠지만, 6·13지방선거를 치르고 나면 다시 불붙을 것으로 예상한다.

    1987년 이후 5년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대선바람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대통령선거만큼 중요한 일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는 우리 사회의 중대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투표는 일반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통로다. 이 점에서 대선과정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분석이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의 과정을 보면 올해 대선의 초점은 지역주의와 세대문제, 그리고 이념갈등에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 이슈들의 한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노풍(盧風)’, 즉 ‘노무현 바람’이다. 간단히 말해 노풍이란 노무현씨가 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 후보를 따돌리고 대통령후보로 선출된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노후보를 지지하는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386세대’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노무현이란 정치적 상징은 신드롬으로 발전했다.

    7개월 남짓 남은 2002년 대선레이스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대결하는 양강구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박근혜씨를 포함한 제3후보의 등장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이제까지의 여론조사 결과는 노무현 대 이회창의 대립구도가 단연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성장과정과 개인경력에서 대조를 이루는 두 후보의 대결은 여러가지 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2002년 대선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것인가. 그 동안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역주의 투표성향은 약화할 것인가. 세대와 계층갈등은 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2002년 대선구도의 중심을 이루는 이슈들을 살펴보고 향후 전개과정을 전망해보고자 한다.



    필자의 잠정적인 가설은 2002년 대선구도는 한국 시민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 핵심 관건은 지역주의가 끼치는 영향력이 과연 어느 정도인가에 놓여 있다. 계층적·이념적·세대적·지역적 균열이 교차하는 우리 시민사회에서 정치적 선택은 지난 세 번의 대선에서 볼 수 있듯이, 높은 지역주의의 수문(水門)이 다른 요인의 영향력을 가로막아 왔다. 따라서 지역주의의 수문이 낮아질 때 세대와 이념 및 계층적 균열의 영향력은 커질 수 있으며, 한국정치는 망국적인 지역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논지를 전개하기에 앞서 미리 밝혀둘 것이 있다. 필자는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다만 노후보와 이후보의 대결구도를 가져온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노풍’이었던 만큼, ‘노풍’에 대한 분석에 상대적으로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에 양해를 구한다.



    노풍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번 대선의 초반 레이스를 주도한 것은 노풍이다. 노풍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언론지면을 통해 다양한 분석들이 제시되었다. 지난 5월9일 ‘참여사회연구소’ 주최로 노풍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는데, 발표자로 나선 손혁재 박사(참여연대 운영위원장)와 홍성태 교수(상지대, 사회학)는 각각 노풍의 정치학적 분석과 사회문화적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

    먼저 손박사는 노풍을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2000년 낙천·낙선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분석한다. 즉 정치개혁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열망이 노무현 바람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풍의 정치적 요인은 환경적 요인과 제도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치개혁의 부진, 정치불신의 심화, 시민사회내 합리적 개혁 세력의 비중 증대, 야당의 비전 부재, 인터넷의 보급 등이 환경적 요인이라면, 국민경선제는 제도적 요인이라는 것이다.

    한편 홍교수는 노풍의 사회문화적 조건으로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의 구조적 변화, 세대론으로 표상되는 주체의 변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매체의 변화를 주목한다. 이 가운데 특히 필자가 관심을 둔 것은 세대분석인데, 홍교수는 이제 30대가 된 신세대가 흔히 ‘탈정치적’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지만, 차이의 존중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최초의 문화정치 세대이며, 기성정치를 혐오하는 세대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노풍에 대한 이런 분석은, 그것이 갖는 다면적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민경선제 도입이라는 제도적 요인 못지않게 사이버 공간과 긴밀히 결합된 젊은 세대의 폭발적인 관심 또한 노풍의 주요 요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와 다른 각도에서 노풍을 바라보는 시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분식(粉飾) 지역주의’ 또는 ‘전략적 지역주의’로 노풍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호남지역이 전략적으로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선택한 것이 노풍의 발원지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지역주의가 여전히 한국 시민사회의 정치적 선택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이번 대선 역시 지역주의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필자가 보기에 노풍의 실체는 전자와 후자의 분석을 모두 포괄하는 복합적인 요인에 따른 것이다. 어떤 결과라 하더라도 그것에는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이 있게 마련인데, 지난 몇 년간 사회구조 및 문화적 변화가 노풍의 원인이었다면, 국민경선제와 그 과정에서 부각된 전략적 지역주의는 노풍의 근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노풍이 이렇듯 복합 요인들이 상호작용한 결과라면, 이를 세심하게 살펴보는 것은 이번 대선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노풍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시민사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어느 나라이건 시민사회는 계층적·이념적·세대적·성적·종교적·지역적 균열이 교차하고 있으며, 이 균열들이 서로 복합적인 영향을 끼쳐 선거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이런 시민사회의 특성을 고려할 때 1987년 이후 우리 시민사회의 정치적 선택에서 가장 중요한 균열은 단연 지역이다. 지역패권주의나 지역할거주의란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후보가 어느 지역 출신인가는 선거의 향방을 결정짓는 최대 변수였다. 한편 서구 시민사회의 정치적 선택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계급과 이념적 균열이 지난 10여 년간 영향력을 증대해왔음에도, 앞서 지적한 지역주의의 높은 수문은 이 계급 및 이념적 균열을 활성화하는 것을 저지해왔다. 더욱이 지난 50여 년간 우리 현대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온 반공주의는 이념 및 계급적 균열을 결빙시켜 왔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서 지역 다음으로 영향력이 큰 시민사회의 균열은 오히려 세대적 균열이며, 이는 압축적 경제성장이 낳은 세대격차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시민사회의 특성을 고려해 노풍을 살펴보면, 노후보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지역주의가 퇴색하는 증거일 것이라는 진단을 낳게 한다. 노풍은 과연 지역주의의 수문을 낮추고 세대와 계급 및 이념의 균열을 활성화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구체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이 글에서 활용하는 여론조사 자료는 ‘동아일보’가 3월9일, 4월1일, 5월1일 세 번에 걸쳐 조사한 것이다).

    먼저 은 지난 3월9일부터 5월1일까지 두 후보에 대한 지지율의 변화다. 3월 초에는 이회창 후보가 앞서 있었지만 노풍이 불기 시작하면서 지지율이 역전되어 4월1일에는 노무현 후보가 12% 정도 앞섰다. 그러다 5월1일에는 두 후보의 지지율이 모두 약간 하락하면서 10% 정도 노무현 후보가 우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지후보를 밝히지 않은 태도유보층의 변화인데, 노풍이 강세를 보인 4월 초에는 20.1%였지만, 민주당 경선이 끝난 5월 초에는 다시 24.1%로 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거에 분출한 노풍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다소 가라앉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은 지역에 따른 지지율의 변화 추이다. 먼저 주목할 것은 3월 조사와 4월 조사 사이에 나타난 노후보에 대한 지지율의 극적인 변화다. 노후보에 대한 지지가 급상승한 지역은 광주·전라(49.4% → 71.4%), 부산·울산·경남(25.0% → 40.1%), 서울(38.3% → 49.7%) 등이며, 이후보의 아성이라 여겨지던 대구·경북에서도 20.2%에서 31.2%로 높아졌다. 반면 대전·충청은 36.6%에서 40.0%로 소폭 상승했으며, 인천·경기는 42.6%에서 42.4%로 거의 변화가 없었다. 노후보에 대한 지지율은 5월1일 조사에서 다소 떨어졌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부산·울산·경남의 경우 지지율이 40.1%에서 33.3%로 떨어졌는데, 이는 PK지역 주민들의 노후보에 대한 지지가 매우 불안정한 상황임을 보여준다.

    한편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는 세 번의 조사에 걸쳐 전지역에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기할 만한 것은 영남에서의 이후보에 대한 지지율의 변화인데, 대구·경북의 경우 68.2% → 49.5% → 43.2%로 감소한 반면, 부산·울산·경남의 경우에는 53.1% → 40.8% → 47.8%로 감소했다가 다시 증가했다. 부산·울산·경남에서 1개월 사이의 이런 변화는 노후보와 이후보에 대한 이 지역 주민들의 생각이 수시로 변화하고 있으며, 이번 대선에서 결정적인 변수가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 지역은 지난 1997년 대선에서 제3의 후보인 이인제 후보에 대한 지지가 비교적 높았던 곳으로, 과거의 그러한 경험이 현재의 선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노후보와 이후보의 대결에 한국미래연합 박근혜 의원이 가세할 경우 그 지지율의 변화 또한 관심거리다. 이 글에서는 노후보와 이후보의 대결구도에 주목하고 있지만, 1987년 이후 치러진 대선결과가 보여주듯이 이번 대선 역시 3자대결 구도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는 5월1일 현재 3자가 대결할 경우 지역에 따른 지지율을 보여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박의원이 대선에 출마한다면 이후보의 표보다는 노후보의 표를 가져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지역은 서울과 부산·울산·경남인데, 박의원이 출마할 경우 이 지역에서 이후보의 지지율은 각각 2.9%, 1.4% 감소한 반면, 노후보의 지지율은 6.8%, 5.6% 감소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박의원이 갖고 있는 정치적 이미지가 이후보보다는 노후보의 그것과 중첩되는 것에서 비롯한 결과라 풀이할 수 있다.

    지역에 따른 이런 지지율의 변화가 함축하는 바는 세 가지다. 첫째, 노풍은 전국적인 현상이지만, 그것을 주도한 지역은 호남, 부산·울산·경남, 그리고 서울이다. 둘째, 이 가운데 문제가 되는 지역은 부산·울산·경남으로, 두 후보에 대한 이 지역의 지지가 상당히 불안정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대선구도가 노후보와 이후보의 양자대결로 갈 경우에는 이 지역의 선택이 승패의 중요한 갈림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대선이 가까워지고 태도유보층이 점차 줄어들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율 하락은 라이벌 후보에 대한 지지율 상승으로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에 현재 지지율의 차이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은 세대에 따른 지지율의 변화 추이다. 이 표에서 주목할 것은 3월과 4월 사이에 노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20대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고르게 증가했다는 점이다. ‘386 세대’가 주축을 이루는 30대의 경우 47.5%에서 57.2%로 늘어났으며, 20대의 경우도 41.3%에서 52.9%로 증가했다. 노후보에 대한 전체 지지율이 다소 감소한 5월1일 조사에서는 30대와 40대의 지지율이 한풀 꺾였지만, 20대의 경우는 오히려 52.9%에서 58.1%로 늘어났다. 한편 이후보에 대한 지지는 점차 감소해 왔지만, 핵심 지지층인 50대 이상에서는 계속 노후보를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세대에 따른 두 후보에 대한 이런 지지율의 차이는 우리 사회에서 세대적 균열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준다. 노후보와 이후보의 대립구도를 흔히 세대문제로 접근하려는 분석들이 있는데, 이제까지의 여론조사 결과는 그 분석들이 상당히 타당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여러 사회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우리나라 세대간 정치의식의 차이는 매우 큰 편이며, 특히 젊은 세대의 경우 개혁적인 후보를 지지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세대에 따른 이런 차이는 이번 대선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다. 1997년 대선에서도 세대별 차이는 선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덧붙여 여론조사 결과는 노풍을 바라보는 20대와 30대의 차이를 보여준다. 30대의 경우 노풍이 본격화하기 전인 3월 초부터 높은 지지를 보여주는 반면, 20대의 경우는 2개월 동안 극적인 상승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결과가 시사하는 바는 노풍의 진원지가 ‘386세대’이지만, 그 바람의 영향은 20대에서 강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노후보에 대한 20대의 높은 지지율은 그것이 단기간에 이뤄진 것인 만큼 불안정한 요소가 없지 않다. 하지만 일각에서 이야기하는 ‘20대 보수론’은 적어도 정치의식의 경우 타당하다고 보기 어려울 듯하다.

    는 직업에 따른 지지율의 변화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노후보와 이후보의 지지계층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노후보의 경우, 화이트칼라와 학생을 주축으로 블루칼라와 자영업층에서 높은 지지를 받은 반면, 이후보는 농·임·수산업과 블루칼라, 자영업, 주부층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직업에 따른 지지율 조사결과는 계급투표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한데, 주목할 것은 화이트칼라의 노후보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다. 일반적으로 계급투표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이익과 이념에 따라 투표하는 것을 말하는데, 서구의 경우 상층계급은 주로 보수주의 정당을, 하층계급은 주로 진보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계급투표 경향을 염두에 두고 를 다시 보면 우리 시민사회의 계층적 균열은 후보의 지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화이트칼라층에서의 노후보에 대한 유독 높은 지지율에는 ‘386세대’가 화이트칼라의 주축을 이룬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계층적 요인보다는 세대적 요인이 잠복되어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더욱이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낮은 지지율은 유권자가 갖는 정체성 가운데 계급보다는 지역과 세대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이다.

    지역·세대·직업에 따른 지지율 분석을 종합해보면, 영호남과 서울, 20∼30대, 그리고 화이트칼라와 학생층이 노풍을 주도했으며, 노후보와 이후보의 대결구도는 지역이 주요변수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세대가 나름대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결과를 고려할 때 이번 대선이 노후보와 이후보의 양자 대결로 갈 경우 예상되는 경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경향성이 다소 약화되겠지만 지역은 유권자의 선택에 여전히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칠 변수로 보인다. 특히 문제가 되는 지역은 부산·울산·경남이며, 이 지역의 성향은 예측하기가 매우 어렵다. 노후보에 대한 이 지역 주민들의 성향은 현재까지 유동적이며, 앞으로 나타날 이슈들에 따라 그 지지율의 변화는 작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노후보는 김영삼 전대통령을 만나고 한이헌씨를 부산시장 후보로 미는 등 다각적인 대비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노후보에게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지는 미지수다. 6·13지방선거가 중요한 분수령이 되겠지만, 그 이후에도 상황에 따라 이 지역의 지지율이 격변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내 고장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의 노후보에 대한 지지가 유동적인 것은 ‘합리적 행위’로서의 투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통적으로 사회과학에서 투표경향을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 가운데 하나가 ‘합리적 선택이론’이다. 즉 투표는 경제적 이익을 지향하는 합리적 행위로 볼 수 있는데, 내 고장 후보를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보다 경제적 이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과거 대선에서 자기 고장 후보에 대한 영남과 호남에서의 극단적인 표쏠림 현상은 합리적 선택이론의 구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의 경우는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대선에서는 양김씨처럼 정당과 대통령후보가 지역적으로 일치하거나, 이회창 후보처럼 지역과 무관했던 반면, 2002년 노무현 후보의 경우에는 호남에 기반을 둔 민주당 후보라는 점에서 부산·울산·경남의 유권자들이 노후보에 대한 지지를 망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1997년 당시 이 지역에서 이인제 후보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았던 지지가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의 패배를 가져 온 ‘정치적 학습효과’는 그 판단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이번 대선에서 지역 다음으로 중요한 변수는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30대 초반에서 40대 초반에 이르는 ‘386세대’의 노후보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이들이 1980년대 일련의 정치변동을 거치면서 성장한 세대라는 점에서 실제 투표행위로 이어질 것이다. 이 ‘386세대’의 정치의식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개혁에 대한 높은 열망이며, 이들은 ‘보수 대 진보’로의 정치사회 재편을 선호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를 보면 신민주대연합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대는 30대이며, 지역에 따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20대와 40대의 경우 현재 이후보보다 노후보에 대한 지지가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 투표에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 속단하기 어렵다. 의 4월과 5월 조사에서 40대의 지지 경향을 보면 태도유보층이 6.2% 증가했는데, 보수적 경향과 진보적 경향이 공존하는 40대의 경우 두 후보가 앞으로 제시하는 정책들을 지켜보면서 지지의 향방을 결정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5월 조사에서 노후보에 대해 가장 높은 지지를 보여주고 있는 20대는 상대적으로 개혁적인 노후보를 지지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예견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20대의 투표율이 낮았던 점을 고려할 때 그것이 대선구도에 끼칠 영향력은 30대보다는 적을 것으로 보인다.

    1997년 김대중과 2002년 노무현의 차이

    그렇다면 현재의 구도는 과거 대선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제까지의 여론조사 결과를 1997년 대선결과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지역주의 투표의 경우 1997년 대선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영남지역에서 50%가 넘는 지지를 얻은 반면,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호남에서 90%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3위를 차지한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인천·경기, 대전·충청지역과 영남지역에서 대략 20∼30%에 이르는 지지를 얻었다.

    1997년 대선결과를 현재까지 나타난 노후보와 이후보의 지지율과 비교해볼 때 지역주의가 약화하고 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2002년 지지율이 1997년 투표경향과 다른 점이 있다면 부산·울산·경남지역에서 노후보에 대한 지지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는 점인데, 노후보가 이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지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 시민사회의 정치적 균열에서 지역주의의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세대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에서 볼 수 있듯이 1997년 대선에서는 20∼30대가 김대중 후보를 높게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과 은 1997년 한국갤럽의 투표자 조사결과로 정대화 상지대 정치학과 교수가 1998년 ‘동향과 전망’ 37호에 발표한 ‘제15대 대통령선거 결과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재인용한 것임).

    1997년 대선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이었던 ‘386세대’는 보수를 내세운 이회창 후보보다는 개혁을 표방한 김대중 후보를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과 을 비교해볼 때 이회창 후보는 20∼30대보다는 40대 이상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노무현 후보와 김대중 후보 지지에 대한 비교는 노풍 진원지의 하나로서 386세대에 대한 분석을 좀더 세심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즉 386세대가 노풍을 주도하고 노무현씨가 민주당후보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지만, 그것을 아주 새로운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적 상상이 허용될 경우 만일 이인제 후보가 386세대에 어울리는 개혁적인 경향을 보여주었다면, 경선결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가오는 12월 대선에서 노후보에 대한 20∼30대의 지지는 1997년 대선과 비교할 때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1997년 대선결과와 현재까지 나타난 노후보와 이후보에 대한 지지율의 비교에서 흥미로운 것은 직업별 성향이다. 와 을 비교해볼 때 단연 두드러지는 것은 화이트칼라와 농·임·수산업층의 경향이다. 1997년 당시 대선에서 화이트칼라는 이회창 후보에게, 농·임·수산업층은 김대중 후보에게 더 많이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현재 노후보와 이후보의 구도에서는 다른 경향을 보여준다. 이는 아마도 IMF 경제위기 이후 중산층이 양극화되고 소득분배가 악화된 것이 화이트칼라층에게 보수적인 후보보다는 개혁적인 후보를 선호하게 만든 것으로 보이며, 농·임·수산업층의 경우에는 지난 몇 년간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야당 후보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략히 살펴본 2002년 대선 과정과 1997년 대선 결과의 비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재 노후보에 대한 지지 양상은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 대한 지지 양상과 사뭇 다른 특성을 보여준다. 그 중요한 차이는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호남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반면, 노후보는 호남에서의 높은 지지와 함께 영남에서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경향은 현상적으로 지역주의가 다소 약화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역주의의 수문이 단숨에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과거와는 달리 이번 선거에서 지역주의는 지역에 따라 복합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둘째, 지역주의의 수문이 다소 낮아질 경우 먼저 시민사회의 균열을 활성화시킬 요인은 세대가 될 것이다. 노풍을 386세대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일종의 ‘세대혁명’으로 보는 시각은 바로 이런 상황을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세대의 역할을 우리 시민사회에서 아주 새로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가능성이 비교적 낮았던 노무현씨를 대통령후보로 만든 것에는 세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지만, 20∼30대의 노후보에 대한 지지는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받은 지지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386세대’의 정치적 영향력은 1997년 대선에서 이미 시작된 셈이다.

    대선에 대한 우리 국민의 관심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볼 때 높은 편이다. 이것은 한국정치가 고도의 중앙집중성을 갖고 있으며, 대선 결과가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더불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정치의식의 지속적인 성장 또한 대선에 대한 관심을 크게 제고시켰다. 지금까지 치러진 세 번의 대선은 모두 국민들의 높은 관심을 끌었으며, 특히 1987년 대선과 1997년 대선은 그 결과를 누구도 쉽게 예측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이었다.

    세 차례의 대선에서 흥미로운 것은 민주화를 표방하는 세력의 점진적인 약진이다. 1987년 대선에서 민주화를 대변하던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패배했지만, 1992년 대선에서는 3당합당을 통해 여당 후보로 나선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고, 1997년 대선에서는 자민련과의 연대를 통해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가 특정한 정치적 국면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흐름을 볼 때 1992년 대선이, 3분의 1의 민주화 세력이 3분의 2의 보수 세력과 연대해 성공한 것이라면 1997년 대선은, 3분의 2의 민주화 세력이 3분의 1의 보수 세력과 연대해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난 세 번의 대선 모두 보수와 진보의 2강구도로 치러지지는 않았다. 1987년 대선에서는 3강구도, 그리고 1992년과 1997년 대선에서는 2강1중구도로 진행되었다. 2002년 대선도 2강구도가 아닌 복합구도로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다만 현재까지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은 후보는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이며, 이들은 앞서 지적한 대로 지역, 세대, 계층에서 대립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특히 민주화 세력을 표방하는 노후보는 현재까지 보수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하지 않고 대선에 임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구도가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것은 노무현 후보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정치 세력의 성격은 진보인가 아니면 중도인가. 필자가 보기에 현재까지 나타난 노무현 후보의 정치적 성격은 진보와 중도가 혼재되어 있는 ‘진보적 중도주의’에 가깝다. 진보적 중도주의란 중도주의를 견지하되 그 방향을 진보 쪽에 두는 것을 말하며, 이는 현 김대중 정부의 성격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경제정책에서는 신자유주의에 가깝지만 사회정책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진보적 중도주의의 요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대선이 노후보와 이후보의 양자대결로 진행될 경우 그것은 ‘보수 대 진보적 중도’의 대결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보수와 진보의 대립구도를 이루는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 대선의 정치지형이 ‘보수 대 진보적 중도’의 구도로 나타나는 것은, 시민사회의 이념적 균열이 갖는 실제 영향력이 그만큼 적거나, 아니면 시민사회의 보수적 성격이 여전히 두드러진다는 것을 함축한다. 정치의식조사에서는 진보주의를 선호하지만 실제 투표에서는 보수주의나 중도주의를 선택하는 것이 현재 우리 시민사회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2002년 대선에서 과연 유권자들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노후보든 이후보든 정책과 비전에서 개혁을 화두로 삼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개혁 프로그램은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세계화와 정보화의 흐름을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보수적 개혁과 중도적 개혁이라는 선택 앞에서 지역주의를 축으로 세대와 계층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대선레이스를 섣불리 예단하기는 어렵다. 바야흐로 한국 시민사회가 새로운 시험대에 올라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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