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 자료에 따르면 지난 6~7월에 출간된 논술 관련 서적이 무려 50여 종에 이른다.
“책을 다 읽고 써야지. 무조건 많이 쓴다고 좋은 게 아냐.”
“아냐, 엄마. 다 읽었어. 읽으면서 중요한 내용은 생각주머니에 넣어두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빨리 쓸 수 있더라고.”
“생각주머니?”
읽고 쓰기를 반복하면서 저절로 줄거리를 요약하고, 질문을 던지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술을 터득한 것이다. 요즘 아이는 책을 읽고 쓰는 일보다 말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 “내가 얘기해줄게” 하고는 두서없는 이야기를 끝도 없이 종알댄다. 지껄일수록 이야기에 조리가 생겨 점점 들을 만해지고, 그럴수록 아이는 더욱 신이 나서 책을 읽는 눈치다.
인문·교양 사라지고 논술만 남아
하지만 이 녀석의 행복한 책읽기도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초등학생의 독서나 글쓰기마저 대학 입시형 논술 체제로 바뀌고 있다. 심지어 일기 쓰기도 논술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강조되는 판이다.
교보문고 자료를 보면 올해 6~7월에만 논술 관련 신간이 무려 50종이나 나왔다.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00시리즈’ ‘통합형 논술 대비 과학 필독서’ 식으로 묶여져 나오는 참고서형 책까지 논술은 출판시장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심지어 각 출판사의 간판인 문학전집도 슬그머니 논술대비용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다. 출판에서 인문·교양은 사라지고 논술만 남았다는 이야기가 과장은 아닌 듯하다.
단답형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창의력, 사고력을 길러주기 위해 논술을 도입한다지만 실제 시중에 나와 있는 논술 관련 책들은 최근 출제경향 분석에서부터 쟁점정리, 논리전개 훈련까지 정답 유도형이 대부분이다. 논술이라는 방식으로 또다시 정답 찾기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2003년 부산과학영재학교 개교를 앞두고 신입생 선발 기준을 취재한 적이 있다. 당시 ‘창의적 문제 해결력 검사’는 학생들에게 물의 순환과정을 묘사한 그림, 물과 관련한 분야별 과학논문, 기상이변에 대한 기사 등 300쪽에 달하는 자료집을 주고 끝이었다. 학생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학생 선발에 참여했던 이상천 경남대 과학영재교육원 원장은 “학습된 지식을 측정하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해결하는 능력을 평가했다”고 설명했다. 이 테스트를 받은 아이들의 반응도 재미있다. “문제를 푸는 9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데 감사한다”….
그렇다. 똑똑한 아이는 주어진 문제를 잘 푼다. 그러나 영재는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그 문제 속에서 놀 줄 안다. 논술도 영재교육과 마찬가지다. 일단 책의 바다에 빠뜨려놓고 마음껏 놀게 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생각주머니가 채워지고, 하고 싶은 말이 가득 차면 저절로 입을 벌린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생각주머니가 채워지기를 기다리지 못해서, 입을 억지로 벌려 넣어주고 익기도 전에 다시 꺼내려 하기 때문에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