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휴대전화 가입자수 3315만7493명(2003년 7월말 현재).
- 이들은 전화 한 통 걸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정보화촉진기금’을 내고 있다.
- 이동통신회사들이 휴대전화 사용자들로부터 거둬들인 휴대전화 사용료 중 매년 1000억~1조원을 이 기금에 무상출연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2조5000억원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정보통신산업 발전을 위해 요긴하게 쓰여야 할 이 돈이 ‘눈먼 돈’이 되고 있다.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는 말까지 있다.
정보통신 관련기업이 많이 입주해 있는 서울 테헤란밸리 전경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이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보통신부는 2003년 2월10일부터 3월15일까지 한 달여 동안 정보통신연구진흥원에 대한 감사를 벌였다.
감사 결과 정보화촉진기금의 융자를 받아 시행된 54개 민간 기업의 기술개발 사업에서 융자 목적과 다르게 돈이 사용됐거나 돈만 받은 뒤 기술개발은 사실상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감사자료에 따르면 C사는 2000년 제3세대 디지털신문 솔루션 개발을 하겠다면서 6억6300만원의 정보화촉진기금 융자를 받은 뒤 이 돈을 융자 목적과 다른 데 전용했다. H사도 한국형 고속 인터넷 캐시서버 개발 목적으로 받은 정보화촉진기금을 목적과 다른 곳에 사용했다.
정보화촉진기금 융자를 받은 기업은 융자 목적에 맞는 기술개발을 완수한 결과를 정보통신연구진흥원측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그 41개는 융자를 받은 이후 최장 5년이 경과했음에도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고, 11개 업체는 제출하기는 했으나 보고서가 날림으로 제작됐으며 당초의 기술개발 목표에 크게 미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경우 해당 업체는 ▲돈만 받아놓고 기술개발을 등한시했거나 ▲돈을 받기 위해 애초 실현성 없는 기술개발 과제를 설정했거나 ▲기술개발을 할 능력이 부족한데 돈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발된 업체들은 기초핵심기술과 관련된 IT분야의 기술과제들은 거의 내놓지 않았다. 다음은 이들 업체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에 제출해 융자를 받아낸 과제명들 중 일부다. “필기문자 인식 엔진 개발, 골프장 종합 관리 소프트웨어 개발, 온라인 협력학습 시스템 개발, 그래픽 머그게임 개발, 홈네트워크 장비 개발, 다기능 무선 헤드셋 개발, 홍채인식보안시스템 개발, 휴대전화를 이용한 바코드데이터 전송시스템 개발, 위성인터넷을 이용한 동시 모의 수능평가 시스템 개발.”
김형오 의원은 “정보화촉진기금의 관리와 평가 부실로 투자효율성이 떨어지고 있으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실기업이나 질 낮은 기술과제에 지원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이 기금으로 융자를 받은 업체는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총 5559개 업체다. 이번 감사에서 지적을 받은 54개 업체는 1998년 이후 융자를 받은 업체들이다.
김의원측에 따르면 융자를 받은 총 5000여 개 업체 중 1%에 해당하는 54개 업체만 지적을 받은 것이니 문제 될 일 아니라는 것이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보통신부는 2003년 2~3월 정보통신연구진흥원에 대한 감사를 벌일 당시 정보화촉진기금 부분의 경우 1998년부터 융자를 받은 5000여 개 전 업체를 조사한 것이 아니라 이들 업체 가운데 일부를 샘플로 추출해 조사하여 54개의 부정사례를 적발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김형오 의원측도 정보화촉진기금 융자를 받은 업체 중 21개사를 임의추출해 융자금을 당초 목적대로 사용했는지 여부를 자체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정보화촉진기금을 받은 업체 중 14%인 3개사만이 기금 융자받을 당시 목표인 기술개발-상용화에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의원측은 “현장조사를 나가보니 스캐너 1개와 PC 2대만 갖춰놓은 업체가 정보화촉진기금을 따내 이 돈을 쓰고 있었다. 기술개발도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보통신부는 “감사에 적발된 54개 기업을 상대로 정보통신연구진흥원측이 융자금 회수노력을 했으며, 현재 회수하지 못한 돈은 12억~13억원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정보통신부 감사결과는 정보화촉진기금의 방만한 운영과 유용이 극히 일부 업체에서만 나타나는 예외적 사례가 아니라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일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게 김의원측의 평이다.
김의원측은 “융자사업 부문과는 별도로 이 기금을 이용한 또 다른 기업지원형태인 출연사업 부문에서도 부실 운영 의혹이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출연은 융자보다 돈의 회수가 훨씬 더 어렵다는 점에서 보다 큰 문제라는 설명이었다.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이 김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보화촉진기금이 처음 설립된 1993년부터 2003년 6월 현재까지 2조5196억원의 정보화촉진기금이 기업체의 기술개발 지원 명목으로 출연됐다.
그런데 같은 기간 동안 기술료 징수액은 1787억원이었다. 정보화촉진기금 출연 금액의 7%만이 기술개발-상용화에 성공해 환수되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촉진기금의 운용 규모는 1999년 2조원, 2000년 2조2000억원, 2001년 3조3000억원, 2002년 2조7000억원, 2003년 2조5000억원에 이르고 있다. 정보화촉진기금의 운용규모가 매년 2조~3조원대에 이르는 만큼, 방만한 관리에 따른 우려도 커지고 있다.
정보화촉진기금은 기업이 기금 융자 또는 출연 신청을 하면 정보통신연구진흥원측이 해당 기업이 제시한 기술개발의 타당성, 성공가능성, 상업성을 검토한 뒤 융자 또는 출연을 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정보화촉진기금의 문제점은 구조적인 데 기인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용처가 발생하지 않는 정부 기금은 정리대상이 될 수밖에 없어 정부 기관 입장에선 기금의 용처를 계속 발생시켜야 하는 반면 기금 관리를 맡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은 심사업무 및 기금 제공 업체에 대한 사후 검증 업무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금운용이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진행되는지에 대해 의문이 발생하고 있다.
정보화촉진기금은 기업들로선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예를 들어 부동산을 담보로 잡히지 않고 기술력만을 담보로 융자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기업체에선 “정보화촉진기금 받기가 매우 어렵다”는 푸념이 나온다.
‘눈먼 돈’ 로비의혹까지
다른 한편에선 “정보화촉진기금은 눈 먼 돈”이라는 말이 나온다. 상당수 기업들이 이 기금을 주인 없는 돈처럼 써왔다는 것. 감사결과에서도 지적됐듯 엉터리 회사에 돈이 뿌려지고 있는 것이 사실로 밝혀지고 있어 불신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정보통신연구진흥원도 이같은 의혹들을 일정 부분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정보통신연구진흥원 관계자는 “기금이 기업에 전달된 뒤 목적에 맞게 사용되는지 여부를 정기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을 올해 하반기 새로 구축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진흥원측은 또한 기술개발 가능성이나 의지가 거의 없다고 판단될 때는 융자금을 조기회수하는 방안도 추진중이다.
정보통신 업계 일각에선 정보화촉진기금을 둘러싼 로비의혹도 끊이지 않는다. 정보화촉진기금을 유치해주는 브로커가 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 실제로 2001년 8월 정보통신부 손모 정보통신정책국장은 한 벤처기업가로부터 정보화촉진기금을 계속 받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4000만원을 건네받아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현실적으로 외풍에 약한 정부 산하기관(정보통신연구진흥원)에 자금운영의 전권이 주어져 있고 로비 대상의 폭도 좁은 편이다.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여서 로비가 작용했는지 여부를 가리기도 쉽지 않다. 정보화촉진기금을 둘러싼 로비의혹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 때문에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촉진기금이 건전한 벤처기업의 유력 기술개발에 실질적 도움을 준 측면도 있다. 정보통신부와 정보통신연구진흥원은 정보화촉진기금 운영의 투명성, 합리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마련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업계에서 “다른 방식으로 2조5000억원이나 되는 자금을 활용한다면 IT산업을 위해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는 여론이 비등하는 것또한 현실이다.
감사원은 최근 “정보화촉진기금이 설립취지와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는 감사결과를 밝히며 이에 대한 해법을 제시했다. “정보화촉진기금을 폐지하라”고 기획예산처에 권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