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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과학수사 현주소

시체 속 구더기, 파리 돼서야 법의학자 손에

  • 이은영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한국 과학수사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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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염색체에 대한 법정 공방

지난해 7월, 경남 거제시 옥포동 앞 도로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피살자는 39세 여성. 사건 용의자는 택시 운전사 김모씨(39). 승객을 흉기로 위협, 거제시 하청면 실전매립지에서 살해하고 현금 40만원이 든 손가방을 빼앗은 혐의(강도살인)로 1심에서는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그러나 김씨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다. 지난 7월,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 재판에서 최대 쟁점은 혈흔. 피해자 손톱 밑에서 채취한 혈흔에서 드러난 성염색체의 유전자형 11개 모두 용의자의 타액에서 검출된 것과 일치했지만, 법원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검찰이 특별한 증거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내몬 꼴이 됐다.

이 사건을 심리한 부산고법 형사부 지대운 판사는 “피해자 손톱 밑에서 발견된 혈흔에서 남자에게 존재하는 Y염색체가 발견됐지만 이 염색체는 부계(父系)로 유전되는 성염색체”라면서 “이론상 증조와 손자가 같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Y염색체는 동일 부계인지를 확인하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개인 식별력엔 한계가 있다는 해석이다.

이 사건을 수사한 창원지검 통영지청 김재권 검사측은 “혐의선상에 오른 거제도 택시기사 500여 명 중 피고인만이 유일하게 성염색체가 일치했고, 그의 부계 7촌 이내의 혈족 중에 범행장소인 거제시에 거주하거나 그 시점에 거제시를 방문한 사람이 없다”며 김씨가 진범이라고 주장했다. 피고인의 부친과 조부가 범인일 확률은 거의 없다는 논리다.



대검 유전자감식실 이승환 연구관은 “Y염색체는 동일 부계 유전을 나타내지만 꼭 일치하는 건 아니다”며 “동성동본이라도 Y염색체가 같지 않다”고 지적했다. 선조 대에 피가 섞이거나 돌연변이가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이 수사기관의 무리한 조사와 피의자의 인권침해를 막겠다는 취지로 공판중심주의 도입을 선언한 지 2년6개월. 지난해 12월, 재판에서 피고인이 부인하면 검찰 신문조서를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온 뒤로 법원의 증거심사는 더욱 엄격해졌다. 사건현장에서 지문이나 족적, 혈흔 이 나온다고 해도 보강증거와 정황증거일 뿐 범행을 입증할 증거로 인정받지 못한다. 또 대법원 판례상 수사관의 증언은 피고인이 부인하면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지난 6월,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대한 대법원 최종 판결은 증거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워준 계기가 됐다. 유영철은 노인과 부녀자 21명을 연쇄살인한 혐의로 구속돼 사형이 확정됐다. 대법원은 유씨의 범행 중 ‘이문동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문동 살인사건’은 지난해 2월, 서울 동대문구 한 골목길에서 한 여성(24)이 흉기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다. 유씨는 경찰과 검찰에서 자신의 범행이라고 진술했다가 공판과정에서 “경찰의 회유로 허위 자백했다”고 번복했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상처 부위와 유씨의 자백이 일치하지 않고 자백경위와 동기가 석연치 않아 범죄를 증명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은 우리나라 수사기관이 얼마나 자백에 의존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유씨가 사용한 범행도구 해머에서 피해자의 유전자를 검출한 대검 유전자감식실 이승환 연구관의 얘기다.

“피해자의 유전자가 범행의 결정적인 증거가 됐어요. 조립된 해머 손잡이 틈새로 피해자인 황학동 노점상 안모씨의 유전자가 흘러들어가 있었어요. 국과수 1차 감정에선 발견되지 않았는데, 대검에서 해머를 분리해 찾아냈어요.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습니까? 만약 유씨가 자백하지 않았다면 범죄를 입증하기 힘들 뻔했지요. 달리 증거가 없었거든요.”

뇌물·조폭 수사의 어려움

검찰 내부에서는 법원의 엄격한 증거심사에 대해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가 적지 않다. 대검 과학수사1담당관 김종률 검사는 “자백 위주의 수사는 자백 위주의 재판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법원의 과학재판을 강조했다. 피고인이 아무리 부인하더라도 재판부가 과학적 심증을 통해 과감하게 유죄를 선고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검사는 또 “증거의 가치와 판단 과정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며 “영국 법정에서는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이 유전자감식보다 더 중요한 증거로 받아들여진다”고 국내 법원의 판결풍토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우리나라 법원에서는 거짓말탐지기로 알려진 홀로그래프를 아직까지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법원이 수사기록보다 명백한 증거를 요구하면서 과학수사를 통한 명백한 물증확보는 수사기관의 지상명제가 됐다. 검찰은 올해를 ‘과학수사 원년’으로 정했다. 검찰 내부에서 과학수사 역량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 결과다. 내년까지 과학수사지원센터를 건립해서 컴퓨터, 회계, 유전자, 심리분석 등 과학수사를 위한 인적·물적 인프라를 확충하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검찰이 과학수사지원센터 건립자금으로 정부에 요구한 예산은 약 260억원. 여기에는 디지털 증거분석시스템 등 각종 첨단장비 구입과 과학수사 전문요원 채용비용이 포함돼 있다. 한마디로 한국형 CSI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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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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