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념과 실제 사이
북한과 미국 사이에는 최근 교역이 활발해지고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면서 관계가 개선되고 있지만, 양국간에 아직 긴장은 남아 있습니다. 서방 전문가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귀하는 북한 총리로서 북한의 군사적 목표와 남한, 일본 등 주변국들 간 경제적 정치적 관계에 대해서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귀하가 연설할 구체적인 주제는 물론 전적으로 귀하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이를 위한 협의는 한결 솔직하게 토론할 수 있게 협의회의 전통적인 룰에 따라 진행될 것입니다.…”
이것은 미국의 외교정책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교협의회의 레슬리 겔브(Leslie H. Gelb) 회장이 북한의 강성산(姜成山) 당시 총리에게 보낸 서신 내용이다. 기자가 입수한 자료에 의하면, 날짜는 ‘June 15, 199’로만 돼 있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1995년임이 분명하다. 1994년 6월이라면 미국이 평양 폭격을 계획했을 정도로 양측 관계가 급박하게 돌아갈 때이고, 서신에 나와 있는대로 국제연합 창립 50주년이라면 1995년이기 때문이다.
1995년 6월에 미 외교협의회가 북한 총리를 뉴욕에 초청했다? 이건 이번에 처음 밝혀지는 사실이면서 동시에 저간의 ‘통념’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왜 그런가?
1995년 당시는 남·북한과 미국 사이에 북한 경수로 건설 문제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였다. 93년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본격화된 북한 핵문제가 파국을 향해 치닫다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로 극적인 반전을 겪은 후, 양국간에 관계개선을 위한 물밑 탐색전이 한참 벌어지던 국면이었던 것이다. ‘한국형 경수로’를 줄기차게 고집하는 한국을 사이에 놓고, 북·미는 1995년 6월12일 콸라룸푸르에서 열린 준고위급회담에서 경수로 제공과 관련한 제반 사항을 합의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 경제는 이미 피폐할 대로 피폐한 상태였다. 심지어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 2기를 약속하면서까지 제네바 합의를 성사시킨 배경에는 북한 정권의 ‘잔여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정설’처럼 돼 있을 정도였다. 경수로 건설기간 10년이 다 가기 전에 북한체제는 붕괴할 것이고, 따라서 경수로 건설 약속은 부도수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계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에 따라서 미국의 민간 기업·단체들은 대북 진출에 관심도, 의지도 없다는 게 저간의 ‘정설’이었다. 북한은 경제활동의 전제가 되는 인프라가 열악하고 자본주의 경제운용 방식에 무지하며, 더욱이 언제 다시 고조될지 모르는 남·북관계의 위험 부담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미국 기업으로서는 한 마디로 북한에서 “얻을 게 없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미국기업들은 한국 기업과 동반해서 대북 진출을 도모하거나, 훗날 제반 여건이 웬만큼 성숙할 때 비로소 북한에 진출할 것이라는 게 그동안의 지배적인 분석이었다.
사적이고 솔직한 대화를 갖자…
그러나 그런 논리는 ‘표면상의’ 논리일 뿐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기자가 입수한 자료의 상당 부분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정부와 민간 기업·단체들은 대북 경제제재와 적성국교역금지법(Enemy Act) 등 북한과의 경제관계를 가로막는 미국 내의 갖가지 규제장치들에도 불구하고 1995년부터 이미 대북 진출을 신중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우선, 몇 가지 자료를 좀 더 살펴보자.
▲ 하버드대학 페어뱅크 동아시아 연구센터의 에즈라 보겔(Ezra Vogel) 박사가 북한 외교부 이형철 미주국장에게 보낸 1995년 12월12일자 서신 중에서.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내 친구인 스티븐 린튼 박사로부터 박석균(Pak Sok Gyun)씨를 만나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데에 귀하가 도움을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와 같은 비공식적, 비공개 대화는 우리 양국간의 이해를 증진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학술대표단이 미국에 와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과 공개된 장소에서 여러 차례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면담은 양측의 공식적인 주장만을 천명한 채 결국 논쟁으로 이어졌을 뿐입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좀 더 사적인 토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샌 넌 상원의원은 린튼 박사에게 자신이 1994년 카터대통령 방북 이전에 받았던 방북 초청이 아직 유효한지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미·북 대화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의회와 정부 내의 다른 고위 인사들도 고위급 접촉에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같은 생산적인 의견교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워싱턴 정부에 2년간 봉사하고 지난 9월 하버드대학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여행을 하기에 좀 더 자유롭습니다. 하버드에서의 강의일정 때문에 1월 말에서 5월 말까지는 여행하기가 어렵지만, 1월 중순에는 며칠간 여유를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1월20일 이후 며칠간 베이징에 체류할 계획이지만, 그 전 며칠간 스티븐 린튼 박사와 함께 평양을 여행할 수 있습니다.
귀하의 정부가 그같은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접촉에 관심이 있다면 린튼박사나 나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린튼 박사와 나는 평양이나 다른 곳에서 귀하나 귀하의 동료들과 만나서 샌 넌 상원의원같은 분들의 방북문제를 논의할 기회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양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 사이에서 우호적이고 솔직하며 생산적인 의견교환을 나누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해서 토론할 기회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이 서신을 보낸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93∼95년에 미 국가정보위원회(NIS) 동아시아 담당관을 지낸,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동북아문제 전문가다. 서신에 등장하는 스티븐 린튼 박사 역시 미국의 대표적인 민간 대북구호단체인 유진벨(Eugine Bell) 재단을 세워 북한에 식량지원과 결핵퇴치 사업 등을 지원하면서 수십 차례 북한을 방문한 인사다. 한편 이 서신의 수신자인 이형철 국장은 북한 외교부 내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알려진 인물. 이들간에 ‘비공식적이고 사적이며, 보다 솔직한 대화’의 필요성이 언급되고 있는 게 흥미롭다.)
▲ 미 노틸러스 연구소의 피터 헤이즈(Peter Hayes) 박사가 뉴욕소재 북한 유엔대표부에 보낸 1995년 8월4일자 서신 중에서.
“이 서신은 북한대표부에 인터넷 설비를 제공하고, 대표부와 평양에 있는 스태프를 (우리 바람으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교육하기로 합의한 우리의 논의에 따른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서는 한정된 자원 때문에 귀하가 속한 대표부에만 인터넷 장비를 설치할 수 있습니다(여기에는 컴퓨터·모뎀·소프트웨어의 제공, 여행경비, 숙박비 및 뉴욕 혹은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교육비용이 포함됩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통신센터의 스태프 두 명을 교육하는 데 필요한 추가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재정적 준비가 확실하게 확보되기 전까지 기다리는 게 나을 듯 합니다.
이런 일에는 어쨌든 서류작업에 일정 시간이 걸리는 까닭에 여기 ‘인수서류’를 동봉해 보냅니다. 귀하는 이 서류에 서명한 뒤 우리측 워싱턴 사무실의 스티븐 뇌퍼 박사에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발송봉투와 서류를 동봉했으므로 귀하는 1-800-0000000 페데럴 익스프레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서 서류를 건네주기만 하면 됩니다. 뇌퍼 박사는 그 서류를 받아서 워싱턴 관료조직을 통해 수출허가를 획득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런 지루하고 복잡한 절차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긍정적인 결론이 나올 것으로 믿고 있으며, 최소한 대표부에 대한 교육문제는 향후 몇 달 이내에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요한 자원이 확보되는대로 평양측 요원들에 대한 교육도 동시에 혹은 추후에 이뤄질 것입니다.
이 서신이 전달됐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며칠 뒤에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피터 헤이즈 박사 역시 한반도문제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핵문제 전문가인 헤이즈 박사는 90년대 이래 미 캘리포니아에서 동북아 지역의 안보·에너지·환경 문제 등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노틸러스연구소(민간)를 운영해오고 있다. 한편 스티븐 뇌퍼 박사는 하와이 주둔 미 태평양사령부 산하 연구소에 근무하는 동북아 전문가인데, 이렇게 보면 민간·정부산하 연구소의 전문가 2명이 미국내의 유일한 북한 공식기관인 유엔대표부에 컴퓨터 및 관련 장비를 ‘기증’하기 위해서 뛰었다는 말이 된다.
미국 기업들의 대북 타진
90년대 초, 북한이 핵문제를 들고 국제사회에 ‘깡패 국가’로 부각될 때만 해도 미국이 보기에 북한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나라’였다. 그래서 미국은 구소련이나 동유럽, 중국 등 사회주의권 국가들과도 구별되는 북한의 행태나 협상 테크닉을 파악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북한 정보에 관한 한 최고임을 자부하던’ 한국측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점점 커지고, 현실에서 북한과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미국의 대북한 정보력은 그새 수직 상승곡선을 그렸다는 게 여러 전문가들의 말이다. 북한은 더 이상 ‘미지의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 본 것과 같은 갖가지 ‘비공식적’ 혹은 ‘인도적 차원’의 접촉 노력이 그러한 변화에 크게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자료에 의하면, 미국의 여러 민간기업들도 1995년 당시 북한의 문을 두드렸다. 이미 1995년 당시에 CNN, 코카콜라, AT · T 등 미국 유수의 대기업들이 북한과 접촉하고 있다는 소문은 나돌았지만, 해당 기업 임원이 공개리에 방북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구체적인 행보는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보자.
▲ 코카콜라의 아틀랜타 본사 장-미첼 복(Jean-Michel Bock) 부회장이 뉴욕 북한대표부 박길연 대사에게 보낸 편지(1995년 1월17일자)
“뉴욕으로 귀환하는 비행편이 편안하셨으리라고 믿으며, 귀하의 짧은 아틀랜타 체재가 즐겁고 유익한 것이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귀하를 만나 짧게나마 코카콜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대프트(Daft)씨에게서 말씀을 들으셨듯이, 올 봄 어느 시점에 우리측 경영진 2∼3명이 평양을 방문하는 사안에 대해서 귀하가 보여준 지지와 지침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들의 약력은 아래에 첨부돼 있습니다. 우리측의 이번 평양 방문은 미국 법률이 허용하는 시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코카콜라를 생산·배포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이 목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귀국 내에서 우리 제품을 생산할 회사를 설립하는 등의 다양한 문제와 관련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어떤 당사자와 협조를 해야 할지와 관련, 귀하의 지도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귀하의 대표부 측이 우리가 접촉해야 할 당사자와의 면담을 주선해주는 일 등에서 가능한 한 많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작년 말에 저는 우리측의 이러한 노력과 관련, 참사를 경유해서 김종수 대사와 접촉을 가졌습니다. 귀하는 이런 접촉을 통해서 우리측의 의사를 더 분명하게 파악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코카콜라는 자본주의와 미국 문화의 상징이다. 그래서 사업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폐쇄됐던 사회가 일단 개방되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진출하려고 노력한다. 실제로 코카콜라는 굳게 닫혀 있던 북한의 대문 틈새가 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약간 벌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그 문을 두드린 미국 기업 중 하나였지만, 아직 북한에 코카콜라는 없다.)
▲ 알프레드 R. 피어스(Alfred R. Pierce) 법률사무소가 의뢰인 코라데티사(Coradetti Enterprises, Inc.)를 대신해서 북한 유엔대표부에 보낸 1995년 2월28일자 서신.
“이 서신은 3월10일 오전 11시에 귀하의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의 고객인 코라데티사는 다양한 종류의 상업적, 가정용품 생산업체이며, 동시에 외국에서 상업적, 가정용품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저의 고객은 향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간의 교역이 활발해질 것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양국간 교역이 확대되기 전에 추가적인 외교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현 단계에서 미국인은 귀측에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알려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하와 만나서 우리측이 귀하의 국민과 정부에 제공할 수 있는 인도적 지원의 형태에 대해서 논의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상호간 우정과 신뢰의 기초를 만드는 것이 일차적으로 필수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 뉴욕의 북한 유엔대표부가 미/북 교역협회(USA/DPRK Trade Counsel)에 보낸 서신(날짜 없음).
“북한의 티타늄 광산과 관련한 답변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티타늄은 강가의 모래를 정련해서 생산되며, 부존량은 수십만t에 이릅니다.
2) 현재의 생산능력은 3개 지역에서 월 200∼300t이며, 생산량은 수요에 따라 조절되고 있습니다.
1차 정련된 티타늄 모래는 40∼60%의 순도이며, 재정련할 경우 70∼75%에 이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련량과 1차 정련된 것을 재처리해서 생산되는 양질의 티타늄 생산량을 늘릴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3) 이 목적을 위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정련설비 뿐 아니라 일체의 생산설비를 투자할 외국 기업/개인을 물색하고 있습니다.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원하는 투자규모는 양질의 티타늄 1000∼1500t을 생산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5) 현재 운송수단은 양호한 상태에 있으며, 귀측이 제기한 의문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쟁력있는 회사가 귀측의 우려를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귀측의 전화와 팩스 번호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공화국내의 경제조직이 그것을 알려달라고 요청해왔습니다.
평양의 관계 당국이 귀측 혹은 귀측이 지정한 대리인과 직접 접촉할 수 있도록 가급적 빠른 시일내에 투자와 관련한 귀측의 의사와 위에 요청한 자료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미/북 교역협회 마크 윈클러(Mark Winkler) 사무총장이 북한 유엔대표부 앞으로 보낸 1995년 6월26일자 서신
“답변 : 티타늄 광산
귀하가 제공한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그 정보는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것이었으며, 미국 기업들이 우리에게 제기할 것으로 예상되는 질문에 답변할 자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소와 팩스번호는 편지지 위에 적혀 있으며, 우리측 법률사무소의 주소도 위에 적힌 주소와 동일하며, 우리 전화번호는 …”
(90년대 이후 산업기반이 거의 붕괴된 북한이 그나마 해외에 내다 팔 수 있는 것이 원자재, 그중에서도 광물자원이다. 북한은 중석, 몰리브덴, 마그네사이트, 흑연, 은, 알루미늄 등이 풍부하고, 특히 마그네사이트는 전세계 매장량의 약 50%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일 등 서방 기업들도 이 대목에 주목, 오래 전부터 관심을 기울여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두 통의 서신은 그것이 사실임을 말해주고 있다.)
“평양에 세계무역센터 지어주겠다…”
▲ 미국의 조선(Chosun) 컨설팅사가 뉴욕 북한대표부에 보낸 편지 (1995년 8월22일)
“지난 월요일 뉴욕에서 우리를 만나주신 데 대해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그날 면담은 생산적이었고, 귀하와 나눈 대화는 유익했습니다. 우리는 또 그날 면담이 상호신뢰에 기초를 닦았다고 믿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 간의 교역 환경이 빠르게 개선됨에 따라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우리 고객 모두에게 유익한 계기가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향후 예정된 북한 여행과 관련해서 여러 고객과 접촉하고 있으며, 결론이 나오는대로 고객들에게 그 정보를 전달할 예정입니다.
우리는 귀측이 상업관련 법률 자료를 제공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앞으로 상호 이익이 되고 장기적인 관계를 수립하기를 바랍니다.…”
▲ D.T. associates사가 북한대표부 대사에게 보낸 95년 10월6일자 서신
“(제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해외투자 기회
우리는 1995년 9월20일 수요일자 ‘월스트리트저널’ 지에 위의 제목으로 실린 기사에 대해 검토했습니다.
D.T. Associates사는 광범위한 기업군과 산업계의 고객들을 대상으로 국내금융 및 동아시아에 대한 직접 투자기회에 관한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컨설팅 회사입니다.
우리는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에 진출한 우리 고객들에게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해왔으며,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는 ‘월스트리트저널’에 실린 기사를 보고 귀국에 대한 투자 정보를 요청해온 3개 기업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 회사들은 (1) 현재 중국으로부터 실리카, 카바이드 및 기타 광물을 미국으로 수입하고 있는 수입회사로 이 회사는 귀국에서 광물과 관련해서 이와 유사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2) 철골구조물용 크레인을 제작하는 대규모 회사로, 이 회사는 동아시아 지역에 건설용 크레인 생산설비를 세울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3) 캐나다에 사업기반을 가진 한 석유회사는 귀국의 해안에서 석유·가스 탐사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4) 우리 회사도 현재 해안가에 호텔/빌라 건설사업을 위한 투자자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업과 관련, 우리는 현재 ‘베트남 자산관리사’라는 별도 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며(첨부한 월스트리트저널의 광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귀국에서 그런 프로젝트가 가능하다면 이와 비슷한 별도 회사를 설립할 수 있습니다.…”
▲ L.B.A. 아메리카사가 북한 유엔대표부에 보낸 1994년 12월20일자 서신.
“지난 몇 달간 귀하와 전화로 나눈 다양한 대화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귀측에 보낸 서신에서도 밝혔듯이 우리는 1991년 10월 이래 귀측 대표부와 접촉해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귀측의 여러 대사, 동료들과 면담을 갖기도 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누차 강조했듯이 우리는 귀국과 사업관계를 맺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귀측 사무실에 여러 차례 밝혔듯이 우리는 다음의 사업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귀국 수도인 평양에 ‘세계무역센터’를 건설하는 일.
이를 위해서 우리가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에서 수행한 세계무역센터 건립 프로젝트와 관련한 사업계획안과 타당성조사 보고서를 귀측 뉴욕 사무실에 제출한 바 있으며, 동시에 귀측의 세계무역센터와 관련한 세부 사항을 담은 서신을 여러 통 전달했습니다.
위에 언급한 세계무역센터 이외에 우리는 또 ‘국제 투자교역회사’를 설립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투자와 교역의 중심’이 돼야 합니다.
A : 경제적으로 타당성있는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예를 들면 항만, 광물 프로젝트, 통신, 여행자 수용시설, 섬유·신발·전자제품 등 다양한 공장을 새로 짓거나 현대화하는 일.
B : 조인트 벤처회사 설립
C : 수출입 업무…”
▲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 소재 림 인터내셔널(Ream International)사가 뉴욕의 북한 유엔대표부에 편지(1995년 8월15일자)
“북한 투자전망에 관한 세미나에서 귀하들을 만날 기회를 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귀하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서 임박사와 저는 두 개의 자유무역지대 개설을 비롯해서 외국투자 유치와 해외교역, 북한 내 기업활동에 관한 북한측의 계획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림(Ream)사의 식품점 체인, 림 인터내셔널사를 통한 관련 공급업체들과 그 네트워크는 귀하의 위대한 공화국에 모든 종류의 식품을 공급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대(對)아시아교역에 관한 임박사의 지식을 통해 우리는 중국, 일본, 싱가포르, 홍콩, 남한 등에 대한 수출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머지않아 그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북한의 고객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어서 귀하들의 지도를 요청합니다. 또한, 귀하들을 가까운 시일 안에 북한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솔트레이크시티의 기업인들의 세미나에 초청해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갖기를 희망합니다. 계속 연락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최근 움직임들
위에서 예로 든 서신들은 자료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1995년, 북한에 드리웠던 장막이 살짝 걷히는 듯하자 미국의 수많은 민간 기업들, 구호단체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북한측에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손길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시들해졌다. 기업들의 경우, 무엇보다도 대북 경제제재와 적성국교역금지법 등 미국의 국내법적 제약 때문에 실제 대북투자까지 진전될 수가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 후 “미국기업이 한국 기업에 앞서서 대북 진출을 도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통설’이 굳어졌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긴 ‘겨울잠’이 끝나고 있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무엇보다 1999년 9월 북한 미사일문제를 논의했던 북·미 베를린협상 타결과 함께 대북 경제제재가 일부 완화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와 관련, 한 북한 전문가는 “미국 기업의 입장에서 95년에 추진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중단됐던 대북 진출이 당시 논의되던 수준에서 다시 재개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예가 주한 미 상공회의소(AMCHAM)가 작년 10월 이래로 추진 중인 대북 투자조사단 방북문제. 여기에 참가할 미국 기업들은 모토로라, 퓨리나(사료회사), P&G, 얼라이드 시그널(Allied Signal), 골드만 삭스, GE 캐피탈, 지멘스, 웨스팅 하우스, BBMS(섬유수출업체) 등 총 12개 업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애당초 작년 11월에 이뤄진다고 발표했던 투자조사단의 방북은 그후 연기를 거듭해왔다. 이와 관련, 투자조사단의 구성을 주도한 제프리 존스 전 회장은 “조사단 방북 시기는 현재 뉴욕에서 진행중인 북·미 고위급회담과 연계돼 있다”고 말했다. 즉, 상공회의소의 방북조사단이 미국정부의 협상카드 중 하나로 활용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3월7일부터 시작된 북·미 고위급회담은 작년 9월 베를린 합의에 이어 북·미관계에 하나의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미국은 북한에 ▲ 테러국 해제 ▲ 식량지원 ▲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 차관지원 등의 카드를 제시하는 반면 북한에게서 ▲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포기 ▲ 신종 테러 포기선언 등을 얻어내려 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아무튼 투자조사단의 방북 일정은 뉴욕 고위급회담의 향배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조사단 실무를 지휘해온 제프리 존스 전회장은 “테러국 명단에서 북한이 제외되는 결과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적성국교역지법 상의 제약조건이 완화되기만 해도 조사단 방북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주한 미 상공회의소의 대북투자조사단 방북문제와 관련,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코리아 소사이어티 회장)은 작년 10월 초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경제학회 세미나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는 “미국 경제계가 북한에 대해서 갖고 있는 관심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으며, 많은 미국기업들은 북한이 동북아 경제권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구체적인 기업을 거명하며 “벡텔사의 경우 부산에서 출발, 북한을 거쳐 중국 베이징을 잇는 철도사업에 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며,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사는 북한의 전력산업을 건설하는 데 한몫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 우리는?
미국 기업과 민간단체가 활발하게 대북 진출을 모색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굳게 닫혔던 북한의 문호가 조금씩 열리고 경제회생의 길로 접어든다면, 남북간 긴장 완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기대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동안 우리측 전문가들은 “어차피 미국기업은 한국기업과 동반 진출을 원할 것”이라며 자신감을 피력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흔히 얘기하듯이 “북한이 미·일과의 협상에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고 경제적 수혜의 폭이 넓어질수록 남북관계를 본격화시킬 필요성은 오히려 덜 느끼게 될 것”이라는 걱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한 북한 전문가의 말이다.
“미국은 동유럽에서 사회주의체제 국가를 자본주의체제 국가로 전환시키는 데에 상당한 노하우를 쌓은 나라다. 북한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진출 시도도 단순히 경제적 측면 뿐만 아니라 이런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 미국의 민간기업들도 사적 이익에서 뿐만 아니라 잠재적 라이벌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면서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유지·확대한다는 미국의 큰 전략구도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미 상공회의소의 대북 투자조사단에 미국 유수의 금융사들이 포함돼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다시 말해, 미국 민간기업들의 대북진출 시도는 좋게 표현해서 “북한에 대한 자본주의 교육의 일환”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본주의 교육을 통해 경제적 차원에서 남북한에 공히 재갈을 물리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이와 관련, ‘신동아’ 1999년 1월호 ‘위기의 한·미·북 3각관계 정밀분석’에 소개된 미국측 보고서 ‘시장경제만이 통일의 해법’ 참조).
아무튼 북한으로 향하는 미국의 행보는 우리의 상식 수준을 훨씬 넘어 빠르고 치밀하다.
뻔한 결론이지만, 문제는 우리다. 정부는 2년 동안 포용정책을 줄기차게 외쳤지만 성과는 아직 불투명한 실정이다. 물론 우리 정부는 ‘카운터파트인 북한이 수용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며 반박하겠지만, 그것으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또 언제는 경쟁적으로 너도나도 뛰어들었다가 IMF 위기가 오자 썰물 빠져나가듯 한산해지는 기업의 대북사업 풍토,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사고 없이 무턱대고 한 건 올리려는 행태들도 시급히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