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월호

공포의 ‘동향보고’ 관료들이 떨고 있다

‘막강파워’ 국정원 경제단

  • 신동아 특별취재팀

    입력2004-11-05 13: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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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른바 ‘3대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국정원 경제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간부들의 잇딴 비리의혹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국정원 경제단. 그 실체를 파헤쳤다.
    2001년 9월11일 미국 뉴욕에서 테러사태가 터진 직후 국가정보원 경제단 경제1과 거시경제팀에는 비상이 걸렸다. 뉴욕사태를 계기로 국정원이 국내에서 테러가 발발할 가능성과 대비 태세를 점검하기 위해 머리를 싸맨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테러와 직접 관련이 없는 경제1과에 비상이 걸린 것은 뜻밖이다.

    이는 거시경제팀이 2001년 9월 초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경제 활성화 방안’이라는 보고서에서 비롯됐다. 당시 우리 경제는 ‘도대체 경기 바닥이 언제냐’는 논란이 일 만큼 추락을 거듭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보고서는 나름대로 시의적절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 주례보고 때 신건 국정원장이 이 보고서를 가지고 가지 않으면서 사단이 생겼다. 이런 경우 국정원은 보고서를 폐기처분하지 않고 보관하면서 그때그때 업데이트한다. 원장이 언제든 대통령에게 보고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것이다. ‘경제 활성화 방안’ 보고서도 이런 운명에 처했는데, 공교롭게도 이때 9·11 테러가 터진 것이다.

    9·11 테러는 그렇지 않아도 침체한 미국 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다보니 경제상황도 ‘경제 활성화 방안’ 작성 당시와는 천양지판이 됐고, 거시경제팀 직원들은 이를 감안해 새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휴일에도 출근하는 등 초비상이 걸렸다.

    국정원 경제단의 기능과 역할 등을 어느 정도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 국정원 대공정책실 산하 경제단은 국내 경제정보를 총괄, 국정원 정보보고의 ‘유일한 독자’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보고를 올리는 곳이다. 경제단 외근 직원(IO·Intelligence Officer)들은 과천 경제부처와 정부 산하 공기업 및 산하단체, 금융권, 대기업, 벤처기업 등을 출입하면서 정보를 수집한다.



    경제부처 등 출입하며 정보수집

    경제단은 대공정책실의 다른 단과 마찬가지로 2급인 단장 밑에 1, 2, 3, 4과로 구성돼 있다. 과장은 통상 3급으로 보임한다. 1과는 2, 3, 4과에서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분석과, 2, 3, 4과는 통상 ‘경제1, 2, 3과’로 불린다. 경제1과는 경제부처 가운데 재정·금융, 경제2과는 건설교통 및 정보통신, 3과는 농림 등을 맡는다.

    경제단은 신문사 경제부와 기능 및 시스템이 비슷하다. 출입처도 겹치고, 경제부처를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같다. 신문사 편집부의 경제담당 편집자가 경제부에서 출고한 기사를 비중에 따라 분류하듯, 경제단 분석과도 2, 3, 4과에서 수집한 정보를 취합·분류하고 보충 ‘취재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과거 안기부 시절 분석과는 101실(기획판단실) 소속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개혁 차원에서 부서를 통폐합하면서 101실과 102실(대공정보실)을 대공정책실로 통합했고, 천용택 원장 시절에는 내부기능을 조정하면서 분석과를 각 단 산하로 흩어놓았다. 정치·경제·사회 등 각 영역별로 수집과 분석파트를 한데 묶은 단을 만들어 효율적인 정보 수집 및 분석을 가능케 하기 위함이었다.

    경제단 IO는 석간신문 경제부 기자들과 활동패턴이 비슷하다. 석간신문 기자는 아침 일찍 출근해 주로 그 전날 오후에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해 출고한다. 경제단 IO들의 일과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자는 기사거리가 없을 때 기사를 쓰지 않아도 되지만, 경제단 IO는 다른 단의 IO와 마찬가지로 반드시 하루에 2건 이상의 ‘기사’를 써야 한다는 점.

    출입처가 겹치다보니 경제부 기자들과 경제단 IO들은 서로 ‘필요’에 따라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한 중앙지 경제부 기자는 “같은 부처를 출입하는 국정원 IO가 인사를 건네면서 ‘특종기사를 쓰는 경우 미리 귀띔 좀 해달라’고 부탁하더라”면서 “IO들은 신문에 나온 내용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면 내부에서 엄청 ‘깨진다’고 들었다”고 했다.

    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서, 신건 원장이 왜 처음 작성된 ‘경제 활성화 방안’ 보고서를 청와대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엇갈린다. 다른 보고서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신원장이 경제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게 국정원 소식통의 전언.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원장의 주례보고를 받으면서 궁금한 내용이 있으면 즉시 질문을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검찰 출신인 신원장은 특히 경제분야에서 말문이 막힐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경제관련 정보는 보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 때문에 ‘유효기간’이 지난 보고서들을 일일이 업데이트해야 하는 경제단 직원들은 업무 강도가 점점 더 세질 수밖에 없다.”

    ‘동향보고’의 힘

    경제단 IO들은 경제부처나 정부 산하기관 등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국정원 IO들이 쓰는 보고서의 최종 독자가 최고 통치권자이기 때문이다. 특히 3급 이상의 고위 공직자들은 이들이 올리는 동향 보고가 공직 인사에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O들이 올린 고위 공직자들의 동향 보고는 청와대 민정수석실로 직보된다. 이 가운데 범법혐의가 있으면 민정수석실 사정비서관 책임하에 경중을 가려 검찰에 이첩하거나 해당 부처에 통보, 인사 자료로 삼도록 한다. 가벼운 비위나 나중에 인사 자료로 참고할 만한 내용은 공직기강비서관실이 관리하는 존안파일에 기록된다.

    존안파일이야말로 고위 공직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대상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고위 관계자도 “민정수석실에 힘이 있는 이유로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존안파일을 관리하는 공직기강비서관이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고위 공직자들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 파일에 기록된 내용 때문에 인사에서 번번이 좌절을 맛보는 경우도 있다.

    1998년 정권교체 후 모 공기업 감사로 옮겨간 전 감사원 감사관 C모씨의 사례가 대표적인 경우. C씨는 자녀를 결혼시킬 때 절친한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에게 청첩장을 보낸 게 화근이 됐다. 당시 이 공무원의 방에 우연히 들렀던 국정원 IO가 “감사원 감사관이 담당 부처에 결혼 청첩장을 뿌려 ‘관폐’를 끼친다”고 보고를 올린 게 존안파일에 기록돼 승진에서 누락됐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에 입각했던 학자 출신의 모 부처 장관은 재임기간 중 끊임없는 루머와 투서에 시달리다 단명으로 끝났다. 결재도 미룬 채 외부 강연에만 열중하고, 조직 장악력이 없다는 게 주 내용이었는데, 이 장관 측근들은 이것이 국정원 등을 통해 청와대까지 보고된 것으로 파악했다.

    경제부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정원 IO들의 ‘힘의 원천’은 동향 보고만이 아니다. IO는 해당 부처 장관과 언제라도 독대할 수 있기 때문에 관료들로서는 IO가 자신들의 인사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IO에게 힘이 있으니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정보가 모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부처나 정부 산하기관과는 달리 재벌기업은 경제단 IO들도 ‘취재’하기 힘든 곳이라고 한다. 한 관계자의 설명.

    “재벌기업 임원들은 총수에게만 잘 보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정보를 얻기가 힘들다. 물론 기자들보다는 쉽지만….”

    그렇다고 재벌이 경제단 IO를 무시할 수는 없다. 과거 관치경제시대의 기억 때문인지, 권력기관에 잘못 보이면 손해라는 피해의식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재벌그룹에서도 국정원 경제단에 발이 넓은 사람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LG스포츠단 정학모 사장이 그런 경우라고 할 만하다. LG그룹 고위 임원의 귀띔이다.

    “현 정부 초기 LG그룹과 관련된 ‘이상한’ 정보를 국정원 경제단이 포착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LG측은 이를 해명하려고 해도 마땅한 방법이나 줄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누군가가 ‘정학모 사장이 경제단 간부들을 잘 안다’고 알려줬다. 부랴부랴 정사장을 수배했더니 그는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전화로 사정을 설명했는데, 10분도 안돼서 전화가 왔다. ‘잘 처리됐으니 염려말라’는 기분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경제단이 올리는 정보는 얼마나 정확할까. 국정원 정보는 대통령에게 올리는 ‘특상 보고’도 있지만 경제단의 일상적인 정책보고는 청와대 경제수석실에도 배포된다. 따라서 경제수석실 관계자 등 고위 경제관료를 통해서 검증할 수밖에 없다. 아쉬운 점은 이 때문에 취재원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

    하지만 때로는 국정원이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청와대 경제수석실이나 관료들을 흔들어대는 과정에서 정보 내용이 새나가기도 한다. 2000년 말 정보통신부가 IMT-2000 사업자를 선정하면서 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동기식 사업자 한 곳을 선정하려 할 때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났다.

    IMT-2000 사업자 선정을 앞둔 2000년 11월 중순 무렵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가 국정원 경제단 고위 관계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대뜸 정통부를 물고 늘어졌다.

    “정보통신부가 동기식 사업자 선정을 고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비동기식이 세계 표준이 될 가능성이 높고, 업계에서도 모두 비동기식을 희망하는데 정부가 동기식 사업자 선정을 관철하려는 것은 문제 아닙니까.”

    “그것은 정부의 정책적인 판단사항입니다. 정통부에서 충분히 검토한 후 추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정원 관계자는 물러서지 않고, 대통령의 뜻을 거론했다.

    “국정원에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대통령은 동기식 사업자를 꼭 선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화를 끊은 경제수석실 관계자는 곧장 이기호 경제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대책 마련을 건의했다. 정부에서 나름대로 검토한 후 추진하는 정책에 대해 국정원이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문제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한만 행사하려는 국정원의 행태가 드러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수석님, 임동원 국정원장에게 직접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국정원 실무자들이 정통부를 너무 흔드는 것 같습니다.”

    이수석은 그 자리에서 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동기식 사업자 선정과 관련한 경위를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IMT-2000 공방전

    정부가 당시 ‘업계의 반발이 크고 사업성이 없다’는 일각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동기식 IMT-2000 사업자를 선정하려 한 것은 동기식이 CDMA 기술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CDMA 기술을 상용화한 CDMA 강국인데다, 향후 CDMA 시장이 미국, 중국 등지로 확산할 전망이어서 수출에도 유리하다고 판단, 동기식 사업자 육성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정통부의 이런 의지는 결과적으로 세계 최대의 CDMA 장비 사업자인 삼성전자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도 사실. 이 때문에 당시 비동기식에 관심을 가진 일부 통신서비스 업체 관계자들은 “삼성이 중국 진출을 앞두고는 있지만 중국 시장이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인데도 정부가 CDMA 기술만 지나치게 보호한다”며 정통부 간부들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국정원 관계자가 청와대 관계자에게 전화를 한 것도 업계의 이런 정서에 기울어진 국정원 실무자들의 정보보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국정원 경제단 직원이 GSM 방식의 외국 이동통신 장비업체에 스카우트된 것으로 안다”면서 이 직원이 국정원 경제단 여론을 비동기식쪽으로 돌린 것으로 보았다.

    국정원은 2001년 3월 타계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건강과 관련한 정보에서도 정확성을 보이지 못했다는 게 현대측의 평가다. 정 명예회장의 건강이상설은 2000년 하반기부터 정 명예회장이 입원을 반복하면서 ‘한 달을 넘기기 어렵다’는 등으로 증폭됐는데, 현대측은 국정원이 이 정보를 언론에 흘린 것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정주영씨 건강문제도 예의주시

    정 명예회장의 건강문제는 비단 현대뿐 아니라 우리 경제에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사안이었다. ‘왕회장 이후’의 후계 구도가 그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가 타계하면 현대그룹 전체가 큰 혼란에 휩싸일 수 있는 것은 물론, 정 명예회장이 직접 챙겨왔던 대북사업에도 차질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국정원도 이런 점 때문에 정 명예회장의 건강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국정원 관계자는 “그의 건강문제는 국정원에서도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보고서를 남기지 않고 구두로 보고한 것으로 안다”며 “그렇게 보안에 신경을 썼는데, 우리가 정 명예회장의 건강이상설을 증폭시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박했다.

    국정원 경제단 간부들이 ‘정현준·진승현·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됐거나 연루 의혹을 받는 것은 경제단의 파워를 남용하거나 잘못 사용한 결과다. 이들 게이트의 주역들은 국정원 경제단이 경제관료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이용하기 위해 경제단 간부들에게 접근했고, 경제단 간부들은 이들의 검은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경제단은 현 정부 초기부터 말이 많았다. 초기 경제단장을 맡았던 김모씨는 모 업체에 정보를 유출한 혐의가 감찰실에 포착돼 대기발령을 받았다. 단장급 간부가 감찰실 감찰로 불명예퇴진한 것은 이례적이다. 정현준 게이트와 관련돼 구속된 이경자 동방금고 부회장에게서 55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김형윤 전 단장은 경제단장으로서는 현 정부 들어 두번째로 불명예 퇴진한 경우.

    김형윤씨는 자신의 광주상고 후배인 G&G그룹 이용호 회장에게 전남 진도의 보물선사업을 소개했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용호씨는 보물선사업을 삼애인더스 주가조작 소재로 이용했다. 보물선 사업은 애초 국정원에서 관심을 갖고 추진하다 포기한 것. 김형윤씨는 이에 대해 “보물선사업은 고(故) 엄익준 전 2차장이 직접 목포분소에 지시해 추진한 사업이기 때문에 나는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있다.

    2001년 12월1일에는 정성홍 전 경제2과장이 MCI코리아 대주주 진승현씨로부터 1억4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정씨는 2000년 6월 김형윤씨가 경제단장으로 승진하면서 김씨에 이어 경제2과장으로 승진한 인물. 두 사람은 같은 전남 해남 출신에 중앙대 선후배 사이지만 사이가 극히 나빴다. “정씨가 김씨 앞에서는 깍듯이 모시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김씨를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했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의 전언.

    국내 정보를 총괄했던 김은성 전 2차장까지 ‘진승현 게이트’ 관련 의혹에 연루되자 한나라당은 “3대 게이트는 한 몸통에서 나온 일란성 세 쌍둥이”라고 주장했다. 3대 게이트의 몸통은 국정원이라면서 ‘국정원 게이트’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은 더 나아가 국정원이 벤처 붐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비자금을 조성, 여당의 정치자금 조달을 맡아온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의혹은 정성홍 전 경제과장이 2000년 4월 총선 직전 진승현씨를 데리고 민주당 김홍일 의원 지역구를 찾아가 선거자금 제공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됐다. 그러나 검찰의 ‘진승현 게이트’ 재수사 등을 봐도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국정원 게이트’가 되려면 김은성 전 2차장을 정점으로 김형윤 전 단장, 정성홍 전 과장 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어야 한다. 그런데 정씨는 김은성 2차장의 신임을 믿고 김형윤씨를 찍어내려 했다. 이것만 봐도 ‘국정원 게이트’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개인 비리로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의혹 제기에 대해 ‘지극히 한나라당적인 발상’이라고 반격한다. 과거 한나라당이 여당 시절 국정원을 이용해 선거자금을 조달한 적이 있기 때문에 민주당도 그럴 것이라는 비난은 어불성설이라는 얘기다.

    과거 안기부 때 경제단이 대선이나 총선에서 선거자금 조성에 개입한 사실이 밝혀진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서다. 2000년 4월부터 대검 중수부가 프랑스 알스톰사의 고속철도 차량 선정 로비 의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안기부 자금이 정치권에 유입된 혐의가 포착됐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안기부의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기조실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안기부 경제단이 조직적으로 대선 자금 모금에 협조한 사실이 드러난 것은 1996년 총선과 1997년 대통령선거 때다. 1997년 대선의 경우 당시 한나라당 김태호 사무총장의 부탁을 받은 권영해 안기부장의 지시로 원구연 경제단장이 한국통신과 한국중공업 임원들에게 한나라당에 대선 자금을 전달하도록 한 사실이 밝혀졌다.

    힘얻는 국정원 쇄신론

    당시 한국통신 임원 2명은 원단장의 압력을 받고 자신들의 명의로 각각 5000만원의 신용대출을 받아 1억원을 한나라당에 전달한 후 기밀비와 업무추진비 등으로 갚아오다 들통나기도 했다. 당시 박운서 한국중공업 사장은 임원들로 하여금 한국중공업 하청업체 4곳에서 각각 5000만원씩 2억원을 조달해 한나라당 경남도지부에 전달했다.

    1996년 총선 때도 안기부가 선거자금 조성에 개입한 사실이 포착됐다. 정권교체 직후 기아그룹 전 회장 김선홍씨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김씨가 기아그룹 계열사 사장 출신으로 당시 여당 후보로 나선 이신행씨에게 18억원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진 것. 김씨는 검찰에서 “기아그룹을 담당하는 안기부 경제단 직원의 협조 요청을 거부하자 나중에는 오정소 차장이 직접 선거자금 제공을 종용했다”고 진술했다.

    이와 관련, 흥미를 끄는 대목은 김영삼 정권의 안기부 시절 오정소 당시 차장의 핵심 측근 역할을 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정성홍씨라는 점이다(정씨는 이런 이유 때문에 정권교체 이후 호남 출신으로는 이례적으로 대기발령을 받았다).

    이런 점에서 정씨가 2000년 4월 총선 당시 진승현씨를 데리고 김홍일 의원을 찾아간 것도 오정소씨에게 배운 수법을 그대로 재현한 게 아니냐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진승현 게이트’를 재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현재 김은성 전 2차장에 대한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는 듯하다. 검찰 주변에서는 김 전 차장의 ‘오른팔’ 노릇을 했던 정성홍씨가 구속됨으로써 김 전 차장의 ‘진승현 게이트’ 관련 혐의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검찰도 이번에는 철저한 수사를 다짐하고 있어 수사결과를 지켜봐야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경제단 간부들이 각종 게이트에 관련됨으로써 국정원 쇄신론이 그 어느 때보다 힘을 얻어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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