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직접 나서서 소프트웨어 산업을 지원하는 나라가 있습니까.
“소프트웨어 산업을 정부가 주도하는 좋은 모델이 말레이시아의 슈퍼코리도라는 프로젝트입니다. 마하티르 총리가 이 프로젝트를 구상해서 96년부터 추진했어요. 이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목적은 말레이시아에 ‘멀티미디어 슈퍼코리도’라는 소프트웨어 단지를 만들고 거기에 세계 일류기업들을 유치해서 세계 소프트웨어 생산기지를 만들겠다는 겁니다.”
─소프트웨어 단지만 만들면 세계 일류기업들이 몰려 올까요.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들은 사회적 기반시설이 잘되어 있는 싱가포르나 홍콩에 가든지 이미 소프트웨어 개발단지가 있는 인도에 가면 되지 구태어 말레이시아까지 오겠어요? 그래서 마하티르 총리가 유인정책을 폈어요.
첫째는 말레이시아를 정보화사회의 세계 모델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겁니다. 이를 위해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를 7개 추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플래그십 프로젝트라고 하는데 사이버 학교, 사이버병원, 사이버 정부, 전자상거래, 로봇 자동화공장, 전국민에게 IC카드 보급, 연구소 건립 등 분야로 나뉘어 있습니다.
마하티르 총리는 이처럼 7개 분야의 프로젝트를 만든 후 세계의 기업들을 실리콘 밸리에 모아놓고 ‘내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주겠다. 내가 돈을 내고 실험 장소를 제공하겠으니 여러분이 말레이시아에 와서 7개의 프로젝트를 추진해달라’고 선언한 겁니다. 그러면 당신들은 신기술 개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세계 시장에 팔 수 있는 모델을 만들 수 있다고 한 겁니다. 말레이시아 정부에서는 모든 측면을 고려한 뒤 연구에서부터 프로젝트 발주견양서까지 외국기업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어요. 이 유인책이 성공했어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빌 게이츠가 실리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죠
“제가 빌 게이츠에게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물어봤어요. 그때 빌 게이츠는 ‘우리는 어차피 미래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데 미래에 대한 개발을 위해서 돈 대주고 실험 장소 제공해준다니 얼마나 좋습니까’라고 대답해요.”
─말레이시아가 이웃나라에 비해 세계 일류기업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첫째 요인이 돈과 공간의 무상 제공이었다면 둘째 요인은 무엇입니까.
“말레이시아는 다민족 국가입니다. 인도 사람, 중국 사람, 발리 사람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언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말레이시아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는 영어까지 포함해서 처음부터 4가지 언어로 개발합니다. 그러면 중국어로 개발한 건 중국에다 팔고, 인도어로 개발하는 건 인도에다 팔고, 발리어로 개발한 건 인도네시아에 갖다 팔 수 있어요. 인구가 중국은 13억, 인도는 8억, 인도네시아는 3억이니까 모두 합하면 세계 인구의 절반 아닙니까. 말레이시아에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 그만큼 유리한 것이지요.”
─그러면 셋째 요인은….
“아시아에서 외국 기업을 유치하는 정부가 많지만 말레이시아가 제일 좋은 조건을 제공한 겁니다. 법인세 면제해주고 관세 면제해주고, 이민 자유롭게 하게 해주고, 인터넷 검열하지 않으니 온갖 기업과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마하티르 총리의 정책이 제가 보기에는 현명합니다.”
소프트웨어, 정부가 지원해야
─좋은 조건을 제공하면 반대급부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마하티르 총리는 그런 식으로 외국 기업을 모아가지고 프로젝트를 주면서 조건을 붙였어요. 말레이시아에 진출한 외국기업에 말레이시아 사람들을 쓰라는 겁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기업과 컨소시엄을 만들어라는 겁니다. 소프트웨어는 한 번만 만들어보면 기술이 체화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자동으로 굴러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정부로 봐서는 초기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더라도 장차 돌아오는 효과를 생각하면 굉장한 거죠. 우리도 그 모델로 해야 되는데 그걸 어떻게 개인이 합니까. 삼보컴퓨터가 아무리 애써도 그런 약속은 할 수 없거든요.”
인천 송도에 미디어밸리라는 소프트웨어 단지를 만들었지만 진전을 보지 못한 이회장으로서는 말레이시아의 슈퍼코리도가 상당히 부러운 눈치였다. 이 부러움은 우리 정부에 대해서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시종 차분하게 일관된 톤을 유지하던 이회장의 목소리도 약간 높아졌다.
“장사하는 사람들이야 초기에 집어넣어야 될 돈이 몇조원이면 그걸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그건 정부가 해줘야 됩니다. 정부가 지원해서 한국이 소프트웨어 생산기지가 되면 앞으로 천년간 우리 국민이 잘 먹고 잘 삽니다. 거기에 들어가는 돈은 1조면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에서 돈 쓴 것 보세요. 기아자동차 처리하는데 7조원, 제일은행 파는데 4조원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데….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자기 자리를 걸고 결심해야 하는데 소신이 없으니까 아무도 시작을 하지 않아요. 한국 정보산업의 미래가 밝은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니까 안타깝고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더이상 정부에 기대할 수가 없어 미디어밸리도 만들었습니까.
“그렇죠. 정부에 건의안을 내고 자금 지원을 해달라고 했지만 반응이 없기에 여러 기업에서 각각 7억원씩 걷어서 166억원으로 인천 송도에 주식회사 미디어밸리를 만들었어요. 인천 송도에 하려고 하는데 중앙 정부도 냉담하고 인천시도 관료주의에 젖어 되지도 않는 말만 하고 있어요. 그래서 현재 정체돼 있어요.”
미디어밸리 외에도 이회장이 현재 속타는 문제가 있다. 96년 한국전력의 요청으로 설립한 두루넷이 미국 나스닥에도 상장되는 등 호평을 받고 있는데 케이블망이 부족해 두루넷 이용자들의 불만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한 줄에 가입자가 약 300명만 매달려 있으면 셀을 분할해야 속도가 살아나는데 한전이 케이블을 더 이상 깔아주지 않으니까 한 줄에 1000명이 매달리면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도로수는 적은데 차가 폭주하면 도로를 하나 더 깔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한전이 안 해주는 겁니다. 우리가 깔겠다고 하니까 한전은 자회사인 파워콤이 깔아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겁니다. 이만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두루넷으로 봐서도 손해고 국가적으로 봐서도 손해입니다.”
“비즈니스 모델 성패의 관건”
이회장은 40대 중반에 벤처기업을 시작한 셈이다. 정보통신업계에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한 이회장은 성공한 벤처기업과 실패한 벤처기업의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비즈니스 모델을 얼마나 잘 만드느냐에 성공과 실패가 갈립니다. 지금은 비즈니스 모델만 좋으면 장사를 하지 않고도 빌리언 달러의 회사가 됩니다. 좋은 예가 홍콩에 있는 PCCW라는 회사예요. 리처드 리라는 사람이 사장인데 리 카이싱이라는 홍콩 재벌의 아들이에요. 그 사람이 PCCW라는 회사를 만들어서 비즈니스 모델만 써놓고 주식을 팔았더니 회사의 가치가 300억달러가 됐어요.”
─그 비즈니스 모델이란 것이 특별한 것이었습니까.
“그 모델의 핵심은 중국 본토를 무대로 한 인터넷 회사를 설립하겠다는 아이디어입니다. 주식을 판 돈으로 사회기반 시설이 좋은 홍콩에다가 개발단지를 만드는 거죠.”
─비즈니스 모델만 좋으면 됩니까.
“아이디어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대로 경영을 할 줄 아는 핵심 멤버가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속임수 쓰고 너무 과대한 욕심을 내는 사람들만 모여가지고는 안 됩니다. 경영이라는 걸 알고 제대로 회사를 이끌어가야죠.”
기왕 비즈니스 모델이 나온 김에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에 대한 화제를 꺼내 보았다. 손정의 회장은 이용태회장과 가까울 뿐 아니라 이회장의 차남인 이홍선씨(李洪善·38)가 사장으로 있는 나래이동통신과 합작으로 소프트뱅크코리아란 지주회사를 만들기도 했다.
─손정의씨가 한국의 100대 기업에 투자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벌써 몇 개 기업에 투자도 했습니다만 손정의씨의 이런 행보에 대해 한국의 벤처기업의 자금줄을 독점한다는 우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손정의씨의 영향력이 너무 크기 때문에 손정의 그룹에 들어가는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사이에 이해의 차이가 큽니다. 아무래도 손정의 그룹에 들어가는 기업은 소수이고, 못 들어가는 기업은 다수일 테니까 못들어가거나 못들어갈 것 같은 다수들이 상대적으로 손해본다고 생각하겠죠. 이들 기업들이 다소 과민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손정의씨의 대한 투자가 전혀 우려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까.
“손정의씨도 어디까지나 사업가니까 애국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우리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한국의 벤처비즈니스가 굉장히 좋고 잘 해도 세계 시장에 진출하려면 외국인들의 인식도가 낮아서 남의 주목을 끌지 못하지만 손정의씨 같은 사람이 나서서 소개를 하면 먹혀들어간다는 말이죠.
한국에 진짜로 좋은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면 세계 시장에 나가서 소개하는데 손정의씨의 영향력이 굉장히 큰 이점이 됩니다. 그리고 벤처기업가가 혼자서 기업을 세우는 경우와 손정의 그룹과 같은 영향이 큰 네트워크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손정의씨와 손을 잡으면 상승효과를 일으키고 경쟁력도 키울 수 있죠.”
“손정의씨의 투자 이점 많아”
─그러나 손정의씨도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돈을 벌어가지고 나갈 것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문을 닫아놓고 외부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죠. 그건 시대착오적인 겁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외자를 많이 꿨습니다. 돈을 꿔가지고 사업을 일으킨 것은 애국적 행위고, 외국의 직접 투자를 유치하는 건 매국적 행위라는 건 말이 안됩니다. 외국 사람들한테 돈을 꿔오면 원금에 대한 이자를 반드시 받아갑니다. 외국인이 손정의씨를 믿고 국내의 어떤 회사에 직접 투자를 하지요. 손정의씨가 그 회사를 팔아가지고 일본으로 들고 가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중요한 인터넷 시장이기 때문에 여기에 두고 갈 겁니다. 자기 재산이 증식되면 어느 나라에 두든 만족하는 거지요.”
─국민경제의 측면에서는 손정의씨의 투자가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국내 벤처기업가 중에는 손정의씨가 우리 벤처기업들을 독식해버리면 국내 벤처산업이 손정의 그룹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손정의씨가 전 세계를 무대로 하고 있는데 유독 한국의 벤처기업만 독식하겠어요? 극히 일부일 겁니다. 그러니까 독식한다는 주장은 생트집이죠. 물론 국내 기업이 잘 하고 있는데 손정의씨가 미국 기업을 끌고 들어와서 누를 끼쳤다면 한국 경제가 부분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 있겠죠. 그렇지만 쇄국주의를 고수할 수는 없지 않아요? 이 문제는 어제 오늘 나온 얘기가 아닙니다. 개방했기 때문에 망한 나라는 없고 개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나라는 많습니다. 결국은 개방해야 한다는 것은 IMF사태를 통해서 증명이 된 겁니다. 대통령이 해외를 순방하면서 열심히 자본을 유치하려고 애쓰는데 국내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되겠습니까.”
─손정의씨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92년인가 93년에 국제회의에서 만났어요.”
─그때는 손정의씨가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았을 터인데 잠재력을 본 겁니까?
“그 당시 국제회의에 참석한 아시아 사람들은 몇 명 안됐습니다. 그런데 일본 사람으로서 손이라는 우리 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자연히 친근감을 가지고 대했죠.”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게이츠 회장과도 친분이 있으시죠?
“빌 게이츠 회장은 두루넷의 주주 아닙니까.”
이회장은 빌 게이츠 회장과의 인연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미국의 나스닥에 상장한 두루넷에 빌 게이츠 같은 거물도 투자했다는 것을 은연중 자랑하고 싶은 듯했다.
이용자에게 편안한 환경 제공할 것
이회장도 벤처기업에 투자를 한다. 삼보그룹의 계열사 중에는 TG벤처라는 벤처투자회사가 있는데 여기서 일하는 직원은 20여명밖에 안 되지만 이 회사의 순이익은 수천명이 일하는 삼보컴퓨터보다 더 큰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TG벤처에서 투자하고 있는 회사는 60여개.
“지금까지 TG벤처는 완전히 독립된 벤처캐피탈로 운영했습니다. 삼보컴퓨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수한 독립회사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삼보그룹이라는 네트워크가 있으니까 덕을 볼 것 아닙니까. 가능하면 인터넷에 집중투자를 해서 시너지 효과를 살려서 덕을 보려고 합니다.”
─삼보컴퓨터는 제조업체로 출발해서 인터넷 정보통신 종합 업체로 발돋움했는데 경영전략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극히 간단합니다. 인터넷 이용자가 우리가 만든 네트워크에 가입을 해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아주 편하게 얻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현재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은 1주일에 1시간정도 인터넷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인터넷을 하루에 12시간은 사용할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휴대폰, 텔레비전, 냉장고, 오븐 등 생활 필수품이 모두 인터넷에 연결되니까 하루에 12시간 이상 인터넷을 이용하게 됩니다. 결국 하루의 절반은 현실에 살면서 나머지 절반은 사이버 월드에서 살게 되는 거죠. 사이버 월드에서는 우리한테 오면 가장 편리한 환경을 제공해주겠습니다.”
─컴퓨터를 만든다는 것은 간단한 조립 수준에 불과한데 앞으로 이 사업을 계속 밀고 나갈 생각입니까.
“PC 생산 자체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연간 700만대를 공급한다고 하면 700만대가 전부 인터넷에 연결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인터넷 사업자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컴퓨터 하드웨어를 만든다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삼보컴퓨터의 사용자를 늘려 인터넷 사업을 할 수 있다면 나중에는 컴퓨터를 무상으로 줄 수도 있겠습니다.
“광고를 받는다든지, 상품을 어느 정도 사준다든지, 유용한 정보를 창출한다든지 그렇게 한다면 컴퓨터뿐만 아니라 인터넷까지도 공짜로 쓸 수 있는 시대가 올 겁니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