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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아의세계|커피즐기기

갈색향이 빚어내는 지적활동의 윤활유

  • 성우제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

갈색향이 빚어내는 지적활동의 윤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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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를 ‘사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방식을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이 커피를 이용할 게 아니라, 커피가 지닌 맛과 에너지를 각자 개성에 맞게 뽑아내라고 가르친다.

내가 그에게서 커피를 배우는 곳은 보헤미안에서 매달 둘째·넷째 수요일 저녁 7시에 여는 커피 교실이다. 보헤미안에서는 그 시간만 되면 ‘손님이 왕’이 아니라, ‘커피 교실 수강생이 왕’이 된다. 공부에 방해가 된다고 음악도 틀지 않는다. 커피 교실 수강생들은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 값(3000원)의 수강료를 내고 최고급 커피를 적어도 3~4잔 마실 수 있다.

박씨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커피 교실을 열 뿐만 아니라, 95년에는 커피점 경영자·커피회사 관계자 들과 함께 한국커피문화협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을 맡았다. 지금은 그 협회 고문으로 있다. 커피 전문점이라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는 “먹고살 정도면 된다. 내 목표는 국제적인 음료인 커피를 한국 사람뿐 아니라 미국인·일본인의 입맛에도 맞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올해 안에 ‘조용히 커피를 연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강원도 두메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

내가 만난 커피 전문가들은 거의 예외없이 박이추씨처럼 ‘커피 전도사’들이었다. 커피점을 운영하든, 커피 회사에 근무하든 커피를 조금이라도 안다는 이들이 전도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단순히 커피 시장을 넓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커피는 파고들면 들수록 어렵고, 어려운 만큼 혼자서는 공부할 수 없는 특이한 음료이기 때문이다. ‘좋은 커피를 맛보기 어렵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커피가 지닌 가장 큰 매력으로 보인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음료로 자리잡은 커피, 그런데 알고 보면 얼마나 어려운 음료인가를 아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커피나무는 북위 25도에서 남위 25도 사이의 ‘커피 존’에서만 자란다. 커피 품종은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총생산량의 75%를 차지하는 아라비카와 24%의 로부스타, 그리고 지금은 생산량이 미미한 리베리카이다.



먼저,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로부스타부터 이야기하자. 이 커피 종은 잡초처럼 끈질긴 성격을 지니고 있다. 환경에 민감한 아라비카와는 달리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서리나 가뭄에도 강하다. 아무 곳에서나 쑥쑥 잘 자라는 대신, 로부스타는 맛이 쓰고 거칠며 향이 약하다. 값도 저렴해 고급 커피와 배합해 커피의 가격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인스턴트 커피의 주재료로 사용된다.

C레이션으로 들어온 로부스타

한국의 커피 소비량은 로부스타로 만드는 인스턴트가 85%를 차지한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에서 흘러나온 C레이션 깡통으로 커피를 마시던 전통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커피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쓴맛’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그것은 바로 향기가 거의 없는 로부스타가 커피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한국 바깥에서 일반적으로 ‘커피’를 일컬을 때는 아라비카를 의미한다. 커피 존의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 지대에서 수확하는 커피가 아라비카 종이다. 아라비카는 고산 지대에서 생산될수록 고급 커피로 대접받는다. ‘커피의 황제’라 불리는 블루마운틴은 해발 2000m 이상에서만 재배되는 자메이카산 커피다.

아라비카 종도 생산 국가·도시·농장에 따라 성격이 천차만별이다. 커피의 이름도 생산 국가·선적항·생산 지역·원두의 등급 등에 따라 붙인다. 이를테면 ‘브라질 산토스 버번’은 ‘브라질에서 재배되어 산토스 항을 통해 수출된 버번 종 커피’를 의미한다. 수준급에 올라 있는 아라비카 종 커피라면 이름만 가지고도 족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커피에서는 족보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족보에 따라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족보가 있는 커피라면 기본적으로 신맛이 나게 마련이지만 탄자니아 커피는 그중에서도 신맛이 좋다. 탄자니아의 최고봉 블루마운틴은 부드러운 커피로 정평이 나 있다. 코스타리카 커피는 묵직하면서도 쓰고 입안에서 팡팡 튀는 맛을 지녔다. 케냐산 커피의 진수를 맛보면 신맛에서 커피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족보를 파악했다고 해서, 커피의 맛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커피 전문점을 경영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기가 갈고닦은 노하우를 전달하는 데 너그럽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나는 물을 어떤 것을 쓰고, 원두는 어느 수준에서 볶으며, 배합은 어떻게 하고, 물 온도는 어떻게 한다’는 것을 거리낌없이 이야기해준다. 커피 전문점 경영자들이 인간성이 유별나게 좋아서가 아니다. 자기가 가진 방식을 남에게 아무리 전해줘도 똑같은 커피를 추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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