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수로건설 공사는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이 서명한 제네바합의문에 따라 이행되는 사업이었다. 북한이 플루토늄 핵시설을 동결·해체하는 대가로 발전용량 1000MWe 경수로형 원자력발전소 2기를 제공하기로 했던 것. 또한 미국은 첫 경수로가 완공될 때까지 대체에너지로 북한에 매년 중유 50만t을 공급하기로 했다.
이듬해 3월 한·미·일 3국은 이 사업을 담당할 KEDO를 설립했고, 12월에는 ‘경수로공급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후 KEDO 경수로는 DJ정부 햇볕정책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였다. 크고 작은 마찰음에도 2002년 7월에는 경수로 운영과 관련해 북한측 요원 25명이 남한에서 훈련을 받았고 8월에는 콘크리트 타설 등 공정을 본격화해 순풍을 탄 듯 보였다.
그러나 착공 후 6년이 지난 지금 KEDO 경수로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2002년 10월 이른바 ‘제2차 북핵위기’가 불거진 이래 진척되지 못한 건설사업은 사실상 중단상태에 놓였다. 건설지연에 따른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북한과 장비·인원의 안전한 철수를 요구하는 KEDO측 입장이 맞부딪히며 진통을 겪다가, 급기야 2003년 12월1일에 경수로건설 중단이 공식 선언되기에 이른다.
한국은 ‘일시중단’, 미국은 ‘폐기’
당시 장선섭 통일부 경수로기획단장 등 한국 당국자들은 “주 계약상 명시된 유보조항에 따라 한시 중단된 것이며 이 용어 자체는 반드시 재개를 전제로 한다”고 강조했다. KEDO 집행이사국 간에 ‘1년 내 공사재개’를 위한 협의를 계속할 것이며 언제라도 공사를 재개할 수 있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그러나 9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열린 6자회담은 경수로 문제와 관련해 어떠한 결정도 도출하지 못한 상태다.
경수로사업의 재개를 낙관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태도에 있다. ‘일시중단’을 강조하는 한국측과 달리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영구중지’ 입장에 가까웠다. 2003년 11월 아담 어렐리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경수로사업 중단방침을 밝히는 정례브리핑에서, 일시중단을 의미하는 ‘서스펜션(suspension)’ 대신 종료의 뜻을 담은 ‘엔드(end)’를 사용했다. 이에 대해 미국 언론은 경수로 계획에 대해 미 국무부가 공식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6자회담 등을 통해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더라도 부시 행정부는 결코 경수로 같은 핵에너지 프로그램을 부활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2004년 6월말 현재 금호지구 현장에는 KEDO측 직원 6명과 한국인 115명이 체류하면서 경수로건설 사업재개에 대비하여 시설물을 보존 중이다. 6월말까지 투입된 경수로사업비 15억1000만달러 가운데 한국이 부담한 비용은 11억달러 안팎(약 1조3000억원). 이와는 별도로 추후 경수로사업이 공식적으로 ‘완전중단’ 될 경우 KEDO는 주계약자인 한국전력에 3억~5억달러의 위약금을 물어주어야 한다.
현재는 한국과 일본이 기존 사업비 분담비율에 따라 추가비용도 나누어 책임질 계획이지만 일본의 태도가 확실하지 않은 만큼 한국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외에도 한전을 비롯해 두산중공업,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KOPEC), 현대 동아 대우건설 등 공사에 참여한 100여 개 국내외 업체의 피해는 고스란히 별개로 남아 있다.
경수로사업이 폐기되면 총 2조원에 달하는 비용이 허공으로 날아가버린다. 발전소를 짓지 못하게 됨으로써 비용을 회수할 방법은 전혀 없다. 한국의 재정적 손실에 대해 미국은 ‘모르쇠’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더욱이 사업 폐기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확고해 보인다.
지난 5월 ‘워싱턴 타임스’는 미국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했다. 베이징에서 열린 6자회담 실무그룹 회의에서 리근 북한 외무성 부국장이 “농축 우라늄 핵 프로그램을 폐기할 경우 경수로 건설공사를 재개할 의향이 있는지” 미국에 물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측 대표인 조지프 디트라니 국무부 대북교섭담당 특사는 “북한이 우선적으로 모든 핵 프로그램을 완벽하게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