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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시받는 국민가요 '뽕짝'의 마력

  • 송기철·대중음악 평론가

괄시받는 국민가요 '뽕짝'의 마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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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를 외형적으로 구분짓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꺾이는’ 창법이다. 트로트 가수들은 누구나 꺾임 창법을 구사한다. 꺾임은 트로트의 장르적 특징 가운데 하나인 애잔함을 표현하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트로트는 꺾여야 제 맛이란 얘기도 있다. 자, 그렇다면 ‘음악 속의 꺾임’이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전 세계 각 나라의 다양한 음악을 듣다보면 아주 신기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가까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멀리 북유럽,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중남미, 중동, 동유럽 집시음악 등등 동서양을 막론한 여러 지역의 민속 음악 속에도 공통적으로 ‘꺾임’이 존재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아랍, 인도같이 종교적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 있는 나라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타문화에 배타적 입장을 견지해온 지역일수록 꺾임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좀 달리 보면 서구 선진국에서는 상대적으로 꺾임이 퇴조했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민요 속에도 ‘꺾임’은 존재한다. 트로트 속에 있는 전통의 골격을 추측케 한다.

노래가 발휘하는 가장 큰 ‘힘’ 가운데 하나는 노랫말을 통한 메시지전달이다. 리듬과 멜로디도 음악의 구성요소지만, 노래가사는 궁극적으로 가수가 전달하고자하는 심상을 듣는 이의 마음 속 깊이 새겨 넣는다. 흔히 멜로디에 취한다는 말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마음을 적셔주는 것이 바로 노랫말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가요를 들으며 간혹 “이건 꼭 내 얘기 같아”하는 혼잣말을 탄식처럼 내뱉기도 있다.

몇 해전 큰 인기를 모았던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는 노랫말의 위력을 절감하게 해준 명곡이다. “이슬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30대 초반인 필자는 도라지 위스키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낭만에 대하여, 더 나아가 ‘추억’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희망의 중심은 추억’이라는 어느 시 구절처럼 누구나 마음 속 한편에는 추억이 자리잡고 있다. 하물며 도라지 위스키 시절을 겪은 세대에게 이 노래가 어떤 감상을 전달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제 30을 넘겨 인생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 40대들에게, 그 인생을 함축한 듯한 트로트 가사 한 구절은 소주의 첫 모금처럼 가슴을 싸하게 감싸 안는다.



트로트의 노랫말을 살펴보면,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과 슬픈 이별, 인생에 관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점 역시 앞서 언급한 엔카의 특징과 흡사하다. 그렇다고 속칭 신파조 가사들이 트로트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인기 있는 가요 노랫말 속에서도 비슷한 감성의 가사들이 넘쳐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10대 신세대 가수들의 노래에서.

노래라는 것이 본래 사람 사는 모습을 담는 거고 더 나아가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내 사랑을 몰라줘서 나는 너를 떠난다” 내지는 “너는 나를 망가뜨렸으니 너도 눈물 흘리게 될 거야” 식의 가사들에서는 젊은이답지 않은 진부함이 풀풀 풍겨 나온다. 이런 가사가 만연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트로트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트로트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이 슬픈 멜로디다. 슬픈 느낌이 나는 이유는 역시 마이너(단조) 음계에서 찾을 수 있다. 과거 사랑받았던 노래나, 지금도 인기 있는 곡들을 보면 가요, 팝 구분 없이 단조음계를 사용한 것이 많다.

우리 민족이 단조 풍의 슬픈 노래를 선호하는 이유는 잘 알려져 있듯 우리의 역사와 민족성 때문일 것이다. 잦은 외침 탓에 갖은 고난을 겪으며 살아왔고, 때문에 저마다 가슴에 응어리진 사연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마디로 ‘한’이라 하지 않는가.

농축된 한을 표현함에 있어 단조음계들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이 점은 멜로디가 중시되는 우리 국악을 살펴봐도 쉽게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남도 민요, 서도 민요의 한서린 정조를 되새겨 보라. 역시 마이너 음계다.

‘황금의 레퍼토리’ 자랑하는 메들리

트로트를 얘기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메들리다. 이른바 ‘뽕짝 메들리’로 불리는 이 희한한 스타일의 음악은 트로트 보급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음반 구매자들이 메들리에서 느끼는 매력은 무엇일까.

먼저 편리함을 꼽을 수 있다. 트로트 메들리 테이프들은 ‘황금의 레퍼토리’를 자랑한다.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샹하이 트위스트’까지, 그야말로 대중이 선호하는 트로트 곡은 거의 다 들어 있다. 한 개의 테이프에서 내가 좋아하는 여러 곡을 동시에 맛볼 수 있다면 음반구매자에게 그보다 더 실속있고 기분 좋은 일도 없다. 물론 오리지널과 ‘가리지널(다른 가수가 리메이크한 것을 의미하는 속어)’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그 다음으로는 가격의 저렴함을 꼽을 수 있다. 최근 가요 테이프의 가격이 보통 4000~5000 원대에 형성되는 것에 비해 트로트 테이프는 유명가수의 독집이라 해도 그리 비싸지 않다. 그중에서도 메들리 테이프들은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 보통 2000원대인데 이 가격은 일명 ‘길보드(불법 복제 음반)’ 테이프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이렇듯 저렴한 가격 때문에 대부분의 트로트 테이프들은 불법음반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별 판매량도 뚜렷이 구분된다. 도시보다는 시외, 농촌 지역의 판매량이 많다. 이 점은 음반을 구입하는 연령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트로트 메들리의 주소비자가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위에 언급한 ‘낀 세대론’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가격이 싼 만큼 이윤이 박할 것 같지만 메들리 테이프의 마진은 생각 외로 짭짤하다. 제작비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녹음에 쓰이는 악기라고는 전자 오르간과 리듬박스가 전부이며, 가수 개런티 이외에는 특별히 추가되는 비용이 없다. 단, 녹음에 임하는 가수는 불러야 할 곡들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능수 능란하게 애드립을 구사할 수 있다.

요즘 각광받고 있는 ‘신바람 이박사’ 이용석 씨도 메들리 가수 출신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음악에 열광하는 세대가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전형적인 ‘디지털 세대’라는 점이다. 어릴 적부터 첨단전자제품에 익숙한 디지털 세대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디지털 악기인 전자 오르간과 리듬박스로 만들어진 음악에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뽕짝메들리는 일본에서 ‘새로운 음악’으로 평가받았고 큰 인기를 얻기도 했다. 음반관계자들의 얘기에 의하면 메들리만 놓고 봤을 때 우리나라엔 이박사에 못지 않은 재목들도 많다고 한다.

메들리 테이프는 이렇듯 편리하고 값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메들리 장르 특유의 가벼운 느낌과 급조되는 제작방식 때문에 트로트는 경박하다는 인식에 일조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좋든 싫든 트로트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 속에서 즐기고 있는 또 하나의 문화다. 그렇지만 아직도 온전한 제 자리를 찾았다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트로트를 부르는 또 다른 용어들인 ‘뽕짝’, 그리고 ‘전통음악’이란 단어의 속내만 살펴봐도 그렇다.

뽕짝이란 단어는 트로트를 하대하는 명칭이다. 그 저변에는 일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반감이 작용하고 있다. 만약 트로트가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유입된 것이라면. 그래도 우리의 반응이 지금과 같았을까. 적어도 지금처럼 인정도, 부정도 하기 힘든 어중간한 대상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뽕짝이냐 전통가요냐

한편에선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 한다. 누가 왜 그런 명칭을 부여했으며, 과연 우리 사회 대다수 사람이 동의할 수 있을 만한 이름인가. 그저 오래 됐다 해서 ‘전통’이란 호칭을 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끌어 안아야 할 ‘악습’들은 너무나 많다.

흔히들 광복 후 우리 정치사가 분열과 부정으로 얼룩져 온 것에 대해 제대로 된 일제청산과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지적들을 한다. 트로트도 마찬가지다. 광복 직후 더 활발한 논의와 명확한 장르적 규명이 이루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없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이는 한국 대중음악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돼 있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트로트가 진정한 의미의 전통음악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젊은 세대가 즐길 수 있는 히트곡이 나와야 한다. 옛것일수록 거듭 새로워지는 과정이 없으면 발전도, 생명 유지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또 그런 히트곡이 나와야만 ‘트로트는 구식’이라는 일반적 생각을 뛰어 넘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중반 편승엽의 ‘찬찬찬’ 이후 젊은이들이 즐길 수 있는 트로트의 흐름이 끊겼다고 보는데, 최근 불고 있는 이 박사 열풍은 트로트가 젊은 층에 파고들 수 있는 또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히트한 노래 한 곡으로 너무 오래 버티는 풍토도 개선돼야 할 것이다. 방송에서 트로트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도대체 저 노래가 언제적 건데…”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물론 트로트는 장르적 특성 때문에 신곡 위주의 새 음반을 자주 발표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가수에게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은 피할 수 없는 의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역시 젊은 층이 트로트를 선뜻 인정하지 않는 주요인 가운데 하나다.

트로트를 ‘저급, 하층문화’의 일종으로 깔보는 일부의 시각도 개선되었으면 한다. 문화를 굳이 고급, 저급으로 나누어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야말로 설익은 엘리트의식이다. 다수가 즐기고 있는 것이라면 그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 실체를 인정한 이후에야 발전적인 비판도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그 작업은 우리 스스로가 좀 더 솔직해지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은 즐겨 부르면서도 누군가 자신을 ‘트로트나 불러대는 구식’이라 생각할까 주저하고 꺼리는 마음. 때로는 좋아하는 걸 있는 그대로 좋다고 인정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다.

신동아 2000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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