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나홀로 영화관’에서 즐기는 五感만족

  • 장인석

    입력2005-05-13 15: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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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디오 수집은 단순한 컬렉션이 아니다. 영화란 종합예술이며 시대를 조명하는 역사적인 자료 가치도 있기 때문이다. 비디오 수집은 작은 시네마테크를 갖는 것이다. 즐거움을 얻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취미생활이다.
    주말이면 청계천 7가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학생들이지만 개중에는 꽤 나이 든 사람도 보인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손에 제법 큰 가방이 들려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인가를 찾아서 계속 두리번거린다는 것이다. 이 근처에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영화 비디오테이프(이하 비디오) 도매상가에 원정 나온 비디오 수집가들이다.

    요즘은 비디오대여 시장의 경기침체로 다소 썰렁하지만 지난해만 해도 이 부근은 일요일이면 통행이 불편할 정도로 사람이 북적거렸다. 비디오대여점 업주 입장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난 비디오라 해도 여러 고객이 원하면 서비스 차원에서 구해다 놓을 수밖에 없다. 청계천 7가는 이런 비디오대여점 업주 외에도 취미 삼아 비디오를 수집하는 마니아들에게는 아쉬운 대로 중고 비디오를 구입할 수 있는 쇼핑타운인 셈이다.

    쓰레기 속에서 보물 찾기

    영화마니아인 비디오수집가들은 가게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비디오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끈질기게 고른다. 하지만 이미 청계천 도매상가의 업주도 ‘희귀·명작 비디오’에 대해 정통해 있는 터라 소위 값나가는 비디오는 따로 보관해놓고 바닥에 쌓아놓은 것은 형편없는 ‘똥프로’(소장 가치가 없는 영화를 가리키는 속어)인 경우가 태반이다.

    몇 달 전 청계천에서 프랑스 누벨바그의 선구자인 장 릭 고다르 감독의 대표작 ‘미녀갱 카르멘’과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 존 카사베츠 감독의 ‘사랑의 행로’(원제는 Love Streams)를 구했다는 영화광 L씨는 “월척을 낚는 기쁨이 이보다 더하랴”라는 말로 감격을 대신했다. 이 두 작품은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끼리 거래가 이루어지면 최소한 5만~10만원까지 거래될 수 있는 명작비디오. 이 보물을 단돈 1000원씩에 구입했으니 L씨로서는 횡재한 셈이었다.



    이들이 주로 구하는 희귀 비디오란 아트, 명작, 고전, 컬트 등의 영화로, 출시된 지 오래돼서 구하기 힘들거나 처음 출시 때부터 소량으로 나온 비디오들이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분노의 주먹’ ‘비열한 거리’를 비롯, 데보라 카 주연의 ‘흑수선’, 진 켈리 주연의 ‘파리의 아메리카인’, 카트린느 드뇌브 주연의 ‘셀부르의 우산’, 샘 페킨파 감독의 ‘철십자 훈장’,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호금전 감독의 ‘협녀’,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해탄적일천’,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의 ‘위대한 휘츠카랄도’ 등 잘 알려진 걸작에서부터 조니 뎁이 주연하고 존 워터스가 감독한 컬트영화 ‘사랑의 눈물’, 누벨바그의 여성기수 아네스 바르다 감독의 유일한 출시작 ‘아무도 모르게’, 에릭 로메르 감독의 ‘녹색광선’ 등 수준 높은 영화 마니아여야 알 만한 숨겨진 걸작 등 다양하다.

    아주 오래된, 그것도 잘 알지도 못하는 영화 한 편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실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마니아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사실만큼 ‘괴로운’ 일은 없다. 아예 국내에 개봉하지 않았거나 개봉했더라도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다면 포기해버리면 되지만 분명히 비디오로 출시됐다는데 구하기가 어렵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그때부터 마치 상사병을 앓는 사람마냥 그 영화만 생각나는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비디오 대여점에 내가 찾던 비디오가 있다면 만사 제쳐놓고 그곳으로 달려간다. 비디오 재킷이라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비디오를 손에 쥐고 날마다 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게다가 오래 보관해둘수록 가치도 높아지니 재산증식의 이점도 있고, 소장자료로도 가치가 빛나게 된다.

    자신의 사무실에 800장 정도 소장하고 있는 영화감독 김동빈씨는 “좋은 영화 한 편을 비디오로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영화관이 집에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가의 명작은 수십 번 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좋은 법이고 또 공부를 위해서도 봐야 하는데, 항상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다”고 말한다.

    ‘으뜸과 버금’과 ‘영화마을’의 건전비디오 보급운동 아트영화나 명작, 고전 영화 비디오에 일반인들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93년 4월 YMCA 건전비디오연합회에서 주관하던 ‘으뜸과 버금’이란 모임이 ‘1차 선정작 478선’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실 그 이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비디오문화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디오 하면 으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영화를 연상했을 정도로 통속적인 비디오가 판을 쳤고, 청소년에게 꿈과 사랑을 주는 건전한 비디오 보급은 뒷전이었다.

    YMCA는 비디오 문화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 90년 초 건전비디오연합회를 만들어 좋은 비디오 보급에 나섰다. 그 결과 각계 전문가들이 선정한 우수비디오를 발표했으나 정작 비디오보급의 최일선에 있는 비디오대여점이 이런 우수비디오를 보유하지 못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주로서는 장사에 도움이 안 되는 비디오를 비치할 수는 없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건전한 시민들의 ‘비디오 일기’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우수비디오 보급은 먼저 우수비디오상점을 발굴 소개하는 데 있다고 판단한 건전비디오연합회는 91년 ‘으뜸과 버금’이란 친목단체를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우수 비디오상점들을 찾아 나섰다. ‘으뜸과 버금’에 가입할 수 있는 비디오대여점의 자격은 규모가 어느 정도 돼야 하고, 건전비디오연합회가 선정한 우수비디오를 다수 소장해야만 했다. ‘으뜸과 버금’의 취지에 동참한 회원들이 늘어가면서 우수비디오상점이 도처에 생겨나기 시작했고, 명작이나 고전 영화비디오 구입의 관심도 이때부터 높아졌다.

    94년 ‘으뜸과 버금’ 멤버 중 일부가 영화체인점 ‘영화마을’을 만들면서 건전비디오 보급은 일반인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갔다. 영화마을은 ‘특선 1000선’을 선정해 각 체인점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 보유하게 했는데, 가맹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명작 희귀비디오의 유통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으뜸과 버금’이 95년 ‘으뜸과 버금 2000선 목록집’에 이어 97년 ‘3000선’을 발간하면서 아트영화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고, ‘으뜸과 버금’이나 ‘영화마을’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97년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4대 통신사의 영화동아리들도 명작 영화 보급에 일조했다. 취미 삼아 보던 영화에서 탈피해 좋은 영화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졌고, 회원끼리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명작영화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회원끼리 좋은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교환해서 보거나 함께 구입하러 다니는 것도 일상사가 됐다.

    수많은 영화동아리가 있지만 유니텔 시네시타 내의 ‘배드 테이스트’는 일반인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컬트영화나 그들 스스로 평가한 영화들을 소개한다는 데서 관심을 모은다. 정기적으로 비디오영화제도 개최하는 ‘배드 테이스트’의 초대방장 최명국씨는 “설립된 지 2년여 동안 우리가 그냥 지나쳐버렸던 영화 중 주옥 같은 작품들을 재조명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한다.

    비디오 수집은 단순한 컬렉션이 아니다. 영화란 종합예술이며 시대를 조명하는 역사적인 자료라는 가치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의 흐름을 꿰뚫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보편화돼 있는 시네마테크 운동이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시발점이라는 데서도 열악한 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작은 시네마테크, 이것이 비디오 수집이다. 즐거움을 얻는 것 이상으로 자부심을 느끼는 취미생활이다.

    비디오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다. 매년 수백 편의 비디오테이프가 쏟아져 나오지만 데이터베이스는커녕 소장가치가 있는 비디오들을 제대로 비치해놓은 곳도 없다. 따라서 어떤 영화가 비디오테이프로 나왔는지조차 모호하고, 극장용 제목과 비디오 제목이 전혀 다른 경우가 많아서 찾고 있던 영화 비디오가 나와도 모르고 지나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 누벨바그의 여성 기수 아네스 바르다의 유일한 출시작 ‘아무도 모르게’는 원제가 ‘쿵후 마스터’다. 자기 여자 친구의 엄마인 40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14세 소년이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는 아케이드 게임 이름을 제목으로 단 것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도 모르게’란 얼토당토 않은 제목으로 둔갑했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걸작 ‘브라질’은 ‘여인의 음모’로, 미국 리얼리즘의 기수 폴 브릭맨의 ‘리스크 비즈니스’는 ‘위험한 청춘’으로, 이탈리아의 페미니즘 여성 감독 리나 베르트뮬러의 ‘8월의 푸른 바다에서 예기치 않은 운명으로 떠내려간…’이란 다소 시적인 제목은 ‘귀부인과 승무원’으로 출시돼 실소를 자아낸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비디오 업계가 영세성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비디오테이프를 제작해서 배급하는 회사나 그 테이프를 받아 대여점을 운영하는 업자 모두 장삿속에 급급하다 보니 흥행 위주의 프로를 보급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실정이니 다소 지명도가 떨어지는 영화는 야한 제목이나 선정적인 사진을 내세워 하나라도 더 팔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이다.

    요즘은 비디오업계가 불황이어서 전국의 비디오대여점이 1만5000개에 불과하지만 전성기인 3∼4년 전만 해도 3만5000개에 달했다. ‘아마겟돈’이나 ‘쉬리’ 등 소위 ‘대박’ 영화는 10만여 장을 찍어 배급하지만 독일 뉴저먼 시네마의 기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문제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와 같은 아트영화는 2000장을 찍는다. 비디오 가게 17군데 중 한 곳만이 이런 영화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10년 후를 상상해보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분실되거나 파손돼 잘해야 100장 내외만 남게 될 것이고, 그 가치는 빛날 수밖에 없다.

    아직도 청계천 도매상가에는 소장가치가 높은 희귀 비디오가 꽤 많이 진열돼 있다. 나중에 오를 것을 대비해 업자들이 미리 사재기를 하거나 하나둘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이 진열된 비디오들은 비디오 대여점주나 소장가들에게 판매된다. 하지만 청계천은 유통업자를 통해 구입했기 때문에 가격이 꽤 비싸게 형성돼 있어 비디오 수집가들에게 그리 환영받는 곳은 아니다.

    인터넷 시대를 맞이해서 명작비디오판매 홈페이지를 개설해놓은 곳도 있지만 그곳 역시 ‘빠꼼이’(희귀 비디오를 잘 아는 업주들을 가리키는 속어)들이 많아 턱없이 비싸다. 가끔 유니텔이나 하이텔 등 통신사의 장터 사이트에 ‘희귀명작비디오 싸게 팝니다’란 글이 뜨기는 하지만 사기를 당할 수 있으므로 가격과 상관없이 그리 바람직하지는 않다. 따라서 비디오 대여점이나 ‘헌터’라는 유통업자를 통해 구입하는 것이 비교적 바람직하다.

    비디오는 ‘구관이 명관’

    비디오 대여점 중에서는 오래 됐지만 장사가 안 돼 ‘맛이 간’ 곳이 주된 공략 대상이다. 게다가 대여점주가 영화에 문외한이면 금상첨화. 비디오대여점을 오랫동안 운영했다고 해도 호구지책으로 이 업종을 선택한 사람은 영화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영화에 대해 문외한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똑바로 살아라’ 있어요?” 하고 물어보면 된다. 문외한 주인은 십중팔구 박중훈 주연의 국내영화를 내놓을 것이다. 영화를 좀 안다면 “박중훈이 주연한 겁니까? 아니면 스파이크 리 감독의 영화입니까?” 하고 되물을 것이다. “‘돈을 갖고 튀어라’ 있어요?” 하고 물어도 마찬가지. 이것도 박중훈 주연의 영화를 내놓으면 문제가 있다. 미국의 천재 감독 우디 앨런의 대표작이 출시돼 있기 때문이다.

    “‘위험한 관계’ 있어요?” 하고 물으면 더 간단하다. 영국의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명작 ‘위험한 관계’(원제는 위험한 레슨)는 어지간한 비디오가게에는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을 아는 비디오가게 주인조차 사실 많지 않다. 아마도 대부분의 비디오대여점 주인은 구석에 처박아 놓은 같은 제목의 성인용 외국영화(‘위험한 관계’란 노골적인 애정영화가 서너 편 출시돼 있다)를 찾아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보물이라도 못 알아보면 쓰레기가 되는 법. 영화에 문외한인 비디오 대여점주는 대여도 거의 안 되는 영화를 고객이 사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고 생각한다. 좀 비싸게 받으려고 좋아하는 표정을 짐짓 감출 뿐이지 속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가 손님에게 5000원에 판 비디오 중에 금싸라기 같은 진주가 있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나도 알지 못한다.

    필자가 잘 아는 영화 관계자는 2년 전 동네 가게서 ‘아주 우연히’ 이만희 감독의 ‘삼포 가는 길’이란 비디오를 구했다며 조촐한 소주파티를 연 적이 있다. 그는 이 비디오를 지금도 애지중지 아끼고 있는데, 그 후 비디오가게를 여러 군데 다녀봤지만 다시는 볼 수가 없다고 말한다.

    ‘헌터’라고 불리는 유통업자들의 집중 공략 대상도 역시 주인이 영화에 문외한인 대여점이다. 헌터들이 주로 사용하는 전법은 소위 ‘신프로로 눈탱이치기’. 오래된 희귀 비디오들을 출시된 지 한두 달 정도 지난 신프로와 교환하는 것이다.

    비디오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프로가 오래된 구프로보다 더 값이 나갈 것이라 생각하지만 비디오의 세계에서는 철저히 ‘구관이 명관’이다. 아무리 유명한 대작이라도 출시된 지 두 달 정도 지나면 소위 ‘똥프로’라 해서 거저 줘도 안 가져가는 애물단지가 된다. 두 달 동안 테이프 구입가인 2만7500원의 몇 배에 달하는 수입을 올렸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마감하고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출시됐을 때는 인기가 없어 비디오대여점주의 애를 태우는 아트, 명작 등 소위 ‘구색프로’는 세월이 지나면서 그 빛을 발휘한다. 대개 가격이 2만2000원인 아트 명작비디오는 1년이 지나도 대여해가는 고객이 적어 본전을 뽑기 힘들 지경이지만 팔아버리려고 마음먹으면 제값 이상을 받을 수 있다. 헌터들은 이런 비디오들을 헐값에 사들여 몇 배를 붙여 비싼 값에 팔아넘긴다. 팔아넘기고 남은 물건들은 청계천의 비디오테이프 도매상가나 통신 등에 올려 싼값에 처분한다.

    헌터생활 8년째인 J씨는 “4, 5년 전만 해도 희귀비디오를 찾는 수요자도 많았고, 구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아 보수가 짭짤해 수십 명의 헌터가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다른 직종으로 전직해서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한다. J씨에 따르면 3, 4년 전 헌터들에 의해 서울의 어지간한 비디오가게에서 희귀 비디오가 바닥을 보이자 지방의 대도시를 비롯해 산간 벽지까지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2, 3년 전부터 비디오가게가 사양길에 들면서 희귀 비디오를 구입하는 업주가 현저히 줄어 애써 희귀비디오를 모아봤자 기름값도 나오지 않게 됐다는 것.

    사정이 이러하자 여유가 있는 헌터들 중엔 이른바 ‘찍기’라는 것을 통해 중고 테이프를 팔기 시작했다. ‘찍기’란 폐업을 하는 비디오가게의 테이프를 한 장당 얼마에 사들인 뒤 한 달 내지 두 달간 월세를 대신 내주고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2년 전만 해도 한 장당 1000원이던 ‘찍기’ 값은 요즘은 200∼300원까지 떨어졌다. ‘찍기’ 하려는 사람에 비해 폐업 가게가 턱없이 많아진 결과다. ‘찍기’ 업자들은 일괄 구매한 비디오 중 쓸 만한 것들은 소매로 팔고, 팔고 남은 것들은 떨이로 청계천 등지에 넘긴다. 청계천 등지의 비디오 도매상가에서 바닥에 쌓아 놓고 파는 비디오는 이렇게 구입한 것들로 원가로 치면 100원도 되지 않는다.

    비디오 구입시에는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가짜’인지 ‘볶은 것’인지를 잘 구분해야 하며, 정품이라도 화질이 불량한지를 세심히 살펴봐야 한다. 위조 비디오 중에는 하도 교묘해서 일반인이 보기엔 진짜와 똑같은 것이 많다. 정품을 복사한 테이프를 유통시키는 것을 ‘볶았다’고 말하는데, 케이스 종이와 테이프 뒷면 옆면에 붙어 있는 상표를 유심히 살펴보면 조악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테이프 케이스가 출시회사 것이 아닐 때도 일단 의심을 해봐야 하며, 지나치게 값이 싸거나 비싸도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서 비디오 화질을 검사한 후 불량하면 반품할 수 있도록 사전에 약속을 받아두는 것도 중요하다.

    중고 비디오의 가격은 정해져 있지 않다. 보통 도매업자들이 폐업가게에서 인수한 것은 장당 200원에서 1000원까지지만 소매가는 1000원부터 10만원 이상까지 천차만별이다. 대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프로는 3000∼4000원이면 비싼 것은 아니라고 보는데, 문제는 희귀비디오의 값이다. 이것은 부르는 게 값일 때도 있고, 같은 비디오라도 파는 사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중요한 것은 사려는 사람의 가치기준인데, 본인이 꼭 구하고 싶은 명작이라면 눈에 띌 때 가격에 구애받지 말고 구입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 비디오를 다음에 다시 만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희귀 비디오의 가격은 일반적인 명작이 대략 1만원에서 1만5000원, 좀 구하기 어려운 명작이 3만원 내외, 아주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5만원부터 50만원까지 다양하다.

    희귀 비디오들은 대개 출시된 지 오래된 것이 많다. 아무래도 오래된 비디오들은 유통과정에 소실되기 마련이고 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적던 시절이라 출시됐을 때부터 소량만 시장에 나왔기 때문. 80년대에 출시된 비디오들은 일단 관심을 갖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영화제목이 낯설어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원제와는 전혀 동떨어진 이상야릇한 제목으로 나온 경우도 많으므로 배우나 감독 이름을 꼼꼼히 살피는 게 좋다. 배우나 감독 이름도 철자가 엉망인 경우도 많지만 세밀히 살펴보면 정확한 이름을 유추할 수는 있다.

    지금은 폐업한 금성, 지구, 오아시스, 우진, 대우 등에서 나온 비디오 중에 희귀 비디오가 많다. 일단 이런 회사의 비디오라면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데, 특히 대우에서 나온 ‘종이비디오’(재킷이 플라스틱이 아니라 두꺼운 종이라고 해서 이렇게 불림)들은 거의 희귀 비디오 대열에 들어가니 주의를 요한다.

    최근 1, 2년 전부터 직배사들이 명작 출시란 이름으로 오래된 고전들을 출시하거나 재출시하는 경우가 있다. ‘수색자’나 ‘말타의 매’ ‘필라델피아 스토리’와 같은 영화들은 말로만 전해지다 처음으로 영화팬들에게 선보여 마니아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욕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파리의 아메리카인’ ‘분노의 주먹’ ‘비열한 거리’ 등 주옥 같은 명작들은 이미 출시됐지만 구하기가 너무 어려워 이번에 재출시됐다. 하지만 재출시됐다고 해서 값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재출시되면 오히려 과거에 나왔던 오리지널의 값은 더욱 뛰게 된다. 똑같은 영화지만 더 오래 된 비디오를 수집가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희귀 비디오 마니아들

    비디오가게라고 해서 주인이 전부 영화에 문외한이거나 좋은 비디오를 소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경희대학교 부근의 미래영상은 영화마니아, 비디오 수집가에게는 보물창고다. 주인 손태영씨는 “지금까지 8년간 장사하면서 10억원을 벌었다면 그중 7억원은 비디오 구입비에 들어갔다”고 말할 정도로 비디오 구입에 열심이다. 그의 15평 남짓한 가게는 사람 둘이 지나다니기도 힘들다. 3만5000장을 진열하느라 이중장을 설치해 통로가 좁아진 것이다.

    그 좁은 곳에 진열돼 있는 비디오 테이프는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동네 비디오가게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없던 명작들이 무려 석 장씩 꽂혀 있다. 폴란드의 거장 크지스토프 키에로프스키 감독의 10장짜리 ‘십계’도 석 질이나 있다. 손씨는 출시되는 비디오 중 좋은 영화라는 판단이 서면 대여가 안 되더라도 반드시 석 장을 구입하고, 틈날 때마다 희귀 비디오를 구하러 다닌다. 그가 말하는 희귀비디오 구입 방법은 단순하다. 눈에 띄면 얼마를 주더라도 산다는 것이다. 그때를 놓치면 다시는 못 볼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철칙 때문에 그의 집에는 희귀비디오 중에서도 희귀하다는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공포의 휴가길(Hills have eyes)’도 석 장, 베르너 헤어조그의 ‘위대한 휘츠카랄도’도 석 장씩 진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아직까지 한번도 못 본 비디오가 있다는데, 바로 프란시스 F. 코폴라 감독의 ‘럼블 피시’다.

    집에도 2만여장을 소장하고 있다는 그는 “테이프를 베고 잘 때의 기분을 아느냐”고 묻는 전형적인 희귀비디오 수집가다. 훗날 비디오 가게를 그만둔다면 그 동안 모은 희귀비디오를 영화관련 공공기관에 기증하겠다고 하는데, 경희대 영화동아리들이 ‘비디오 영화제’를 열면서 못 구한 비디오들을 자기 가게에서 빌려갈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천리안 영화동호회인 ‘우리영화사랑’ 회원인 안규찬씨는 한국 영화에 관한 한 독보적인 존재. 희귀한 한국 영화 비디오는 거의 모두 소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제목만 대면 주인공과 감독 이름부터 어느 극장에서 몇 월 며칠에 개봉했다는 것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다.

    천리안을 비롯해 유니텔, 나우누리, 하이텔 영화동호회에는 영화퀴즈 소모임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소모임의 회원들은 ‘영화퀴즈방’을 통해 영화이름 맞히기 게임도 하고 영화에 대한 정보도 교류한다. 안씨는 이 4대 통신을 통틀어 ‘한국영화의 달인’으로 통하는 퀴즈게임의 절정고수. 그와 영화퀴즈방에서 맞붙은 영화마니아들은 그의 해박한 한국영화 실력과 기억력에 혀를 내두른다.

    그는 지난 7월 그가 속한 천리안 영화동호회인 ‘우리영화사랑’ 후원으로 한국영화 비디오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얻었다. 일반인은 물론 국내영화 관계자들조차 이런 영화가 비디오로 나와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한국영화 비디오의 열악한 실정에 같이 가슴 아파했다.

    “진짜 희귀한 비디오는 사실 한국영화라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외국영화 비디오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고, 소장하고 있는 분도 많지만 한국영화 비디오는 출시되자마자 푸대접받다 보니 현재 제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없어요. 제가 10년 전부터 보이는 족족 구하고는 있지만 외국 영화에 비해 너무 보관이 안 돼 있어 영화사적 자료의 보관이라는 측면에서도 각성을 요합니다.”

    그가 지난 7월 전시회 개최를 계기로 쁘랭땅백화점 지하에 문을 연 ‘청춘극장’에는 진귀한 한국영화 비디오가 진열돼 있다. 비디오 마니아들의 수집을 도와주고 한국영화의 저변 확대를 위한다는 ‘청춘극장’에는 황해 윤정희 주연의 ‘독짓는 늙은이’, 하길종 감독의 ‘화분’ 같은 잘 알려진 걸작도 있지만 숨겨진 명작도 많아 영화마니아의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든다.

    안씨는 희귀 비디오의 정의에 대해 색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아트나 명작, 걸작 이라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몇십 명이라면 희귀비디오의 대열에서 탈락한다는 것. 희귀비디오 중에서도 가격이 30만원을 호가한다는 ‘협녀’나 ‘위대한 휘츠카랄도’ 등은 소장가가 꽤 있다는 점에서 안씨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그보다는 출시는 됐는데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한 영화, 5∼6년 만에 한 번 본 비디오가 진짜 희귀 비디오라는 것. 물론 좋은 영화, 보관가치가 높은 영화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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