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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대체의학 연구에 몸바친 ‘운동권 의사’ 전홍준

“인간의 탐욕과 잘못된 생활양식이 난치병 주범”

  • 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대체의학 연구에 몸바친 ‘운동권 의사’ 전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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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4·19가 났어요. 그후 민족통일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형성됐죠. 어린 저도 형의 영향을 받아 민족통일을 절실한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5·16이 났어요. 형은 학교에서 퇴학을 맞았죠. 저는 형편이 어려운 지방 학생들이 많이 지원한다는 서울의 철도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하지만 광주에서 이미 의식화된 저는 학교 공부보다 정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대학생 선배들이 지도하는 교육을 받았을 정도였죠.”

-사회운동을 하다가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저는 사회적으로 꽤 조숙했어요. 10대 때부터 억압된 사회구조를 변혁해서 민중이 주인 되는 시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경기고에 다니던 조영래(변호사)군과도 고교생 연합시위에서 만나 평생 동지로 지내게 되었지요. 고교시절에는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SOFA)을 개정하는 운동을 폈어요. 물론 서울대 문리대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서였죠. 그때가 1962년의 일입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과격한 급진주의자였어요. 굴욕적 한미행정협정 반대, 나중에는 월남 파병 반대 운동을 펼쳐 고교생으로는 최초로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갔지요. 석방된 후에는 육사를 가려고 했는데, 그 이유가 좀 남달랐죠. 당시 저는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흠모했어요. 쿠데타를 일으켜 진보적 정권을 세운 인물이지요. 저도 군인이 돼 나세르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진보적 민주정권을 세우고 통일을 달성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저의 학생운동 경력은 육사 지원 자체를 불가능하게 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1967년 전남대에 진학한 후 월남 파병 반대운동을 계속하고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주도했다. 당시 그는 데모를 하기 위해 학교를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베트남 사지에서 양키의 총알받이가 될 수 없다. 한일 매국 협정 주범은 바로 미국이다”라는 성명을 낸 후 구속돼 실형을 선고받고 제적됐다. 1학년 때였다. 그후 반정부 지하결사에 참여하다가 다시 체포돼 목포와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리고 고법 항소심에서 심상찮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

“운명이란 것이 묘합니다. 항소심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데 재판장이 유심히 저를 살피더니 집행유예로 석방을 해주는 거예요. 김용근 부장판사님이었는데, 이미 정보부로부터 중형 지시를 받았으면서도 저를 집행유예로 풀어주셨죠. 그런데 판사님이 훗날 제 아내 된 사람의 고모부님이셨어요. 제 결혼식날 다시 뵈었는데 그분도 놀라시더군요. 그때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은 나중의 인연을 대비해 어떤 힘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석방되고 나서 얼마 후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전남대 의대에 재학중이던 동생이 전남 신안군 도서지역 의료봉사에 나섰다가 쓰러진 것. 그는 견딜 수 없는 자책감과 좌절감에 빠졌다. 동생은 광주일고 재학 당시 형의 영향을 받아 학생시위에 가담하다 담벼락에서 떨어져 뇌를 다쳤는데 그 후유증으로 갑자기 사망했던 것이다.

전씨는 동생의 길을 대신 가기로 마음먹고 도서관을 찾았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가지 않으면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공부에 매달렸다. 이듬해인 1971년 그는 조선대 의과대에 지원, 전체 수석합격을 차지했다. 다른 학교도 진학할 수 있었지만 시위 가담 전력으로 정치학생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그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진학이 용이한 지방대학 쪽으로 선회했던 것. 그러나 정보부가 제동을 걸었다. 학교에서는 감옥을 드나들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에 연루된 학생을 받아도 되는가를 두고 연일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수석’이라는 것이 신문에 보도된 마당에 입학을 취소시키면 더욱 큰 문제를 부르리라는 판단에 따라 그의 입학은 어렵사리 허용됐다.

-다시 들어간 대학에서는 데모와 거리를 뒀나요. 시대적으로는 박정희 폭압 정권이 유신을 비롯해 강권 통치를 강화하던 시기였는데요.

“노회해졌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데모와 완전히 거리를 둔 것은 아닙니다. 민청학련 사건도 저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지학순 주교님, 김지하, 여영남, 조영래, 이철, 유인태, 원혜영 등과 연대해 광주에서 주로 활동했죠. 저는 조영래와의 연락책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지역에서 3선 개헌반대, 교련 반대 시위를 저희가 주도했죠. 또 조씨가 도피생활을 하면서 전태일 평전을 쓰는 공간도 제가 확보했습니다.”

그의 지나온 삶의 궤적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 싶어 다른 질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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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계홍 언론인·용인대 겸임교수 khlee194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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