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관대첩비’탁본을 펼쳐놓고 감회에 젖은 초산 스님.
임진왜란이 끝난 지 111년 후(1709년) 숙종은 의병장 정문부 등이 관북지방에서 일본군을 8차례나 격퇴시킨 공을 기려 함경북도 길주(현재 김책시)에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높이 187cm, 너비 66cm의 이 비석에 새겨진 1500자는 당시 의병들의 활약상을 세세히 전한다.
이 대첩비는 현재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도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자신들의 패전 기록인 이 비석을 수치로 여겨 일본으로 옮겨갔다. 그 후 1969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에 의해 발견될 때까지 북관대첩비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이 비석의 존재가 알려지자 한국 정부와 관련 단체, 해주정씨 종친회 등 후손들이 반환운동을 펼쳤으나 야스쿠니측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 채 30여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현재 북관대첩비 위에 갓처럼 씌워진 큰 돌은 마치 호국영령의 기상을 제압하려는 듯 탑신을 짓누르고 있다. 이것도 모자라 야스쿠니는 4년 전 비석을 어둠침침한 숲 속으로 옮기고 높은 철책을 둘러쳤다. 이렇게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서 북관대첩비는 100년 세월의 풍화에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
1996년 비문의 탁본을 뜬 일본의 원로서예가 요코 세이자부로씨는 “탁본을 하면서 비석이 진동하며 우는 것을 느꼈다”며 “하루 빨리 한국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 탁본은 일한불교복지협회 회장인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74) 스님에게 전달됐다가 2000년 반환운동을 함께 펼치는 징표로 초산 스님(76·한일불교복지협회 회장)에게 건네졌다. 아산 독립기념관에는 이 탁본의 사본이 전시돼 있다.
[장면 ②] 노스님의 결심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 한·일간 해결하지 못한 3대 과제로 ‘임진왜란, 한일합방, 재일본 한국인 처우문제’가 거론되자 일본 천태종(일본불교의 중심 종단)의 고승인 가키누마 스님은 이렇게 결심한다. ‘내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재일본 한국인 처우문제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대신 승려로서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에 관해서는 뭔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가키누마 스님의 머릿속에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돼 있는 북관대첩비가 떠올랐다. 전쟁의 원혼을 위로하고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를 원래 있던 자리로 돌려놓는 일이라면 승려의 본분에 맞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미 가키누마 스님은 1989년 한국 불교계로부터 ‘귀무덤’의 한국 봉환사업을 지원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한불교복지협회를 설립한 바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승리의 증거로 조선인 전사자의 귀와 코를 잘라갔다. 그 중에서도 귀무덤은 400년 동안 교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무덤 앞에서 치욕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양국 불교계의 노력으로 1990년 4월 ‘귀무덤’의 원혼이 고국 땅에 안치됐다.
그 후 일한불교복지협회는 간토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캐간 희귀 동백나무의 묘목 반환, 안중근 의사를 위한 일한 합동법요, 오카야마 ‘코무덤’ 환국 봉송, 이(李) 왕조 황세손 이구씨 환국, 시베리아 억류 일본국 외국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법요, 일본에서 창씨개명에 반대하다 감옥에서 순국한 강상호 의사의 유골 환국 봉송 등 일련의 한국 관련 사업을 성사시켰다. 또 1995년 8월 광복 40주년을 맞아 가키누마 스님이 직접 일본의 민간인 참회사절단을 이끌고 한국을 방문해서 과거 일본의 한국침략을 사죄하는 ‘한일역사 총참회식’을 갖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을 왕래한 것이 150여 차례. 가키누마 스님이 1990년부터 부단히 노력했으나 성사시키지 못한 일이 딱 하나 있다. ‘북관대첩비’의 한국 반환이다.
“야스쿠니 신사 한구석에 쓸쓸히 서있는 비(碑)가 조국으로 돌아간다면 많은 국민의 눈에 띄게 될 것이고 반일(反日)감정도 풀릴 거라 생각합니다. 진실한 평화운동에 참가하여 힘을 합쳐서 실현되도록 간곡히 부탁드립니다.”(가키누마 센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