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입력2005-04-08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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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물 10동에 총 120여 칸의 규모를 자랑하는 선교장은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선정된 고택이다. 한국의 선풍(仙風)과 풍수사상이 집안 곳곳에 깊숙이 밴 선교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장원으로서도 손색이 없다.
    仙風이 깃든 한국 최고의 장원
    옷도 대충 입고, 먹을거리도 되는대로 먹고 산다 하더라도 집만큼은 푸른 소나무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집에서 살고 싶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의(衣)와 식(食)이 주는 멋과 맛보다도 주(住)가 지니는 건축적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마 주(住)가 다른 무엇보다 나의 문화적 욕구를 중층적으로 충족시켜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강원도 강릉에 있는 선교장(船橋莊). 산수화에 즐겨 등장하는 수백년 된 벽송(碧松)들이 집 뒤를 지키고 있고, 집 앞으로는 활래정(活來亭)의 홍련(紅蓮)들이 향기를 뿜어내는 집. 뒤를 보니 벽송이요 앞을 보니 홍련이라! 푸른 소나무 숲과 붉은 연꽃들이 조화를 이루는 선교장은 한국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집이라 할 것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은 어디인가?’라는 설문조사에서도 1위로 꼽힌 곳이 바로 선교장이다. 아무튼 선교장은 9대에 걸쳐 240여 년간 유지되어온 고택이자,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도 아름다운 전통가옥이다.

    집의 명칭도 다른 집과는 달리 ‘장(莊)’자가 들어가 있다. 장은 장원(莊園)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선교장은 일반 주택이 아니라 장원임을 표방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서울에도 이화장, 혜화장, 경교장과 같은 장 자 이름을 가진 저택이 몇몇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름뿐이었지 실질적인 규모에서 장원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장 자 이름에 걸맞은 집은 강릉의 선교장이라고 생각된다.

    국가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민간주택

    그만큼 집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선교장의 대지는 3만평에 달한다. 건물 규모를 보자면 큰 사랑채인 열화당, 작은사랑채, 행랑채, 연지당, 동별당, 안채, 안사랑채, 활래정, 서별당을 합쳐 건물 10동에 총 120여 칸이다. 민간 주택의 최대 한계선이라고 여겨지는 99칸을 초과한 저택이다.



    장원으로서의 웅장함을 확인하게 해주는 건물은 뭐니뭐니 해도 선교장 정면에 한 일(一)자로 길게 늘어선 23칸의 행랑채다. 횡렬로 길게 늘어선 행랑채는 이 집 대문에 들어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중세의 위엄’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독특한 아름다움과 웅장함으로 인해 선교장은 1965년 국가지정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궁궐이나 공공건물이 아닌 민간주택이 국가지정 문화재가 된 것은 선교장이 처음이라고 한다.

    선교장은 일찌감치 전국에 명성이 알려졌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이 집에 대한 소감을 글로 남긴 바 있다.

    1970년대 중반에 건축학자 정인국(鄭寅國, 1916∼1976)은 “한국 상류주택의 두 가지 유형인 집약된 건물배치와 분산 개방된 건물배치 가운데 선교장은 후자에 속한다. 통일감과 균형미는 적지만 자유스러운 너그러움과 인간생활의 활달함이 가득 차 보인다”(‘한국건축양식론’)고 평가한 바 있다. 인간미가 넘치는 활달한 공간구조로 선교장을 규정한 건축학자적 관점이다.

    또 다른 건축학자 김봉열(金奉烈,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은 “가족용 주택 영역을 대외적 영역이 감싸고 있는 중첩적인 구성이다. 선교장을 통해서 한국건축의 집합구성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건물군의 형태적인 집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교장의 조영사가 축적해온 시간적 집합의 모습이기도 하다”(‘앎과 삶의 공간 2’)고 해석한다.

    한옥 전문가 신영훈(申榮勳)은 특히 선교장의 활래정에 대해 “얼핏 보면 ㄱ자형의 정자로 보이나 구조는 두 채가 하나로 이어진 것이다. 결구도 지붕도 각각 형성되어 있다. 이런 쌍정(雙亭)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어렵다”(‘한옥의 향기’)고 평가했다. 한옥을 직접 지어본 사람이 갖는 현장감이 묻어 있는 코멘트다. 그런가 하면 차(茶) 전문가인 김대성(金大成)은 다인(茶人)의 시각에서 활래정을 주목하고 있다.

    “활래정은 온돌방과 누마루 사이에 ‘부속차실’을 갖춘 조선시대 상류층의 차실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는 손님을 찻상 앞에 모시고 앉아서 직접 차를 끓이지 않고 부속차실에서 준비된 차를 다동(茶童)이나 시동(侍童)이 찻상에 들고 내오게 하였다. 활래정에 설치된 부속차실은 이러한 조선시대 차 풍습을 보여주는 증거다.”(‘차문화 유적 답사기 下’)

    한편으로 이 집안 자손으로 선교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려대 이기서(李起墅) 교수는 1980년에 선교장 사랑채 이름을 딴 저서 ‘강릉 선교장(江陵 船橋莊)’을 펴냈는데, 집 주인의 시각으로 선교장 역사와 함께 선교장의 과거 시절 사진을 실어놓았다.

    여기에다 필자가 하나 첨가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풍수에 대한 내용이다. 선교장을 다녀간 한국 문화계의 여러 선지식(善知識) 가운데 풍수를 언급한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선교장과 족제비 사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지는 장년에 접어든 한국남자들이 유서 깊은 고택을 볼 때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이 다름아닌 풍수라고 생각된다. 고택을 감평하는 데 제일 먼저 풍수부터 보는 것은 한국의 오랜 지적 전통일 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은 명당 설화들을 장년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선교장 전체에 밑그림으로 깔려 있는 인문학적 문법(文法)이 바로 풍수이고, 이 문법을 해독하다 보면 숨겨져 있던 몇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발견되기도 한다.

    먼저 족제비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조선조 효령대군의 11세손인 가선대부 이내번(李乃蕃)은 충주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안동 권씨)와 함께 외가 근처인 강릉 경포대 쪽에 옮겨와 살았다. 어느 정도 재산이 불어나면서 좀더 넓은 집터를 물색하던 중, 한 떼의 족제비가 나타나 일렬로 무리를 지어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이내번이 그 족제비들을 따라가 보니 현재의 선교장 터 부근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를 계기로 이내번은 이곳에다 집터를 잡았으므로 선교장은 족제비와 인연이 있다.

    집터를 잡을 때 동물을 이용하는 경우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경북 영양 일월산 아래의 호은종택(조지훈 생가)은 매를 날려 잡은 터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오리를 날려 잡은 절터도 몇 군데 있다.

    동물은 인간보다 본능과 감각이 수십, 수백 배 발달해 있어서 대개 동물들이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지점은 명당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노련한 풍수가는 동물들이 지닌 감각도 중요한 정보로 이용한다. 아마도 족제비 뒤를 따라간 이내번은 이러한 이치를 터득한 인물일 것으로 유추된다.

    풍수가에서는 동물의 직감 외에도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지게를 받쳐 놓고 자주 쉬는 곳, 겨울에 눈이 왔을 때 제일 먼저 녹는 곳도 명당으로 친다. 나무꾼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직감적이고 무심한 상태에서 제일 편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에서 쉬게 마련이니 그곳이 명당일 것이고, 눈이 제일 먼저 녹는 장소는 따뜻하고 양명한 곳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굳이 풍수 이론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런 곳은 대체적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터다.

    선교장의 전체 지세를 살펴보자. 대관령에서 동해 쪽으로 내려온 산세(山勢)의 한 가닥이 오죽헌 자리를 만들고 거기서 다시 동북쪽으로 흘러가 시루봉(甑峰)으로 솟았다. 시루봉에서 일차 뭉친 맥은 경포대 방향으로 올라가면서 여러 개의 자그마한 내청룡과 내백호를 분화(分化)해 놓고 있다.

    이 자그마한 내청룡과 내백호는 흡사 알파벳의 유(U)자 모양 같다. 유자 모양의 산세는 그 가운데에 들어서면 기운이 아늑해서 편안하게 느껴진다. 시루봉에서 삼국시대의 고찰 월인사(月印寺) 터까지 약 4km 구간에 걸쳐 이러한 유자 모양의 집터가 줄잡아 10여 개 이상 자리를 형성하고 있는 것 같다.

    산세도 200m 내외로 그리 높지 않아서 위압감을 주지 않고, 주변에 날카롭게 솟은 암산도 보이지 않아서 강렬한 살기도 눈에 띄지 않는다. 문사(文士)들이 선호할 만한 터임이 분명하다.

    시루봉에서 약 2.5km 거리에 위치한 선교장 터도 바로 그러한 유(U)자 모양 집터 가운데 하나다. 선교장 터에 들어서면 곧바로 느껴지는 아늑함은 유자 모양, 즉 부드러운 청룡 백호가 활처럼 둥그렇게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패철을 꺼내서 선교장 좌향을 재어 보니 간좌(艮坐)다. 간좌는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30。 정도 튼 남서향을 가리킨다. 산세로 보아서는 정남향인 자좌(子坐)도 가능할 성싶은데 방향을 서쪽으로 튼 간좌를 놓았다.

    왜 그럴까? 풍수를 모르는 일반인이 보기에는 자좌가 더 좋아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좌향이 자좌를 놓으면 앞의 전망이 시원하게 터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간좌를 놓으면 백호의 끝자락을 안산으로 삼게 된다. 큰사랑채인 열화당 마루에 앉아서 바라보면 백호가 앞을 가린다. 즉 백호의 끝자락이 앞의 전망을 약간 가리는 방향으로 집터를 앉혔다.

    이렇게 전망이 불리한데도 집터 방향을 약간 서쪽으로 돌려놓은 간좌를 택한 배경에는 풍수의 문법이 작용하고 있다. 덧붙여서 청룡이나 백호를 안대로 잡을 경우 그 안대로부터 발생하는 발복이 빠르다고 한다.

    한편 선교장 터는 수구(水口)가 벌어져 있다. ‘택리지’에서 양택의 첫째 조건으로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수구라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청룡과 백호 사이가 바로 수구인데, 수구가 넓게 벌어져 있으면 마치 여자가 양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좋지 않다고 본다. 기가 빠져나가서 재물이 모이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구는 닫혀 있어야 좋다.

    풍수학자 최원석의 박사 논문 ‘영남(嶺南)의 비보(裨補)’에서는 수구가 벌어져 있을 경우 이를 비보하기 위해서 인공으로 막는 ‘수구막이’를 설치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마을 풍습이었다고 한다. 나무를 심어 놓거나, 돌로 된 장승을 설치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예를 들면 경북 안동 내 앞에 있는 인공 조림인 개호송(開湖松)은 수구가 벌어진 의성김씨 종택의 약점을 비보하기 위해서 수백년간 공을 들여 조성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선교장 터는 자좌를 놓으면 전망이 탁 트이는 이점이 있지만 수구가 벌어지는 약점이 드러나는 형국이라서 방향을 약간 틀어 간좌를 놓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백호 자락이 앞을 가려주기 때문에 수구가 닫히는 형국으로 변한다.

    필자의 관찰로는 선교장 행랑채를 한일자로 23칸이나 배치한 이유의 하나도 집터의 수구와 관련이 있다. 즉 간좌를 놓아 수구가 벌어진 약점을 보완하긴 했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중으로 수구의 약점을 보완하는 장치가 선교장의 행랑채를 횡렬로 길게 배치하는 건축이었다고 보인다. 수구를 막는 바리케이드라고나 할까. 아무튼 행랑채가 일종의 수구막이 용도의 건축이라는 말이다.

    선교장 풍수에서 또 한 가지 유의할 것은 백호자락 끝에 서 있는 돌백호다. 자세히 바라보면 백호 끝자락에 화강암으로 만든 호랑이상이 설치돼 있다. 높이 50cm, 길이 150cm의 호랑이가 선교장을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쯤 백호 끝자락에 민속자료 전시관을 신축하면서 포클레인이 백호자락을 훼손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안 선교장의 14대 종부 성기희(成耆姬) 여사가 관계 당국에 항의하자, 강릉시청에서 비용을 대 비보로 설치한 것이 바로 호랑이상이라고 한다. 백호 맥을 훼손하였으니 이를 보강하기 위해 돌로 만든 호랑이상을 끝자락에 설치하였던 것이다. 지맥이 너무 강할 때는 탑을 세워 누르지만, 약할 때는 이처럼 백호상을 만들어 보강한다. 만약 청룡 자락이 훼손되었다면 청룡상을 만들어 보강할 수 있다. 돌로 만든 백호상을 바라보면서 명가의 풍수사상은 여전히 그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天文과 연못

    풍수 논리에서 24개의 좌향 중 간좌(艮坐)에는 천문과 관련된 비밀이 하나 있다. 간좌는 하늘의 천시원(天市垣)과 관계가 깊다. 동양의 고천문학에서는 하늘의 영역을 자미원, 태미원, 천시원으로 구분해 삼원(三垣)을 이야기한다. 북극성 근처에 있는 영역을 자미원(紫微垣)이라고 하고, 천구(天球)의 적도 안쪽으로 태미원(太微垣)과 천시원(天市垣)이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의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 ?∼1465)가 편찬한 ‘천문유초(天文類抄)’에 따르면 천시원은 천자(天子)의 시장(市場)에 해당하므로, 천하가 모여드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천시원의 별이 밝고 커지면 시장을 관리하는 사람이 각박하게 굴어서 상인들에게 잇속이 없게 되고, 홀연히 어두워지면 쌀값이 폭등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남대문시장 상인들이 가장 주목해야 할 별자리가 천시원인 것이다.

    또 천시원은 하늘의 시장이라서 교역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따라서 돈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풍수가에서는 천시원과 연결된 터에서 부자가 많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터가 천시원과 관련되는가? 바로 그것이 간좌다. 예부터 좌향이 간좌인 집에는 부자가 많다는 속설이 이를 뒷받침한다. 참고로 영남의 이름난 고택 가운데 안동의 학봉 김성일 종택과 영양의 호은종택이 간좌를 놓은 집으로 기억된다. 이들 고택은 재물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풍수서에 따르면 간좌의 터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 하나 있다. 바로 터 앞에 연못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집 앞에 팔방수(八方水, 여러 방향에서 오는 물)가 모여드는 연못이 있어야 제대로 된 간좌라고 한다. 간좌 터에 반드시 연못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풍수서 가운데서도 고급 과정에 속하는 ‘감룡경(龍經)’에 나오는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선교장의 활래정에 들어서 있는 연못은 원래부터 있던 자연 연못이 아니고 이내번의 손자인 오은거사 이후(鰲隱居士 李, 1773∼1832) 때에 인공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 연못은 ‘감룡경’에서 말하는 풍수적인 문법에 맞추어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이 추정이 맞다면 오은거사는 적어도 ‘감룡경’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풍수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교양필수 과목이 풍수였음을 감안하면 오은거사의 풍수 실력은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선교장 안채 대문 앞에 있는 우물도 풍수와 관련이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선교장 정면에 배치된 두 개의 대문을 살펴봐야 한다. 일반 고택 가운데 정면에 두 개의 대문이 나란히 설치된 경우는 선교장말고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선교장의 대문 두 개는 그 용도가 각기 다르다. ‘선교유거(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린 솟을대문은 남자와 손님이 출입하는 이 집의 공식 대문이고, 솟을대문이 없는 오른쪽의 평대문은 여자와 가족이 출입하는 대문이라고 한다. 대문을 두 개 만들어 놓은 것은 사는 사람을 배려한 것이다. 이 집의 건물배치는 가로로 길게 늘어서 있어 사랑채로 통하는 대문을 하나만 설치해 놓으면, 안채로 출입하는 여자들은 빙 돌아 들어가야 하는 불편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채로 직행하는 대문을 따로 마련한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안채 앞에 있는 우물의 존재다. 이 우물은 정확하게 일직선으로 안채 대문 앞에 위치하고 있다. 풍수적인 시각에서 이 우물은 대단히 좋은 위치에 있다. 우물은 혈구(穴口)로서 인체에 비유하면 입과 같다. 즉 건물이 코의 위치에 있다면 혈구는 입에 해당하기 때문에 일직선상에 있어야 모범답안이다. 그렇지 않고 우물이 대각선 방향이나 삐딱한 방향에 자리잡으면 마치 입이 삐뚤어진 것과 같아서 좋지 않게 본다. 우물이 집 뒤 또는 옆에 있어도 좋지 않게 본다.

    그러므로 선교장 안채 대문 앞에 일직선으로 배치된 이 우물은 풍수 교과서의 지침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물이 먼저 이 자리에 있었으므로 안채 대문을 거기에 맞추어 설치하였다는 뜻이다. 더구나 이 우물은 살림하는 주부들이 물을 긷기에도 더없이 편리한 지점에 있다.

    선교장 사람들에 따르면 이 우물은 제사 때 사용하였다고 한다. 제사지내는 데 필요한 음식이나 술을 빚을 때 이 우물 물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제사는 성스러운 의식이므로 부정을 타지 않게 하기 위해 제삿날을 전후해 며칠씩 이 우물에 흰 명주천이나 창호지를 덮어 놓았다고 한다. 명주천을 덮어 놓은 때는 당연히 우물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대갓집 제사가 어디 한두 번인가. 제사가 자주 있다 보니 이 집 식구들은 이 우물을 사용할 기회가 적었다고 한다. 일상의 물은 다른 곳의 우물 물을 사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선교장은 전체적으로 선가(仙家)의 풍류가 배어 있는 집이다. 한국의 지적 전통을 구성하고 있는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에서 유가(儒家)는 현실적이고, 불가(佛家)는 금욕적이라면, 선가는 낭만적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선가에는 유가의 현실참여적인 면도 있으면서 불가의 초탈적인 면모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래서 선가 사람들은 젊었을 때는 부지런히 현실세계에서 노력하다가 사회적 책임을 어느 정도 마치면 산으로 들어간다.

    원래 대관령의 동쪽인 관동(關東)은 선가의 유풍이 있는 곳이다. 대관령의 높은 산맥이 속세의 풍진(風塵)을 차단해 주면서 동해의 광망(光芒)을 마주하는 별천지가 바로 관동이요 강릉 일대가 아닌가! 가깝게는 설악산이요 조금 더 가면 금강산이다.

    그 때문일까. 이곳에는 신라 사선(四仙; 永郞, 述郞, 安祥, 南石行)의 유적지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영랑호(永郞湖)는 사선 가운데 우두머리인 영랑선인의 이름을 딴 것이고, 강릉의 옛 월인사(月印寺) 터는 원래 영랑을 비롯한 사선이 선도를 닦던 곳에다 절을 세운 곳이다.

    시루봉에서 시작한 부드러운 용맥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중간에 선교장 터를 만들고 다시 더 흘러 경포 호수를 마주보고 우뚝 멈춘 자리에 옛 월인사 터가 있다. 산진수회(山盡水回; 산이 다하고 물이 감아도는)의 터라서 신선이 공부할 만한 자리다. 경포호수가 메워지기 전에는 이 월인사 터에서 호수를 바라보면 안으로는 호수가 초승달처럼 이 터를 감싸고 있었고, 경포 밖으로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한 동해가 열려 있었다. 만약 경포호수를 메우지 않고 자연 그대로 놔뒀더라면 한중일 삼국 중에서 가장 빼어난 전망을 제공하는 호수가 아니었을까.

    강릉에 선가 유적지가 또 하나 있다. 강릉시내에서 정동진 방향으로 7km 정도 가다 보면 안인(安仁)이 나오는데 해령산(海靈山)이 있다. 해령산 용맥이 바다 쪽으로 뻗어 나가다가 파도를 맞고 멈춘 자리, 그 파도 치는 해령산 절벽 아래 촛대바위에는 ‘명선문(溟仙門)’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자리는 그 옛날 신선들이 동해를 마주보면서 바둑을 두고 놀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구전해온 해상선(海上仙)의 귀중한 유적지임이 분명하다.

    강릉이 배출한 조선시대의 두 인물로는 김시습과 허균이 꼽힌다. 필자가 보기에 조선시대를 통틀어 세상의 그물을 의식하지 않고 가장 자유롭게 그리고 파격적으로 살다간 인물이 바로 김시습과 허균이다.

    그들 역시 선도와 인연이 깊다. 조선의 선맥(仙脈)을 정리한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김시습은 정통으로 도맥을 전수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허균 역시 평소 선가 인물들과 접촉이 많았으며, 당시 전라도 함열에 살던 남궁두(南宮斗)라는 선인의 일대기를 기록한 ‘남궁두전(南宮斗傳)’을 세상에 남겼다. 유교만이 정통이고 불교와 선교는 사문난적으로 몰리던 조선시대에 선가에 대해 깊이 천착한 보기 드문 사례다. 강릉 출신의 두 사람이 이처럼 선가와 인연이 깊은 것은 어렸을 때부터 신선들의 행적을 보고 들으면서 자란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인다.

    선교장의 솟을대문 현판글씨인 ‘선교유거(仙嶠幽居)’. 신선이 거처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 글씨는 관동과 강릉일대에 오랜 세월 축적돼 있는 선가적 풍류를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포호수가 메워지기 전에는 이 집을 다닐 때 배를 타야 했으므로 이곳 이름을 배다리(船橋)라고 불렀고, 전주이씨 완풍종가인 이 집 이름도 선교장이라고 칭하였던 것이다. 선교유거의 ‘선교’는 발음이 같은 선교(船橋; 배다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발음은 같으면서도 그 의미는 배다리에서 신선으로 바꾸었다. 재치가 엿보이는 작명이기도 하다.

    이 멋진 현판글씨는 누구의 작품인가? 조선 말기 서예가인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1909)의 글씨다. 대원군이 천재라고 부를 정도로 그 자질이 빼어났던 소남은 선교장 전체 분위기를 ‘선교유거’ 한마디에 압축시킨 것 같다.

    선교장에 배어 있는 선가적 요소를 추적하다 보니 앞산의 이름도 범상하지 않다. 선교장 앞에서 바라다 보이는 투구 모양의 조산 이름을 물어보니 ‘상산(商山)’이라고 한다. 상산은 ‘상산사호(商山四晧)’로 유명한 산 이름 아닌가.

    중국 진시황 때 국난을 피하여 섬서성 상산에 들어가 숨은 네 사람(東園公, 綺里秀, 夏黃公, 里先生)이 있다. 이 네 사람의 은사를 ‘상산의 네 신선’이라는 뜻에서 상산사호라고 칭한다. 이들 네 명이 모두 눈썹과 수염이 흰 노인이었으므로 희다는 뜻의 호(皓)자를 쓴 것이다. 흰 수염을 기른 노인 네 명이 산 속 정자에 앉아서 바둑 두는 동양화를 본 적이 있다면, 그 노인들이 대개 상산사호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튼 선교장 조산의 이름이 상산인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강릉 지역의 뿌리깊은 선가적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본다면 선교장 주변은 신라의 사선 유적지와 중국의 사선이 은거했던 유적지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오은거사가 지은 열화당과 활래정

    선교장의 역사는 크게 세단계로 나뉜다.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이 처음 이곳에 터를 잡았고, 그 손자인 오은(鰲隱) 이후 때에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과 연못인 활래정(活來亭)이 만들어졌으며, 이후의 증손자인 경농(鏡農) 이근우(李根宇, 1877∼1938) 때에 23칸의 한일자 행랑채가 증축되었다.

    선교장을 찾는 방문객들이 낭만적이라고 찬탄하는 열화당과 활래정은 오은(鰲隱) 때 만들어졌으므로, 선교장의 낭만적인 정체성을 확립한 인물은 오은거사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기본 골격은 오은거사가 짜놓았고 거기에 살을 붙이면서 선교장을 확장한 인물은 경농일 것이다.

    오은거사는 멋과 풍류를 알았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열화당이라는 작명만 해도 그렇다. 유교 선비들의 사랑채 편액 이름은 대개 유교적인 윤리나 가치관이 담긴 내용으로 정한다. 충(忠)이나 효(孝) 아니면 수신(修身)에 관한 제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열화당’은 그러한 맥락에서 벗어나 있다. 단지 ‘즐겁게 이야기하는 집’을 표방하고 있을 뿐이다. 엄숙함과 긴장감 대신에 지극히 인간적인 정감이 전해오는 이름이다.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입신양명과 출세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만나 즐겁게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데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당호(堂號)다. 향외적(向外的) 가치가 아니라 향내적(向內的) 가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오은거사의 도가적 취향을 엿볼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을 접어두고 향내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은 고준한 경지다. 수양한 사람만이 추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가운데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저명한 도교학자 앙리 마스페로는 “동양의 종교와 사상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의 행복과 구원에 관심을 기울인 개인주의적 종교는 도교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열화당이라는 이름에서 그러한 개인주의적인 취향을 발견한다. 개인주의적인 취향을 가진 사람은 십중팔구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공감하기 마련이다. 체제와 이념과 조직은 사람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들던가! 전후 사정을 고려해볼 때 열화당의 주인이었던 오은거사는 도연명을 흠모했음에 틀림없다.

    오은거사가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던 “평생에 눈썹 찌푸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응당 이빨을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平生不作皺眉事 世間應無切齒人)”는 대목에서도 그러한 기미를 읽을 수 있다.

    연못을 파고 거기에다 연꽃을 심으면서 활래정이라는 그림 같은 정자를 만들어놓고 거진출진(居塵出塵; 풍진 세상에 살면서도 진세를 벗어나 있음)을 도모했던 오은거사. 오은(鰲隱)이라는 호도 동해에 떠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바다 밑에서 받치고 있는 신령한 동물인 자라(鰲)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활래정 연못 안의 조그마한 동산은 아마도 신선이 사는 봉래산을 상징하는 섬일 것이고, 그 봉래산 밑에는 자라가 떠받치고 있을 터다. 동해에 사는 거인 낚시꾼의 낚싯바늘을 피하기 위해서 봉래산의 자라는 눈에 띄지 않게 숨어야 하리라!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는 집 뒤의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겨울을 음미하고,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삼복 더위에는 연꽃 속의 활래정에서 여름을 즐기리라.

    선교장에서 직접 살아 보았던 이기서 교수는 열화당 출판사가 발행한 ‘강릉 선교장’에서 그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선교장의 사계는 그 어느 계절 하나 버릴 것이 없다. 강릉을 가리켜 사계의 고을이라 한다면 선교장은 사계의 장원이다. 활래정의 앞 논에 해빙의 물이 넘쳐 출렁이고 그 물 위로 봄바람이 파문을 일으키며 이곳의 봄은 시작된다. 안채 뒤 대밭에 죽순이 움트고 매화가 그 짙은 자태를 드러낸다. 못에는 연잎이 솟으며 활래정 뒷산에 오죽순(烏竹筍)이 얼굴을 내민다. 그러면 이곳 골짜기는 한겨울의 동면에서 서서히 깨기 시작한다. 앞 냇가 아지랑이가 움트는 버들가지와 더불어 이곳의 봄은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술렁인다. 여름은 뒤 솔밭으로부터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고송, 고목 속에 깃을 친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로 한여름은 짙어간다. 이때 제철을 맞는 것이 활래정이다. 연꽃 봉오리가 솟고 꽃봉오리가 터지면 누마루에 올라 술자리를 벌인다. 그땐 으레 시서화를 곁들이게 된다. 비오는 날, 연잎에 듣는 빗소리 역시 문객의 시정을 일게 한다. 이런 사시사철의 아름다움으로 또 역대 주인들의 후덕함으로 선교장은 수많은 문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관동의 제일명가(第一名家) 선교장의 열화당과 활래정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문인 묵객들이 다녀가면서 시서화를 남겼다. 조선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던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 1782∼1850), ‘선교유거’ 현판글씨의 주인공이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구한말 소론(小論)의 팔천재(八天才)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설 ‘단’의 실제 모델인 우학도인 권태훈 집안과 인연이 깊었던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9∼1936), 근대의 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 소남 이희수로부터 처음 글씨를 배웠으며 전국의 유명사찰 현판에 많은 글씨를 남긴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 백련(百蓮) 지운영(池雲永, 1852∼1935), 중국 원세개의 옥새를 새겼고 그의 서예고문을 지낸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 등이 그들이다.

    독립운동가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과 백범(白凡) 김구(金九)도 자주 출입하였다. 그래서 김구 선생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도 활래정의 단골 손님이었다. 특히 몽양은 선교장과 인연이 깊어서 1908년 선교장 옆 터에 세운 동진학교(東進學校)에서 1년간 영어 교사를 하기도 했다. 동진학교는 이 집안에서 세운 강원도 최초의 사립학교다.

    화려했던 선교장의 후손들은 현재 어떻게 사는가? 14대 종부인 성기희(成耆姬, 82) 여사는 현재 병환으로 누워 있다. 성삼문, 성혼을 배출한 창녕 성씨 집안이 친정이다. 성여사는 1974년부터 강릉에 내려와 관동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외로이 선교장을 지켜왔다. 정년 후에도 열화당을 찾아오는 수많은 손님을 접대하면서 선교장의 종부 노릇에 최선을 다한 여걸이다.성기희 여사는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이강륭(李康隆, 58)은 조흥은행 부행장으로 근무하고 있고, 둘째아들 이강백(李康白, 55)은 공무원으로 있다가 그만두고 현재 선교장을 지키고 있으며, 셋째아들 이강보(李康輔, 50)는 쌍용그룹에 근무하고 있다.

    조흥은행 본점 13층에서 선교장의 장손인 이강륭씨를 만났다. 둥그렇고 두툼한 얼굴에 눈썹이 아주 짙다. 삼국지에 나오는 장비처럼 두터운 인상이다. 먼저 선교장 터에 대해서 직접 물어보았다.

    ―족제비가 인연이 되어서 집터를 잡게 되었다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도 집 뒤에 족제비가 많았죠. 먹이도 가끔 던져주고는 했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영물로 생각해서 잡지 않고 보호했습니다. 6·25전쟁 전까지도 그 수가 아주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서울에도 별도로 집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6·25 직전까지 서울 재동 110번지에 60칸짜리 집이 있었어요. 거기서 일가 친척들이 많이 머물렀지요. 구한말에는 이 집에 자가용도 있었는데 자가용 번호가 110번이었습니다.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는 목탄차였는데 이 차로 당시 서울 집에서 강릉 선교장까지 가는 데 이틀 걸렸다고 합니다. 목탄을 때다 보면 엔진 과열로 인해 중간에 엔진을 식혀야만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먼 친척이 그 차의 운전기사를 했는데, 기생집에 가면 기사가 주인보다 인기가 더 좋았다고 해요. 당시 서울 시내에 자동차 운전기사가 통틀어 열 명 미만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마나 인력거를 탈 때죠. 그러다 보니 기생집에 가면 기생들이 자동차를 한번 타보기 위해서 운전기사에게 특별 서비스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구한말이면 대원군하고도 친분이 있었습니까?

    “저희 고조부가 대원군과 아주 친했습니다. 대원군이 거처하는 운현궁 문지방을 건너 들어가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고조부뿐이었다고 합니다. 같은 이씨 왕손 집안이라는 혈연 의식도 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희 집이 대원군에게 정치자금을 댔기 때문이죠. 대원군이 중국에 잡혀갈 때 고조부는 거문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정치적 운명을 같이한 것이죠. 그래서 저희 집에는 대원군의 친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만석꾼 집안의 적선

    ―선교장은 만석꾼이라고 소문 났는데, 토지는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까?

    “동대문에서 강릉까지 갈 때 남의 땅 밟지 않고 간다는 말이 있었죠. 저희 집 땅이 북으로는 양양, 남으로는 삼척, 동으로는 동해 바닷가까지 이어졌고 서로는 대관령 넘어 평창까지 추수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감기에 걸려서 재채기할 때는 으레 ‘배다리 통천댁으로 가라’하고 외치는 습관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가을에 참새들이 곡식을 쪼아먹을 때는 새들을 향해서 ‘배다리 통천집으로 가라’고 했고, 호남의 민요 가운데 새를 쫓는 가사 중에 ‘배다리 통천집으로 가라’는 대목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저희 집이 부잣집으로 소문났던 것이죠. 통천집이라는 표현은 고조부가 통천군수를 지낼 때 극심한 흉년이 들자 집 창고에 있던 쌀 수천 석을 풀어 군민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었는데 그때의 적선(積善)으로 사람들이 저희 집을 통천집(댁)으로 불렀습니다.”

    ―선교장에서도 역시 적선을 중요시했었나 보죠?

    “소작인들에게 인심을 잃으면 집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보아야 합니다. 선교장에 9대 종손이 거주했다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만큼 인심을 얻었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인심을 잃고는 살 수 없었다고 해요. 소작인들이 감사의 표시로 저희 집에 옥양목으로 만든 우산을 만들어 주었어요. 이 우산을 ‘만인(萬人)솔’이라고 부릅니다. 일만 명의 소작인이 그 옥양목에 일일이 서명을 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만인솔인 것이죠. 만인솔은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집에 있었습니다.”

    ―그 많던 토지는 현재 어떻게 되었습니까?

    “토지개혁 때 전답이 거의 해체되어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선교장에는 많은 과객이 머물렀을 텐데 과객 접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습니까?

    “저희 집 사랑채는 세단계로 구분돼 있었습니다. 가장 고급 사랑채이자 응접실은 열화당이고, 중급 사랑채는 중사랑이고, 하급 사랑채는 행랑채였다고 해요. 집 주인이 과객의 학문과 사람 됨됨이를 테스트해서 학문과 식견이 있는 사람은 중사랑에 머물게 하고, 아주 고명한 선비는 열화당에서 응접을 하고, 보통 평범한 과객은 행랑채에 배치했죠. 중사랑에는 방이 열 개가 있었는데 편안하게 숙식을 제공했음은 물론이고 손님이 떠날 때는 노자와 옷까지 마련해 주었다고 합니다. 집 구조가 침모방의 문구멍을 통해서 손님의 신체 치수를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어요.”

    ―만약 과객이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면 어떻게 대처합니까? 무척 곤란할 것 같은데요?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학문이 시원찮은 과객은 2∼3일 대접하고, 학문이 높으면 중간 사랑에 머무르고, 가끔 큰사랑(열화당)에 가서 이야기가 되면 몇 달간 유숙할 뿐 아니라 옷까지 해드리죠. 손님이 이제 그만 갔으면 하고 바랄 때는 밥상의 반찬 그릇을 바꾸어 놓습니다. 옛날 손님 밥상을 차릴 때에는 간장 놓는 자리, 초장 놓는 자리, 깍두기, 김치, 된장찌개 놓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를 바꾸어서 상을 차려 놓으면 ‘그만 떠나라’는 메시지였죠. 과객이 이걸 보고 ‘이제 그만 가라는 이야기구나’하고 다음날 짐을 꾸려 떠났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방법이었어요. 요즘 인사동에 가서 한정식을 먹어보니까 반찬 그릇 놓는 자리가 제멋대로인 것 같아요. 옛 법도가 전부 사라지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현재 활래정의 모습이 서울 창덕궁 후원의 부용정(芙蓉亭)과 흡사하던데요. 활래정 이야기 좀 해주시죠?

    “6·25 때 다행히 활래정이 폭격을 면했습니다. 9·28 수복 때는 미군 비행기에서 조준 폭격을 해서 폭탄이 저희 집에 6발 떨어졌는데, 그중 1발이 동별당 앞 행랑채에 떨어져서 4칸이 날아가버렸죠. 그 안에 1인용 7첩 반상 그릇이 300인용 이상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게 다 박살났어요. 그 외에도 많은 도자기와 골동품, 특히 창간호부터 보관해오던 대한매일신보가 전부 불타 버렸죠. 집안 어른들이 몹시 아쉬워했습니다. 뒷산에도 몇 발 떨어져서 600년 된 소나무 몇 그루가 불타 버렸죠. 그러나 열화당과 활래정은 무사했습니다. 현재 활래정 건물은 연못을 파고 돌기둥을 네 개 박은 것입니다. 그 기초공사를 얼마나 튼튼히 했던지, 지금도 이 돌기둥이 아주 튼튼해서 꼼짝 않습니다. 열화당과 활래정을 지을 때 대목수를 중국에 여러 번 파견했다고 합니다. 중국의 건축 방식을 참고하기 위해서였죠. 저도 요즘 외국 나가면 박물관부터 가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선교장 후손이기 때문일 겁니다.”

    ―현재 선교장에 남아 있는 유물 가운데 볼 만한 것이 있습니까?

    “선교장의 중간사랑에 전시되어 있는 ‘돈궤’가 볼 만합니다. 높이 150cm, 너비 3∼4m 크기인데,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돈궤일 겁니다. 선교장의 부를 상징하는 유물이죠.”

    종손인 이강륭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7월 하순 연꽃이 한창일 때 선교장을 방문하였다. 선교장을 지키고 있던 이강백씨가 반갑게 맞이한다. 멀리서 온 손님이라고 홍련이 그림처럼 피어 있는 활래정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달빛 속에서 큰 부채만한 연꽃잎들이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를 듣는 호사를 이틀이나 누렸다.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도 하고 개인사업도 하다가 집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10년 전부터 선교장에 거주하는 이 집 차남 이강백씨와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장남이 아닌 차남으로서 대장원을 지키고 계시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저희 집이 1703년에 처음 지어졌고 1983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으니까 2002년이면 집 역사로는 300주년이 되고 공개되기는 20주년이 됩니다. 그런데 목조건물은 사람이 거주해야 생기를 유지하는데, 사람이 살지 않으니까 건물들이 급속하게 낡아 걱정입니다. 작년에 강원도 백두대간을 휩쓴 산불이 났을 때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잤습니다. 선교장 1km 전후방까지 산불이 왔었어요. 강풍 때문에 소방 헬기도 못 떴어요. 송진에 불이 붙은 불똥이 수백m까지 날아다녀 언제 집에 불이 붙을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어요. 그때 집은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집 뒤의 소나무만큼은 제발 무사하라고 기도했습니다. 집이야 불타도 재건축할 수 있지만, 집 뒤의 수백년 된 소나무는 한번 불타면 다시는 복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바람이 1시간만 더 불었어도 다 탔을 겁니다. 저는 선교장 건물보다 저 소나무들에 더 애착이 갑니다. 저 소나무만 바라보면 마음이 흐뭇합니다.”

    ―어떤 종류의 소나무들입니까.

    “수령이 대략 300년에서 600년 된 금강송(金剛松)입니다. 근래에 솔잎혹파리로 인해 많이 죽고 한 20여 주가 남았어요. 동해안의 강릉 삼척 영월 일대에서 잘 자라는 수종이죠. 키가 큰 미남 같은 소나무입니다. 사진기자들의 말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5대 소나무 숲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연차·연엽주·연잣…

    ―활래정의 연꽃을 가지고 연차(蓮茶)를 만든다고 하던데요.

    “연으로 여러 가지를 만듭니다. 저희 집에서 어른들이 연차를 만들 때는 연꽃 잎만 따서 물에 달여먹었어요. 연꽃의 꽃술은 사용하지 않아요. 꽃술에는 독이 있다는 것 같아요. 연잎을 가지고 연엽주도 담그죠. 연 뿌리는 코피 멈출 때 효과가 있고, 연꽃 열매인 연잣(실)은 한약재로 씁니다. 닭을 연잎으로 싸고 그 위에 황토를 바른 다음 장작에 구우면 맛이 아주 좋습니다. 닭에 연향이 배어들기 때문이죠. 제가 경험한 바로는 비오고 난 뒤에 태양이 뜰 때 연향이 가장 진합니다. 머리가 상쾌하고 몸이 가뿐해지죠.”

    ―선교장은 계속 유지될 것 같습니까?

    “재산상속법이 문제입니다. 요즘 상속법은 옛날같이 장남이 전부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차남들과 딸들도 동등하게 유산을 분배받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법에 따르자면 선교장도 여러 자식에게 골고루 분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집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해지죠. 저희 대에는 저를 포함한 동생들이 자발적으로 상속권을 포기하고 장남인 형님에게 유산을 몰아주었는데 다음 대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집 후손 가운데 서울에 있는 열화당 출판사의 이기웅(李起雄, 61) 사장 역시 선교장의 맥을 잇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열화당 출판사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미술 전문 출판사인데, 사장인 이기웅씨는 고등학까지 선교장에서 다녔다. 종손 이강륭씨의 당숙이다.

    ―열화당이라는 출판사 이름은 선교장의 열화당에서 따왔다고 하던데요.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 열화당 아궁이에 지피는 군불은 제가 땠어요. 그래서 유년 시절부터 열화당에 대한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열화당은 단순한 사랑채가 아니라 족보도 찍고 문집도 발행하는 출판기능을 가진 문화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서울에서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그 기본 정신은 저희집 열화당의 인문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출판사 이름을 열화당으로 지었습니다. 출판사 열화당은 1971년에 시작되었지만 선교장 열화당의 시작은 1815년이었으니까, 통틀어 계산하면 열화당 출판사의 역사는 1815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가 받은 이기웅 사장의 명함에도 열화당 출판사의 출발은 1815년이라고 자그마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열화당 출판사는 한국에서 가장 뿌리 깊은 출판사가 된다. 한국의 인문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이사장의 신념이 담긴 대목이다. 그것은 선교장의 깊은 역사에서 배어나온 자부심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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