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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샌드위치 세대’ 40대의 흔들림

정신과 의사의 중년남성 관찰기

  • 정혜선 정신과 전문의·마음과 마음 원장

정신과 의사의 중년남성 관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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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흔들리는 40대에 접어든 한국 남성들을 관찰해보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가 ‘현실순응적 태도’다. 98년에 출간된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 자료를 보면 각 연령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몇 가지 키워드가 수록돼 있다. 벗어나려는 10대(탈출 욕구), 즐기려는 20대(재미 욕구), 더불어 살아가려는 30대(공동체의식), 외로운 50대(외로움)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40대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바로 ‘피곤한 40대’다. 40대는 20대처럼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몸부림치지도 않으며 30대처럼 사회불만을 토로할 힘도 없다. 일회용 위장약 복용률이 어느 연령대보다 높고, 노후보장보험에 80%가 가입해 있을 만큼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지니고 있다.

가족에 대한 강박적인 의무감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이나 자신감 상실도 40대 남성들에게 심리적 피곤함을 가중하고 있다. 그러한 심리적 피곤함에서부터 40대 남자의 현실순응적 태도가 비롯된다.

둘째는 ‘편견과 아집의 고착화’다. 얼마 전 한 식당에서 재미난 장면을 목격했다. 직장 동료간 회식자리인 듯했다. 상사로 보이는 40대 남자를 중심으로 10여 명이 방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상사는 자신의 인생관, 정치철학 등에 관해서 신나게 말하느라 고기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상사 바로 앞과 옆에 앉은 두세 명만 얼굴에 기계적인 웃음을 띤 채 그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 그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얼굴에 생기가 있어 보였다.



확실히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서 말이 많아지고 남의 말을 귀기울여 듣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오정식 동문서답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뿐 아니다. 스스로 터득한 몇 개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칙들을 일반화하여 타인에게 강요하는 무리수조차 서슴지 않는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비유를 들어 A,B,C 세 자동차 중 하나를 사려고 망설이는 남자가 있다고 치자. A자동차는 엔진성능이 뛰어나고, B자동차는 외장이 좋으며, C자동차는 승차감이 뛰어나다. 이렇게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경우 남자는 어느 한 자동차를 선택하고 나서도 ‘불안심리’가 뒤따른다. ‘내가 선택한 것이 과연 최선이었는가’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장점을 강조하고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나쁜 것이라고 폄하기 시작한다. 마음을 편케 하려는 심리적 방어기제의 일종인 것이다.

중년은 이렇게 자기 정당화, 자기 합리화가 두드러지는 시기다. 어떻게든 자신이 경험했거나 받아들였던 상황들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부정하게 되면 그 시간 속에 들어 있던 자신의 존재 근거 자체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40대 남자들이 편견이나 아집 등에 집착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바로 이런 것이다.

40대의 감성화 경향

셋째는 40대 남자들에게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감성화 경향’이다. 상담실에서 만난 한 40대 건축가의 말을 들어보자.

“얼마 전 집 앞 문방구를 지나다 우연히 하모니카를 보았습니다. 갑자기 어린 시절 하모니카를 서툴게 불어보던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제부터 한가할 때 하모니카나 불어볼까 해서 하나 샀습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가슴이 다 설레더군요.”

중앙부처의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과장(43)도 그런 경우다. 서점에 가도 늘 경제 재테크 서적이나 직장인의 성공처세술을 다룬 책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그가 시에 끌리기 시작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 때문이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보던 책을 뒤적이다가 한 구절에 끌려서 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시는 이젠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낙이 되었다. ‘방금 운명이 제 앞을 지나갔습니다’라는 시구처럼 시가 운명처럼 그의 앞을 지나갔다. ‘내가 왜 그동안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를 몰랐을까’ 하고 뼈에 사무치게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는 시를 보기 위해서 월간 문학지를 정기 구독하기 시작했고 PC통신의 문학동호회에도 가입했다. 동호회 사람과 만나서 시와 인생에 대한 얘기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이제까지 쌓아온 생활의 온갖 찌든 때와 쓰레기들이 다 발 밑으로 사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시와 시를 통한 세상만이 그에게 의미를 갖게 해주는 듯했다.

그는 지금 자신과 비슷한 나이에 지리산에서 실족사한 어느 시인의 시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그의 아내는 “문학청년 하나 났네” 하며 약간은 비아냥거린다. 아내의 그런 태도는 김과장을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우울하게 했다.

늘 바깥일에만 신경을 집중한 채 전투적인 삶을 살아가던 남자가, 어느날 드라마를 보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또 남자들은 이때 의존성이 늘어나고 따뜻하고 섬세한 감정이 되살아난다. 갑자기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이 생기며 아이의 생활에도 관심이 생긴다.

40대 후반의 한 육군 대령이 아들 문제로 진료실을 찾았다. 그의 아들은 머리를 온통 노랗게 물들이고 가출을 일삼는 세칭 ‘날라리’였다. 그는 남부끄러워서 아들을 때려도 보고 회유도 해보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부대에서는 그의 말 한마디에 수천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 집에서는 아들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수치스러웠다. 그런 그가 어느날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며 당황한 기색으로 병원으로 뛰어온 것이다.

자세한 내막은 이렇다. 전날 저녁 아들이 밤 11시까지 들어온다는 약속을 해놓고서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들어왔다. 아들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아들이 들어오자 흥분해서 혼을 내다가 아들 앞에서 자신이 옛날에 얼마나 고생하며 살았는지를 얘기하게 됐고, 그러다가 그만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아들에게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얘가 이제부터 아버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큰일났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만나본 아들의 말은 전혀 달랐다. 아들은 “저는 어제 저녁에 난생 처음으로 우리 아버지도 인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전까지 아버지에 대한 반항과 적개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아들은 아버지의 인간적인 면모에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다. 남자의 감성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이 성공적으로 나타난 사례다.

남자의 감성으로 성공한 나훈아와 실패한 남진

실제로 남자의 감성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바로 가수 나훈아와 남진이다. 70년대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두 라이벌 가수는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라이벌이 아니다. 한 사람은 남자의 감성으로 호소해 지금도 성공적인 인생을 보내고 있지만, 또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훈아를 보자. ‘대한민국 나훈아’라는 그의 비디오 타이틀에 걸맞게 30년 이상 가수로서 정상을 유지해온 스타다. 철저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모든 것이 자신의 컨트롤하에 움직일 수 있을 때만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그래서 자신이 기획하는 라이브 무대에만 서는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다. 탄탄한 노래 실력과 엄격한 자기관리가, 30년이 넘은 지금껏 가수 나훈아를 인기 정상에 있게 만든 비결이란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그의 콘서트를 직접 본 필자는 다른 각도에서 나훈아를 생각하게 됐다. 프로로서 완벽에 가까운 그의 능력에다 결정적으로 날개를 달아주는 어떤 요소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감성적 섹스 어필’이었다.

과장된 경상도 사투리, 검은 얼굴에 유난히 대비되는 흰 치아를 드러내는 과장된 웃음은 팬들에게 친밀감을 주면서 심리적 방어를 무장 해제시킨다. 그리고 그의 무대에서 느껴지는 일관된 흐름은 한마디로 ‘교태’였고, 그것이 중년 여성들에게 강한 감성적 섹스 어필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개발한 창법이라는 ‘꺾기’나 ‘뒤집기’도 결국은 탄탄한 그의 목청에 교태를 섞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의 섹스어필은 요즘 젊은 가수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겉무늬만 섹스 어필이 아닌, 청중들에 대한 ‘극진한 공감과 배려’가 동반된 섹스 어필이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것은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최고의 여자로 대우받는 여자가 가질 법한 극치감 같은 것이다. 불가사의할 만큼 매력적인 나훈아식 감정전달이다. 많은 중년 여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빠져 드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리라.

그는 또 나이든 남자의 성도 상품이 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가수이기도 하다. 그 나이가 되도록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다. 그러나 50이 넘도록 감성적인 섹시함을 보여줄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다.

반면에 한때 라이벌이었던 가수 남진을 보자. 얼마 전 연예인협회 이사장에 취임한 후 토크쇼에 나온 그를 보게 되었다. 한때 대한민국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었고 50대라는 나이에 ‘걸맞아 보이는’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한 사내가 거기 있었다. 예술가적인 풍부한 감성이나 상상력은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집안일은 잘 도와주느냐는 MC의 질문에 “우리 집안 남자들은 절대 부엌 같은 데는 안 들어갑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그것을 너무나 자랑스러워하는 듯 보였다. 그의 아내가 밝히는 남편에 대한 바람은 듣는 사람의 마음까지 우울하게 만들었다.

“조금 덜 권위적이셨으면 좋겠어요.”

필자는 남진을 폄하하거나 희화(戱化)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융통성 없이 딱딱해 보이는 그는 마치 기름기 하나 없는 팍팍한 고기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잘생기고 재능 있던 사람도 나이가 들어 감성이 결여되면 전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무서운 증거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직업적인 능력만 대단하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여자를 데려다가 좋은 옷, 좋은 집을 사줄 수 있는 남자라고 가정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 있고 섹스 어필한 남자, 이것이 남자들에겐 지상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는 감성적인 남자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40대 남성의 흔들림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성공을 거머쥔 40대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그래, 난 성공했어. 그런데 그것이 대체 내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거야?” 하며 의미타령을 하기도 한다. 자신이 이룬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동시에 받기 때문이다. 살아왔던 시간들을 ‘의미가 없었다, 잘못 살았다’고 회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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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선 정신과 전문의·마음과 마음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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