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호

아라파트 없는 중동, 어디로 가나

前 총리 압바스·現 총리 쿠레이로 후계구도 압축… 최종 낙점은 미국 손에

  • 글: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입력2004-11-24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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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랍세계의 거목 야세르 아라파트가 역사의 무대 뒤로 퇴장했다.
    • 그는 지난 35년간 중동정치의 중심축이었다. 그가 사라진 중동 땅엔 평화가 깃들일 것인가. 그의 빈 자리를 메울 후계자는 누구이며, 어떤 어려움에 부딪힐 것인가.
    아라파트 없는 중동, 어디로 가나

    11월10일 한 아랍계 소년이 아라파트가 입원중인 프랑스 파리 근교의 군병원 앞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아랍어 문자 모양을 따라 촛불을 세우고 있다. 아라파트는 11월11일 새벽 사망했다.

    2000년 9월 말 이래 4년을 넘긴 중동 유혈사태가 큰 전환점을 맞았다. 중동정치의 거목 야세르 아라파트(75)가 11월11일 새벽에 사망, 정치무대의 중심에서 영원히 퇴장했다. 아라파트가 누구인가.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이끌며 대(對)이스라엘 항쟁에 일생을 바쳐왔다. 아랍인의 투쟁사에 이미 전설처럼 그 이름이 올라있는 인물이다.

    아라파트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언론들은 그를 가리켜 “독립국가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중동평화를 파괴한 인물”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비판의 초점은 그가 평화가 아닌 파괴적인 테러전술에 매달려왔다는 데 모아진다.

    ‘정치인 아라파트’에게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인티파다 과정에 아라파트가 보인 상대적 유약함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강경파 하마스(Hamas)에서 희망의 빛을 찾았다. 아라파트 측근의 부패문제도 어제오늘 나온 지적이 아니다(필자가 라말라에서 아라파트 지지자에게서 들은 우회적인 해명에 따르면, “대이스라엘 항쟁을 위한 무기 구입, 알 아크사 순교여단 같은 친(親)아라파트 무장조직에 대한 재정지원 등 말못할 항목에 큰 돈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과 이슬람권의 평가는 우호적이다. 두 지역에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무단(武斷)통치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을 벌여온 의지의 정치인으로 여겨진다. 그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민족적 우상(icon)이다. 요르단, 레바논 등 중동 일대에서 수십 년 넘게 난민생활을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아라파트는 희망의 화신이었다. 팔레스타인 민중은 그의 지도력에 따라 언젠가는 고향땅을 밟을 수 있으려니 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를 따르던 지지자들에게 아라파트의 죽음은 정치적 구심력의 실종을 뜻한다.

    “넬슨 만델라가 되고 싶다”



    필자는 2002년 5월과 올해 6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정치중심도시 라말라의 아라파트 집무실에서 두 차례 그를 만난 적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치정부 수반의 집무실을 무카타(Mukata)라고 일컫는다. 우리로 치면 청와대다. 올해 6월 무카타에 들어서자, 전보다 휠씬 심하게 파괴됐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아라파트 경호부대가 묵는 막사를 비롯, 집무실 건물 두 채를 뺀 나머지가 모두 파괴됐다. 아라파트를 지키는 소수의 경호대원들은 이스라엘군의 탱크 포격과 불도저 공격에 저항하지 못하고 몸을 사려야 했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정권은 물론 미 부시 행정부를 강력히 비난했다. “현 중동사태를 둘러싸고 부시 행정부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있다고 보는가”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부분에 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아리엘 샤론의 범죄행위를 덮어왔다. 샤론은 미국의 지원(유엔에서 대이스라엘 비난결의안이 나올 때마다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유엔총회에서 부표를 던짐으로써)을 바람막이로 삼고 있다.”

    아라파트를 만날 때마다 그의 얼굴이 주위 사람들에 견주어 몹시 창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라파트를 평생의 라이벌로 여겨온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2001년 말 이스라엘군 탱크를 동원, 무카타를 향해 마구잡이로 포격해대면서 “아라파트가 라말라 집무실(무카타) 밖으로 나오면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위협했다. 그때부터 지금껏 거의 3년 동안 아라파트는 감옥 아닌 감옥인 무카타의 집무실에서 지내왔다. 어쩌다 라말라 시내 회교사원에서 예배를 보는 게 유일한 외출이었다.

    “나는 팔레스타인의 넬슨 만델라가 되고 싶다.” 지난 10월 초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는 아랍계 신문 ‘아슈라크 알 아우사트’와의 인터뷰에서 아라파트가 한 말이다. 남아프리카 백인정권의 흑백차별정책(apartheid) 아래서 27년 동안 옥고를 치르면서도 남아프리카에 희망을 빛을 비춘 만델라는 아라파트의 마음속 영웅이었다. 만델라도 아라파트를 높이 평가한다. 그는 한 자서전에 써준 서문에서 아라파트를 가리켜 “난민 처지로 떠돌던 팔레스타인을 국가로 끌어올린 인물”이라고 적었다.

    아라파트는 그렇게도 열망하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러나 지난 35년 동안 아라파트의 카리스마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해왔다. 어느 누가 아라파트의 빈자리를 차지하더라도, 그의 지도력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아라파트 후계구도가 복잡한 것은 팔레스타인 지도력이 단일하지 못하고 복선구조를 띠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라파트를 가리켜 단순히 ‘라이스(Rais, 우리말로는 대통령)’라고 부르지만, 그의 직함은 여러 개다. 첫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의 대통령이다. 1993년 체결된 오슬로평화협정에 따라 3년 뒤 1996년 치러진 선거에서 그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최고 행정책임자가 됐다.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땅에 ‘자치정부’를 수립, 지도력을 행사해왔다.

    둘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집행위원회 위원장이다. 1964년 대이스라엘 저항 비밀조직으로 출발한 PLO는 팔레스타인 각 정파의 연합기구. 1967년 6일전쟁에서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에 굴욕적인 참패를 당한 뒤 PLO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염원인 독립이념을 이끄는 조직으로 떠올랐다. 아라파트는 1969년부터 PLO 의장직을 맡아왔다.

    아라파트의 여러 직함 가운데 그가 35년 동안 지켜온 PLO 의장 자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1993년 중동평화협정을 맺을 때 팔레스타인 협상대표로서 서명했고, 그 뒤로도 내내 이스라엘 쪽과의 공식 협상루트였다. PLO는 아라파트가 해외를 떠돌며 테러활동을 벌이던 1960년대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대이스라엘 투쟁의 중심이었으므로 PLO에 대한 그들의 자긍심은 대단하다. 오슬로평화협정이 기만적이고 타협적이라며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 데 반대하던 PLO의 좌파 세력, 이를테면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과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등도 PLO에서 탈퇴하지 않았다.

    셋째, 아라파트는 PLO를 구성하는 최대 정파인 파타(Fatah) 중앙위원회 위원장이다. 파타는 팔레스타인 각 정파의 연합기구인 PLO 안에서 아라파트 직할조직의 성격을 지녔다. 1960년대 초 알제리에서 아라파트가 조직한 파타는 요르단, 레바논을 근거지로 삼아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벌여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1965년 PLO 창설 무렵, 파타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지지세(勢)가 강해지면서 파타는 PLO의 주축이 됐고, 파타 중앙위원장인 아라파트는 PLO 의장을 겸하게 됐다. 2002년 봄 이스라엘군에 잡혀 무기징역형을 받고 현재 이스라엘 감옥에 갇혀있는 마르완 바르구티는 파타의 서안지구 사무총장이다.

    아라파트가 프랑스 파리의 육군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세계 언론엔 PLO의 후계구도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PLO 정치위원장 파루크 카두미가 아라파트의 후계자가 될 것이란 소문도 나돌았다. 아라파트의 부인 수하(Suha)가 아라파트의 정치적 유언을 담은 문서를 갖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카두미가 후계자라는 것이다. 카두미는 1993년 아라파트가 서명한 오슬로평화협정에 대해 ‘타협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귀국을 거부, 자치정부와 거리를 두어왔다.

    그러다 2003년 봄 아라파트와 화해하고 PLO 정치위원장에 임명됐다. 필자가 팔레스타인 정치중심도시 라말라의 취재원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확인한 그곳 분위기는 “그런 유언장이 있다 하더라도 법적 효력은 없다”는 쪽이다.

    집단지도체제로 갈 것인가

    아라파트가 숨을 거둔 날 PLO 의장에 마흐무드 압바스(PLO 사무총장, 전 총리)가 뽑혔다. 큰 그림으로 보면, 아라파트 후계는 2인 구도로 잠정 정리된 모습이다. 팔레스타인을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정치조직(PLO)을 압바스(69)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다스리는 행정조직인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 또는 PNA)는 현 총리인 아흐메드 쿠레이(68)가 끌어가는 구도다.

    2003년에 만들어진 팔레스타인 기본법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대통령이 사망하거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팔레스타인 자치의회(PLC) 의장이 60일 동안 한시적으로 대통령 직무대행을 맡게 돼 있다. 현재 자치의회 의장은 라우히 파투(55). 팔레스타인 기본법에 따르면, 대통령 유고 60일 안에 새 대통령을 뽑게끔 규정돼 있다.

    압바스 PLO 의장과 쿠레이 총리, 두 사람은 하마스를 비롯한 팔레스타인 강경파 세력과 달리 오슬로평화협정에 적극 참여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어왔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대이스라엘 무장투쟁 경력이 없다는 약점이 따라붙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선 그다지 인기가 높지 못하다. 대중적 인기도 면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감옥에 있는 마르완 바르구티에 훨씬 뒤진다.

    지난 9월 말 팔레스타인정책조사연구소(PCPSR)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주민 1300명을 상대로 ‘팔레스타인의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다면 누구를 뽑겠느냐’고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쿠레이와 압바스의 대중적 지지도는 매우 낮게 나타났다. 1위는 아라파트(35%), 2위는 하마스 지도자 마흐무드 자하르(15%, 올해 봄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 세이크 아흐메드 야신과 압둘 아지즈 란티시가 이스라엘이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사망한 뒤 비밀리에 지도자로 뽑힌 인물, 야신의 주치의 출신이다), 3위는 마르완 바르구티(13%).

    ‘아라파트가 대통령에 뽑힐 경우, 부통령후보 경선자로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선 바르구티(22%), 자하르(12%), 올해 85세로 의사 출신의 PLO 활동가 하이다르 압둘 사피(12%), 자치정부 외무장관 사에브 에레카트(6%), 전 가자지구 보안책임자 모하마드 달란(4%) 순으로 답했다. 쿠레이의 지지도는 3%, 압바스는 2%에 머물렀다.

    ‘아라파트라는 거목이 사라진다면, 그 자리를 메울 만한 지도자는 누구인가.’ 이 물음에 대해 중동전문가는 대다수 대답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독립투쟁의 화신’이라 일컬어져온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민중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지닌 입지(立地)가 크고 넓은 까닭이었다. 미 외교협회의 한 모임에서 미-중동프로젝트 책임자 헨리 시그먼은 “아라파트 사망 뒤 생겨날지 모를 권력 공백기를 메우려면 여러 지도자와 권력기구들이 함께하는 집단지도체제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후계구도의 변수, 하마스

    압바스 PLO 의장과 쿠레이 총리가 60일 이내에 치러질 선거에서 대권을 쥐기 위해선 팔레스타인 각 정파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그중에서도 하마스의 지지가 관건이다. 아울러 국제사회,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의 암묵적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겨난다. 이스라엘과 하마스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마스는 아라파트가 대이스라엘 투쟁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해왔다. 실제로 인티파다 4년 동안 하마스는 100건이 넘는 자살폭탄공격을 감행, 팔레스타인 민중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하마스의 지지도는 특히 가자지구에서 매우 높다. 지난 9월 말 팔레스타인정책조사연구소 조사에서도 하마스의 대중적 지지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합치면 아라파트의 직할 정치조직이자 PLO의 주축인 파타(29%)가 하마스(22%)보다 지지율이 높지만, 가자지구만 떼놓고 보면 하마스(30%)가 파타(24%)보다 높다.

    하마스는 오슬로평화협정에 반대해 1996년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선거에 불참했다. 그러나 이제는 전보다 훨씬 높아진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의회선거에 적극 참여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스라엘 강경파 세력은 새 팔레스타인 지도자가 하마스를 제대로 통제하는 것이 이-팔 중동협상의 전제조건이라 여긴다. 아라파트의 후계자가 하마스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다”며 아라파트에게 하던 비난을 그에게도 퍼부을 것이다.

    그 동안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는 “아라파트는 중동평화협상에서 이스라엘에겐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스라엘 강경파가 아라파트를 제거하고 싶어도 함부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은 그러한 국제사회의 공감대, 그리고 아라파트 제거 뒤에 밀어닥칠 혼란이 어느 정도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이스라엘 온건파도 “하마스 같은 저항세력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아라파트가 낫다”고 판단해왔다.

    내전 또는 국가간의 전쟁 후반부에 평화협상을 하는 단계에서 협상 자체를 가로막는 세력을 일컬어 흔히 ‘훼방꾼(spoiler)’이라고 한다. 미 부시 행정부는 하마스를 중동평화의 훼방꾼이라 주장해왔다. 자살폭탄공격으로 중동의 정치적 긴장을 높여 팔레스타인 온건세력과 이스라엘 당국의 평화협상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하마스는 그런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마스의 투쟁이야말로 대이스라엘 투쟁에서 아라파트와 공동전선을 이루고 있다고 여긴다.

    하마스 노선 변화, 온건파와 손잡나

    하마스는 아라파트의 정치적 독선을 비판하면서도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가 현실적으로 지닌 정치적 비중과 중요성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지난 6월 가자지구에서 만난 하마스 대변인 사미 아부 주흐리는 “우리는 아라파트가 이스라엘의 기만적인 점령정책에 때때로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는 점을 비판하지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으로서 아라파트가 지닌 지도력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공동의 적인 이스라엘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이스라엘 샤론 정권과 미 부시 행정부가 아라파트의 지도력에 흠집을 내려드는 것에 반대한다는 얘기였다.

    아라파트가 사라진 뒤 하마스가 노선에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은 없을까. 이스라엘이 강압정책을 펴는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자살폭탄테러 같은 극한적인 투쟁전술을 수정할 것인가. 1988년 아라파트의 직할 정치조직 파타가 그런 것처럼, 하마스도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고 중동 땅에 2개의 국가(이스라엘-팔레스타인)가 가능하다는 쪽으로 공식방침을 정리할 가능성이 이슬람 중동전문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흘러 나오고 있다.

    알라 샤이퍼(카이로 아드함 TV저널리즘센터 소장)는 아랍 위성방송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가 새로운 정치환경 아래서 변화를 모색할 것으로 내다봤다. “하마스는 지금껏 이스라엘과의 중동평화협상을 반대해오던 태도를 바꿔 실용적 노선을 걸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그럴 경우 파타 출신의 아라파트 후계자들도 하마스와 손잡을 수 있다.

    하마스 지도부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그런 변화의 조짐을 조금씩 내비쳐왔다. 필자가 2002년 봄 하마스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유대인들)은 우리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지중해 바닷속으로 수장(水葬)시키려 한다면서, 이스라엘이 생존하려면 전략적으로 1967년 6일전쟁 점령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무단통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당면 목표는 유대인들을 1967년 국경선 바깥으로 몰아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뿐 아니라 서안지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다면, 하마스가 극한투쟁을 벌여야 할 명분은 사라진다.

    아라파트가 퇴장한 뒤 과연 하마스의 영향력이 전보다 더 강해질 것인지도 관심사다. 왈리드 카지하(카이로 아메리칸대 교수)는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의 비중이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아라파트 사후에도 팔레스타인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고 새 지도부가 이스라엘에 타협적인 자세로 양보를 거듭하는 모습을 보이면, 하마스의 대중적 지지도는 더 높아질 것이다.

    그런 지지를 바탕으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정치권을 접수하려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물론 그런 사태를 이스라엘이 팔짱만 끼고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다. 하마스가 강해지면 이스라엘로선 팔레스타인을 장악하기가 더 쉬워진다는 분석도 있다. 군사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선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요리’하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을 지닌 아라파트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뜻이다.

    “압바스를 밀어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선호하는 지도자는 PLO 의장으로 갓 선출된 마흐무드 압바스 전 팔레스타인 총리다. 그는 2003년 봄 요르단의 휴양도시에서 부시 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중동평화협상에서 타협적인 저자세를 보여 아라파트는 물론 팔레스타인 민중의 분노를 샀고, 그 뒤 아라파트의 견제로 3개월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압바스가 신속하게 권력의 전면에 나서길 바라고 있다. 1993년 오슬로평화협정을 성사시킨 이스라엘 중도좌파정당 노동당을 지지하는 신문 ‘하레츠’의 보도에 따르면,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이미 압바스가 팔레스타인의 새 지도자로 나서도록 측면지원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는데 팔레스타인 사람의 이스라엘 취업을 전보다 완화하는 것 따위다. 그렇다고 강압 무단통치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에 있는 야페 전략문제연구소 연구원 출신인 요시 알퍼는 이스라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압바스가 후계자로 등장한다면, 미국은 그가 입지를 다지게끔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나 샤론 정권으로서는 압바스가 상대하기 편한 인물이다. 당연히 도우려 들 것이다. 그 방식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꿈에도 바라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이정표(road map)를 다시 그려주는 것이다. 2003년 부시-샤론-압바스는 ‘2005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선포’라는 청사진을 그렸으나, 그 뒤 압바스가 물러나면서 무산됐다.

    그러나 올 여름 필자가 현지취재하면서 만난 팔레스타인 지식인들은 이스라엘 우파 정권이 팔레스타인 독립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와 같은 우려는 터무니없는 게 아니다. 샤론 정권의 가자지구 철수안에도 음모가 깔려 있다. 샤론 총리가 일방적으로 가자지구 철수를 주장하고 나선 이면에는 중동평화협상을 통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전망을 논의하지 않겠다는 의도가 깔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샤론 총리가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에서 가자 철수안을 비판하는 극우파의 공격에 몰리자 그의 측근이 언론에 흘린 말에서 확인됐다.

    아라파트의 유고를 보는 미국의 시각은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이 11·2 대선 뒤 처음으로 가진 외신과의 인터뷰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회견에서 “아라파트가 파리 병원에 입원해 있는 가운데 권력교체가 일어나고 있다. 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는 평화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기회를 적극 활용할 것이다”고 말했다. 파월의 발언은 아라파트가 중동평화협상의 걸림돌이라는 이스라엘의 시각과 똑같다.

    지난 4년 동안 부시 행정부의 중동정책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스라엘 강경파 아리엘 샤론 총리는 백악관에 10번 넘게 초청받았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이를테면 가자지구 남단 라파 난민수용소에서 학살을 저질러 세계적인 비난을 받던 올 봄에도 샤론은 백악관 만찬에 초대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라파트는 미국 땅에 발을 디뎌보지도 못했다.

    중동평화협상은 테러와의 전쟁, 북핵문제, 이라크 사태 안정 등과 더불어 부시 행정부가 풀어야 할 4대 대외현안 가운데 하나다. 부시 행정부와 샤론 정권이 ‘중동평화협상의 걸림돌’이라 주장해온 아라파트가 숨을 거두었으니 이제 중동 땅에 평화가 찾아들 것인가.

    그럴 확률은 낮다. 이슬람권의 중동전문가들도 아라파트의 죽음이 이-팔 의 평화협상 전망을 밝게 해주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집트 지식인 왈리드 카지하(카이로 아메리칸대 교수)는 알 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동의 평화는 미국이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달렸다. 현재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사태에 매달려 있다. 지난 4년 동안 부시 행정부는 샤론 총리가 하는 대로 끌려왔다.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

    2기 부시 행정부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극복하고 중동사태에 중립적으로 접근할 것인지 여부가 중동에 평화가 뿌리내릴 수 있는 관건이 될 것이다.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副)장관과 딕 체니 부통령의 비서실장 루이스 리비를 비롯, 부시 행정부에서 힘을 지닌 유대인 네오콘들의 대(對)중동 시각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보이지 않는 한 중동평화 이정표가 자리잡기는 어려운 일이다. 중동평화의 열쇠는 결국 미국이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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