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급날 잠깐 통장에 머물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돈.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말이라도 듣는 월급쟁이라면 그래도 성공한 삶이다. 현금으로 10억원쯤은 갖고 있어야 돈의 구속에서 해방된다고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인가. 많든 적든 내 호주머니에 들어왔다 나가는 돈, 어디에 써야 할까.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시작한 산골생활, 그곳에서 깨닫는 돈과 몸의 상생 원리.
뒷간 쪽창으로 바라본 마을 풍경.
나는 서울 살 때 돈이 참 무서웠다. 직장에 다니는 동안 돈을 제대로 벌지도 못했지만 번 돈을 쓰는 데도 자유롭지 못했다. 성격이 소심해서 사업은 꿈도 꾸지 못했고 그렇다고 직장생활을 성실히 할 만큼 몸도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걸 누구보다 싫어해 직장을 자주 옮겼다.
반면에 아내는 돈벌이와 씀씀이에 대해서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절약하고 사는 삶에 익숙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아내는 육아기간을 빼고는 늘 나보다 돈도 잘 벌었다. 집안 경제는 서서히 아내 중심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나는 돈에 대해 소외감과 스트레스가 많았다. 점점 돈에 주눅이 들었고 자신이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
아내가 가끔 식구끼리 외식이라도 하자고 하면 나는 주머니 생각을 먼저 했다. 아내 눈치를 보며 거절도 못하고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아내는 먹고 싶은 음식을 줄줄이 꿰면서 근사한 식당을 찾아 발품을 판다. 내 얼굴은 나도 모르게 굳어만 간다. 아내가 원하는 식당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차림표부터 슬쩍 본다. 값이 얼마나 하는지. 값이 싼 음식에 눈길이 머문다. 식당 주인이 물컵을 들고 주문하러 오기 전에 얼른 결정해둔다. 값이 싸서 먹는 게 아니라 그걸 좋아한다는 확신을 식구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친구들과 어울려도 술값 한번 호기 있게 내 본 기억이 없다.
먹는 게 그러하니 다른 일은 더 심했다. 친지 결혼식이나 회갑 잔치도 돈에 짓눌려 축하보다 돈 걱정을 먼저 했다. ‘부조금을 얼마 하지?’ 몸이 아파도 견딜 만하면 병원에 갈 생각을 못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날은 월급 탄 바로 다음날이었다. 월급봉투를 아내에게 갖다주면 “수고했다”는 인사 한마디뿐이다. 그리고 가계부를 열심히 적고는 그 다음날이면 “쓸 돈이 없다” 했다. 아내가 돈밖에 모르는 수전노로 보였다. 어이없어 하는 내 얼굴을 보면서 아내는 한 달 동안 써야 할 공과금과 생활비, 그리고 부어야 할 적금 등 항목을 조목조목 늘어놓는다. 물론 아내는 ‘합리적’인 경제행위자로 최소한의 돈으로 최대 만족을 누리는 소비를 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자라서인지 소비나 저축에 익숙하지 않았다. 돈 없이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려운 도시 환경. 한두 해도 아니고 20년 가까이 그렇게 살다 보니 돈에 대한 억압과 두려움이 누구보다 많았다.
그러다가 시골로 왔다. 어차피 큰돈을 만질 팔자가 못될 바에는 몸으로 때우며 살고 싶었다. 하지만 시골도 돈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도시보다 씀씀이가 한결 적기는 하다. 그렇지만 적은 돈이나마 버는 것이 농촌 경제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돈의 억압에서 풀어준 뒷간
그래도 첫 해 농사를 결산하면서 생각지 못했던 소득이 있었다. 곡간에 차곡차곡 쌓이는 곡식. 그냥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농산물이 ‘빽’이 될 줄이야! 그 뒤에는 내 몸이 있지 않나. 돈으로 쪼그라들었던 내 자존심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몸만 건강하다면 먹고 사는 건 가능하겠구나!’ 소비는 하기 나름 아닌가. 돈 씀씀이에 대해서는 늘 아내가 중심이다가 처음으로 내가 주체가 되었다. 꼭 필요하다 싶은 최소한의 씀씀이를 ‘내 손’으로 꼽아보니 공과금과 의료보험 정도였다. 그 정도라면 농사로도 어렵지는 않으리라. 나머지는 씀씀이를 줄이면서 손수 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싶었다.
돈 대신 몸으로 때우는 첫 실험으로 뒷간을 손수 짓기로 했다. 집터를 닦고 나서 살림집을 짓기 전에 뒷간부터 지었다. 나무는 집터 닦을 때 나온 낙엽송으로 하고, 흙은 뒷간 둘레에 널려 있었다. 지붕 재료는 이 지역에서 잘 자라는 갈대와 억새로, 문은 오고가는 길에 버려진 것들을 주워다 놓았다.
그런데 돈 들이지 않고 짓자니 시간이 문제가 됐다. 자연에는 모두 때가 있다. 갈대나 억새를 베자면 가을에 줄기가 마른 다음이어야 했다. 또 용마름(지붕마루에 덮는 ‘ㅅ’자형으로 엮은 이엉)은 볏짚으로 해야 한다. 볏짚을 미리 챙겨두지 않았기에 가을에 갚기로 하고 아랫마을 아저씨한테 빌렸다. 그리고 이엉 엮는 법도 배웠다.
단돈 1만원으로 지은 뒷간인데 올 가을에 지붕을 바꿨다. 억새 지붕을 걷어내고 컬러 강판으로 바꾸니 지붕 자재 값만 14만원이 들었다.
그렇게 1만원을 들이고 지은 뒷간. 내 눈에는 수백만원을 들인 어느 화장실보다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 뒷간은 내게 돈의 억압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작은 징검다리가 되었다.
몸에서 우러나온 자신감. 그 자신감은 신기하게도 자신을 치유하고자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다. 자신에게 남아 있던 돈에 대한 억압을 뿌리째 뽑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농산물 판매에 대해 근본부터 다시 고민했다. 첫 해 농산물은 친구나 친지들이 고맙게 사주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주먹구구식이라 안정적으로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다음해는 생활협동조합과 직거래를 했다. 하지만 계약 재배를 하자니 마음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품질이 ‘공인’돼야 함은 물론이요, 불특정 소비자의 입맛에도 맞아야 한다. 그래도 이 일은 조금만 노력하면 어렵지는 않았다. 흙을 살리면서 정성으로 키우면 농산물 맛이 좋다.
가장 어려운 건 아무래도 하늘이다. 계약 물량을 제때 맞추는 건 사람 힘만으로는 안 된다. 태풍이나 가뭄, 또는 예기치 못한 병이라도 돌면 주저앉기 십상이다. 그러다 보니 가을걷이 전까지 늘 마음 졸이는 게 계약 재배다. 그렇게 해봐야 도시 월급쟁이 두어 달 월급 수준이다. 그나마 대부분의 소득이 가을에 몰리는 것이 농촌 경제.
두 해쯤 계약 재배를 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논밭 있겠다, 집도 새로 지었겠다, 아내 덕에 빚도 없겠다, 부자가 부럽지 않았다. 꼭 들어가야 할 돈이 많지 않으니, 뒷간을 손수 짓던 자신감으로 돈 안 쓰고 사는 길로 한 발짝 더 나아가 보려고 했다. 아예 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기계 안 쓰고 농사 짓기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농사에 대한 관심이 바뀌기 시작했다. ‘농사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나’에서 돈을 안 쓰고 농사가 가능한가, 돈을 안 들였는데도 돈이 된다면 돈은 덤이 되지 않겠나로. 돈이 덤이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고, 조건 없는 사랑도 가능하지 않을까.
돈벌이 농사는 대부분 전문화, 기계화됐다. 돈이 되려면 한두 작목에 특화된 노력이 필요하다. 씨앗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사람과 농사짓는 사람이 확연히 나뉜다. 돈벌이로 선택한 곡식 씨앗은 대부분 돈을 주고 사게 된다. 게다가 기계는 돈 단위가 큰 데다 석유에 의존한다.
경운기나 관리기(밭을 갈거나 관리하는 기계)는 몇백만 원으로 그나마 싼 편이다. 성능이 좋은 트랙터나 콤바인은 몇천만원이다. 여기에다가 기름값, 수리비…. 농기계를 제대로 장만하고 관리하자면 돈이 끝도 없이 든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기계를 안 쓰고 하기에는 농사를 너무 모르는 데다가 일이 서툴렀다. 그러다가 기계를 안 쓰는 계기가 생겼다. 밭을 한 필지 샀는데 거기에 20평 남짓 뙈기밭이 딸려 있었다. 작은 관리기도 들어갈 수 없는 가파른 밭.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몸으로 해야 했다. 막상 해보니 할 만했다. 점차 기계를 안 쓰고 농사짓는 땅을 늘려갔다.
곡식을 거두는 일도 되도록 기계를 쓰지 않았다. 낫으로 벤 나락을 홀태로 거두어보았다. 홀태는 머리빗처럼 생겼다. 벼이삭을 홀태 빗살 사이에 끼우고, 손으로 당겨서 낟알을 훑는 것이다. 처음에는 언제 다 하나 싶어 맛보기로 조금 해보았다. 점차 요령이 생기자 하루에 100평쯤 거두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논에서 홀태질하는 광경은 말 그대로 그림이 된다. 따스한 가을 햇살이 등에 와 닿는다. 이따금 윗도리를 벗어 한두 시간 일광욕을 한다. 땀이 날 때 불어오는 바람은 얼마나 선선한지. 손으로는 이삭을 당기면서 고개 들어 산을 보면 단풍이 산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하루하루 다른 느낌으로 본다. 까치들은 더없이 높고 푸른 하늘을 무리지어 날고…. 내 자신이 자연 그 자체가 된 느낌이다.
손으로 하는 타작은 우리 아이들도 곧잘 한다. 콤바인으로 타작할 때는 위험하니까 아이들은 멀리서 구경만 했다. 낫으로 베고 홀태로 훑는 일은 아이들도 자기 힘만큼 할 수 있다. 참 신선한 체험이었다. 아이들은 나락을 낫으로 한 움큼 벤 다음 홀태로 달려온다. 자신이 벤 것을 훑어보고 싶어한다. 조금 하다가 지겨우면 메뚜기를 잡는다. 다 벤 논에서는 공을 차기도 한다. 배고프면 집으로 달려가 참을 챙겨 온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눈앞에 죽 펼쳐졌다.
차랑∼ 사랑∼ 처랑∼
콤바인은 수백 사람 몫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편리한 대신 돈이 만만치 않게 든다.
그렇다면 홀태 이전에는 어찌 나락을 거두었을까. 옛날 자료를 더듬어보니, 젓가락같이 생긴 나뭇가지 두 개 사이에다가 이삭을 넣고 당겼다고 한다. 이름도 가락홀태다. 그러다가 나무로 된 손홀태, 그 다음이 쇠로 된 홀태였다. 이 홀태는 이전의 것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고 속도도 빠르다. 이삭을 한꺼번에 열 개쯤은 가볍게 훑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쩌면 쇠로 된 홀태가 나오면서 부의 축적이 광범위하게 가능해졌는지도 모른다. 인류는 그동안 엄청난 물질문명을 이뤘음에도 바쁘고 여유가 없다. 그래서일까. 몸으로 느끼는 시간 여행은 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다.
홀태로 이삭을 당기다 보면 소리가 난다. 벼이삭은 활이 되고 홀태 빗살은 현이 되어 공명이 생긴다. 그 소리는 사람 처지에 따라 들을 때마다 다르다. 차랑∼ 사랑∼ 처랑∼. 홀태 아래 나락이 그득히 쌓이면 기분이 좋아 ‘차랑’으로 들린다. 이 쌀을 누구와 나누어 먹을까 그럴 때는 ‘사랑’, 태풍에 쓰러지거나 병들어 쭉정이가 많은 나락을 당길 때는 ‘처랑’으로 들린다. 때로는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일에 쫓기면 힘겨움에 숨소리 외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홀태로 거두었다고 다 된 게 아니었다. 쌀이 되는 과정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절구질은 아주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이것도 계기가 생겼다. 어느 해 겨울, 옆마을에 사는 이웃이 절구질로 좁쌀을 쓿고 있었다. 코미디를 보는 듯 웃음이 나왔다. 이웃이 정색을 하고 “잡곡은 어렵지 않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는 잡곡 농사를 중요하게 생각해 좁쌀 기장 수수 따위를 골고루 재배해왔다. 하지만 방아 찧기는 어려웠다. 요즈음은 웬만한 방앗간에서는 잡곡을 취급하지 않는다. 잡곡 농사가 돈이 안 되니 기계도 덩달아 밀려난 셈이다. 그러니 방아 기계를 찾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멀리까지 가야 했다.
이웃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겨 절구질을 해보았다. 껍질이 벗겨지며 나온 노란 알이 아주 예뻤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무절구와 공이를 만들었다. 기장이나 수수는 잠깐만 찧으면 일주일 정도 먹을 양이 나왔다.
‘우리 식구 목숨이 이 손 안에 있구나!’
자신이 생기니 쌀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쌀이 갖는 상징성은 아주 크다. 돈도 돈이지만 석유 문명에 대한 위기감이 한 나라를 넘어 점점 높아가고 있다. 절구질로 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대안이 되지 않겠나. 적어도 소박한 삶에 대한 자기만족은 되리라고 보았다.
내 나름대로는 머리를 굴리며 비장한(?) 마음으로 절구 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하지만 잡곡과 달리 쌀은 쉽지가 않았다. 한 시간 낑낑대며 얻은 쌀은 한 끼 분량이 채 안 되었다. 밥은 하루 세 끼 날마다 먹는 건데 앞이 아득했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옛날 사람들은 누구나 절구질로 쌀을 쓿어 밥을 먹었을 테니까.
절구질을 몸에 익히자면 동기 부여가 더 필요했다. 날마다 먹는 밥이 어렵다면 떡을 먼저 해보자. 그것도 떡메로 치는 찹쌀떡으로. 겨울 분위기도 느끼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으리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떡메를 근사하게 만들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식구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절구질하는 손에 다시 힘이 붙었다. 밥솥에 찐 쌀을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며 떡메로 쳤다. 산골 겨울의 추위도 잊고 식구가 함께 ‘체험학습’을 했다. 떡이 다 되자, 마음은 급하지만 목구멍에 떡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손으로 모를 내고, 낫으로 베어, 홀태로 거두고, 절구로 방아를 찧어, 떡메로 친 떡.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은 이랬다.
‘나와 우리 식구 목숨이 바로 이 손 안에 있구나.’
그 감격에 겨워 계속 연구했다. 절구와 공이를 내 몸에 맞게 개조했다. 공이 손잡이 곡면을 내 손바닥에 맞추고, 무게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도 나락껍질을 가장 잘 벗길 수 있는 정도로 맞추어 나갔다. 절구의 홈 역시 공이와 암수가 되어 위아래 전후좌우 회전 운동이 잘 되게 다듬었다.
그리고 기술적인 여러 방식을 시도해 보았다. 절구질을 할 때 보통은 위아래로 찧는다. 그럼 쌀알이 잘 깨진다. 그래서 나는 공이를 절구에 문질러 껍질을 벗겨냈다. 한 되 정도 일차 껍질을 벗기면 바람에 껍질을 날린다. 옛날에 우리 형이랑 어머니랑 세 사람이 하던 디딜방아보다 효율이 더 좋게 느껴졌다. 디딜방아는 세 사람이 필요하고 쌀알도 훨씬 더 잘 깨지며, 키질을 해야 한다.
절구질 방아 역시 바람이 없으면 키질을 해야 한다. 그러나 키질은 내 몸에 익지 않았기에 제대로 안 된다. 그러니 바람에 민감해질 수밖에. 하루 가운데 바람이 언제 이는지. 계절에 따라 바람 방향은 어떠한지. 바람을 타지 않으면 일이 안 된다. 쌀이 안 나온다. 밥을 먹을 수가 없다. 점차 몸 구석구석이 바람을 느끼기 시작했다. 갈수록 기술이 늘고, 몸에 익어 하루 한 시간 정도면 이틀 먹을 양식을 찧게 되었다.
절구질 수행을 연출했더니 영 어색하다. 절구질을 한창 할 때는 머리도 길어 도사 분위기가 물씬 났다.
그렇게 두 해를 절구질하다 보니 우리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재미있겠다고 ‘체험’해 본 사람도 있었지만 마땅치 않게 보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혼자만 그렇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며 따지거나 “바쁜 세상에 언제 그 짓을 하고 있느냐”고 비웃기도 했다.
그런 비판과 비난에 일일이 대꾸를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필요했다. 남이 뭐라고 하든지 내 모습에 내가 취했다. 때로는 ‘간디의 물레’가 이 땅에서 나를 통해 나무절구로 다시 살아나는 거라며 나르시시즘에 빠지곤 했다.
손으로는 절구질을 하면서 머리로는 깨달음을 얻고자 경전을 공부하고 명상을 했다. 노자 도덕경을 다시 보았고, 바가바드기타(힌두교 3대 경전 중 하나)는 아예 끼고 살았다. 한 구절을 읽고는 절구질하면서 그 내용을 되새김질하곤 했다. 깨달음에 목이 말랐기에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경전을 빨아들였다. 좀체 나와는 인연이 없던 성경도 보았다. 몇 구절 읽는데 예수가 내 앞에 살아 있는 듯 다가왔다. 그러면서 예수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집 뒤 산등성이에 올라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내 의식이 급속히 팽창하는 듯했다. 산 아래 세상을 굽어보며 명상에 젖었다. 수천년 전부터 내려오던 경전인데 지금 내게 소중하게 다가온 이유가 뭘까. 이제는 세계가 하나로 통하니 경전도 하나로 통합되면 좋지 않겠나. 깨달음이 인류 보편의 가치가 될 수는 없는가. 우리에게 영혼이 있다면 쌀에도 영혼이 있지 않을까. 내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마냥 막힘없이 생각이 이어졌다.
그때 ‘절구질 도사’로서 깨달은 ‘도(道)’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공이로 나락을 문지르다 보면 껍질이 한꺼번에 다 벗겨지지 않고 미가 남는다. 절구통 안에 먼저 벗겨진 쌀알과 남은 미를 어떻게 분리할까. 고민하다가 바가지에 담고 흔들어보니, 껍질이 벗겨져 실한 쌀알은 아래로, 미는 위로 모이는 게 아닌가. 여기서도 물리 법칙이 작용하는 셈이다.
그러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물리법칙만이 아닌 그 무엇이 있다! 나락은 물질이면서 살아 있는 생명이다. 흙을 떠나서는 자기 생명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 그리고 껍질이 쌀알을 감싸고 있을 때는 벌레나 추위에 잘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껍질이 벗겨진 다음에는 그 생명은 오래가지 않는다. 벌레도 호시탐탐 노리고, 곰팡이도 좋아라 하고 달려든다. 그러니 껍질이 벗겨진 쌀알은 작은 흔들림에도 자기복제를 실현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래로 내려가고자 하는 건 살아 있는 씨앗의 ‘자기 떨림’이 아닐까? 흔들림에 반응하는 자기 떨림. 내 생각이 그럴 듯해 보였다. 내친김에 이름을 붙였다. 내 이름을 따 ‘광화 법칙’이라고. 나 자신이 위대한 철학자라도 된 듯 뿌듯했다.
한술 더 떠, 이 법칙을 사람 사는 세상에 적용해보았다. 사람도 생명이니까. 금융위기와 같은 경제적 충격이나 세계를 뒤흔드는 정치적 충돌을 겪게 되면 사람은 새롭게 움직인다. 사람을 ‘흔드는’ 그 충격에 저마다 대응하는 방식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자신에 대한 성찰을 아무래도 많이 하게 되리라. ‘위’를 좇다 보면 만족할 수가 없다. 만족을 알고 자신에게 충실하자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경쟁보다 나눔을, 전쟁보다 평화를, 두려움보다 자유를 얻자면 우리는 더 낮아져야 하리라.
그런데 꼬박 두 해를 절구로 쌀을 쓿어 먹다 보니 아내가 힘들어했다. 이게 어떤 쌀인가! 쌀 한 톨, 잡곡 한 톨 허투루 버릴 수 없으니 긴장한다. 밥을 남길 엄두를 못 낸다. 손님이 와도 대접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당시 우리 집에서 밥 한 끼 먹자면 누구든 절구질을 손수 해야만 했다.
정장 차림으로 김매러 가다
지금 돌아보니 절구질은 나 자신을 위한 ‘수행’이었다. 내 안에 깊숙이 남아 있던 돈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결국 내 ‘깨달음’은 나만의 치유일 뿐 아내에게는 또 다른 억압이 된 셈이다. 이웃에게는 ‘별난 놈’으로 거리감을 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먹어치우는 양은 갈수록 늘어나는데, 내 절구질 기술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깨달음을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우선 나부터 행복해야 했다. 돈 때문에 생긴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는지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절구질은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 손으로 다시 할 수 있으니 이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앞으로 전기나 석유 없이 ‘살아야 하는’ 날이 행여 있더라도 이를 여유 있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그러는 한편으로 소비 욕구도 달라졌다. 남과 견주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겉치레 소비는 점점 멀어졌다. 뭔가를 사고 싶은 갈증보다 내게 다가온 더 큰 문제는 방치된 살림살이였다. 가장 좋은 보기가 옷이다. 서울 살 때 입던 양복은 시골 와서는 입을 일이 없었다. 나들이옷은 개량한복 두 벌로 몇 년을 입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정리하는데 그때마다 양복이 짐이 되기만 했다. 그렇다고 남에게 줄 수도 없는 노릇. 나중에는 옷장을 볼 때마다 양복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그 옷들을 마련한다고 주눅 들었던 지난날이 떠오르기도 했으니까. 고민하다가 농사지을 때 입기로 했다.
식구가 함께 나락을 베고 거두는 모습. 아이들도 단단히 한몫 한다.
농사에는 양복이 불편하다. 옷이 쉽게 더러워진다. 또 거칠게 입으니 당연히 잘 해진다. 그럼 미련 없이 버린다. 그러다 보니 옷장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다. 그리고 무슨 옷을 살까 하는 고민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다.
한풀이 하듯 ‘돈 굿’ 벌이고
여행을 가고 싶은 욕구도 많이 사라졌다. 앞에서 이야기한 시간 여행도 좋지만 논밭의 곡식들이 눈에 밟혀서라도 오래 떠나 있지 못한다. 외식에 대한 욕구도 많이 없어졌다. 우리 집 밥상은 소박하지만 나름대로 풍성하다. 내 손으로 농사지은 것이기에 아무래도 맛있다. 거기다 자랑삼아 말을 덧붙이자면 유기 농산물에다가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먹을거리들….
예전에는 통장에 돈이 쌓이는 맛이 좋았지만 지금은 느낌이 다르다. 이제는 통장에 돈이 쌓이면 오히려 뭔가 허전하다. 그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 예상했던 것과 달리 돈이 덤은 아니었다. 내 손에 쥐어진 돈은 내 몸을 움직여 번 것이다. 그 돈이 가야 할 곳은 분명했다. 다시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쉽게 말하면 나 자신을 위한 재투자여야 한다. 불편한 몸을 고치고, 삿된 마음을 씻어내는 것만 해도 큰 투자다. 자신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계발하는 데도 필요하다.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소홀했던 사람 관계도 그렇다. 더 나아가 세상과 소통하는 데도 자기 투자가 소중하다.
돈은 다시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번에는 돈을 펑펑 쓰면서 호기를 부렸다. 절구질 수행을 마치는 기념으로 가정용 정미기를 샀다. 내 명의의 통장을 아내에게 내밀며 ‘옷이나 한 벌 사 입고 나머지는 필요한 데 쓰라’고 넘겨주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아내한테 옷을 한 벌 사준 셈이다. 식구들 데리고 근사하게 외식도 했다. 그야말로 한풀이 굿을 하듯이 ‘돈굿’을 벌였다. 잡지에 글을 쓰면 원고료를 받지 않고 사회단체에 기부한답시고 허세도 부려 보았다.
한바탕 굿판을 치르고 났더니 돈이 갖는 의미가 조금 정리된다. 돈을 쓴다는 건 내가 갖지 못한 걸 누군가에서 얻는 것이다. 반대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 사회에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 필요한 일과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게 불필요한 것을 정리하는 게 순서일 것이다. 둘러보니 창고에 처박아둔 관리기가 눈에 들어왔다. 밭을 갈지 않고 농사를 지으니 관리기가 어느새 창고에서 녹이 슬고 있었다. ‘앞날’에 혹시 다시 쓸지 몰라 팔지 않고 그냥 두었더니 창고 자리만 차지하는 게 아닌가. 녹슬어가는 기계에서 내 모습을 보았다. 무엇인가를 쌓아두고자 했던 녹슨 내 마음이 그곳에 있었다. 그 관리기는 누군가에게 더없이 소중한 기계일 수 있는데…. 더 늦기 전에 팔기로 했다.
그 돈으로 곧장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 카메라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식구 모두에게 소중한 보물이 되었다. 자신에 대한 기록이면서 세상과 소통하는 데 더없이 좋은 도구였다.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 없는 사진만의 마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논밭에 갈 때도 손에는 호미나 낫을 든다면 호주머니에 카메라를 넣고 다닐 만큼 익숙해졌다. 생명의 신비를 사진에 차곡차곡 담고 있고, 이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는 데 점점 익숙해졌다. 카메라로 본전을 뽑고도 한참을 더 잘 쓰고 있다. 식구마다 사용빈도가 높아지자 부부가 각자 자기 카메라를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돌고 도는 돈. 빚이 세상에 대한 부채라면 앞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돈을 쌓아놓기만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부채가 아닐까. 가끔씩 나 자신에 대한 부채를 점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