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디지털 시각예술을 창조하는 베스트 9

  • 이영철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입력2006-11-09 1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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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세기 미술 역시 디지털 세계를 피해갈 수 없다. 밀레니엄의 전환점인 세기말부터 크게 각광받으면서 국제적인 작가로 떠오른 현대 미술가들은 대부분 컴퓨터와 인터넷에 익숙한 ‘엑스세대’ 멤버들이다.》
    언제 어느 지역에서나 미술의 내용이란 자연과 인간사에 대한 관심을 담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미술의 표현이 시대를 예감하는 지적 감성과 어떻게 결합하느냐의 문제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미술은 21세기의 세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디지털 세계를 피해갈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세계 미술의 핵심 중 하나로 현재 주목받는 ‘미래형’의 미술은 디지털 세계에 대한 시각예술적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고 지구상의 모든 미술이 디지털화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의 많은 나라, 그리고 상당수의 미술가가 향후 수십년이 지나도 디지털 세계와 별 상관없는 미술을 여전히 지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아 선상에 있는 나라, 문화의 불모지대, 그리고 분쟁지역에서 미술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후진국에서는 낙후한 교육과 미술의 제도적 부실함 때문에 ‘미래형’ 미술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쿠바나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이라도 뉴욕이나 파리에서 작업하는 경우에는 디지털화한 문화환경을 호흡할 수 있고 그들이 겪은 새로운 경험은 전혀 뜻밖의 새로운 표현을 가능케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서는 밀레니엄의 전환점인 1990년대에 크게 각광받으면서 국제적인 작가로 떠오른 9명의 현대 미술가를 소개한다. 이들은 소설가 더글라스 코플란의 용어인 ‘엑스 세대’ 멤버로 분류되는 세대다. 대부분 30대에 속하고 M-TV(뮤직비디오가 나오는 방송)와 컴퓨터에 아주 익숙하다. 이들은 20대 중반에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30세가 되면서 벌써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이 9명의 작가가 하나의 전시를 만든다면 그것은 대단히 아름다운 그리고 매우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조디 : 디지털 시대의 컴퓨터 해커

    컴퓨터 도메인 네임 조디(JODI)는 그래픽 웹 브라우저로 예술적 프로젝트를 수행한 2인조 웹 아티스트의 명칭이다. 네덜란드 출신인 조안 헤름스커크와 벨기에 출신의 덕 패스먼의 이름 앞 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작년 가나아트 센터가 주최하는 웹 아트 국제페스티벌에서 1등상을 받고 1998년 독일의 ‘미술과 미디어 센터(ZKM)’가 주최하는 국제미디어 아트상에서 1200명의 후보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그랑프리를 수상함으로써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두 명 모두 비디오와 사진 활동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네트(net)로 관심이 옮겨갔다. 조디의 웹사이트를 찾는 방문자는, 제멋대로 작열하는 아이콘들, 부서지는 이미지들, ‘시스템 에러’ 메시지 등이 계속 뜨기 때문에 그들의 컴퓨터가 갑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브라우저가 깨지는 것 같은 착각에 순간적으로 빠져든다.

    1994년에 등장한 조디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해 그것을 다시 ‘해체’하는 매우 특이하면서도 이론적인 작업을 하며 분야에 선구적 인물이 되었다. 네트 위에 디지털 데이터의 고유한 소재를 찾아내 그것으로 작업하기 시작한 최초의 미술가 중 하나다.

    그들은 네트와 하드 디스크에서 파생된 이미지와 텍스트 파편들을 날재료로 삼아 그것을 재조합하고 콜라주한다. 이질적 재료를 모아 차용하는 조디의 이런 방식은 신문이나 영화 티켓을 콜라주했던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조디 웹 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작품들은 거의가 뷰어(viewer:감상자)들이 작동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계속 멋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조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디 작업이 과연 인터렉티브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유저(user:사용자)가 개입할 수 있는 행위는 단지 불확실한 결과를 가져오는 무의미한 클릭뿐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기계 사이에 마찰·불화를 만들어내는 이들은 1980년대 독일 뒤셀도르프 대학에 있던 백남준 밑에서 공부를 했다. 조디는 웹 작업을 한다고 해서 미술계를 떠나서 작업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 이상의 일이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작품을 보는 최선의 방식은 그것을 컴퓨터에 그대로 유지하는 일이다. 인터넷은 이런 종류의 작업을 퍼뜨리기에 좋은 시스템이다. 컴퓨터는 미술을 창조하는 도구일 뿐 아니라 네트워크 안에서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매체이기도 하다. 즉 컴퓨터는 붓이면서 동시에 화폭이기도 한 것이다.

    매튜 바니 : ‘남근주의’를 비판하는 완벽한 영상미

    매튜 바니(Mattew Barney)의 유명한 작품인 필름 ‘크래마스터’ 시리즈 중 두 편이 얼마 전 아트 선재 센터에서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는 남성 지배 사회를 집요하게 비판해온 미국 작가로 이야기의 혼성적 구성, 표현의 복합성과 치밀성, 날카로운 냉소, 양식화한 미적 영상으로 전문가는 물론이고 일반 대중에게도 상당한 관심을 일으켰던 대표적인 영상 매체 작가다.

    바니의 작업은 분장, 기묘한 의상의 모델들, 기괴한 형태의 돌연변이, 합성 물질로 만든 정체불명의 형태들, 바셀린으로 만든 징그러운 지렁이 모양, 굉음의 경주용 자동차 그리고 뿔 달린 사티로스들로 가득 차 있다.

    예일대학 의과대 학생이던 매튜 바니의 과도한 상상력과 흘러넘치는 양식적 완결성과 아름다움으로 인해 미술계는 한때 마술에 걸린 듯했다. 미식축구 선수였던 그는 실제로 후디니의 마술에 심취했던 적이 있다.

    그의 작품은 시기별로 ‘크래마스터’라는 다섯 편의 연작 중에서 세 편, 즉 ‘크래마스터 4’(1994), ‘크래마스터 1’(1995/1996) 그리고 ‘크래마스터 5’(1997)가 수작에 든다. 그중 크래마스터 4는 만이라는 섬에서 만들어졌다. 그 섬은 1960년대 이후 매년 오토바이 경주가 열리는데, 이 경주는 바로 이 필름의 중심 모티브다.

    크래마스터 1은 축구 경기장 위에 두 대의 비행선이 떠 있는 상황을 설정했고, 가장 최근작인 크래마스터 5는 과거의 부다페스트를 배경으로 아르 누보식 욕조와 바로크식의 오페라 하우스 그리고 체인 브리지(Chain Bridge)가 나타난다. 그의 필름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1시간 분량으로 언제나 영화관에서 상영된다. 둘째, 거대한 설치, 오브제, 사진과 드로잉 등은 반드시 미술관과 화랑에서 전시한다. 그리고 동시에 필름에서 발췌한 스틸 이미지로 책을 발행하는 점이다. 크래마스터란 남성의 고환을 지탱하는 근육에서 빌려온 용어로 이 근육은 몸 안에서 춥거나 공포를 느꼈을 때 반작용으로 수축한다. 서구 문명을 지탱해온 ‘남근주의’의 문제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도 기이하고 아름다운 영상으로 처리한 그의 필름은 1시간 동안 관객의 눈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다운타운 일대를 전시장으로 이용해 열린 전형적인 유럽형 비엔날레 마니페스타의 두 번째 전시 행사에서, 지도를 따라 한 건물을 찾아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평평하지만 거대하고 깊은 느낌인 코발트 블루의 평면이 건물 중간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물이 가득 찬 풀이다. 마치 아직 특정한 이미지가 나타나지 않은 채 한순간 정지하고 있는 아주 거대한 영상 스크린처럼 그것은 우리 눈앞에 떡 버티고 누워 있다. 가로 세로가 각기 3~4m 크기의 자유로운 페인팅이 물 속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고 풀 옆 벽면에는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유화 작품이 바닥에 놓여 있다. 이것이 바로 자르네 멜가드(Bjarne Melgaad)의 작품이다.

    어수선하게 흩어진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마치 네트 위를 서핑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한쪽 벽에는 고양이와 개의 대가리가 그려진 스티커들이 중얼거리듯 내뱉은 낙서들과 함께 벽을 가득 메웠고 키가 큰 지저분한 나무 한 그루에다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싸구려 두루마리 화장지를 무질서하게 늘어뜨려 일견 거대한 파티가 막 끝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 귀퉁이에는 펭귄이 뒤뚱거리며 걷는 장면이 나오는 소형 TV세트가 자연스럽게 놓여 있다. 이 작가의 극히 산만한 설치 작업은 사라져가는 것들이 한순간에 중첩된 ‘지금 여기’의 디지털 세계를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신선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모든 사물은 아트 오브제의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일종의 사건 현장의 참가자들로 존재 의미가 있다. 이 작업은 인터넷 사이트의 디지털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유사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상황을 지켜보는 관객은 대상에게서 거리를 유지하는 관조적인 주체가 아니라 사건의 일부인 매개 관조자(tele-spectator)가 된다.

    사라 제 : 허공을 가르는 인텔 펜티엄의 칩들

    1969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여성 작가 사라 제(Sarah Sze)는 1997년 첫 개인전을 열었고 지금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작가가 되었다. 그녀는 패스트 푸드, 마이크로 소프트화한 사물들, 지겨운 비디오 게임 등을 연상시키는 자유로운 공간 설치 작업을 하지만 어떤 구심력이나 무게중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라 제의 작품은 물리적인 공간을 독특하게 연극적인 구조로 해체, 재구성해서 ‘일시적인’ 스펙터클한 버전을 보여준다. 그것은 뉴욕·홍콩과 같은 국제적인 도시와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픽션 과학도시의 중간쯤인 독특한 지대로 보인다. 혹은 어린이가 꿈꾸는 우주정거장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가 익숙하게 다루는 소재는 일상 소품들, 즉 비누, 성냥, 의료약, 면도칼, 사탕, 박스 등으로 마치 손오공의 아주 작아진 여의봉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나 봄직한 방 안 풍경처럼 신비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그러나 동시에 복잡하게 접합·병렬되어 있는 이 물건들의 전체적인 이미지는 디지털 세대의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일종의 인텔 펜티엄의 칩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밀폐된 작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상상의 거대 공간, 아주 짧은 기억들의 무질서한 교차, 즉 시간들의 엇갈림, 원근법적인 시점을 도무지 찾을 수 없는 다시점적 공간구성, 물체를 극미시적으로 접근하는 방식 등은 오늘날 젊은 작가들이 만들어내는 ‘미래형’ 미술의 공통된 특성이라 할 수 있다.

    파비안 마르카치오: 회화에 대한 생태학적 접근

    디지털 시대의 정서에 걸맞은 회화는 어떤 것일까. 다양한 작품들이 있겠지만 대표적 모델을 예시하자면 1963년 아르헨티나 출생인 파비안 마르카치오(Pabian Marcacchio)의 회화를 들 수 있다.

    그의 작품 표면은 붓질(브러시 스트로크)과 배경, 캔버스와 이미지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것은 생태적 변형 과정에 있는 유기물처럼 보인다. 피처럼 붉은 색과 짙은 녹색으로 착색된 각각의 형태는 서로 뒤섞이고 팽창하면서 계속 모양이 바뀌다가 한순간 얼어붙은 모양이다.

    비극적이고 그로테스크하고 고딕 분위기를 지닌 그의 작품은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텅빈 무대 세트의 쓰레기더미를 닮은 일종의 세노그라피(senography)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돌연변이적 잡종 ‘상태’를 나타내는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회화의 재난’이라 표현할 만하다. 어떤 희망도 좌절시키는 회화와 조각의 완벽한 붕괴를 보여준다.

    그의 작업은 모더니스트적 전통이 회화적 제스처에 제공한 일말의 해방적 기미도 없으며 유일한 믿음은 오로지 힘과 운동뿐이다. 사방으로 팽창하고 서로 갈라치고 섞이는 이질적인 힘, 방향, 자연의 생태를 닮은 ‘카오스’뿐이다. 파비안 마르카치오와 유사하게 생태학적 시각을 취하지만 구상적 이미지를 통해 좀더 현실 비판에 접근하는 작가도 있다.

    윌리엄 켄트리지 : 생태학적 시각에서 바라본 식민지 담론

    195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난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는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는 사실적인 드로잉 수법으로 긴장감 있는 프로젝션 영화를 제작했다. 역사와 기억, 우리의 몸속에 하나의 재난처럼 깃들인 폭력성을 고발해내는 그의 작품은 고야의 ‘전쟁의 재난’(1810~20)을 떠올린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정책이 남긴 상처들, 기억, 산업, 인종정치학, 부패와 타락의 풍경을 그린다. ‘프로젝션을 위한 드로잉’이라는, 일곱 개로 나뉜 필름에서 풍경은 기억과 탈기억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든 흘러넘치고 변화해가며 예측할 수 없이 전개된다.

    그의 작품에 지극히 아름답게 그린 회화적 풍경의 이미지는 아프리카 초원을 ‘그림 같은’ 풍경이라고 말하는 식민지적 수사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끝없이 열려 있고 점유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초원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위선임을 고발한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이 도착하기 이전의 아프리카는 텅비어 있고 누구도 소유하지 않았던 땅이라는 식의 표현은 그 자체가 식민적 담론의 수사일 뿐이라고 한다. 켄트리지는 풍경이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순수한 자연 현상이라고 주장하는 태도를 비판하면서 풍경을 벌거벗은 몸, 즉 야위고 멍들고 파괴된 몸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힘차고 율동적인 드로잉들은 고고학적인 발굴과정과 동등해 보인다. 즉 그는 땅을 풀어헤쳐 땅이 스스로를 드러내게 한다. 그의 작업 속에서 땅이라는 풍경은 산업적인 목적으로 채광되든 경작되든 인간의 욕망에 의해 늘 남용되는 현장으로 드러나고 있다.

    금년 봄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된 그의 작업은 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과 그 이후의 작업들과 비교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땅에 대한 사회생태학적 접근은 좀더 넓은 지평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9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나 현재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바네사 비크로프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속옷만 걸친 여자들의 퍼레이드를 연속해 보여주었다. 최근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이 등장한다.

    비크로프트의 퍼포먼스와 전시 오프닝에서 퍼포먼서들은 침묵 속에 포즈를 취하거나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거나 관객들 앞에서 살아 있는 그림처럼 서 있다. 쇠라의 회화 작품처럼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이러한 이벤트들은 나중에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비디오로 기록한다. 20세기 후반의 해프닝 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비크로프트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될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거나 미디어를 통해 소통되는 이미지들을 ‘가지고 논다’.

    소녀와 여인들이 총출연한 그녀의 퍼포먼스 중 어떤 것은 ‘삐삐 롱스타킹(어린이 연속극)’을 연상시킨다. 반면 다른 것들은 훌륭하게 절제된 콤퍼지션이나 패션쇼, 혹은 연극이나 영화의 장면들을 연상케 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작업에서 연상되는 그런 것들은 그녀의 의도와 상관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퍼포먼스에서 처녀들은 대부분 의상이나 화장을 거의 같은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개성은 싹 지워진다. 아름다움에 관한 깨져버린 금기와 고전적인 이상 사이에, 그리고 에로티시즘과 쇼윈도의 벌거벗은 마네킹 사이에 긴장이 감돌고 퍼포먼스는 무언가 억압된 분위기로 채워진다.

    모델도 관객도 아무런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으며 그들의 상상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는 결국 미스터리로 남을 따름이다. 아무것도 언급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하다. 퍼포먼스에서 참가자는 모두 그들 나름의 사고와 지각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들’이라는 상태를 끝까지 유지한다.

    아트 클럽 2000 : 공동 작업으로 미술사와 미술계를 풍자

    다국적 작가 그룹인 ‘아트 클럽(Art Club) 2000’은 1992년에 결성된 미술가 그룹이다. 7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대학(뉴욕의 쿠퍼 유니온), 뉴욕의 소호거리, 자유 과학 센터, 아트 인 아메리카 잡지사 사무실, 림보 카페 등에서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컬러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전시를 하는데 조롱, 냉소, 농담, 맛있는 칵테일 음료, 짓궂은 장난 등으로 대중에게 호응을 얻었다.

    1993년 ‘혼성’이라는 첫 전시에서 미국의 의류업체인 갭의 광고에 대항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공동 작업으로 그들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은연중에 세뇌시켰던 갭 광고의 통합적인 이미지들을 패러디하여 아주 불량스러운 사진들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의 작업은 대중 문화와 미술이 서로를 어떻게 차용하고 반영하는지를 조사해서 이뤄졌다.

    1996년의 ‘소호여 잘 있거라’라는 작업은 농담조의 다큐 작업인데, 수많은 갤러리들이 소호에서 첼시로 옮겨간 현상에 대해 고급택지화 과정의 증거들을 조사하여 발표했다.

    1997년 ‘1970’이라는 전시에서는 1970년대의 미술, 특히 개념미술이 오늘날 미술적 생산물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조사해서 발표했다. 그 시대를 이끌어간 인물들 인터뷰 또는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한스 하케의 작업에 대한 설문 조사, 그리고 1990년대에 재인용되어 미술계를 주름잡았던 1970년대의 기본 전략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트 클럽 2000의 프로젝트들은 기존 방식으로 반복, 차용 그리고 교차를 통해 ‘저작권’의 의미를 바꿔 놓았다. 1998년의 작업인 ‘살아 있는, 죽은 저자의 밤’은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라는 유명한 글의 제목과 최근의 컬트 무비 ‘살아 있는 시체의 밤’을 결합해서 만든 타이틀이다.

    이들은 바르트가 말하는 저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으로 스스로 좀비(서양 귀신)로 분장했고 미술계를 그러한 좀비들이 간신히 연명해가는 경찰 국가로 묘사했다. 이들은 미술계의 비즈니스 메카니즘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매우 효과적인 유머 감각으로 접근한다. 관객과 현실적인 소통 방식을 개발하여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이들은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감각적인 대중 전위대로 보인다.

    토비아스 레버거 : 이질적 장르와 매체 결합의 연금술사

    1966년 독일에서 태어난 토비아스 레버거(Tobias Rehberger)는 가구, 인테리어, 그래픽 디자인과 정원 조경, 광고, 인쇄물 디자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작업해왔다.

    산업 사회의 근대적 이념이 제거된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개념을 폭넓게 적용하는 그는 사전 조사를 한 후 아이디어가 정해지면 전문 장인들의 완벽한 기술 공정을 거쳐 작품을 생산한다. 1992년 저명한 큐레이터 카스퍼 쾨니히의 집에서 관공서에 공공기념 조각으로 설치되었던 헨리 무어 등 거장들의 작품을 주택 구조에 알맞은 크기와 손쉬운 재료로 다시 만들어 전시하여 주목을 받았다.

    기하학적 패턴으로 2차원과 3차원의 세계를 넘나들고 기능 다변화를 꾀하는 그의 작업은 미적 요소와 기능적 측면의 조화, 이질적인 매체들, 영역들의 재결합을 추구하는데,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색상, 독특한 형태, 공간 사용의 치밀성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디지털 개념을 영상 작업으로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작가들에게 토비아스 레버거의 작업방식은 새로운 즐거움을 줄 것이다. 그에게는 전시 공간이 단순히 미술 오브제를 전시하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전시되는 내용과 전시 공간을 하나의 사회적 공간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전시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행위를 개념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즉 전시 문맥적 미술(exhibition-based art)을 늘 새롭게 창출하는 동시에 주객의 혼동과 상호작용을 세련된 복고풍으로 실험한다. 그는 1997년 베를린 미술관 광고를 디자인하여 미술잡지에 실은 다음, 니트 제조자에게 의뢰하여 그것으로 옷을 만들게 하고 아트 페어가 열리는 동안에 미술관 직원들이 입게 했다.

    그 다음에는 그 갤러리가 ‘브랑쿠지’ 전시를 광고하는 데 그 옷을 모델로 삼았다. 옷 무늬의 평면적 패턴 구성은 3차원적인 공간의 표면으로 번안되었다. 이것은 1970년대식의 가구로 읽히지만 동시에 자율적인 조각으로 읽힌다.

    이 ‘스리 피스’에서 레버거는 자신의 저작권을 버리고 매니저처럼 또 다른 진행 과정들을 코디네이트하는 데 집중함으로써 미술가와 관계자 사이의 위계 질서를 약화시키는 작업을 했다.

    최근 많은 작가와 미술관들이 미술 관계 출판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추세를 보여준다.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거나 디자인 개념을 제공한 수많은 전시 도록과 전시 포스터, 전시 초대장은 전시의 공간을 넘어 매체를 통해서 좀더 폭넓은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크게 주목받았던, 다양하고 새로운 작업들을 통해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 대한 시각 예술적 표현이 곧 미디어 테크놀로지 미술(영상 매체 미술)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폭넓은 세계를 열어가는 자유로운 행위임을 알았다. 작가들의 태도 역시 모더니즘 시기의 권위적이고 영웅적인 제스처가 사라지고 사회와 새로운 결속을 추구하는 연결자, 개입자, 엔터테이너가 되었다.

    이들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 공통적인 미덕은 ①이동중일 것 ②항상 가벼울 것 ③작품의 내용이 주어진 장소(환경)와 긴밀하게 연관되는 방식을 개발할 것 ④이질적인 매체 사이에 이질적인 결합 방식을 찾을 것 등이다. 요는 지겨운 억압의 역사를 내부에서 더 안쪽으로 뒤집어 ‘새롭게 뜨개질’하는 방식으로 틈을 만들고 네트를 서핑하는 식으로 미끄러지며 작업하는 것이다.

    건축가 렘 쿨하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자유’라고 선언한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①구조로부터 ②유형학(형태학)으로부터 ③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주장은 이율배반의 세기였던 20세기의 장벽을 넘어서는 가장 명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그러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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