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의대생 OK, 곱슬머리는 안돼”

  • 하태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1-15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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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1일 오후 4시. 서울대병원 1층 비뇨기과에는 ‘정자은행(精子銀行)’이라는 현판이 막 걸리고 있었다. 1993년 이후 중단됐던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위한 정자은행의 설치 및 운영을 공식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정자은행이란 정자를 채취한 뒤 냉동보존액과 혼합해 용기에 넣고 영하 196도의 액체질소 탱크에 냉동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녹여 인공수정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보관시설과 시술기관.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 등으로 인해 정자생성 기능에 장애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남자나 정관수술 전 만일에 대비해 정자를 보관하고자 하는 사람은 물론 익명의 남성에게 정자를 얻으려는 불임부부도 이용할 수 있다.

    정자를 얼려서 보존하는 기술은 1776년 스팔란차니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눈속에서도 사람의 정자가 살아 있음을 관찰해 연구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 후 약 1세기가 지난 뒤 종우(種牛)를 보존하려는 목적과 전쟁에서 사망한 남편의 아이를 수태하기 위해 정자은행의 필요성이 처음 소개됐다. 하지만 당시 동결된 정자의 생존율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46년 글리세롤이라는 물질이 냉동으로 인한 손상에 대해 괄목할 만한 보호효과가 있다는 것이 확인된 뒤로 글리세롤을 이용한 정자의 동결이 처음 시도됐다. 그리고 1953년, 인간의 동결정자를 이용한 최초의 임신이 보고됐다.

    정자은행의 탄생

    일반적으로 정자은행의 목적은 나중에 배우자와 수정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자를 보관해 두는 자가 정자동결과 비배우자와 수정하기 위한 공여자 정자동결로 대별할 수 있다. 자가 정자동결은 정관수술과 같은 불임시술 전에 자신의 정자를 얼려서 보관하는 경우 등이 있다. 항암치료에 이용되는 몇몇 항암제들, 콜치신 등의 화학요법, 그릭 방사선 요법 등은 고환의 정자생산기능에 치명적인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젊은 연령층에서도 암환자가 증가하고 있어 항암요법, 방사선요법, 골수이식술 등이 많이 시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암 치료 시작 전 자신의 정자를 보존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동결보존한 정자는 나중에 수정이 필요한 경우 녹여서 사용하면 된다. 정자를 녹여 처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기본적인 원리는 동결보존액을 제거하고 비교적 운동성이 좋은 정자를 선택하여 배란기에 접어든 배우자의 자궁 내에 직접 주입하는 것이다. 임신율은 50∼60%에 이른다.

    이에 비해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위한 공여 정자동결은 고환의 정자생산 기능이 완전 파괴된 환자들에게 적용하는 치료법이다. 최근 세포질내 정자주입법(ICSI)이라는 진보된 보조생식술은 남성불임증의 상당부분을 해결했지만 고환의 정자생산 기능이 완전히 파괴된 환자에게는 아직도 비배우자 인공수정과 입양이 유일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은 건강한 공여자의 정자를 이용하여 수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입양에 비해 모계의 유전적 특성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간정자의 동결보존은 1970년대부터 널리 이용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정관수술에 앞서 수정능력을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상업적 정자은행이 발달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몇몇 대학병원에서도 정자은행이 설립되어 현재 150개 이상에 이르고 있다. 프랑스에는 정부가 관리하는 15개의 정자은행이 있으며 이들을 중앙정자은행에서 총괄한다. 유럽에서는 주로 정부기관에 의한 정자은행이, 미국에서는 상업적 정자은행 혹은 대학 등의 연구기관내에 정자은행이 설립,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동양권의 여러 나라에서는 자신의 혈통을 유지하려는 전통적 관념이나 AIDS와 같이 성교를 통해 전파되는 질환의 위험 때문에 비배우자 인공수정은 제한적으로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구미에서는 정자은행 운영에 미국 불임학회가 제정한 정자의 선별, 동결보존과 이용 그리고 비배우자 인공수정에 관한 지침을 따르고 있다. 이 지침은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의 빈도가 증가하고 성교전파성 질환 중 AIDS의 중요성이 점차 증가하면서 1896년과 1993년 사이에 네 차례나 개정된 바 있다.

    법적 부부만 이용 가능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대학병원과 종합병원 산부인과에서 냉동보존설비를 갖추고 있지만 배우자간 인공수정을 위하여 남편의 정자를 제한된 기간만 냉동보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1993년 초 경희대병원이 AIDS 선별검사가 시행되지 않은 신선정액(Fresh Sperm)을 이용한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을 하다가 적발돼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대학의 중견교수들이 해직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자극받아 대한의학협회는 1993년 5월 6일 ‘인공수태 윤리에 관한 선언’을 제정, 선포했다.

    이 선언은 98년 11월5일 대한산부인과학회 인공수태 시술의료기관 심사소위원회에서 정한 ‘대한산부인과학회 보조생식술 윤리지침’으로 나타났다.

    이 지침에 따르면 비배우자 인공수정은 ▲이것 이외의 의료행위에 의해서는 임신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에 한하여 시술 ▲법률적 혼인관계에 있는 부부만을 대상 ▲남편의 적극적 동의하에 시행 ▲동일 공여자의 정액은 10회 이하 임신에 한해 사용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정액공여자의 신분은 비밀을 보장해야 하며 정액공여자에 대해서도 시술결과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규정을 두고 있다.

    대한의학협회가 이와 같은 기준을 제정하기는 했지만 법적인 제약이 없는 탓에 국내 정자은행의 운영은 병원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국내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정자은행을 표방하며 운영을 시작한 것은 부산대학병원이다. 1997년 4월 부산대병원 신관3층에 문을 연 정자은행을 이끌고 있는 사람은 박남철(朴南喆) 교수. 1993년 경희대 사건의 여파로 같은 대학의 김모교수가 면직처분을 받은 뒤 미국 등 해외에서 정자은행을 집중 연구한 뒤 ‘제대로 된’ 정자은행을 만든 것. 박교수의 노하우는 2월에 문을 연 서울대 정자은행에 영향을 주었고 개원을 준비중인 전남대 정자은행도 부산대를 벤치마킹하고 있을 정도. 부산대 병원은 97년 11월부터 정자를 팔기 시작해 156쌍의 불임부부를 상대로 186번의 불임시술을 해줬다. 성공률은 약 45%. 다른 사람의 정자를 사서 시술을 받을 경우 시술비는 50만~60만원이다.

    부산대의 자랑은 정자은행을 찾는 고객이 원하는 정자를 자동으로 고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산화 프로그램. 불임부부가 비배우자의 정자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체형 및 유전학적 특성인 혈액형, 신장, 체중, 체형, 홍채, 모발색, 모발형, 피부색 이외에도 학력, 취미 등이 입력된 프로그램에 자신이 적당한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원하는 정자를 찾아준다.

    부산대 정자은행에 정자를 의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산의대생이다. 정자은행규정에는 ‘20세 이상 40세 미만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자’를 정자제공 가능자로 명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의대생이 주요 공급원이라는 것. 정자은행장이기도 한 박남철 교수는 의대생들의 수강과목인 남성불임에 대해 강의할 때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홍보하면서 정자를 제공하라고 적극 권유한다. 수술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임부부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정자를 기꺼이 제공할 줄 아는 용기도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고 설득하면 적지 않은 학생들이 정자제공 의사를 밝힌다는 것. 현재 보유중인 정자수는 328개로 54명에게서 받은 것이며 학생 이외에 제약회사직원의 정자도 일부 포함돼 있다.

    정자은행이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는 정자를 공여받아 장래 부모가 될 사람들의 경제력과 사람 됨됨이. 남편의 경우 자신의 정자로 임신된 아이가 아니라는 의식이 잠재해서 아이가 지나치게 말썽을 부리거나 정신적인 질환 등 병리현상을 보일 경우 아이를 내팽개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인 위기에 몰릴 경우에도 아이에 대한 양육책임을 다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주민등록등본이나 재산세 납부증명서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여성전문 종합병원인 미즈메디병원(옛 영동제일병원)은 부산대보다 일러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자은행을 운영하고 있는데 현재 보유하고 있는 정액캡슐 수만 해도 100여개다. 미즈메디병원은 19~29세까지의 대학생과 대학원생을 정자제공 ‘인력풀’로 삼고 있다. 정자공여자의 연령층을 19~39세로 정한 미국보다도 엄격한 기준이다. 이 병원의 정자제공자는 조정현 부원장의 출신대학교 학생이 대부분이다. 주로 인적인 연결고리를 이용한 ‘점조직’식 정자수급방식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 예과 학생들이 회식을 할 경우 조박사에게는 고급 정자를 확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조정현 박사는 “서울대 연세대 등 대학신문에 정자 모집 광고를 내려고 했으나 학교측에서 난색을 표명하는 바람에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며 “정자공급이 양성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재 상황에는 안정적으로 양질의 정자를 확보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즈메디병원은 정자제공자의 신체적인 특성과 혈액형 등 기본사항은 물론 고객의 요구가 있을 경우 출신학교와 전공정도는 알려준다. 시술비는 40만∼50만원 정도.

    한달에 3,4건의 인공수태시술을 해주는 삼성제일병원도 정자은행에 관한 한 국내 최상급 수준을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300여 개의 정자샘플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제일병원은 신장 165∼185㎝의 평균적인 20대 대학생의 정자를 보유하고 있다. 연세대 성균관대 한양대 재학생이 대부분.

    서울대가 정자은행을 열기 전까지 서울대에서 의뢰한 비배우자 인공수정을 전담하던 산부인과 전문병원 함춘클리닉은 서울의대생의 정자만 고집한다. 자신의 정자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가능한 한 가장 양질의 정자를 택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두뇌 능력이 뛰어난 서울의대생의 정자를 선호한다는 것. 김기철 박사는 “이외에도 우리 병원에서는 다른 병원과는 달리 염색체 검사까지 정액검사 항목에 포함하고 있어 비배우자 인공수정으로 인해 유전적으로 이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술비는 25만원선.

    그렇다면 불임부부들이 정자은행에 와 자기가 원하는 정액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을까? 미국 등 상업적 정자은행이 발달한 곳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만 불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안 된다. 정자공여자의 사진이나 자세한 신상을 공개할 경우 익명성이 보장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 각 병원이 확보하고 있는 정자 샘플 수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객의 수요에 부응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한 병원의 정자은행 관리자는 “시장이 공개되지 않은 탓에 정자은행에 정자를 제공하는 예금자가 태부족인 상황”이라며 “불임부부가 찾을 때 즉시 필요한 정자를 공급하는 것만도 벅찰 때가 많다”고 털어 놓았다.

    구두닦이의 정액(精液)

    갓 받아낸 따끈따끈한 정자를 그대로 예비엄마의 체내에 집어넣어 인공수정하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아무 대책없이 즉흥적으로 정자를 모았다. 물론 좋은 환경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의대생들이 주요 ‘희생자’였기 때문에 위험하지는 않더라도 감염된 정자가 제공될 가능성을 늘 안고 있었던 셈이다. 우스갯소리로 들리지만 지도교수로부터 정액을 받아오라는 추상 같은 명령을 받은 예과학생이 학교구내에서 구두를 닦는 사람에게 소정의 수고료를 주고 정자채취 ‘하청’을 맡기기도 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던 시절도 있다.

    ‘자위행위를 하면 돈을 드립니다’라는 광고가 버젓이 나오는 미국의 경우 전국에 150여개 정자은행이 성업중이며 한 번에 40달러(약 5만원) 정도를 준다. 정자은행의 최적 입지조건은 단연 대학교 주변으로 ‘캘리포니아 냉동은행’ 같은 대규모 정자은행은 하버드, MIT, 스탠퍼드, 버클리 등 명문대생의 정자를 서둘러 사들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정자는 덴마크 남성의 정자로 없어서 못 팔 정도란다. 덴마크의 크리스 정자은행은 호주 미국 동구권 등 세계 25개국에 덴마크 남자의 정자를 수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자은행별로 차이는 있지만 교통비조로 6만∼7만원을 지급하는 것이 상례. 그러나 병원측은 정자제공을 위해서는 매독검사, 간염바이러스검사, 에이즈검사, 소변검사, 염색체 확인 등을 거치기 때문에 돈을 받으면서 건강검진도 공짜로 하는 셈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부산대병원과 서울대병원의 경우는 조금 다른 방식을 채택한다. 현금을 주는 대신 문화상품권이나 도서상품권 등을 지급한다. 이들이 현금 대신 유가증권을 지급하는 논리는 이렇다. 매혈과 헌혈을 비교했을 때 헌혈의 경우가 피의 품질이 좋았듯이 돈을 받고 정자를 공여하는 방식은 자칫 상업적인 목적 때문에 몸을 판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잡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 이와 같은 ‘철학(?)’에 기반을 두었는지 함춘클리닉은 공식적으로는 정자제공에 대한 금전적·물질적인 보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대신 정자은행은 보관중인 정자를 고객에게 내줄 때 20만∼25만원을 받는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양질의 정자를 제공한 것은 물론 질소탱크 등 특수시설에 넣고 보관해 온 대가인 셈.

    어쨌든 정자를 제공하는 대가로 고작 6만∼7만원의 현금을 받거나 문화상품권 정도를 받는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할 때 돈을 보고 자발적으로 정자를 공여하는 경우는 드물다.

    돈벌이라 할 수 있나요?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용돈을 벌기 위해 병원을 찾는 대학생들이 그런대로 정자 공급망 노릇을 했지만 요즘은 이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한 의대 교수는 “과외 허용조치가 정자은행의 씨를 말렸다”고 말했다.

    돈벌이가 쉬워진 대학생들이 더는 번거롭고 찜찜한 ‘아르바이트’를 원치 않게 됐다는 것. 정자를 제공하려면 먼저 에이즈 매독 간염 등의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혈액 검사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원칙대로 하자면 에이즈균의 잠복기를 감안해 6개월 후에 다시 검사를 받아야 비로소 정자를 제공할 자격이 주어진다. 또한 자위행위를 통해 정액을 받아내는 일이 수치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결코 ‘돈 보고 할 짓’은 못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 정자은행에 자신의 정자를 기탁한 의대생 A씨도 선배의 권유를 받고 어렵사리 정자를 제공한 케이스. 대놓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끔씩 절친한 친구들과 정자제공에 관한 토론을 벌이는데, 혐오감을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혈육이 활보하고 다닌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끔찍하다거나, 다른 사람의 정자를 받아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정자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는 해외토픽 기사가 남의 일 같지 않다는 얘기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A씨는 “선뜻 내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정자를 기증할 수 있었던 것은 예과시절 생명과 윤리라는 시간에 들었던 강의 때문이었다”며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자녀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보통사람에게 정자를 공여하는 것도 작은 사랑의 실천이라는 생각에 결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정자를 제공할 ‘인력풀’을 갖출 수 없다고 해서 아무 정자나 다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즈메디병원의 전종식 정자은행장은 “고등교육을 받은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한 젊은 남성이라야 대상이 될 수 있다. 유전적 측면을 고려해 키가 너무 크거나 작아도 안 되고, 피부색이 너무 검거나 하얘서도 안 된다. 한국인에겐 드문 편인 곱슬머리도 곤란하다”고 말한다. 정자가 모자라는데도 헌혈 캠페인 같은 대대적인 정자기증운동을 벌일 수도 없는 사정이 여기에 있다.

    그나마 몇몇 대학병원이나 대형 종합병원에서는 의대생과 젊은 전문의들에 의해 정자은행의 명맥이 근근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은 지적 능력이 우수한데다 무엇보다 유전성·감염성 질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어 비교적 신뢰도가 높은 정자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

    게다가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정자의 가임 최저선은 1회 사정시 정액 2㏄ 이상, 정액 1㏄당 정자 2000만 마리 이상, 또한 정자의 30% 이상이 정상형태여야 하며 50% 이상이 정상적인 운동성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사리 받은 정자라도 20% 정도는 폐기처분된다.

    정자은행은 정자의 공여과정에 생길 갖가지 윤리적·법적 문제 때문에 정자를 제공하는 사람이건 받는 사람이건 복잡하고도 상세히 기술된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고 서명해야 한다.

    서울대학교 정자은행이 만든 계약서에 따르면 자기 정자를 내놓는 사람의 경우 ▲자신의 정자로 출생한 아이에 대해 법적으로나 그외 어떠한 관계에서도 자신의 자식임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정자를 제공받은 인물의 신분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법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신분도 엄격하게 비밀로 할 것을 서약해야 한다. 또한 자기 정자를 비배우자 인공수정용으로 내놓은 경우 그 정자를 자기 배우자의 임신을 위해 방출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정자를 받는 부부는 태어난 아이가 법적으로 자신들의 아이임을 인정하고 부양의무를 부담할 것이며 상속권도 인정하겠다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또한 인공수정으로 신체적·정신적 결함이 있는 아이가 태어날 위험성이 있으며 인공수정으로 출생한 아이의 신체적·정신적 결함에 대해서 병원과 정자은행 종사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인정한다는 대목도 눈에 띈다.

    하지만 무엇보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점은 친족으로부터 정자를 공여받아 인공수정하는 것을 허용할 것인가의 여부다. 이런 논란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발생하는 문제인데 씨족의식이 강한 우리민족은 가능하면 ‘남의 씨’보다는 ‘우리 씨’로 임신하려는 성향이 많기 때문에 일어난다. 구체적으로는 남편의 형제로부터 정자를 제공받아 아기를 갖겠다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 대목에 대해서는 대한의학협회나 대한산부인과학회 등이 내놓은 윤리지침에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미즈메디병원은 가족구성원으로부터 정자를 공여받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같은 값이면 가족의 씨를 얻겠다는 인간적인 여망을 거절할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정자를 공여하는 사람과 정자를 받는 부부를 비롯한 가족 구성원 전체가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

    그러나 가족구성원간의 정자제공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시아주버니나 시동생의 정자로 아기를 가진 경우 ‘정신적 근친상간’이라는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친척, 가족간에 비정상적인 감정이 생길 우려도 있다. 훗날 상속 등을 둘러싼 법적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친족간 정자공여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편에 있는 서울대 산부인과 문신용 교수는 “친족간의 정자공여는 비배우자 인공수정의 제1원칙인 익명성 보장에 위배된다”며 “친족간 정자공여는 절대로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가차원의 통합관리 필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정자은행의 설립이나 운영을 제어하는 아무런 법적 장치가 없다. 물론 대한의학협회가 이미 6년 전 ‘인공수태윤리에 관한 선언’을 제정, 발표했지만 아직까지도 인공수정이나 정자은행과 관련한 법률적인 보호장치가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다.

    공익적 정자은행의 설립도 미진한 실정. 그러므로 과거의 불미스러운 상황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공신력 있는 정부기관 혹은 국립대학병원 내에 법적 보호장치가 있는 정자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본격적 정자은행의 효시격인 부산대정자은행의 박남철 교수는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악전고투중”이라며 “뇌사자 장기관리에 대해 정부가 관심을 보였듯이 정자은행의 통합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말했다.

    미즈메디병원의 조정현 박사도 “선택의 폭도 좁고 보유하고 있는 정자의 수도 태부족인 상태에 안정적인 정자의 공급을 위해서는 국립혈액원과 같은 개념의 국립정자은행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정자제공자가 부족할 경우 한 사람의 정자를 여러 쌍의 불임부부에게 제공하는데 따른 부작용도 나타날 수 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성장해 서로 결혼할 경우 근친상간이라는 도덕적 문제는 물론, 유전학적으로 열성 인자가 발현되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원칙적으로는 한 사람이 10인 이상을 임신시키지 못하게 되어 있지만 그 준수 여부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 있다. 정자은행을 운영하는 개개 은행은 정자공여자의 익명성을 보장해 준다는 조건으로 정자를 공여받기 때문에 또 다른 병원에 정자를 제공한다 해도 이를 막거나 감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대 의대 백제승 교수는 “이런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춘 공공기관이 정자은행을 통합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업적인 정자은행이 크게 활성화되고 있는 서구에 비해 우리나라의 정자은행은 병원에 커다란 재정수입을 가져다주지는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와세다대학이나 게이오대학 출신 변호사들의 정자가 120만엔에 팔리고 있으며 중국 상하이(上海)의 정자은행이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정자를 기증해 달라는 광고를 띄우자 100여명이 정자를 기증하겠다고 몰려들었다는 뉴스는 먼 나라 얘기로 들린다.

    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

    미즈메디의 조정현 박사는 어느 불임부부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내놓았다. ‘스무살의 철없는 어린 나이에 지금의 신랑을 만났고 오로지 저만을 사랑해 주는 신랑과 6년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 꿈 같은 신혼생활을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 편지는 그러나 더 이상 행복한 결혼이야기로 꾸며져 있지 않다.

    이들 부부에게는 결혼 3개월 만에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졌다. 예기치 못한 교통사고로 남편의 하반신이 완전 마비된 것. 2년여의 세월이 지나 남편이 정신적·신체적 고통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지만 정상적인 부부처럼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가질 수는 없었다.

    이들 부부는 담당 의사와 상담한 끝에 전기자극 충격요법으로 체외수정을 하기로 했다. 체외수정이기는 하지만 내 씨를 가지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남편은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임신을 하려고 애쓰는 중에 남편은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척추에 이상이 생겼고 전기충격을 가할 경우 신체에 큰 무리를 일으킬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애착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정자은행에서 다른 남자의 정자를 이용해 아이를 갖기로 했다. 그래도 절반은 우리 부부의 피가 섞이는 셈이라며 애써 위안을 삼았다. 조박사는 이들이 보낸 편지를 받은 뒤 흔쾌히 자신이 보관중인 정자은행의 우수한 정자를 이용해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을 하기로 결심했고 현재 이 부부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아이를 정성껏 키우고 있다.

    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은 이처럼 절박한 심정에서 병원 문을 두드린다. 결코 사치나 허영의식이 개입할 수 없는 애절함이 있는 것이다. 조정현 박사는 “물론 정자은행을 찾는 사람들이 공개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들을 향해 보내는 의혹의 시선을 이제는 거둬들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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