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4월호

교황 참회 선언의 의의와 파장

가톨릭 2000년 史 초유의 大사건 교황의 참회

  • 최창모 건국대 히브리학과 교수

    입력2006-11-21 1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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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톨릭이 지난날의 과오를 솔직하게 인정한 것은 참된 기독교 정신을 실천한 용기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 선언은 미래학자의 수천마디 예언보다도 새천년에 인류가 뭉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반드시 과거의 경험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미래의 사건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사건과 일정한 관계를 갖기 때문입니다.”

    - 에릭 홉스봄

    새 천년 3월12일은 가톨릭의 역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중대한 날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를 포함하여, 가톨릭이 지난 2000년 동안 저질렀던 과오에 대해 전 세계를 향해 용서를 구한다는 뜻깊은 연설을 했다.

    ‘성스러운 해 2000년’을 위한 ‘참회의 날’로 규정한 이 날, 보라색 제의를 입은 교황은 전 세계에서 모인 성직자와 청중 1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된 사순절 미사를 통해, “우리 가톨릭은 기독교도 사이의 분파,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 그리고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보인 불신과 적의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성스러운 해, 성스러운 고백



    교황은 “교회 체면을 손상한 이런 행동과 악을 저지르는 데서 우리가 맡았던 역할에 대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세기에 걸쳐 우리를 박해한 사람을 용서할 준비도 돼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억을 정화(淨化)해야 한다”면서, 가톨릭이 새 천년의 시작을 과거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왔던 자신의 신앙을 실행에 옮겼다. 교황은 몇 년 전부터 새 천년이 열리는 올해야말로 가톨릭이 옛일을 뉘우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해라고 역설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교황이 밝힌 가톨릭의 유죄(有罪)는 ▲기독교도 사이의 분파 ▲다른 종교에 대한 박해 ▲유태인 박해 ▲여성 억압 ▲인종 차별 등이다. 각 주제에 대한 역사적 사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세계사 혹은 교회사에서 논의된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각종 종교전쟁, 피정복 원주민에 대한 강압적인 개종 요구, 마녀사냥을 포함한 종교재판, 성차별 및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눈 먼’ 실수, ‘눈 뜬’ 과오

    특히 카시디 추기경은 유태인 박해를 구체적 죄로 고백했다. 다른 추기경과 대주교들은 “다른 문화와 종교 전통을 업신여겼으며, 너무나 자주 여성을 모욕하고 소외했다”고 고백했다. 추기경과 주교들이 고백을 마칠 때마다 교황은 참회하는 뜻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상에 입을 맞췄다.

    알다시피 기독교 진리의 요체는 사랑이다. 사랑의 나무 가지에는 용서하고 관용하는 꽃이 피고, 화해하는 열매가 맺는다. 가톨릭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이름에 걸맞는(‘가톨릭’이라는 단어는‘보편적인’‘포용적인’‘도량이 넓은’은 뜻이기도 하다.) 수많은 결실을 거두었다. 우리는 테레사 수녀의 숭고한 인류애와 이름 모를 헌신자들의 피와 땀을 결코 잊지 못한다. 인류가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오는 동안에도 그나마 정신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은 이들의 기도와 헌신 때문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눈 먼’ 가톨릭 교회는 역사의 긴 터널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과오와 실수를 저질렀다. 어두운 밤에 저지른 ‘눈 먼’ 실수뿐만 아니라, 대낮에 저지른‘눈 뜬’ 과오도 있었다. 그런 과오의 대부분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폭력’이었다.

    정통(正統)이란 이름으로 벌인 종교 박해라는 무서운 역사를 우리는 기억한다. 민족성이나 인종, 계급 논리로 정치 반대자나 종교 이단을 박해하고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기독교도 사이의 분파’와 ‘다른 종교에 대한 박해’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정통과 이단이라는 이념은 특히 가톨릭 교회가 병들기 쉬운 악덕이었다. 이 이념은 자신만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거만이라는 악덕, 타자의 신앙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현학이라는 악덕, 합리적인 비판이 설 자리가 없는 허영심이라는 악덕을 교묘하게 숨겨주었다. 오만과 편견, 억측과 자만 때문에 가장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른 것은 언제나 교회와 교회의 지성인이었다. 그것도 언제나 진리를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이제 이런 악덕을 훌훌 털어 버리고,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틀릴 수 있다”

    교황의 고백에서 가장 이목을 끄는 부분은 ‘다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에게 보여준 ‘불신’과 ‘적의’ 란 부분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1991년 세계 평화의 날 신년 선언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다른 견해를 가진 자를 경멸해서도 안 된다”고 천명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강조한 바 있다.)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바로 유태인 박해와 홀로코스트(유태인 대학살)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슬람과 화해한다는 뜻도 들어가 있었지만) 가톨릭 교회는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언급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유대교와의 역사적인 화해를 추진했고, 1985년 6월에는 교황이 로마 유태인 회당을 공식 방문했고, 1997년 바티칸 특별회의는 반유태주의(Antisemitism)와 홀로코스트 문제를 공식 논의했다. 1998년에는 로마 교황청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해 입장을 밝혔다. 또한 교황은 3월21일부터 이스라엘 독립 이후 사상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이 시점에서 사죄 선언이 나온 뜻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태인 처지에서 볼 때 가톨릭이 지금까지 한 노력은 미흡한 것이었다. 유태인 박해에 대한 교황청의‘입장 표명’이라는 것이 학살을 못본 체한 일부 신자의 잘못만을 인정했을 뿐이며 오히려 가톨릭 교회가 유태인을 구해 준 몇몇 사례만을 내놓은 것에 지나지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죄 선언에 대해 이스라엘 최고 랍비인 이스라엘 라우는 “교황이 유태인 박해에 대해 사죄한 것을 환영한다.”면서도 “제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에서 홀로코스트를 직접 목격한 바 있는 교황이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데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고 했다.

    “천국을 창조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모두 지옥만을 가져다주었다”는 에릭 홉스봄의 말은 이제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가톨릭 교회와 많은 교회 지성인이 히틀러의 지옥을 열광적으로 지지했음을 사실상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로마 교황청이 홀로코스트를 의도적으로 외면했고, 가톨릭 교회의 해묵은 반유태주의 감정이 홀로코스트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확인된 사실이다.

    “지난 2000년간 교회는 한 번도 유태인 편에 서지 않았다”는 교황 고백에서 보듯 예루살렘과 로마의 관계는 항상 적대적이었다. “유태인이 예수를 죽였다”는 신학 명제가 망령처럼 유태인과 기독교인 사이를 떠돌아 다녔다. 이러한 신학적 반유태주의는 사회적·정치적·인종적 반유태주의로 발전하면서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지독한 이념으로 이용되었다.

    ‘예수가 유태인이었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데까지, 교회는 20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이번 선언이 기존의 가톨릭 교리-성모 무염시태(1854), 교황 무오설(1870), 성모 육친승천설(1960) 등-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에 대한 반성은 예수가 유태인이었다는 사실을 교리적으로 인정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 신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가톨릭이 지난 과오를 솔직하게 고백한 것은 기독교 정신을 실천한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 선언은 문명 충돌을 예견한 미래학자의 수천 마디 예언보다도 새 천년에 인류가 뭉치는 데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각 시대의 사건들은 그 시대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역사라는 큰 틀에서 돌이켜 보면 잘못된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이 때 역사를 새로운 해석으로 수정하고 반성해야 하는 까닭은, 현재가 과거 산물이듯이 미래 역시 과거 사건과 필연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리더십, 새로운 교회의 권위

    새로운 세기에 걸맞는 리더십은 전통적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권위, 즉 민주적이며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에 알맞는 권위이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이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현명하게 판단한 데 경의를 느낀다.

    새 시대에는 이념이나 교리만을 강요하기 보다는,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종속하려 들지 않는 합리적 비판이 중요하다. 이를 통한 자유로운 공존과 상대방을 따돌리지 않는 정의로운 협동이 필요하다. 오만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외형적 힘의 집합보다는 공동의 참여를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존재 양식이 훨씬 잘 어울린다.

    지난 세기 ‘베를린의 차가운 겨울 오후’가 새 천년 ‘로마의 따뜻한 봄 아침’으로 나아가는 것은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이다. 이제 가톨릭과 역사가 새롭게 만나는 ‘로마 선언’을 한국 교회와 한국 역사가 새롭게 만나는 ‘서울 선언’으로 이어가야 한다. 한국 교회가 우리 역사 과정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기꺼이 이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새롭게 태어나 사람들과 화해하지 못하면 언젠가 역사 앞에서 더 쓰라린 사죄 기도를 드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비로소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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