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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의 세계 ③­|군사애호가들의 별난 취미

군복수집에서 전쟁영화 엑스트라 출연까지

  • 김세랑 월간 ‘플래툰’ 기자

군복수집에서 전쟁영화 엑스트라 출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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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람들의 경우 근래의 것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1차 세계대전 때의 물건이나 독립전쟁 당시의 물건도 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옛날 물건에 대한 애착이 깊다. 난 1998년, 일본 후지산에서 열린 베트남전쟁 재연 행사인 ‘아호칼립스 98’행사에 참가했다가 일본의 밀리터리 컬렉터들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나는 파월한국군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한 일본인 컬렉터가 다가오더니 가슴에 달린 계급장(깡통 계급장으로 불린 60년대 계급장. 황동판을 프레스해서 만들었다)을 보더니만 내 손을 잡아끄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기 짐을 뒤져 그림액자만한 케이스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IT IS MY COLLECTION.”

그것을 본 내 눈이 휘둥그레졌는데, 6·25전쟁 때부터 베트남전쟁 당시까지의 한국군 깡통계급장이 이병에서부터 장군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수집되어 있는 것 아닌가. 내가 가슴에 차고 있는 깡통계급장을 구하기 위해 두 달여를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날 그 자리에서 알 수 있었다.

일본에는 이 친구 같은 사람이 많고 많았다. 지리적으로 가까운데다 한국사람들은 자기네 군복이나 군대물건을 천시하고 값도 엄청나게 싸기 때문에 자주 한국에 나와 물건을 사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군복을 사도 한두 벌이 아니라 수십 수백 벌 단위로 사가는데, 그렇게 모은 군복 중에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시절 군복이나 대한제국 시대의 물건까지도 있다고 한다.

‘하노버 스트리트’에 나온 군복



내가 깡통계급장에 관심을 보이며 몇 개만 팔 수 없겠느냐고 묻자 그 친구,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이걸 산 것은 80년대 중반인데, 그때 한 개당 100원꼴에 구입했다. 지금 내가 이걸 판다면 한 개에 1만엔은 받아야겠는데 그 값에 살 수 있겠는가? 그나마 앞으로 10년쯤 뒤에는 값이 세 배는 더 오를 것이다.”

불과 10년 만에 100원짜리를 10만원짜리로 만들어내는 그 친구가 무섭도록 얄미웠지만 그 물건들을 지켜내지 못한 것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현재 깡통 계급장은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모두 진품이 아닌, 새로 만든 모조품이다. 어쩌면, 국군 박물관을 일본에서 개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제 군복을 구하러 다니다가 횡재한 얘기를 한번 해보자. 내가 특별히 아끼는 수집품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도 미군 장교용 정복(1930~50년대까지 사용품)을 입수한 얘기를 할까 한다. 이 물건은 평소 무척 갖고 싶어했지만 울로 만들어져 좀이 잘 슬기 때문에 제대로 된 물건을 본 적이 없었다.

먼저 만난 것은 바지였다. 남대문시장은 다양한 물건이 있기 때문에 자주 들르는 곳인데, 좁은 골목 안에 한 줄로 군복과 작업복을 전문으로 파는 상가가 밀집해 있다. 워낙 자주 들르는 곳이기 때문에 어느 가게에서 어떤 물건을 파는지 줄줄이 꿰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유난히 눈길이 가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 이렇게 느낌이 꽂히는 날에는 평소 구하고 싶던 물건이 눈에 띈 적이 많았기 때문에 유심히 물건들을 살피며 걸었다. 이 시장 가게들의 특징은 옷을 겹겹이 쌓아 놓고 팔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맨 위에 올려진 물건 외에는 어떤 물건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난 나라별 시대별 군종별 군복의 색상과 사용옷감 등에 대해 항상 공부해온 덕에 쌓여 있는 옷들의 단면만 봐도 그것이 어느 나라의 어떤 군복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다른사람이 보기에는 무슨 초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고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이건 순전히 경험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쨌든 이렇게 물건들을 살피며 지나가던 내 눈에 무엇인가가 쏘옥 빨려들어 오는 것 아닌가? 자동적으로 걸음은 멈춰지고 눈에 걸린 옷을 옷더미 사이에서 뽑아냈다. 밀리터리 컬렉터들 사이에서 ‘오피서스 핑크 트라우저’(장교용 핑크색 바지: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장교들에게는 회색빛이 약간 도는 핑크색 셔츠와 바지가 지급되었다)로 불리는 바지, 바로 그놈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폭격기 조종사와 영국 여인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 ‘하노버 스트리트’를 보면 주인공 해리슨 포드가 이 바지를 멋지게 입고 나온다. 일단 물건을 찾은 후에는 이것이 진품인지를 가리게 된다. 군복, 특히 미군복에는 반드시 생산지와 제조사, 생산일자, 옷의 명칭 등이 적혀 있는 라벨이나 이에 해당하는 스탬프가 찍혀 있으므로 이를 통해 진위 여부와 그 옷의 족보를 캔다. 이 바지의 경우에는 허리부분 안감에 미 육군 장교용 바지라는 제품 명칭이 적혀 있고 호주머니 안감의 안쪽에 천으로 덧붙인 라벨이 붙어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품인 것이다!

이 장교용 핑크 바지의 경우 미국에서는 100∼150달러에 거래되는데, 내가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가격은 불과 1만5000원이었다. 상의는 바지를 발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이 옷은 희귀품인지라 돈을 주어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인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 벌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은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청계천 골동품점

상의 재킷은 청계천의 한 골동품점에서 찾아냈다. 이 가게의 주 품목은 오래된 일상용품으로 군복과는 좀 거리가 먼 곳이다. 그렇지만 가끔 오래된 앨범들 속에 끼어 있는 창군 초기의 군대 관련 사진들을 구하는 즐거움에 종종 들르던 곳인데, 내가 찾아간 날에는 주인 할아버지께서 연신 흘러내리는 돋보기를 추어올리며 낡은 옛날 양복 몇 벌을 진열하고 있었다.

문제의 재킷은 바로 그 낡은 양복들 사이에 끼어 있던 것. 짙은 올리브드랩색의 이 옷은 바바리처럼 허리끈이 달려 있다는 것을 빼고는 그 모양이나 소재가 영락없는 양복상의여서 주인 할아버지도 보통 양복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목표를 포착한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일단 힘들게 일하시는 할아버지를 돕는 것부터 시작한다.

짐 정리를 도와드리며 넌지시 물건값을 떠보는 것이다.

“어휴, 이 옷은 엄청 낡았네요. 이런 옷도 사오세요?”

주인어른 왈.

“아 글쎄, 60년대 양복하고 옛날 학생복을 주문했는데, 좀 이상한 놈이 끼어 왔어.”

“이거 팔기 힘들겠네요.”

“글쎄, 거 단추를 보니까 무슨 군대옷 같기도 한데… 자네 군복 잘 알지? 이거 무슨 옷이야?”

“이거 미군 정복 같은데요. 한번 입어나 볼까?”

입어보니 몸에 꼭 맞는다. 자, 이쯤 되면 이 물건의 주인은 나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가격 흥정. 밀고당기는 흥정은 이 글에서는 생략하자. 내가 치른 값은 3만5000원. 청계천 길에서 파는 중고 양복 한 벌이 2만원쯤 하니 좀 비싸게 준 게 아닌가 싶지만 미국에서 거래되는 이 재킷의 가격은 200∼250달러다. 물론 그것도 물건이 나왔을 때의 얘기이고, 그중에서 자기 몸에 꼭 맞는 사이즈를 구하기는 누워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얘기다. 횡재란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이렇게 군복을 모으면 자꾸 입어보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옷장에 빼곡이 걸린 옷들을 하나씩 꺼내 혹시 손상된 곳이 없나 확인하고 몸에 걸쳐보기 시작한다. 몇 벌의 옷을 갈아입다 보면 노르망디 해안의 독일군 진지에서 쏟아지는 기관총탄을 헤치며 상륙하는 미군 레인저 부대원이 되기도 하고 베트남 정글에서 스콜을 맞으며 고국을 생각하는 파월 맹호부대 병사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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