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지역이 선망과 질투, 그리고 증오와 좌절이 교차하는 대상이 된 배경에는 동질성이 강한 사회의 강한 경쟁 구조가 놓여 있다. 전체 인구의 5%도 안 되는 지주계급이 전체 농지의 90% 이상을 소유하고 농민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살아가는 남미사회와 비교해보면, 우리는 출발점이 같은 동질적 사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미 조선시대 후반기에 오면 온 나라가 양반 되기에 나선 바 있어 이제는 모두가 양반의 자손으로 뿌리 잇기를 해버렸다. 양반의 헤게모니는 노론 세도정치의 부패와 더불어 밑으로부터 와해되었고, 근대화의 과정에서 성리학적 세계관은 우리나라를 동아시아의 열등생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격하되었다. 나라를 잃은 귀족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기대할 리 만무했고, 부귀영화를 누린 귀족들은 해방 후 친일파로 손가락질을 받았으며, 북한의 토지개혁에 맞선 남한의 농지개혁으로 지주층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거기에다 한국전쟁의 포화가 할퀴고 간 뒤 남은 것은 헐벗고 굶주린 평등사회였다.
그래서 1950년대 한국사회는 잘난 귀족도 없고, 못난 천민도 없는 고만고만한 ‘소시민’의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손바닥만한 땅뙈기를 경작하는 소농(小農)과 구멍가게를 차린 소상인(小商人), 파괴된 적산공장을 불하받아 출발한 소자본가(小資本家)들로 메워진 ‘상승열망에 가득 찬’ 프티 부르주아의 경쟁의 장이 된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러한 경쟁의식이 고도성장기의 원동력이었다. 경쟁의식이 적나라하게 표출된 이 시기에 주된 계급이동의 통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교육을 통한 전문직으로의 상승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업을 통한 자본가로의 성장이었다.
1950∼60년대 우골탑으로 상징되는 대학교육의 효과는 일찍이 로널드 도어(Ronald Dore)가 적절히 명명한 바와 같이, 산업화에 훨씬 앞서 대학교육의 공급을 늘렸다는 점에서 ‘학력병’의 증상을 띠고 있지만, 이 시기 대학졸업장, 특히 명문대학의 졸업장은 소농의 자식들을 전문직종의 신 중산층과 관료지배층으로 상향이동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점에서 닫힌 지위를 향한 열린 문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도성장기에 사회에 진출하여 남부럽지 않은 성취감을 맛보며 신 중간층에 진입한 기성세대에게 ‘치맛바람’은 자신이 경험한 교육처방의 놀라운 효능감에서 우러난 합리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뽕짝과 막걸리와 씨름으로 사원들과 거리감을 좁히려 한 한국 최대그룹 총수의 소박한 ‘자기인식’과, 그를 어릴 적 ‘쌀집 점원’으로 기억하는 뭇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이면에는 그도 자신과 출발점이 다르지 않다는 인식, 한때는 자신이 그보다 앞서 있었다는 자존심, 그리고 수십 년 후 드러난 지위의 차이에는 재능과 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정경유착의 몫이 컸다는 비난이 숨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자본가를 자신의 직접적인 경쟁상대로 여길 수 있는 ‘나와 다름없음’에 대한 확인이 강할수록 부의 축적과정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도 강해진다.
그 결과는 세계가 놀랄 만한 평등의식으로 드러나지만, 때로는 질투의 형태로 분출되기도 한다. 그래서 재벌2세의 파렴치한 행동은 신문의 사회면을 뒤덮을 정도로 온 국민의 공분을 자아내는 뉴스거리가 되며, 똑같은 이유로 청소부 아들이 대학에, 특히 명문대학에 합격한 사실은 온 국민이 치하하는 쾌거로 인식된다.
8학군 효과의 환상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치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다. 각 개인의 미시적 선택이 모여 만들어낸 거시적인 문제가 치유 불가능함을 뒤늦게 깨닫고 당혹해할 따름이다. 근원을 따져보면 구조적인 문제의 원인은 우리의 일상적 선택에 있으며, 선택의 폭을 좌우하는 잘못된 믿음과 실천의 규칙들이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질적 사회의 강한 경쟁의식은 획일적인 구조를 갖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사한 배경을 가진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구조적 등위성에 기반하기 때문에 더 치열해지는 경향이 있다. 한국사회의 경쟁 양상도 장이 달라질 뿐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처한 조건이 비슷하고, 추구하는 목표가 유사할수록 경쟁은 치열해진다.
명문대학을 향한 줄서기 경쟁은 다시 ‘고시’라는 ‘닫힌 지위’를 향한 뜨거운 경쟁으로 이어진다. 의과대학의 ‘닫힌 지위’에 대한 효능감은 공학과 자연과학의 토대까지도 뒤흔드는 이상과열로 나타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문의 수련과정에서조차 힘들이지 않고 편하게 돈 버는 ‘닫힌 전공’을 선점하려는 경쟁으로까지 이어져 기본적인 의료시스템 자체를 위협한다. 대학입시의 경쟁을 완화시키기 위해 도입한 수시 모집은 경시대회 열풍을 낳았고, 공교육을 정상화하겠다고 도입한 수행평가는 심지어 턱걸이와 줄넘기 과외까지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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