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옛날 성불공자 9000명이 은둔하던 곳이어서, 아니면 기암괴석이 9000개 있어서 그리 불렀는지는 모른다. 유래야 어떻든 무주구천동이 심산유곡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곳엔 머루가 지천에 깔렸다. 아침이슬을 먹고 자라 더없이 투명할 것만 같은 무주구천동 머루로 빚은 와인 맛은 어떨까.
덕유산 능선이 바라보이는 고랭지에 자리잡은 샤또무주 머루농장.
요즘 수입 와인이 넘쳐나지만, 한반도의 포도주 역사가 일천해서 빚어진 일은 아니다. 한반도의 포도주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문헌에 따르면, ‘고려사’ 충렬왕 편에 포도주가 처음 등장한다. 고려 충렬왕 28년(1302) 2월에 “(원나라) 황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선물로 보내주었다”고 했고, 34년(1308)에는 “중찬 최유엄이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보냈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왕실에서는 그때 처음 수입 포도주를 맛본 셈이다. 그 포도주가 원나라에서 제조된 것인지, 실크로드를 타고 온 서역의 포도주인지는 알 수 없다.
한반도에서 포도주를 빚은 것은 그 뒤로 여겨진다. 하지만 유럽식 포도주는 아니었다. 조선 중기에 저술된 ‘동의보감’을 보면 “익은 포도를 비벼서 낸 즙을 찹쌀밥과 흰누룩에 섞어 빚으면 저절로 술이 된다. 맛도 매우 좋다. 산포도도 괜찮다”고 돼 있다. 조선 후기에 저술된 ‘양주방’에는 “익은 포도를 짜서 즙을 내어 두터운 그릇에 담고, 찹쌀을 깨끗이 씻고 또 씻어 묽게 쪄, 좋은 누룩가루를 섞어 포도즙까지 한데 빚으면 자연히 술이 되어 빛과 맛이 좋다. 산포도로도 하고, 빚는 법과 분량의 많고 적음은 보아가며 뜻대로 하라. 술밑을 하려면 찹쌀로 빚는 술방문에 처음에나 이틀째나 포도즙을 섞어 빚되, 방문에서 물을 한 되쯤 덜어라”고 좀더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여기에서 조선시대 포도주는 누룩과 찹쌀고두밥과 포도즙이 함께 들어가는 독특한 방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 근본적인 차이는 조선시대 포도나무가 지금의 포도나무와 다르다는 점이다. 현재 국내 와인 제조장으로 영동의 와인코리아, 천안 두레양조, 안산 대부도의 그린영농조합, 영천의 포도마을이 있다. 이들 제조장에서 포도주의 원료로 쓰는 품종은 주로 생과로 많이 소비되는 캠벨얼리다. 이는 조선시대엔 없었고 1906년에 뚝섬원예모범장이 설립된 이후에 농가에 널리 보급된 품종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포도나무는 어떤 품종인가. 조선시대 포도를 잘 그리기로 소문난 황집중(1533~?)의 ‘묵포도도’에 등장하는 것은 잎이 다섯 갈래진 까마귀머루다.
신사임당의 포도 그림도, 한 개의 포도송이 안에 검붉게 익은 포도와 아직 익지 않은 포도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머루로 여겨진다. 포도는 한 송이에 매달린 알맹이가 한꺼번에 익어가고, 머루는 드문드문 익어가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조선시대 포도주의 원료가 된 것은 머루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포도품종으로 보면 지금의 머루주가 한국 전통 포도주에 근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머루와인 집산지는 무주구천동
머루주는 복분자주처럼 근 10년 새에 제조업체가 급증한 주종(酒種)이다. 현재 머루주를 생산하는 업체가 20개가량 되는데, 제조 방법은 크게 알코올 강화 와인과 정통 와인 방식이 있다. 알코올 강화 와인은 발효시킨 머루즙에 주정을 타고 물로 희석한 술이다. 주정에 의존하니 술 만들기가 쉽고 가격도 저렴하다. 하지만 한국형 전문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와인이라고 말하기엔 미흡한 게 많다. 소주 문화가 강성한 한국 땅에서나 먹히는 알코올의 일종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주를 넣지 않고, 머루에 보당(保糖)하여 발효시킨 정통 와인만으로 좁혀서 살펴보자. 물론 설탕으로 보당하지 않은 와인이라야 정통 와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국산 포도나 머루로는 당을 첨가하지 않고서는 12~13% 발효주를 만들어낼 수 없으니 너무 엄격한 잣대는 들이대지 않기로 하자.
머루와인을 빚는 곳은 많다. 파주 감악산 산머루농원, 봉화 에덴의 동쪽, 함양 두레마을, 임실 금화양조, 진안 마이산 머루주 그리고 무주에 머루주 공장 4곳이 더 있다.
그 가운데 머루 최대의 산지이자 머루주 공장이 4개나 밀집한 전라북도 무주를 찾아갔다. 무주는 군청 차원에서 머루 재배를 권장해 1999년에 머루 재배 면적이 15ha이던 것이 올해는 130ha로 크게 늘었다. 올해 생산량도 400t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무주에서 처음 머루주를 담은 이는 덕유양조의 이재국(45)씨다. 1994년에 주류면허를 얻어 1996년부터 머루주를 출시했다. 덕유양조장을 찾아갔을 때 그는 추석선물 세트를 포장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에게 10년 전에 머루주를 생각하게 된 동기를 물었다.
“무주가 구천동 계곡으로 유명하고 무주리조트까지 들어오면서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딱히 내놓을 만한 관광상품이 없었어요. 무주의 노래 중에서 ‘머루 달래 익어가는 무주구천동’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무주가 두메산골이고 깡촌이니 머루농사를 지어 와인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는 그 직후 파주 산머루농원의 서우석씨에게서 머루 묘목을 사다 심기 시작했다. 현재 전국으로 퍼져 나간 머루는 대부분 파주 서우석씨가 보급한 것들이다. 그리고 서씨의 머루나무는 1970년대에 경기도 남양주에서 김홍집씨에게서 분양받은 것이다. 김씨는 머루를 현재의 품종으로 개량한 농민이다. 그는 열매가 촘촘히 달리는 야생 새머루와 양조용 포도나무인 콩코드를 교잡해 현재의 개량머루를 만들어냈다.
무주 농업기술센터에서 만난 김미중씨는 김씨의 개량머루에 대해 “알의 굵기로 보나 성분으로 보나 콩코드보다는 새머루의 기질이 훨씬 강하게 나타난 품종으로 그냥 산머루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라고 평했다.
덕유양조 이재국씨는 한때 전국 머루주 시장의 50% 이상을 석권했고 지금도 선두주자다. 하지만 그런 그도 정통 와인만 고집할 수 없었다. 7년 넘게 상근 직원 한 명조차 두지 못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것. 결국 이씨는 2003년부터 알코올 강화 와인을 출시한다. 알코올 강화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16%로, 정통 와인 12%보다 훨씬 높다. 그가 알코올 강화 와인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머루와인 시장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증표기도 하다.
품격·품질, 복분자보다 우위
머루주와 비교할 만한 술로 복분자주와 오디주가 있다. 이들 술은 적포도주와 술 빛이 비슷해 잘만 하면 웰빙 바람을 탈 수 있다. 이 가운데 복분자주가 가장 먼저 자리를 잡았다. 현재 머루주 시장이 1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반해 복분자주 시장은 500억원에 육박하고 있다. 하지만 시장규모가 모든 것을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시장규모는 비록 작지만 머루주 시장상황은 복분자주보다 훨씬 탄탄하고 건강하다.
복분자주의 경우 20개가 넘는 제조장에서 알코올 강화 와인만 출시하다가 올해 들어서야 비로소 고창과 횡성에서 정통 와인이 처음 출시됐다. 그 수준은 초기부터 정통 와인으로 제조된 머루주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또 복분자주를 빚는 이들은 수익을 앞세운 투자자가 대부분이지만, 머루주는 직접 머루농사를 지으면서 와인을 빚으려는 농업인들이 시장을 주도해왔다. 머루주가 아직 안정된 시장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품질과 품격에서 복분자주보다는 훨씬 우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덕유양조 이씨는 앞으로 설탕을 넣지 않고 순수한 머루만으로 알코올 8%대의 머루주를 만드는 게 목표다. 말 그대로 순수 머루와인을 만들겠다는 것. 2브릭스(Brix·당도)가 알코올 1%로 전환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8%의 머루주를 만들려면 16브릭스를 확보해야 한다. 머루에서 15~16브릭스를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머루는 평균적으로 포도보다 당도가 1~2브릭스가 높은 편이다. 지난해 무주 적상산 서쪽에 자리잡은 산성와인에서 머루를 수매할 때 당도 16브릭스를 1등급, 15브릭스를 2등급, 14브릭스를 3등급, 13브릭스 이하를 4등급으로 나눈 적이 있다. 이때 1등급이 20%를, 2등급과 3등급이 60%를 차지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간단한 건 아니다. 머루의 크기는 포도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씨앗의 크기는 포도와 같다. 껍질과 씨앗을 빼면 과육은 얼마 남지 않는다. 그래서 머루는 생과로는 먹잘 것이 없어 대부분이 머루즙이나 머루주로 가공된다. 압착 수율을 보면 포도는 75%가량이 즙으로 나오는데, 머루는 55%에 불과하다. 게다가 머루의 가격은 1kg에 2000원이 넘는데, 포도는 1000원이 안 된다. 그러니 머루주 제조원가가 포도주보다 3~4배 높을 수밖에 없다.
머루는 포도보다 색소가 진해서 먹으면 입이 새카매질 정도다. 맛은 포도보다 당도가 높은데도 신맛에 가려서 달다는 느낌이 적게 든다. 또 머루주는 포도주보다 걸쭉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씨가 알코올 8% 와인을 만들어도 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은 머루주가 좀더 옅어져도 좋겠다는 느낌 때문이다.
1 와인살균 냉각기. 산성와인은 완벽한 와인 생산설비를 갖췄다.<!--DC type=br DC-->2 머루를 따는 동네 아주머니들. 보통 9월 초순부터 하순까지 머루를 수확한다.<!--DC type=br DC-->3 개관을 앞둔 산성와인의 통나무집 시음장.
2003년에는 무주에 칠연양조와 샤또무주라는 와인 공장 2개가 더 생겼다. 둘 다 직접 머루를 재배하면서 와인을 만드는 곳이다. 칠연양조 대표 주성규씨는 덕유양조 초창기 멤버다. 덕유양조 이씨로부터 독립한 셈. 주씨는 당초 머루농사를 병행하다가 최근 양조장 일이 바빠지면서 농사는 중단하고 머루를 머루농가에서 수매해 조달하고 있다.
지난해 무주에서 머루를 가장 많이 수매한 곳은 산성와인 제조장이다. 총 170만t을 수매했다. 올해도 170만t을 수매할 예정이니, 무주지역 머루 생산량 400만t(추정치) 절반 가까이를 수매하는 셈이다. 이처럼 막대한 양을 수매하는 산성와인은 무주군청이 머루 소비를 촉진하고 농가 소득을 증진하기 위해 만든 공장이다.
무주군청이 41억원을 투자해 지난해 설립한 산성와인은 올해 7월 첫 상품을 내면서 정식 출범했다. 운영자는 공개모집을 통해 무주 산림조합으로 결정됐다. 무주 산림조합은 계약기간 5년 가운데 3년간은 조건 없이 운영하고 그 뒤 2년은 사용료를 지급하기로 무주군청과 약정했다.
산성와인은 중부고속도로 무주 나들목에서 자동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적상산 서쪽 서창마을에 자리잡은 공장 뒤편으로 적상산의 치맛자락 같은 암벽이 둘러쳐 있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통나무로 지은 예쁜 전시장 건물이 있고, 그 위쪽으로 와인설비가 들어서 있는 건물이 보인다. 시설은 흠잡을 데가 없다. 여과시설에서 살균시설까지, 2만5000ℓ짜리 발효통이 여럿 있고 증류기 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지금까지 지방 관청에서 특산품을 가공처리하기 위해 41억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예가 없다. 실로 과감한 투자이고, 아낌없는 투자가 이뤄진 것이다. 덕분에 산림조합은 3년 동안 금융비나 투자비를 생각하지 않고 공장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조건도 좋다.
산림조합의 권영철 조합장은 “훌륭한 양조 여건을 갖췄다. 이런 여건에서 성공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한국에서 어떤 양조장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다.
산성와인의 주질(酒質)을 초기에 잡아준 이는 두산에서 마주앙을 만들던 이순주씨다. 독일에서 와인을 배운, 이론과 현장경험을 두루 갖춘 와인업계의 원로다. 하지만 지금은 이씨 대신 산림조합의 상임이사인 김대웅씨가 주질을 관리하고 있다.
이제 산성와인은 걸음마 단계다. 산성와인의 미래가 무주 머루농가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술맛 좋고 정직하게 술을 빚는다는 소문이 팔도강산에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생긴다.
무엇보다 무주구천동 계곡이든, 적상산 단풍이든, 무주리조트 스키장이든 무주를 찾는 이들이 반드시 들르고 싶은 관광코스가 되어, 양조장 견학하고 머루주 한잔 맛보고 술 한 병씩 사들고 갈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무주구천동의 와인마스터
무주구천동 삼거리를 지나 덕유산 등줄기를 건너다보는 삼봉산 오두재에 샤또무주 와인공장이 있다. ‘샤또’는 성(城)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와인제조장을 상징하는 말로 곧잘 사용된다. 샤또무주는 해발 898m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샤또무주 조동희 대표는 고랭지 배추밭 1만2000평을 1999년에 구입해 손수 머루를 심고 3년을 기다렸다가 2002년부터 머루주를 담갔다. 판매는 2003년부터 시작했다.
조씨의 이력이 흥미롭다. 한양대 화학과를 나온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다가 다시 쌍방울에서 상품기획을 했다. 연관성을 쉽게 찾기 어려운 이력의 연속이다. 쌍방울에서 영업이사를 지낸 그가 무조구천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무주리조트 영업이사로 자리를 옮기면서다.
리조트 호텔인 티롤의 건립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하면서 그는 유럽의 호텔들을 둘러볼 기회가 많았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유럽의 문화와 와인에 대해 깊이 빠져들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몸담고 있던 회사가 공중분해되자 그는 무주구천동 맞은편 산자락을 사들여 와인 제조장을 마련해 일생일대의 꿈에 도전한다. 그는 유럽을 자주 드나들면서 와인을 공부해, 이제는 와인마스터를 자신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
조씨는 이른바 도메인 와인(직접 농사를 지어서 직접 만드는 와인)을 추구한다. 그는 머루 와인 생산과정의 90%가 머루를 재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좋은 머루를 얻어야 그만큼 좋은 머루주를 얻을 확률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머루농사는 포도농사에 비해 농약을 적게 치는 편이다. 하지만 조씨는 일반 농가에서 5~6번 칠 때 3번만 친다. 비료는 따로 주지 않고, 나무 밑에 자라는 풀을 베어 거름으로 삼는다. 가지치기를 많이 해 열매는 적게 열리더라도 튼실하게 자라게 유도한다.
올해 무주의 머루 수확은 추위가 먼저 오는 샤또무주부터 시작했다. 조씨는 동네 아주머니들 품을 사고,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아들 손도 빌려 머루를 따서 술 빚기에 들어갔다.
컨베이어 벨트에 실린 머루송이는 줄기와 알갱이를 분리하는 기계에 들어가 파쇄돼 통에 담겼다. 으깨진 머루는 다시 간이 발효통에서 효모를 배양한 밑술과 섞여서 발효통으로 옮겨진다. 보당은 간이 발효통에서 이뤄진다.
그로부터 10일가량 지난 뒤에 압착과정을 통해 머루껍질과 즙을 분리한다. 그리고 머루즙만 따로 분리해 탱크에 넣고 실내온도 15℃상태에서 1년 동안 숙성시킨다. 술을 담근 지 1년 뒤에 병에 담는다.
샤또무주의 와인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가 마지막 병에 담는 단계에서도 와인을 살균하지 않는다는 것. 머루 와인은 알코올을 마시는 게 아니라 머루가 발효과정을 거치면서 얻는 성분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게 조씨의 생각이다.
입소문으로 팔려 나가는 술
샤또무주의 와인병에는 제조년도를 표시한 빈티지가 있다. 출고량과 재고량이 불안정성한데다 세무서에 신고해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다른 와인 제조장에서는 빈티지를 적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샤또무주는 또 별도의 유통대리점을 두고 있지 않다. 입소문에 의존해 택배 주문만으로 와인을 판매한다. 샤또무주에서는 올 추석을 맞아 기존 고객 2000명에게 상품안내문을 우편 발송한 게 홍보의 전부라고 했다. 그래도 입소문을 타서인지 주문은 끊이지 않았다.
산 아래 와인공장들이 ‘전투상황’인 것과 달리 산중 샤또무주는 느긋해 보인다. 손수 농사지은 머루로 술을 빚고, 잊고 있던 친구가 찾아오듯 전화주문이 오면 이튿날 아침에 택배회사 직원에게 맡겨 와인을 세상에 내보내는 모습이 그렇다. 한 해에 판매하는 양도 750ml 와인 3만병을 넘지 않는다. 술이 떨어지면 그만이고, 또 한 해를 기다렸다가 술을 낼 줄 아는 여유가 있다.
일에 쫓기고 돈에 쫓기는 게 요즈음 양조장 풍경인데, 샤또무주의 조씨에게선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섬세한 장인의 모습이 엿보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양조장을 돌아나오면서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인이 편안하면 술도 편안한 법이다.
무주에 있는 와인제조장 네 곳을 사흘 동안 돌아봤다. 연륜이 다르고, 규모가 다르고, 발상이 다르지만 저마다 탄탄한 기반을 지닌 머루주 제조장들이었다. 제대로 된 한국 와인을 만들어 수입 와인에 맞서려는 기반도 마련했고 솜씨도 지녔다. 그들을 아우르고 그들과 소통하는 와인발효연구소가 무주군에 들어서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 좋아하고 프랑스 와인 문화를 잘 이해한다면서 우리 와인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무주를 여행하라고 권하고 싶다. 와인 사대주의에 젖어 우리 와인을 백안시하는 이들이 흔히 “마실 만한 게 뭐 있어?”라고 말하는데, 그들에게 무주의 머루와인을 맛보고 나서 다시 만나자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