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너 죽고 나 살기’ 20년 싸움

  • 이종찬 아주대 교수·의학사상 및 보건정책

    입력2006-11-09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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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료보험조합 통합논쟁,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권 다툼, 양·한방 의료 일원화와 한약 분쟁

    • 한약 분쟁의 불똥, 의약분업으로 튀다.

    • 의료 소비자인 국민의 작은 권리 찾기,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바야흐로 한국 의료계는 대논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다. 현재 진행되는 논쟁의 큰 줄거리는 다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의료보험 관리 운영 체계를 둘러싼, 소위 조합론 대 통합론 사이의 의료보험 논쟁 ② 한방의료와 양방의료를 일원화하자는, 의사와 한의사 사이의 의료 일원화 논쟁 ③의사와 약사의 업무 영역을 정확히 설정하자는 의약분업 논쟁 ④약사가 한약을 임의 조제할 수 있는지 여부를 둘러싼 한의사와 약사 간의 한약 분쟁을 말한다.

    각각 시작된 시점이 다른 이 4가지 논쟁은 처음에는 서로 무관한 듯 보였다. 그러나 2000년이 시작되면서 상황이 돌변하고 있다. 강의 지류들이 어느새 본류로 합쳐지면서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렇게 4가지 논쟁은 서로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어서 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각각의 논쟁은 한 그루의 나무다. 숲을 보아야 한다.

    의료보험 관리운영체계에 대한 조합론과 통합론 논쟁은 가장 정치적 양상을 띠고 진행됐다. 전두환 정권 이래 정부가 바뀔 때마다 이 의제는 정치적 부담이 돼왔고 정부, 각 의료보험조합, 의사단체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 사용자단체,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자단체, 전국농민회 등 농민단체, 그리고 최근에는 시민단체까지 가세해 이 쟁점은 말 그대로 ‘총력전’ 체제로 확대됐다.

    아마도 지난 20년간 모든 사회정책 가운데 의료보험 관리운영방식만큼 온갖 이해단체들이 줄기차게 대립해온 정책 과제도 없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의 의료보장 방식에서도 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이 논쟁은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다.

    의료보장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독일 비스마르크 모형인 국민의료보험제도(national health insurance, NHI)와 영국 비버리지 모델인 국가의료보장제도(national health service, NHS)가 그것인데, 양쪽 방식을 두고 논쟁한 나라는 있어도 한국처럼 관리운영방식을 둘러싸고 20년에 걸쳐 갈등을 겪은 나라는 없다.



    한약 분쟁, 잠자던 의약분업 깨워

    앞으로 한·양방 일원화, 의약분업, 한약 분쟁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각각의 논쟁결과가 다른 두 논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서로 긴밀한 상관성을 갖는다. 특히 논쟁 당사자들인 의사, 한의사, 약사는 각 논쟁을 제로 섬(zero-sum) 게임으로 간주하여 논쟁에서 지면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가 크게 손상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의료인과 약사들이 사회적 체면을 던져버리고 격렬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

    양·한방 일원화 논쟁과 한약 분쟁이 시작된 구조적 원인은, 의사와 약사들은 부인하지만, 1980년대 들어 한의사들의 경제적 지위가 급격히 상승한 것과 관계가 깊다. 1960~70년대 개발 독재의 결과로 경제 성장이 열매를 맺으면서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계층이 한약(보약)과 건강식품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의사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상승했다. 약사와 의사들이 의료분야의 사촌인 한의사들이 ‘땅 사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의사들은 의료 일원화를 통해, 그리고 약사들은 한약 조제를 통해, 한방의료 시장을 나누어 가지려 했다.

    1953년 약사법은 의약분업을 전제로 제정됐다. 1963년 개정된 약사법에서도 의약분업이 명기됐다. 그 후 몇 차례 의약분업의 기회가 있었지만 계속 유보됐다. 그렇게 미적미적하던 의약분업 논쟁은 공교롭게도 1993년 3월5일 “약국에는 재래식 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깨끗이 관리하여야 한다”는 약사법 시행규칙 제 11조 1항 7호이 삭제됨으로써 불거져 나온 한약 분쟁에 의해 촉발됐다. 얼핏 보면, 약국을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는 법 조항에 대해 한의사들이 집단 대응을 했던 이유는, 약사들의 한약 조제 금지를 규정했던 이 조항이 삭제됨으로써 약사들의 한약 조제를 방기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된 한약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 의약분업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약사들의 주장을 정부가 수용했고 1994년에 약사법이 개정됐다. 개정 약사법은 1999년 7월까지 의약분업을 시행하도록 명시했다. 결과적으로 한약 분쟁이 잠자고 있던 의약분업 논쟁을 깨운 것이다.

    원래 정부, 의사단체, 약사단체는 1999년 7월 의약분업을 실시하기로 합의했으나, ‘준비부족’-한국 사회 보건의료 정책 실시가 연기될 때마다 약방에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수사법이다-을 이유로 2000년 7월로 연기됐다.

    시간을 번 의사들은 대규모 집회와 시위를 통해 현행 의약분업 실시 모형에 대해 격렬하게 반발했다. 한국의료사(史)에 기록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연인원 수만 명의 의사들이 모여 정치적 압박을 가했다. 마침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약사단체도 4월 집회를 예고하고 있어 양측의 분위기가 험악하다.

    정책에서 시기(timing)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이런 점에서 정부는 1999년 의약분업의 실시 시기를 놓쳤고, 의사단체는 2000년 총선을 절묘하게 이용해 그것을 지연시키려 하고 있다.

    실패로 끝난 경실련의 중재

    약사에게 한약 조제권을 허용할 수 없다는 한의과대학 학생들의 집단시위로 시작된 한약 분쟁은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부로 권력이 교체되는 묘한 시점에 일어났다. 그것도 직접 당사자인 한의사와 약사가 아닌, 한의대 학생과 약학대 학생 사이에 대리전 양상으로 치러졌다. 한의대 학생들이 법정수업기한을 어겨가면서 격렬한 시위와 집회를 통해 한의사의 권익을 쟁취하려 했고, 물론 약대 학생들 역시 물리적 행동에 나섰다.

    1993년 9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분쟁 초기 단계에 양 집단을 중재하러 나섰다. 이것은 그때까지 제3자로 분쟁을 지켜보던 시민과 시민단체가 의료정책에 적극 개입하는 계기가 됐다. 경실련의 중재안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정부는 약사법 개정안에 대한 입법 예고에 들어갔다. 그것은 ①한방의료에서 의약분업 실시 ②한약사 제도의 신설 ③기존 약사에 대한 한약 조제권 인정 ④한약조제 지침서를 포함하여 한약조제 시험, 한약학과 설치, 한약사 배출 문제 등을 포함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국 의료제도 전반에 대한 정책적 대안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경실련의 섣부른 중재는 한약 분쟁을 해결한게 아니라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는 한약조제 시험을 둘러싼 2차 한약분쟁으로 번졌다. 1995년에 약사들은 1994년에 개정된 약사법이 자신들의 한약조제권을 제한하고 있다면서 헌법 소원을 제기했고 한약조제 시험을 전면 거부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가 약사 단체의 헌법 소원을 기각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약사 단체는 돌연 이를 취하했으며 한약조제 시험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약사들의 이런 방향 전환은 한의사들의 저항을 불러왔으며 한약조제 시험 출제자로 참여했던 한의과대학 교수들이 출제를 거부함으로써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각 논쟁은 이해 당사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은 정작 논쟁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지키며 그에 따른 적절한 의료비용을 지불하고 이용하는 데 불편함이 없으면 그만이다.

    사실 국민들이 의료보험에 대해 갖는 불만은 “의료보험료를 납부하는데도 진료비 중 본인 부담금이 너무 많다.” “조합론, 통합론이 무슨 말인지 어려워서 모르겠다. 어느 쪽이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데 편하고 의료비가 싼가?” 정도다.

    또 국민들은 한·양방 일원화에 대해 이렇게 불만을 토로한다. “아플 때 의사와 한의사 중에 어느 쪽으로 먼저 가야 할지 모르겠다. 의사와 한의사로부터 한꺼번에 진단받고 치료받을 수는 없나?” 환자들이 정말로 우려하는 것은 양쪽 의료기관을 이용함으로써 지불하는 중복의료비가 아니라 치료받을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또 의사들의 집단 시위, 한의과대학과 약학대학 학생들의 격렬한 집회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한결같이 “의약분업과 한약 분쟁으로 자기들끼리 싸우면 될 일을 왜 휴진과 휴업을 해 국민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지” 의아해한다.

    물론 각 논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들도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그들은 진지하게 이 문제를 고민해왔다. 그럼에도 극히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는 자신들의 논리에 빠져 정작 의료 소비자인 국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한 전문가들은 각자의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논쟁에만 매달리다 보니, 논쟁들이 서로 어떻게 상호 관련되어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보험이라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데서 시작된 의료 논쟁은 연쇄 반응을 불러일으켰고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가져왔다.

    의료보험 논쟁, 잘못 끼워진 단추

    광복 이후 한국 의료계 첫 논쟁은 조합론(의료보험 조합을 규모의 경제 범위 내에서 적정하게 관리하자는 주장) 대 통합론(전국의 모든 의료보험 조합을 단일화하자는 주장)의 대결이다. 1980년대 초 시작된 이 논쟁은 20년 동안 지속됐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면서 일단 통합론자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논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시작은 유신정권의 콤플렉스에서 비롯됐다. 유신정권은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부터 경제가 성장하는 성과가 나타나자 북한에 대해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의료체제의 가장 큰 장점인 전국민에게 무상으로 의료를 제공하는 북한의 정책과 제도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 한 장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픈 아이를 등에 업은 남한의 어머니가 치료비가 없어 울고 있는 모습을 그려놓고 “당신의 조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삼던 유신정권의 정당성을 흔들어 놓을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북한 사회주의 의료제도를 의식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부랴부랴 일본의 의료보험제도를 베꼈다. 이렇게 해서 1977년부터 실시된 의료보험은 500명 이상 사업장의 피고용자와 공무원 및 공·사립학교 교직원들과 같이 매월 일정 보험료를 감당할 수 있는 사회계층에 제한적으로 실시됐다. 오늘날 통합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의료보험 조합도 이때 만들어졌다.

    이렇듯 한국 의료보험 제도는, 비스마르크가 1883년에 독일 노동자들의 사회주의화를 막기 위해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을 실시했던 것처럼, 북한 사회주의 의료제도에 대해 우위를 점하려는 ‘체제경쟁’의 산물로 탄생했다.

    1970년대 정치적 이유로 의료보험 제도를 급조하는 데 동원된 정부 당국자나 학자들이 앞으로 실시해야 할 의약분업과 이 제도를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 고민할 리 없었다. 또 그때까지는 대중적 수요가 많지 않았던 한방진료를 양방진료 중심의 의료보험제도에 어떻게 편입할지 미리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1979년 의료보험법이 개정되면서 피고용자 수가 300명 이상인 사업장까지 의료보험 조합이 설립됐다. 전국 곳곳에 의료보험 조합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개중에는 재정 적자로 어려움을 겪는 곳도 있었다.

    재정 적자로 제때 보험 급여를 의료 기관에 지불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로 발생하면서, 1980년대 초 보건복지부(당시는 보건사회부) 내의 몇몇 관리들은 조합들을 통합해 단일 보험자 조직으로 개편하려는 대안을 제시했다. 논쟁에 불씨가 지펴졌다.

    전두환 정권이 집권했던 1980년부터 83년까지의 1차 논쟁, 노태우 정부가 집권했던 1988년부터 89년까지의 2차 논쟁, 김영삼 정부 집권 시기였던 1995년부터 1997년에 이르는 3차 논쟁, 김대중 정부 초기부터 통합이 이루어진 시기까지 4차 논쟁이 거듭된다. 이를 위해 한국 사회의 이익단체가 총출동하는 격전이 벌어졌다.

    결과는 일단 통합론의 승리로 끝났지만, 과연 통합론자들이 명분으로 내세운 통합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계속된 이 역사적인 논쟁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첫째, 논쟁의 양쪽은 ‘추상적인’ 정책 가치를 위해 ‘비효율적’으로 싸웠다. 통합론자들은 통합이 되면 보험료 부담에 형평성을 확보할 수 있으며 효율적인 관리운영이 가능하다고 주장해왔다. 이에 반해 조합론자들은 통합이 오히려 계층간에 역형평을 초래하며 보험재원 조달 방식과 보험 의료비 관리 측면에서 조합론이 더 효율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둘 다 맞는 이야기인 듯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근거로 내세우는 형평과 효율은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실험실에서 하는 연구가 아닌 바에야 실시하지도 않은 통합방안을 조합모형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더욱 공평하고 효율적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예측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 비현실적인 주장이다.

    필자가 볼 때, 양쪽 논자들은 서로 다른 형평의 잣대로 자기 주장을 합리화하고 있다. 효율성의 잣대도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질적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이렇게 비교 입증이 불가능한 양쪽의 주장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둘째, 양쪽은 조합의 관리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면서 실제 의료보장 문제의 본질인 진료비 지불방식을 소홀히 했다.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는 진료 행위별로 점수를 매겨 보험수가를 책정하는 행위별 수가제(Fee-for-Service)를 채택하고 있다. 의료인에 대한 행위별 수가제 지불방식에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방식은 필연적으로 보험재정의 안정성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

    왜 그럴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행위별 수가제는 똑같은 질병이라도 치료방식에 따라 진료비에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의료보험 수가가 싼 한국 현실에서 의사들은 단위 시간 내에 보험수가가 비싼 진료 행위를 선택할 것이다. 이와는 달리, 곧 시행될 포괄수가제는 맹장염처럼 똑같은 질병에 대해선 일정한 의료보험 수가가 책정된다.

    다음으로 한국의 의사인력은 80% 이상이 전문의인데, 전문의는 자신들이 투자한 교육 및 수련시간에 대한 기회비용을 보상받고자 한다. 그들은 현재의 보험 수가제로는 자신들의 기회비용을 보상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행위별 수가제에서 단위 시간에 가능한 한 보험수가가 높은 진료 행위를 하려 한다.

    이와 같이 행위별 수가제는 의료 제도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국민 의료비 상승을 부채질하고 있다. 양쪽 주장자들은 조합의 관리운영 체계를 진료비 지불방식부터 심도있게 연구했어야 한다.

    또한 의료전달체계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아 1·2차 기관을 거치지 않고 대학병원 등 3차 의료기관으로 직접 가는 것이 허용된 상태에서 환자들은 첨단의료기술을 갖춘 대형 병원으로 몰려들고, 이 또한 진료비의 가파른 상승으로 나타난다. 1990년대 중반 의료보험 적립금이 3조원을 상회했지만, 95년부터 평균 20%가 넘는 진료비 상승으로 보험재정이 흔들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재정경제부가 보험료와 보험수가에 대한 정책결정권을 갖고 있는 현실에, 당분간 낮은 수가와 낮은 보험료가 유지될 것이다. 이는 보험급여를 확대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며 보험재정을 불안하게 한다. 결국 환자들의 본인 부담금만 증가하게 되어(외래 환자의 경우 67%, 입원 환자의 경우 40%를 넘는다), 현재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는 의료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비를 할인’해 주는 제도로 전락해버렸다. 이것이 20년간 지겹도록 싸운 조합론 대 통합론 논쟁의 전리품이다.

    정확한 소득파악이 우선

    셋째, 도시지역 자영자 중에 소득자료가 파악되는 가구가 25%에 불과한 현실은, 조합론이든 통합론이든 지역의료보험 재정이 의료보험에 덫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무시하고 재정통합을 하면, 소득이 높은 도시 자영자가 소득이 낮은 직장 근로자보다 보험료를 적게 내는 소득역진현상이 일어난다.

    그래서 통합론자들은 지금도 애초에 정부가 지역의료보험 재정을 지원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라고 시위한다. 설사 정부가 지원한다 해도 이 구조로는 단기간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인 불균형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국세청도 파악하지 못하는 도시 자영자 소득을 보험자 단체가 어떤 기준으로 파악하고 평가하겠다는 것인가.

    조합론 대 통합론으로 백날 대립해봐야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방법은 조세제도 개혁에 있다. 조세제도를 개선해 자영자의 소득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문제는 국민연금에서도 그대로 재연되고 있다. 조합론자와 통합론자, 그리고 양쪽 주장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익단체들이 의료보험 논쟁에 쏟은 힘과 자원을 차라리 자영자 소득 파악에 투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다.

    넷째, 통합론자들이 최근 제시하는 의료보험 향후 과제들은 의료보험 통합 이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통합 이전에 해결했어야 할 정책이다. 현 정부의 보험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는 통합론자들은 통합 이후의 과제로 진료비 지불 방식 개편, 보험재정 안정화 및 재정운영방식에 대한 점검, 적정한 보험 급여와 보험료 부과 방식에 대한 사회적 합의 등을 이야기했다. 의약분업, 국민의 의료 이용 행태 변화, 진료비의 급격한 상승, 의료인의 수가 인상 요구 등으로 통합의료보험에 대한 새로운 틀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과제들은 조합론이나 통합론과는 무관하게 의료보장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풀어가야 할 사안이지 통합 이후의 과제가 될 수는 없다. 의료보험료와 보험수가가 낮은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조합론과 통합론으로 맞서 싸우는 데 전력을 소모해버리고, 정작 피보험자인 국민에게 진료비 상승과 보험수가 인상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알리고 설득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그리고 이제 와서 사회적 합의 운운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아울러 몇몇 새로운 변수도 조합론이나 통합론과 무관하다. 의약분업의 경우, 1977년 의료보험 제도가 부분적으로 실시됐을 때 이를 의료보험에 접목해 실시했어야 한다. 또 1989년 전국민의료보험이 실시됐을 때 조합론이냐 통합론이냐로 논쟁하지 말고 의료보험 내 의약분업을 적극 검토했어야 한다. 정부가 중요한 시점에 두 차례나 실기(失機)를 하는 바람에 이제 와서 추진되고 있는 의약분업은 극단적인 대결구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책은 간 데 없고 정치만 나부낀다

    이처럼 관리운영체계가 조합론이거나 통합론이거나 국민에게는 별 차이가 없는데 양측은 왜 ‘총력전’을 펼치는 것일까? 사실 1980년 초 조합의 재정적자를 이유로 통합론이 대두했을 때는 정부 담당자들 사이의 찬반 논쟁 정도로 가볍게 출발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대결구도가 확대됐다. 정부와 보험자 조직은 물론이거니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조직, 농민단체, 여기에 의료인 집단과 시민단체까지 가세했다. 이처럼 총력전 체제가 된 데 대해, 각각의 집단에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런 이해관계는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한 것이 아니라, 논쟁을 주도한 논자들에 의해 첨예한 방식으로 만들어져왔다.

    양쪽 논자들은 자신들의 정책적 타당성을 입증하고 홍보하기 위해 기회손실(opportunity loss) 또는 기회이득(opport-unity gain)전략을 구사했다. 원래 이 개념은, 기회비용(opportunity cost)과 달리 비교가 불가능한 정책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쪽이 입게 될 손실 또는 이득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합론자와 통합론자들은 자기 쪽 정책이 시행됐을 때 이해관련 당사자들이 얻게 될 이득을 홍보하는 데 주력하는 한편, 상대쪽 정책이 시행됐을 때 입게 될 손실도 적극적으로 알렸다.

    이런 전략은 관련 이해단체들을 통합론과 조합론의 깃발 아래 모여들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논자들은 자기쪽 주장을 지지할 개연성이 높은 이해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방식으로 설득했고 결과적으로 갈등은 점점 첨예한 구도가 됐다. 급기야 조합론 지지를 서명한 한국노총 노동자 수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발표가 있자 진짜 서명이니 가짜 서명이니 따지는 웃지 못할 사건이 연출됐다.

    여하튼 이것은 정책 결정자에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됐다. 어느 쪽 손도 들어줄 수 없이, 양쪽 눈치만 보게 된 것이다. 기회손실 혹은 기회이득 전략이 힘을 발휘할수록 정책 결정자는 급변하는 의료현실에 대해 임기응변으로 대응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한약사 제도의 신설이다. 경실련의 중재로 한약사 제도를 신설했지만, 한약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2차 한약 분쟁의 도화선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즉 새로운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책은 왜곡, 변질되는 실패의 악순환을 겪게 된다. 한약사 제도는 앞으로 한약 분업 과정에 갈등을 일으킬 뇌관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전략에 따라 논쟁이 가열될수록 의료보장제도를 개선하려는 정부의 정책적 의지는 약해지고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가려는 전술만 난무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 보건복지부 장관은 수시로 바뀌는데 - 김영삼 정부에서만 장관이 9번의 차관이 5번 바뀌었다 - 정부내 어느 고위 공직자가 차분히 앉아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는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권 책임자들은 정책적 목적과 정치적 목적 사이에서 어느 쪽을 쟁취할 것인지 저울질한다. 두 개의 서로 대립된 정책(A와 B) 중에 A의 정책적 목적이 상대적으로 B의 그것보다 타당하더라도, A가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B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A 대신 B를 선택하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김대중 정부에 이르기까지 정권의 책임자들도 이런 고민을 했음이 틀림없다. 김대중 정부가 통합론자의 손을 들어준 것은 통합론의 정책적 목표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통합론 선택이 정권에 미칠 정치적 여파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또 여기에는 현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통합론자들의 로비도 요인이 됐다.

    20년 동안 계속된 의료보험 논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 이르다. 통합이 되기는 했으나 조합주의 시대의 취약점을 그대로 안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현재 한·양방 의료일원화, 의약분업, 한약 분쟁 등 의료보험의 구조에 깊은 영향을 끼칠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세 가지 논쟁은 의료보험 체계와 상관없이 진행돼왔다. 그런데 작년부터 의약분업 논쟁이 뜨거워지자 보건의료 정책과 관련된 논자들이 무대를 의료보험에서 의약분업 쪽으로 바꾸고 의약분업이 의료보험 재정에 끼칠 영향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의료보험 논쟁에서 사용된 전략과 방식이 새로운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다 다를까 벌써 ‘예측’이 난무한다. 예를 들어 정부는 의약분업이 실시되더라도 의료비가 감소하므로 보험재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반면, 어떤 전문가들은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약 1조원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전혀 다른 ‘예측’을 내놓는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통합론자들은 정부와 여당에 1조2000억원을 지역의료보험 재정에 지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의약분업 논쟁은 의료보험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재연하고 있는 셈이다. 통합론자들이 조합론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대결 선수만 바뀐 셈이다.

    한·양방 의료일원화, 의약분업, 한약 분쟁은 의사, 한의사, 약사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의료보험 논쟁과 성격이 다르다. 그동안 의사단체는 의료보험 논쟁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보험진료비 체불만 해결된다면 나머지 논쟁에 대해서는 어느 쪽으로 결정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의사 단체도 한방진료 중 침과 한방 농축제재 등은 의료보험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더라도 진료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기 때문에 의료보험 논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약사들은 사정이 달랐다. 1977년 의료보험이 부분적으로 도입되면서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는 “보험환자부터 의약분업을 실시하기로 노력하자”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로부터 1년 후 대한의사협회가 합의내용을 무효화한다는 공식방침을 발표함으로써 의료보험 체계 속에서 의약분업을 실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 역사에서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하지만, 만약 이때 의약분업을 의료보험 제도 속으로 편입해 실시했더라면, 의료보험의 점진적 확대과정 속에 자연스럽게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20년간 의료보험 논쟁에 들인 시간과 노력을 1980년대에 조금만 ‘보험 내 분업’에 바쳤더라면 의약분업은 훨씬 순조롭게 발전해왔을 것이다.

    의약분업 실시를 몇 개월 앞두고 의사단체는 느닷없이 시범사업을 실시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의사단체의 이 제안은 의약분업 역사를 되돌아보면 명분이 없다. 이미 1984년 약사들의 강경한 요구로 목포시에서 8개월간 시범 실시를 하다 실패로 단정한 의사단체의 반대로 중단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약사단체는 계속 실시하자고 주장했지만 정부도 의사단체의 의견을 따랐다. 이런 의사단체가 이제 와서 다시 시범사업을 해보자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도 의약분업 실시를 몇 개월 앞두고 말이다. 1980년대 중반 의약분업을 정착시킬 기회는 이렇게 사라졌다.

    1989년 7월, 전국민 의료보험이 실시되면서 약사단체는 다시 의약분업을 요구했다. 정부, 의사단체, 약사단체가 모여 밀고당기는 협상에 들어갔지만 조정안은 또 난항을 거듭하다 결국 결렬됐다. 대신 정부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약국의 조제투약을 보험에 적용하는 ‘약국 의료보험’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시행을 발표했다. 약사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의사들은 반대했다.

    물고 물리는 먹이사슬

    1980년대 약사들은 보건의료 정책 전문가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의약분업 실시를 위해 외롭게 싸웠다. 의료보험 논쟁의 논객들은 조합론과 통합론 싸움에 정신이 팔려 의약분업을 의료보험에 접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1993년 시작된 한약 분쟁으로 인해 약사들은 의약분업 추진에 더욱 매달리게 됐다. 한약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 개정된 1994년의 약사법은 1999년 7월부터 의약분업을 실시한다고 명기했지만, 막상 1999년이 되자,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는 또 준비 부족이라는 이유로 정부에 연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민단체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경실련, 참여연대, YMCA 등이 의약분업 실시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때부터 시민단체들은 정부의 의료 정책 방향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시민단체의 강력한 요구에 부담을 느낀 정부와 여당은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약사회가 2개월 안에 합의한다는 것을 전제 1년 연기를 수용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의료보험 논쟁처럼, 의약분업도 국민 건강을 위해 정책적 목표를 구현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수단으로밖에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의약분업을 주장하는 쪽은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의사들의 진료행위가 바뀌며 소비자의 의료 이용 행태도 하루 아침에 바뀔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 진료비에서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높은 것이 사실이지만, 의료제도를 바꾸면 관행적으로 굳어진 의술과 소비자의 의식까지 단시일 내에 바뀔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사실 이 점이 의약분업에 큰 걸림돌이다.

    드링크제인 박카스가 약 판매량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약의 소비행태 면에서 후진성을 보이는 한국 현실에서 의약분업이 실시되면 국민들은 당장 불편하다고 불평을 터뜨릴 것이다. 또 우리 국민들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으면 주사 맞고 약 받는 것을 당연시해왔는데, 7월1일부터 환자들이 의사 진료를 받고 나서 처방전 한 장 달랑 갖고 의료기관 문을 나서려면 얼마나 허탈감을 느낄 것인가.

    최근 대한소아과학회의 의뢰로 여론 조사기관인 한국 갤럽이 의약분업에 관해 시민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는데, 의약분업에 대해 찬성(27.3%)보다 반대(57.1%)가 많았으며, 반대 이유로 다수(전체 반대의 79.6%)가 불편함을 지적하고 있다.

    결국 현재의 의약분업 제도가 넘어야 할 장벽은 의사와 약사 사이의 권익다툼이 아니라 바로 국민들의 관행인 셈이다. 지금과 같은 정부의 안일한 홍보 정책으로는 이 장벽을 넘어설 수 없다. 그리고 몇몇 시민단체가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아 의약분업에 대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지만, 이 정도 노력으로 전 국민의 의료 이용 행태를 하루 아침에 바꿔놓을 수는 없다.

    의약(醫藥)의 전통과 서구화

    의료보험 논쟁과 의약분업 논쟁에 가담했던 논자들도 한·양방 의료 일원화 논쟁과 한약 분쟁에 대해서는 머뭇거린다.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 두 사안이 앞의 두 논쟁과 역사적 성격을 달리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서구사회에서 발달한 제도를 한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관한 논쟁이라면, 후자는 우리 사회처럼 전통의료와 서구의료가 공존하는 나라에서나 생길 법한 논쟁이다.

    우리 사회는 개화기에 서양의학과 과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됐고 일제 식민 통치를 거치면서, 전통의학이 억압을 받았다. 광복 이후에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한의학은 1970년대 경제성장과 때를 맞추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한방진료 덕분에 늘어난 수입이 의료 일원화와 한약 분쟁을 촉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특히 경제적 여유로 보약을 먹는 환자들이 늘어나면서 전국 곳곳에 휘황찬란한 네온 간판을 단 한방 병·의원이 들어서는 현상을 보고 의사와 약사들이 ‘배가 아팠’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 논쟁은 광복 이후 양방의료와 약사업무에 비해 국가적 지원과 정책적 관심을 끌지 못했던 한방의료가 복원되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겪어야 했던 통과의례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쪽과 그것을 나누어 가지려는 집단 사이의 대립상황으로 치달았다. 의사, 한의사, 약사 사이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정책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진지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역사를 통틀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만큼 우리나라 의약사(醫藥史)에서 민중이 의(醫)와 약(藥)의 주체가 된 시기가 없었고, 향약(鄕藥)이 나라 경제에 지대하게 공헌했던 시기도 없었다.

    12세기부터 14세기에 이르기까지 향약에 관한 여러 서적이 쏟아져 나왔는데, ‘향약구급방’과 같은 서적은 당시 백성들이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약초로 질병을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자라난 모든 약용물질의 총칭인 향약은 민중이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에 향약의 대중화는 의약을 사회화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장치였던 셈이다.

    오늘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계층이 사용하는 보약과 달리, 당시 민중은 약초가 지닌 자연 치유력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때는 민중이 스스로 의료의 사회화를 실천했던,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다.

    이와 같이 의사, 한의사, 약사들은 의약의 상품화에만 관심을 가질 게 아니라, 환자와 소비자들이 의약을 통해 몸의 주체로 거듭나게끔 관행적인 기존 의약행위를 바꿔가야 할 것이다.

    또한 국내 시장에서 서로 아귀다툼을 벌일 게 아니라, 대체의학과 보완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이런 당위론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두 논쟁에 이해 관계가 걸려 있는 의사, 한의사, 약사들에게 감히 몇 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먼저, 대부분의 한의사는 한의학의 민족주의적 전통에 호소하여 한·양방 의료 일원화에 관한 논의 자체를 꺼린다. 그들의 피해의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양과 서양의 만남 자체를 터부시할 필요는 없다.

    음악을 보자. 정명훈과 김덕수가 UN본부에서 협연했을 때, 조선 사람의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그들이 한국인이라는 점도 있지만, 서양음악과 사물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중국영화의 거장인 장이모와 인도 출신 주빈 메타가 푸치니의 ‘투란도트’를 베이징 자금성에서 같이 만들고 연주하였음도 알고 있다.

    예술처럼, 의학과 의술도 문화로서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듯이, “인생은 짧고 의술(예술)은 길다.”

    물론 동양과 서양이 어설프게 만나면 홍콩을 무대로 벌어지는 삼류영화같이 되고 말지만, 그렇다고 한·양방 일원화에 대한 고민을 마다할 까닭이 없다. 한의사들이 이를 외면하고 있는 사이, 서양은 대체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의술행위 속에서 서양의학과 동아시아의학을 일원화하고 있으며 오히려 동아시아로 의료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굳이 일반화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양방 의료 일원화에 대한 논의 자체를 반대하는 한의사들을 보면, 개화기 서구문명을 거부하고 쇄국을 주장했던 유학자들이 생각난다. 어느 철학자가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한의사들이 실제로 동양의학의 사상적 계승을 위해 얼마나 고민하는지 의심스럽다. 한의사들은 “동양의 고유성을 말하면서 그 고유성이 보편성으로 발전하지 못할 때, 한 지역의 국소적인 국수주의가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으로, 광복 이후 의사가 부족하던 시절 한국의 약사들이 국민건강의 파수꾼으로 노력해왔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약업 행위가 비록 의사의 진료 행위와 같다 해도 묵인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약사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의약분업의 실시 근거에도 나와 있듯이, 약사의 오랜 관행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의약분업의 전제조건은 임의조제 완전 폐지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몸에 배어 있는 약사들의 유사진료행위를 약사 스스로 바꿔나가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하지만 약사들 사이에 이런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약사들의 자정 운동이 없다면, 앞으로 재연될 한약 분쟁에서 약사들이 설 땅은 좁아질 것이다. 의사와 한의사 수가 매년 증가하고 있는 현실에 약사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의료 행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나라 제약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지름길이다.

    의사들이 진정으로 양·한방 일원화를 원한다면, 무엇보다 한의사를 대등한 의료인으로 배려하는 아량이 필요하다. 한의과대학은 1960년대가 되어서야 본격 설립될 정도로 아직 문화적 하부구조가 취약하다. 그리고 누군가의 비유처럼 의료일원화는 ‘연애’에 비유할 수 있다. 서로 만나 깊이 사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나자마자 억지로 동침할 수야 없지 않은가.

    약 2000년간 서로 다른 패러다임 속에서 발전해온 양쪽 의학이 몇 년 만에 하나로 통합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 조급하다. 중국도 300년이나 걸려 겨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 시인은 한국 사회의 지난 30년 성장 과정이 서구의 300년을 복제한 것에 대해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라는 성찰적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한국의 의사들은 양·한방 일원화에 대해 이 질문을 곰곰이 새겨 보기를 바란다. 노력은 하되 서두르지 말자.

    정책실명제를 실시하자

    마지막으로 의사들은 서양의학의 보편적 합리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문화적으로 한국 현실에 호환성이 있는지를 냉철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마치 우리나라에 들어온 가톨릭과 기독교가 아직도 토착화하지 못한 것과 같이, 개신교에 수용된 서양의학도 지난 100년간 한국 문화에 접속되지 못하고 있다. 서양 의학을 한국 문화에 토착시키려는 노력이 한국 의사들에게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의사, 한의사, 약사들은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자신들이 명백히 옳다고 주장하는 정책적 사안에 대해 한 번 더 성찰해보기를 바란다. 자신들이 신봉하는 정책을 당장 추진하려는 당사자들에게 이런 인문학적 사유는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출발해야 하는 사람의 옷자락을 뒤에서 자꾸 잡아당기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지구는 돌 듯이, 나는 앞으로 한국 의료 대논쟁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들에게 성찰을 위한 사유의 시간을 가질 것을 주문하고 싶다. ‘빨리빨리’보다는 ‘느릿느릿’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우리 사회가 ‘IMF 관리 체제’로 들어갔을 때,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를 두고 정부 고위 관료와 정치인들이 서로 상대 탓으로 떠넘기는 추악한 작태를 벌인 적이 있다. 결국 망각증이 심한 사회에서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앞으로 이런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하여 ‘정책 실명제’를 실시해야 한다. 그것은 법안을 발의한 정치인과 정부 관료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국가에서 엄청난 연구비를 받아 정책안을 제시한 대학교수와 전문가들도 포함돼야 한다.

    예를 들면, 통합론을 주장했던 논자들은 ‘의료보험 심사기구’의 독립을 제안하여 관철했으며 정부 용역을 받아 대안을 제시했다. 그래서 앞으로 독립이 된다면 최종 정책안에 정부 관료와 책임 연구자가 공동으로 ‘실명’을 기입해야 한다. 미학적으로 평가받는 건물을 지은 건축가의 이름이 영원히 남듯이, 정책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 속에서 평가받을 것이며 역사를 두려워하게 된다. 추한 정치가 아니라 정책의 미학으로 승부를 걸자.

    바이오크라시를 위하여

    ‘한국 의료 대논쟁’은 앞으로도 갈 길이 멀다. 정부의 관료, 의료 정책에 관련된 논객들과 의약 전문직 종사자들이 이제까지 논쟁 의제를 설정해왔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보화가 사회의 모든 담론 체계를 바꾸고 있듯이, ‘한국 의료 대논쟁’도 그렇게 될 것이다.

    시민 단체와 소비자 단체들이 벌써 논쟁에 중요한 행위자로 적극적 참여하고 있다. 지금은 의료 전문가들이 NGO를 주도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일반 시민 중에서 한국 의료의 올바른 방향을 이끌어갈 지도자가 배출되기를 바란다. 민주주의(데모크라시)가 시민사회의 등장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왔듯이, 시민운동을 통해 한국 의료의 바이오크라시(Biocracy)가 확립돼야 한다.

    이것이 단순히 수사학이 되지 않으려면 시민들의 구체적인 행동 강령이 필요하다. 시기를 놓치긴 했지만, 의료보험 관리 운영체계를 조합론에서 통합론으로 바꿨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장할 수 있는지를 지금이라도 ‘시민행동강령’에 담아야 한다.

    또 7월부터 시행될 의약분업에 대비하여 강령도 마련해야 한다. 의료인과 약사들도 시민들의 이런 행동 강령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자신들의 의업과 약업을 통해, 바이오크라시를 정착시키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환자와 소비자들이 의약(醫藥)의 객체이던 시대는 지난 세기로 끝났다. 그들은 의료인이나 약사들과 함께 바이오크라시를 만들어갈 파트너이다.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큰’ 권리를 찾는 운동이었다면, 21세기의 바이오크라시는 시민들이 작은 권리를 찾는 것에서 출발한다. 작은 권리이긴 하지만, 시민들이 ‘의료 대논쟁’의 향후 구도를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까닭은, 이것이 우리 생활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시민들이여, 작은 권리 찾기 운동에 참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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