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호

골프와 복싱의 공통점? 장갑 끌러봐야 결과를 안다는 것

골프와 복싱, 그리고 인생

  • 홍수환 전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입력2006-10-13 11:1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골프와 복싱, 어느쪽이 더 어렵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 대답에 왕년의 챔프 홍수환은 역시 골프가 어렵다고 말한다. 복싱은 움직이는 상대방을 때려 눕혀야 하고 골프는 얌전히 앉아 자 신을 힘차게 때려 달라고 하는데도 더 어렵다고 한다. 복싱글러브를 벗고 이제는 골프마니아가 된 홍수환이 들려주는 골프이야기. 》
    나는 골프를 정말로, 진정으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 내가 처음으로 골프채를 잡은 것은 79년이다. 권투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한강 변에 있는 조그만 연습장에서 골프채를 휘둘렀다. 그땐 젊어서 그런지 ‘골프도 운동인가’ 하는 의아심이 있었다. 한 타 치고 걷는 것 이무슨 운동인가 하며 정성 들여 배우지도 않고 그저 골프채를 휘둘렀을 뿐이다.

    그러던 중 나는 이민길에 올랐고 미국 그리피스 파크에서 9년 만에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그러니까 사실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 은 88년이라고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마침 미국으로 여행온 한 선배와 함께 골프장에서 농구화를 신고 라운드를 했었다. 그때는 골프 채도 없어서 친구 장인의 골프채를 빌려 골프장에 나섰다. 그나마 몇개 아이언은 빠져 있었으니 라운드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챔피언 골프가 왜 그래”

    그리피스 파크에서의 첫 라운드에서 지금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황소꼬리로 파리를 잡듯 첫 홀, 첫 드라이버 샷만 멋지게 멀리 날렸 을뿐 그 이후로는 시종 언덕으로 산으로 숲으로 뛰어다닌 기억 뿐이다. 그리고 나서 내게 넌지시 건넨 선배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챔피언이골프를그렇게 치면 되나.” 묻는 것도 아니고 격려도 아니고 실망했다는 투였다. 그날 당한 창피함이 약이 됐는지 난 골 프 연습에 몰두했다.

    그렇게 골프에 푹 빠져 있을 즈음 우연히 미국 LA에서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왕년의 ‘챔프’였던 김기수 선배를 만났다. 그리고 김선 배를만나 그동안 갈고 닦은 골프솜씨를 마음껏 뽐냈다. 내가 권투를 시작한 것도 김기수 선배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66년 당시 니 노벤베누티를 이기고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오른 김기수 선배의 시청 앞 카 퍼레이드를 보고 권투를 꼭 하겠다 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74년아놀드 테일러와 세계 밴텀급 선수권 시합 때 나는 방송국 앞 빵집에서 김기수선배의 맏딸을 보았다. 그 학생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홍수환 아저씨죠? 우리 아빠가 김기수예요.” 이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몹시도 기뻤다. 챔피언이 된다는 징조라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챔피언 쟁탈전 전에 챔피언 딸을 만나다니 우연이라도 기뻤던것이다. 학창시절 참고서를 청계천 책방에 팔아서 그 돈으로 권투선수 김기수 시합을 보러 다니던 나에게 하늘에서도 무언가 보답을 해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각설하고, 이럭저럭 구력 12년에 핸디 12이다. 나는 골프에 우선 감사한다. 다혈질인 나를 침착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술을 먹고 싶어도 다음날 새벽의 골프 티타임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었다.

    많은사람들과 골프를 쳤지만 누구나 예외없이 한번씩 물어오는 질문이 있다. “권투가 힘듭니까, 골프가 힘듭니까”

    그러면 내 대답은 항상 “골프가 힘듭니다”다. 왜냐하면 권투는 찬스를 잡았다 싶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상대방을 때려 눕히면 되고 설령 눈을 감고 때려도 상대가 맞아 주면 끝난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50여 차례의 프로시합 중에서 내가 상대방을 똑바로 보고 때려 눕힌 것은 카라스키야 뿐이었다. 로프에 기대 넘어지고 싶어도 못 넘어지고 있을 때 상대의 턱이 호박처럼 크게 보였다. 이렇듯 권투 란 꾸준한 연습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을 때리다 보면 이기는것이다. 하지만 골프는 그렇지 않다. 아무리 타이거 우즈라 해도 눈 감고는 못칠 것이다.

    골프를 통해 배우는 인생

    움직이지 않는 공을 치는데도 골프란 참으로 어려운 운동이다. 우드로 치건 아이언으로 치건 퍼터로 치건 결국 골퍼는 공을 때리고 공 은 맞는다. 골프공은 완전히 마음을 비우고 때리는 대로 가겠다고 하얗고 동그랗게 앉아 있는데 많은 골퍼들은 그 공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보내지 못한다. 마음을 비운 것은 공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가보다.

    그런 골프가 나에게 준 교훈은 참으로 많다. 나는 지금까지 94년과 95년, 2차례 홀인원을 기록했다. 사용한 아이언은 벤 호겐 6번이다. 어떻게했기에 홀인원했지 생각하면 그저 스윙이 깔끔했고 특히 마무리동작 때 균형이 잘 맞았던 것 같다. 비유하면 기차 타고 서울 을 출발해 대전에서 멈추지 않고 종착역인 부산까지 단숨에 도착한 것 같이 말끔했다.

    골프를 통해 사람도 알고 인생도 배운다. 육사 CC에서였다. 마지막 홀에서 티샷을 했다. 세 사람 다 오른쪽 벙커를 넘은 티샷이었는데 약간 내리막이었고 나무가 있었다. 두 번째 샷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런데 한 명이 공을 잘못 쳐 오른쪽 벙커에 떨어지는 바람에 회생 기회가 없어 보였다. 프로가 치더라도 쉽지 않을 위기의 순간이었다. 다른 일행은 투온에 성공했고 나는 9번 아이언으로 쳐서 60㎝ 정도 붙였으나 내리막이었다.

    드디어 걱정하던 그 사람이 샷을 날렸는데 공이 러프에서 빠져나와 그린 위를 구르더니 홀컵에 빨려들어가는 것 아닌가. 기적적인 버디 였다. 그 사람의 기사회생을 보면서 난 나의 권투시합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해내고 마는 승부사 기질을 그 에게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듯 골프는 나의 인생에서 포기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스포츠인가? 이제까지 좋은 성적을 냈던 날을 생각해 보면 골프장 도착 때까지 서둘러 간 적도 없고 급제동을 건 적도 없었다. 라운드시작 30분 전에 골프장에 도착해 컨디션을 점검했고 동료 중 한 사람도 늦지 않아 기다린 적도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였다. 이렇듯 골프는 내 인생에 미리미리 준비하라는 것도 가르쳐 준다. 이래서 골프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은 함께 골프를 치는 동료가 최적의 조건에서 골프를 칠 수 있게 도와주는 일인 셈이다. 이렇 듯 좋은 하루를 선물할 수 있는 것도 골프다.

    마지막홀 18홀에서 서로 악수하며 “운동 잘 했습니다”할 때 나는 골프를 쳤기에 이런 신선함도 느낄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나는 권투선수 시절에는 몇 회라고 쓰여 있는 라운드 판을 절대로 보지 않았다. 그저 종소리 나면 열심히 뛰었다. 만약 그 종소리가 마지막 라운드를 알리는 종소리라면 아나운서가 발표를 할 것 아닌가. 만약 내가 라운드판을 본다면 ‘앞으로 몇회전을 더 뛰어야 하는구나’ 하 는 생각이 나를 더 지치게 하고 더 못 뛰게 만드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골프도 라운딩 때 각 홀에 집중하여 진행한다면 좋은 스코어는 물론이고 집중력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골프는 바로 인생 자체다

    골프 매력은 더 있다. 나는 가끔 골프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사치 스포츠요?”라고. 나는 고급 스포츠라고 말하고 싶다. 같 은 스포츠라도 인생과 비교가 될 수 있다면 이것은 고급 스포츠다.

    나는 고급과 사치를 그리고 소비와 낭비를 구별하고 싶다. 골프는 더이상 사치 스포츠가 아니다. 몇몇 그런 느낌을 주는 골퍼도 있겠 지만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세리 김미현이 활약하고 박지은도 세계 정상을 노리고 있는 이 시점에 자랑스러운 골프를 놓 고 무슨 이야기인가?

    권투가 아무도 우리 한국을 몰랐을 때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린 효자 스포츠라면 골프는 한국의 국위를 선양한 애국 스포츠다. 맨발로 물 에 들어가 절체 절명의 위기를 극복하며 US 오픈을 우승으로 이끄는 박세리를 보고 나는 거의 울다시피 했다. 연장전 첫 홀에서 버디를 내주면서도 끝에서 이기는 박세리의 용기를 우리 국민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세리처럼 발벗고 나서 보자! 불가능이 어디 있겠는가? 카라스키야가 나를 4번이나 링위에 눕혔을 때 어쩌면 그는 3회전은 슬슬하자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만약 박세리와 맞붙었던 선수가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진지하게 시합에 임했다면 박세리가 극적으로 우승하기는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물웅덩이에 볼을 빠뜨린 박세리를 비웃지만 않았어도 아마추어로서 US 오픈 우승이라는 신화를 일궈냈을 것이지 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이래서 나는 골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권투와 똑같이 장갑을 끌러봐야 결과를 알수 있기 때문이다. 카라스키야가 방심하지 말고 나를 눕혔다면 한 세대를 풍미할 수 있는 챔피언이 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끝으로 우리 박세리가 어떻게 챔피언을 먹었나 항상 기억하자. 그래야 나도, 우리도 인생에서 이길 수 있다. 내가 내 아들에게 남길 수 있는 말은 “진짜 무서운 권투는 인생이다”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 는다. 나는 골프는 바로 인생 자체라고 생각한다. 내가 골프를 그토록 사랑하듯이 나는 내 인생도 그토록 사랑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