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 황승경| 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음악 감독 lunapiena7@naver.com

    입력2011-10-19 14: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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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19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 오페라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1813~1901)가 없었다면 세계 유수의 오페라극장은 시즌 프로그램 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그것은 베르디의 오페라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명작을 찾기가 쉽지 않은 까닭이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해 성악가의 매혹적인 음성과 감성적인 멜로디에 집착한 나머지 이야기의 구성이 허술하고 철학적 사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선율로 청중을 현혹하려 한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이 같은 비난은 베르디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베르디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진실과 존엄성, 그리고 한계상황에 직면할수록 절박하고 치열해지는 고뇌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 때문에 베르디는 ‘음악의 셰익스피어’로 비유되곤 한다(베르디의 26개의 작품 중에서 ‘맥베스’ ‘오셀로’ ‘팔스타프’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세상에 알려진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독보적인 예술적 가치를 가진 희곡작품을 썼다. 베르디 역시 사장될 수도 있었을 기존의 원작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오페라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전통 위에 만들어진 베르디의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은 모든 가창에 번호를 붙이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작곡가들이 극적 내용의 전개보다 노래의 순서에 따라 작품이 진행되는 ‘번호 오페라 형식’으로 작곡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베르디 역시 자칫하면 극과 음악의 일관된 흐름을 끊을 수 있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두 작품을 제외한 24작품을 관객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번호 오페라 형식으로 작곡했다. 시대를 앞서가는 획기적인 새로운 양식의 시도보다는 익숙한 전통 안에서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발휘한 것이다.

    베르디가 오페라에서 창조한 인물들은 극적 상황에 맞는 성격이 음성의 색과 가창기법 등 다양한 방식의 음악적인 이미지로 표현돼 현실감을 더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창조된 인물들을 ‘베르디아노’라 불렀다.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한국오페라단과 공동으로 ‘춘희’를 공연하는 일본 후지와라 오페라단 공연 장면.

    베르디는 주역 배우의 노래에는 고음 위주의 화려한 음색을 사용하던 관습을 깨고 저음의 성악 파트를 다채롭게 사용해 인물 사이의 관계를 다각도로 구체화했다. 예를 들어 ‘맥베스’에서 맥베스 부인 역을 맡은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가 아름다운 음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탐욕스럽고 악한 인간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에는 적격이 아니라 생각해 교체했다. 그리고 맥베스 역을 저음 파트의 바리톤에게 맡겨 깊고 잔악한 인간의 본성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했다. 세계적인 성악 콩쿠르인 부세토 베르디콩쿠르는 베르디 작품으로만 진행하는데, 여기서 우승한 한국인 최현수, 김동규, 전기홍씨가 모두 바리톤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베르디 작품에서 바리톤의 존재감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이렇듯 베르디는 저음과 음색을 활용해 감정 표현을 차례로 폭발시켜나가는, 특유의 다이내믹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하는 연속적인 음악구도로 관객의 감성에 호소했다.

    1600년경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오페라라는 장르가 탄생한 이후, 이탈리아에서는 매년 수많은 창작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베르디까지의 200여 년 동안에 어떤 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감히 바꿀 수 없는 음악 형식이 전통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이 전통은 작곡가들의 음악적 재능으로만 정착된 것이 아니라 청중의 지지와 반향에 따라 정착된 것이기도 했다.

    ‘개천의 용’ 베르디

    이런 점에서 동년배로 항상 베르디와 비교대상이 되는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사정이 달랐다. 바그너의 경우 독일 오페라라고 할 음악 전통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철학적 사상과 미학적 이론을 손쉽게 새로운 음악 형식으로 탄생시킬 수 있었다.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바그너는 베르디보다 18년 먼저 세상을 등졌다.

    베르디는 1813년에, 독일의 바그너보다 5개월 늦게 이탈리아 북부 파르마라는 소도시에서, 그것도 2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롱콜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푸치니처럼 대대로 내려오는 음악 집안도 아니었고, 바그너나 베버처럼 부모가 극장과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집안도 아니었다. 그는 조그만 동네에서 포도주를 만들고 판매하는 지극히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베르디는 음악을 좋아했고 재능은 남달랐지만 모차르트나 멘델스존이 어린 시절에 보여준 천재성에 견줄 정도는 아니었다. 또 그의 부모는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의 부모처럼 아들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줄 안목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오셀로’의 한 장면.`

    베르디의 부모는 너무 아까운 음악 재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10살짜리 아들을 생각해 나름 최선책으로 300가구 정도가 거주하는 부세토로 유학 보냈다. 베르디는 이런 부모의 선견지명 덕분에 그곳에서 마을 유지 안토니오 바레치(1787~1867)를 만나게 되고, 그의 지원으로 밀라노로 유학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밀라노국립음악원에서는 그의 작품이 우수하기는 하지만, 입학연령을 넘긴 18세의 학생을 합격시켜줄 정도로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평가와 함께 입학을 불허했다. 입시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거니와, ‘읍(邑)’ 단위 마을의 성당 오르간 주자를 사사한 베르디의 시험 준비는 도시 아이들에 비해 너무나 허술했던 것이다. 이 사실은 후일 밀라노국립음악원의 명칭이 국민영웅이 된 그를 기념해 ‘베르디 국립음악원’으로 변경된 것을 상기할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르디는 밀라노에서 비록 정식 학교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체계적인 음악레슨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숨어있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오페라인 ‘오베르토’가 스칼라 극장의 매니저인 바르톨로메오 메렐리의 눈에 띄어 스칼라 극장과 3개의 작품을 계약하는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렇게 앞길이 열린 베르디는 1836년 고향에 돌아와 자신을 발탁하고 지원해준 바레치의 첫째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한다. 어려서부터 베르디는 장학금에 대한 보답으로 바레치의 네 딸에게 피아노와 성악을 가르쳤는데, 그중 첫째 딸과 결혼함으로써 존경하던 바레치의 사위가 된 것이다. 그리고 1837년에는 딸을, 이듬해에는 아들을 낳으면서 주세페 베르디의 인생은 남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삶, 그 자체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르디의 이 같은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838년부터 차례로 딸과 아들 그리고 아내가 병으로 세상을 등졌고, 1839년에 초연한 그의 두 번째 작품 ‘하루 만의 임금님’마저 혹평과 함께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리는 일을 당했다. 당시 그의 심정은 고스란히 회고록에 담겼다.

    “살아도 살아 있다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어둠뿐이었다. 혹자는 나의 작품 속에 나오는 인물들이 맞닥뜨린 극한 상황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데 그때의 경험이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잔인하게 논한다. 물론 부정할 수야 없겠지만 내 가족의 삶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최고의 명예와 화려한 영광을 준 나의 모든 작품을 다 바친다 할지라도 전혀 아깝지 않다. 그들은 언제나 나의 모든 것이었다.”

    베르디가 이런 심적 혼란기를 겪고 있을 무렵 스칼라 극장 지배인인 메렐리가 그를 찾았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나부코도노소르(Nabucodonosor) 이야기를 오페라로 올리고 싶다며 찾은 것이다. 원래는 경험이 부족한 베르디보다는 빈에서 활약하는 오토 니콜라이(1810~1849)에게 의뢰할 예정이었지만, 촉박한 스케줄 때문에 베르디에게 작곡을 맡긴 것이다. 베르디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베르디는 다른 작곡가의 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선이 굵고 역동적이고 극적인 표현을 오케스트라에 부여했다. 인물의 표현기법 또한 극적인 상황에 맞게 드라마틱하면서 열정적 방식으로 변모시켰다. 오케스트라는 성악가를 보조하는 반주 수준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고 또 다른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1842년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된 오페라 ‘나부코’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달고’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프랑스 오랑주의 로마 극장에서 공연된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 1막의 한 장면. 로마 극장은 2세기에 건립됐다.

    당시 이탈리아반도는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베르디가 태어난 파르마는 프랑스의 지배를, 80㎞가량 떨어진 밀라노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특히 ‘나부코’의 3막에서 유대인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창하는 ‘날아라! 생각이여! 금빛날개를 달고’(히브리 노예들의 합창)는 이탈리아의 현실을 극중 상황과 동일시하게 만들면서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동시에 베르디를 일약 애국전선의 선두에 서게 했다.

    베르디의 영향력은 후일 로미 슈나이더가 주연한 영화 ‘시씨(Sissi)’에도 등장하는,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셉 황제의 황후이자 ‘시씨’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비운의 엘리자베스 황후가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서 들어서자, 객석의 밀라노 시민들이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며 주권회복을 위한 시위를 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베르디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역에 퍼졌다. 사람들은 당시 통일운동의 구호였던, 사보이아 왕가의 왕인 ‘빅토리오 엠마누엘을 이탈리아의 왕으로’라는 말의 약자를 조합하면(Vittorio Emanuelle Re Di Italia) 바로 ‘베르디’가 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종의 정치적 목적으로 ‘베르디 만세’를 더욱 부르짖었다.

    베르디는 ‘나부코’ 이후 제1차 십자군원정 때 이탈리아인의 기상을 보여주는 ‘십자군의 롬바르디아인’에서 다시 종교적인 색채로 민족주의에 호소했고, ‘아틸라’ ‘잔다르크’ ‘레냐노의 전투’ 등 역사적인 사건을 다룬 작품에서도 애국심에 호소했다. 그러면서 그의 초창기 작품은 자연스럽게 극적이고 남성적인 색채를 가진, 영웅적 스토리 전개를 바탕으로 하는 경향을 보였다.

    1848년 프랑스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무너지고 다시 공화정이 수립되자 주변국들은 크게 영향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반란으로 권력을 쥐고 있던 재상 메테르니히가 실각했으며, 이러한 어수선한 정세를 틈타 밀라노 시민들은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고 5일 동안의 짧은 독립을 쟁취한다. 그러나 곧바로 라데스키 장군의 진압군에게 밀라노 시민들은 무참히 짓밟히는데, 이때 라데스키 장군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작곡해 그에게 헌정한 행진곡에 맞추어 밀라노로 진격했다. 그 때문에 ‘라데스키 행진곡’은 매년 빈의 신년음악회에서는 세계 최고의 지휘자가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면서 즐겁게 연주하는 음악이지만, 이탈리아인에게는 수많은 독립투사의 피로 물든 역사를 상기시키는 어둡고 가슴 아픈 행진곡이 됐다.

    여하튼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에 대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반감은 베르디를 매개로 국민을 더욱 단결시켰다.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에 격분하고 이탈리아 국민의 열망에 공감한 베르디는 12세기 신성로마제국을 상대로 거둔 이탈리아의 승리를 소재로 한 오페라 ‘레냐노 전투’를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로마에서 공연해 20여 회나 무대 인사를 할 정도로 국민적 환호를 받았다. 또한 실러의 ‘군도’ ‘루이자 밀러’, 바이런의 ‘해적’, 위고의 ‘에르나니’ 등 대문호들의 낭만적인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를 연속 발표해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한편, 작곡자로서의 역량을 과시한 결과 이탈리아 국민의 가슴에 영웅으로 자리 잡았다.

    경험으로 알게 되는 약자의 항변

    베르디는 새로운 작품 문제로 들른 파리에서 ‘나부코’의 초연 때 악역인 ‘아비가일레’역을 맡아 열연한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다시 만나 가까워졌다. 스트레포니는 베르디의 몇몇 작품에도 열연을 한 테너 나폴레오네 마리오네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사생아로 태어난 두 아들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여기에 장인이었던 바레치의 축복과 격려가 보태어져, 베르디는 스트레포니를 그의 고향으로 데려왔다. 그렇지만 대대손손 집성촌을 이루며 단단한 결속력을 가진 마을 사람들은 베르디의 전처에 대한 추억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굴러들어온 돌’인 스트레포니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베르디는 사회적 통념과 도덕적 인습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하면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1851~53년에 창작한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는 각각 곱추로 태어난 광대, 억압받는 집시, 경시당하는 고급 창녀에게 초점을 맞춘 3대 오페라였다.

    ‘춘희’로 알려진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은 소(小) 뒤마가 파리의 위선적인 사회상을 날카롭게 비판한 소설 ‘동백꽃 여인’이었다.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인 마리 뒤 프레시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는데, 소설 속 여주인공은 코르티잔(상류사회 남성의 공인된 애인으로 사교계 모임에 동반하며 지적인 교양과 품위를 지니고 있는 여성)으로 남성들의 숭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생리주기를 알려주려는 듯이 한 달 중 25일은 흰 동백꽃을,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꽃을 머리에 꽂고 있다. 이 소설은 대단한 대중적 성공을 거두어서 프랑스에서는 고급 매춘부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동백꽃 여인(La Dame aux Camelias)’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가 된다.

    사실, 소 뒤마는 바람둥이인 대 뒤마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며, 하층민인 어머니를 하찮게 여기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여인들 때문에 어린 나이에 많은 상처를 받은 인물이었다. 그 자신이 바로 타락한 사회와 잘못된 제도로 ‘고통받는 자’였기에 고급 매춘부의 순수하고 맑은 사랑 이야기를 더욱 절실하게 그릴 수 있었다. 이 소설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자 작가는 이 작품을 희곡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그런데 피비린내 나는 현실 정치에 대한 대중의 혐오와 염증 탓인지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리고 파리에서 이 연극을 관람한 베르디 역시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결국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 작품을 신작으로 결정한 후 열정적으로 작업에 들어가 한 달 반 만에 오페라를 완성했다.

    베르디아노가 되살리는 ‘오페라 거장’ 주세페 베르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의 한 장면.`

    그럼에도 ‘라 트라비아타’의 초연에 대한 관객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예상외로 싸늘했다. 첫째는 주인공 역을 맡은 소프라노가 폐병으로 죽게 되는 마당에 너무 뚱뚱한 몸매를 드러냈기 때문이고, 둘째는 당시 베네치아 사람들은 파리 사람 못지않게 문란한 사생활을 즐기고 있었는데 파리 사회의 문란함을 비판하는 이 오페라가 마치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르디는 작품 이미지에 맞게 음악을 손질하고 주역 소프라노를 다시 캐스팅했으며, 작품 배경도 100년 전의 파리로 바꾸어서(성공 후에는 다시 19세기 중반 무렵으로 시대적 배경이 돌아왔다) 베네치아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지 않게 만들었다. 이렇게 바꾸어서 무대에 올리자 이번에는 마치 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울음보를 바늘로 찔러주는 듯한 효과가 나타났다. 전 이탈리아를 휩쓰는 뜨거운 호응의 물결 속에서 베르디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으며, 그의 이름은 음악계를 뛰어넘어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이후 베르디는 제1회 세계만국박람회를 기념해 1855년에 ‘시칠리아의 저녁 기도’란 작품을 파리에서 무대에 올렸다. 오페라 양식에 발레를 삽입한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지만, 1282년 시칠리아에서 프랑스의 지배에 항거해 일어난 대대적인 봉기사건을 소재로 삼은 까닭에 외교적으로 불편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베르디였기에 큰 논란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이어서 베르디는 ‘시몬 보카네그라’ ‘운명의 힘’ ‘가면무도회’ ‘돈 카를로’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서 자신의 오페라 음악을 간결하고 서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음악으로 변모시켰다.

    토리노 하원의원

    1859년 이탈리아 통일운동을 벌이던 사보이아 왕가에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손잡고 오스트리아 세력을 이탈리아 영내에서 몰아내는 전쟁을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프랑스의 협력과 배신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밀라노가 위치한 롬바르디아 지방을 획득하면서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북부를 1차적으로 통일할 수 있었다. 베르디는 작품에서 수많은 전쟁을 그렸지만, 이때 직접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인간의 행위로부터 커다란 충격을 받은 베르디는 자신의 생활방식에 대해서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첫 아내 마르게리타와 장인 바레치에 대한 미안함으로 식을 올리지 않은 채 동거한 스트레포니와 1859년 결혼식을 올렸다.

    베르디는 1861년에는 그의 인지도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토리노의 하원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나, 상징적인 역할을 담당했을 뿐 본격적인 정치활동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1862년에는 첫 공연을 시작하는 러시아의 세인트 페테르부르크 극장을 위해 ‘운명의 힘’을 작곡하고, 1867년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을 위해 실러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돈 카를로스’를 작곡했다. 이후 휴식과 반성의 시간을 가지다가 1871년에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자 축하공연으로 ‘아이다’를 무대에 올려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아이다’는 베르디 오페라의 집대성이라고 할 정도로 그동안 그가 사용한 모든 음악적 표현 양식을 한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다. 성악가의 유려한 가창과 주옥같은 선율을 핵심으로 삼으면서도 ‘개선 행진곡’처럼 화려하고 장중한 음악을 통해 인간 내면에 대한 성찰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는 까닭이다.

    1870년 이탈리아 반도는 드디어 통일됐다. 그렇지만 통일과 함께 베르디에 대한 민심은 바뀌기 시작했다. 통일 전에는 베르디를 통일의 상징으로 삼아 환호하던 사람들이 통일 후에는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되는 이념과 사상에 대해서만 관대했다.

    그가 거주하던 고향 파르마 지방은 일찍부터 ‘프로슈토’라는 소시지와 ‘파르메자노’라는 치즈를 생산하는 낙농업 중심의 소도시였다. 따라서 소수의 대지주와 수많은 소작농으로 이루어진 상하구조로 빈부격차가 컸다. 지리적으로 대도시와 가까워서 소작농들은 빈부격차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고, 당시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은 지식인들은 농촌사회에까지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혁신적 사회주의자와 바그너 음악의 신봉자가 늘어나면서 베르디의 음악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베르디와 그의 음악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사람이 속출하는 현실은 베르디에게는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변화 속에서 베르디는 기존의 번호 오페라 전통에서 벗어나 가장 이탈리아적인 방식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바그너가 날카로운 비판에서 열광적인 지지로 바뀌는 현실에 적응해 독일 오페라의 방향을 제시했던 것처럼. 베르디는 초심으로 돌아가 7년 동안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친 1887년에 마침내 ‘오셀로’를 밀라노 스칼라 극장 무대에 올렸다. 이 오페라를 본 버나드 쇼는 “오셀로는 셰익스피어가 이탈리아 오페라를 위해 쓴 희곡”이라고 말했다. 1893년 80세가 된 베르디는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희극오페라 ‘팔스타프’를 내놓아 세간을 놀라게 했다. ‘아이다’를 공연한 지 22년 후, ‘오셀로’를 공연한 지 6년 후였다. ‘팔스타프’는 ‘오셀로’에 비해 내용적인 면에서 탄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베르디는 ‘오셀로’에서 보여주었던 음악적 연결성, 긴장감, 생명력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웃음을 선사하는 또 다른 재미를 보여주었다.

    1901년 사망한 베르디의 장례식에는 20만명의 인파가 모여 거장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는 조국통일의 염원에 불을 지른, ‘나부코’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창조한 인물들을 통한 베르디의 음악적 외침이 지금도 세계인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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