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직도 광야에서 방황 중
- 구원은 천당 가는 게 아니라 영의 정화
-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하지 말라
- 단군상 모가지 자르는 사람들, 기독교 정신 전혀 몰라
- 한국교회 너무 많이 갖고 있으나 내 눈의 들보가 크니…
- 기독교에 기초한 생명자본주의로 새로운 문학 시작
●1934년 충남 아산 출생<br>●서울대 국문학과<br>●서울신문·경향신문·중앙일보·조선일보 논설위원<br>●이화여대 교수<br>●문학사상사 주간<br>●1990년 문화부 장관<br>●2002월드컵조직위원회 공동의장<br>●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br>●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중앙일보 상임고문, 이화여대 학술원 명예석좌교수
기독교는 제국주의 팽창에 힘입어 동양인의 정신세계도 빠른 속도로 점령했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기독교 열기가 뜨거운 국가로 꼽힌다. 몇 년 전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이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바로 이어령(77)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다. 그는 다재다능한 문인(평론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이자 언론인, 교수로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며, 시대변화를 앞서 읽는 예지력과 통찰력으로 한국 지식인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해왔다. 인본주의 전도사로서 신을 부정하고 종교를 비판해온 그였기에 그의 ‘변절’ 혹은 ‘굴복’은 뜻밖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 3월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신앙고백서를 펴내 또 한번 화제가 됐다. 이 책은 6개월 만에 30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지난해 11월엔 산문집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와 시집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잇달아 펴냈다. 출판사는 신문에 세 책을 묶어서 소개하는 전면광고를 여러 차례 내며 그의 이름이 가진 위력을 한껏 과시했다.
콧대 높은 석학이 받아들인 신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그는 진정 엎드린 것일까. 서구 합리주의와 실존주의로 무장했던 그가 비과학의 극치인 부활과 영생을 믿는 ‘예수쟁이’가 된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혹시 딸 때문에 잠시 몸을 낮췄다가 남이 눈치 채지 않게 예전의 완고한 인본주의자로 되돌아가 있지는 않을까(그가 신앙인이 된 표면적인 계기는 독실한 신자인 딸이 실명(失明) 위기를 맞았다가 ‘기적처럼’ 회복된 사건이다). 그에게 신과 종교를 주제로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일대 전환을 한 한국 대표 지식인의 정신세계를 엿보려는 것이었지만 어쩌면 나 자신의 영혼의 목마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을 논하는 것은 곧 인간을 논하는 것이니까.
가족에게 닥친 불행
인터뷰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 인터뷰는 그가 이사장인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에서, 두 번째 인터뷰는 그가 상임고문으로 있는 중앙일보 사옥에서 진행됐다. 익히 알고 있던 대로 그는 하나를 물으면 열을 대답해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난감하게 만들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요령 있게 말허리를 끊어야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분수처럼 내뿜는 화려한 수사와 비유에, 빈번한 영어 사용까지.
1월5일 이 교수는 삼성의 회장단과 사장단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 주제는 스마트 경영. 첫 질문으로 이날 강연에 대해 묻자 그의 입에서 말 폭포가 쏟아졌다. 요지는, 아무리 하드웨어가 좋고 프로그램이 좋더라도 인문학과 접목되지 않으면 문명의 흐름에 뒤처진다는 것,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진 자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가 몇 번 거론됐다.
여기서 잠깐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전에 그와 그의 가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리해보자. 2006년 5월 일본에서 홀로 생활하던 그는 딸 민아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하와이병원에서 실명 진단(망막박리)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하와이로 날아간 그는 딸의 권유로 현지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약속한다. “만약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라고.
이후 딸은 한국으로 들어와 재검사를 받았고 하와이병원의 진단이 오진이었음이 드러난다. 2007년 7월 그는 딸과 약속한 대로 세례를 받는다. 두 달 후 민아의 큰아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 19일 만에 숨을 거둔다. 버클리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사무실에서 일하던 25세의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한동안 신앙심이 흔들렸지요. 지금도 대단한 신앙심은 아니지만.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 배운 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하박국’에 나오는.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 있다면 참 잔인하다. 혹은 무분별하다. 왜 악인은 멀쩡하고 선한 자는 비참한가. 이런 회의를 안 겪은 사람이 없지요. 그것을 극복하는 게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예요. 나 또한 그런 체험을 겪으면서 신앙인이 되는가 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내 신앙은 아직 남에게 말할 게 못 돼요. 아직도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거죠. 내가 교회의 간증 요청이나 강연을 극도로 사양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그의 표정은 다소 초췌했다. 심한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목소리엔 생기가 넘쳤다. 앞머리가 기운차게 위로 빗겨 올려져 있다. 자신감이 가득 찬 그는 여전히 날선 지식인이었다.
▼ 책을 내고 나서 자괴감이 들지는 않았습니까.
“책이라는 것은 내고 나서 늘 불만스럽기 때문에 또 내는 거예요. 내가 많은 책을 냈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권의 책도 못 낸 거지요.”
지적 호기심의 막다른 골목
▼ 이 책은 이전에 이 선생께서 냈던 다른 책들과는 성격이 완연히 다르지요.
“비교적 자괴감이 없었던 것은, 신앙심을 얘기한 게 아니라 문지방에 이른 과정을 썼기 때문이에요. 무신론자가 신을 영접하기까지의 과정. 남녀관계로 치면 아직 약혼도 안 한 단계의 얘기지요. 결혼해 애를 낳는 게 진짜 신앙생활이라면. 자랑도 아니고 깊은 참회도 아니고 프로세스를 얘기한 거지.”
▼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와 ‘무신론자의 기도’를 잇달아 낸 데는 출판사의 상업적 의도가 보입니다.
“물론 출판사는 다 상업적이지요. 내가 (신문에) 광고를 자주 내지는 말라고 했어요. 저자가 출판사한테 광고 내달라고 부탁하는 게 정상인데.”
▼ 광고, 엄청 하던데요.
“엄청나게 때리고 있어요. 그분(출판사 대표)이 크리스천이에요. 돈도 돈이지만 이 기회에 자기 사역을 하겠다는 거지. 그 사람 열성이 아니면 그 책 못나왔어요. 아마도 출판하면서 광고를 몇 개 내겠다고 신문사와 계약을 한 것 같아요.”
▼ 기독교는 흔히 각(覺)의 종교가 아니라 신(信)의 종교라 하지요. 기독교로 귀의했지만 여전히 지성과 영성이 양립하는 게 아닙니까.
“양립하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거지요. 지성의 궁극에는 영성이 있다는 거지요. 지적 호기심이라는 게 뭡니까. 돈 벌려고 지적 호기심을 갖나요?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 영성을 믿는다는 것은 지극히 순수하다는 점에서 지적 호기심과 같아요.”
▼ 지적 호기심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나요?
“지적 호기심의 막다른 골목에서 맞닥뜨린 거죠. 내가 교토에 머물며 혼자 밥 지어 먹으면서 연구소 생활한 것 자체가 이미 종교적인 행위였던 거예요. 기사, 비서, 가정, 직장 다 버리고 떠난 것 아닙니까. 일흔이 넘어 내 인생을 바라보면서 내 삶이란 게 뭔지 되돌아본 거죠. ‘무신론자의 기도’를 쓴 것도 그때예요.”
▼ 그때만 해도 종교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미학이었죠. 믿음 얘기가 아니지요. 당신의 능력을 빌려줘서 무지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는 한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쓰게 하소서, 했지. 그러니까 심미주의자의 기도지. 혼자 살면서 고민한 주제는 평범한 사랑이었어요. 나 아닌 사람을 진정 사랑한 적이 있는가. 물론 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지요. 에로스든 아가페든 필리아든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알고 보면 이기주의적인 나르시스적인 사랑이지. 자기를 사랑한 거지. 딸이나 아내나 이웃을 사랑한 게 아니라. 더군다나 나는 필리아가 없는 사람이거든요. 부모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좀 있었는지 몰라도 이웃에 대한 사랑, 동료에 대한 사랑, 이른바 횡적인 사랑은 평생 안 했던 사람이에요. 릴케가 뮈조트의 성 안에서 시를 썼듯이 밀실 속에 나를 가두었지. 남과의 단절 속에 상상력도 생기고 지적 호기심도 생기는 거지. 남하고 섞이면서 나오는 문학은 4·19 이후 끊었거든요.”
‘나를 넘는 어떤 힘이 있구나’
이어령 교수는 “니체만큼 기독교를 잘 이해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 딸이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해주면 남은 생을 바치겠다는 건 조건부 신앙인데요.
“조건을 달고 하나님을 믿는다? 기독교 윤리로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지요.”
▼ 혹시 신을 한번 시험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건 아닙니까.
“그때는 경황이 없었어요. 절실했고. 딸애가 내 앞에서 그릇도 깨뜨리고 더듬더듬 했거든요. 성서도 못 읽고. 믿음이든 지성이든 계산된 행동은 아니었어요. 그냥 그렇게 무릎 꿇고…. 그런데 자꾸 신문에서 내가 딸이 나은 기적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된 것처럼 얘기하는 건 사람들을 호도하는 거예요. 어느 날 내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니까 딸이 너무 기뻐하는 거예요. 그냥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앞뒤 생각 안 하고 한 말이었죠. 그날 딸애가 교회에 가서 간증을 했어요. 간증이 끝나고 하용조 목사님이 청중 앞에서 얘가 누구 딸인데 그분이 곧 세례를 받는다고 말했어요. 그때 기자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다음날 조간신문에 크게 보도된 걸 보고 내가 안 하고 싶어도 안 할 수 없게 조여오는구나 싶었죠. 이것은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구나. 내 지적 판단이나 이성적인 사고로 어찌 못하는 신의 세상이 있구나. 나를 넘는 어떤 힘이 있구나. 그래서 그냥 포기한 거예요. 아유, 그냥 맡기자.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고.”
▼ 절대자에 대한 실존적 차원의 무릎 꿇기라고 볼 수 있나요?
“그렇지요. 키에르케고르나 쇼펜하우어의 실존적 사상은 여전히 제 마음속에 있어요. 실존주의는 두 가지죠.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 실존의 낭떠러지에 서서 나 아닌 바깥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지. 여전히 나는 비참한 존재이고 죽음은 처절하고 인간은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외톨이로 서 있다. 이런 절망적인 인간관은 변함이 없지요. 그것을 넘어서느냐 안 넘어서느냐.”
▼ 굳이 구분하자면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넘어갔다는 건가요?
“그렇지요. 지성의 발전은 계단을 올라가는 거지, 점핑하는 게 아니거든요. 난 지금 계단 밑에 있는 거지요.”
▼ 그 결정적인 계기가 아주 우연히 자식과 한 약속이었다는 게 참 묘합니다.
“그게 외국인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 한국인의 특징이에요. 목사 집에서 태어난 다윈은 진화론을 펴면서도 기독교를 부정하지는 않았어요. 그 딸이 죽어요. 그러고 나서 무신론자가 됩니다. 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요? 가족관계를 확장한 것이 사회이고 민족이고 인류이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관계의 기본이 가족이지요.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냈다는 비유도 가족의 개념으로 실감하는 거지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이웃으로 번지면서 기독교적인 사랑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족주의를 버리는 것이 크리스천이거든. 가족을 넘어서는 것이. 가족은 예수를 가장 쉽게 믿게 하는 조건이면서도 믿기 힘들게 만드는 조건이지요.”
유다의 절망
▼ 역설이네요.
“역설이에요. 예수님이 죽기 전에 자기 어머니에게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하잖아요. 여자여, 저기 당신의 아들들이 있다고. 왜 나만 아들이냐는 거죠. 예수는 가족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가족을 넘어서는 진리를 전한 거예요. 공자도 마찬가지예요. 조상신을 어떻게 천(天)의 개념으로 볼 거냐. 여기서 종교가 생기는 거지요. 혈족에 대한 사랑을 더 넓히고 보편화할 때 생판 모르는 남에게까지 사랑이 미치는 거지요. 한국에선 가족주의가 어느 나라보다 강하기 때문에 쉽게 예수교를 믿어요. 반면 예수교가 몸에 배는 과정은 참 어렵습니다. 들어가기는 쉬운데 나오기가 어렵다는 거예요. 가족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교인들이 주일마다 기도를 드리는데, 그걸 전부 (동영상으로) 찍었다고 합시다. 전부 자기 자식, 마누라, 대학입시… 이게 샤머니즘이지 무슨 기독교냐는 거지.”
▼ 기복(祈福)신앙 말이죠?
“기복신앙이지. 그런데 그 기복이란 걸 무시하면 종교의 입구에 들어가지 못해. 그것이 인간의 한계지. 인간의 노력만으로 안 된다니까 복의 개념이 생긴 것이고 죄의 개념이 생긴 거지. 옛날부터 뭔가 불행한 일이 생기면 자기 탓이라 했거든. 내가 죄를 지었나 보다, 조상이 죄를 지었나 보다. 죄의식 없는 종교는 무의미하거든요. 참회는 죄에서 나오는 것이고 참회 없는 종교는 거짓말이에요. 죄의식 없는 사람이 정의를 얘기해요. 그런 사람들 곁에 가면 데어요. 정의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종교에 기대는 거지, 알면 왜 종교를 찾습니까. 여기 지상에서 다 실현하지. 유다가 예수님을 돈 때문에 팔았겠어요? 아니에요. 지상에서 천국을 만들려 한 거예요,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면 하나님이 로마인들을 물리치고 유대를 해방시켜줄 걸로 생각했는데, 낫싱(nothing)! 그러니까 자살한 거지요. 인간이 어떻게 정의를 내세워요? 미국의 남북전쟁 때 하나님은 둘로 갈라졌을 거예요. 서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으니. 그래서 종교는 세속적인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가 또 4·19 얘기를 꺼냈다.
“아무 저항도 안 한 사람이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사진 찢고 동상 끌고 다니는 걸 보면서 참 허망했어요. 정의를 내세운 끝없는 권력주의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런 게 역겨워 저항과 참여의 대열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나는 너희들과 같지 않다고. 그래서 저항과 참여의지를 거두었고 그게 지금까지 내려온 거죠. 문학에서 의로움을 내세우는 건 위선이고 자기기만이고 상업주의일 수 있는데 미(美)를 내세우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요. 미라는 건 자기를 위한 것 아니에요? 그래서 나는 의(義)보다는 미적인 것, 감동적인 것을 얘기했지. 단군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간의 고통을 얘기한 거지. 사회체제에 대해선 깊은 관심을 안 가졌지요. 그렇기에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70 넘어서까지 그의 내면을 짓누르는 이 깊은 상처는 무엇인가. 따지고 싶은 게 있었지만, 인터뷰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민족공동체에서 생명공동체로
▼ 종교에 귀의한 것이 문학활동의 연장선이라고 봐도 됩니까.
“연장선이기 때문에 지금 제가 생명자본주의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리먼 브러더스 사건 이후 자본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시장경제 원리가 무너졌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대안이 있느냐? 없어요. 그렇다고 사회주의를 하겠어요? 기독교는 세 가지 필리아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토포필리아(topophilia), 바이오필리아(biophilia), 네오필리아(neophilia), 즉 장소에 대한 사랑, 생명체에 대한 사랑, 새로운 것에 대한 사랑이죠. 생명자본주의는 이 세 가지 축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경제체제입니다. green growth(녹색성장)라든지 하켄이 얘기하는 natural capitalism(자연자본주의), 하스가 말하는 cooperative capitalism(협력적 자본주의), creative capitalism(창조적 자본주의), 이런 것들을 다 한마디로 추리면 viva capitalism(생명자본주의)입니다. 유물론적 자본으로부터 유신론적 자본으로 가는 겁니다. 민족공동체가 아니라 생명공동체죠. 우리와 관계없는 유대인의 역사를 왜 읽어야 하나. 생명공동체, 사랑공동체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성서에는 인간의 약점과 잘못이 다 기술돼 있어요. 내가 지성을 가진 실존적 리얼리스트로서 기독교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실존적 고뇌의 프로세스를 가진 종교, 밤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또 내가 동양문학보다 서양문학 작품을 많이 읽은 것도 영향을 끼쳤지요. 외국문학이라는 게 대개 christianity(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것 아닙니까.”
▼ 종교에 귀의한 계기가 따님 문제였는데, 내면적으로는 교토생활 혹은 그전부터 귀의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보이네요.
“물론이지요. 그게 모멘트가 됐다는 거지. 내 내부에서 붕괴를 촉진한 거지. 갑자기 딸 때문에 확 돌아버린 건 아니지요. 나는 지금도 그걸(딸이 실명위기에서 벗어난 것)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지금까지 인류역사에서 기적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일어났다면 예수의 부활뿐이지요. 그 외의 기적을 믿는다면 예수를 잘못 믿는 거지요.”
▼ 주변에서 예수쟁이 됐다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다면서요?
“많지요. 내 주변 사람이 전부….”
▼ 그런 사람들은 이 선생께서 나이가 들어 약해진 게 아니냐는 얘기도 하겠지요?
“두 가지예요. 하나는 혼자 살기에 너무 힘든 게 아니냐. 내가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거든요. 외롭고 고통스럽죠. 친구라도 많고 조직이라도 있으면 버틸 텐데 점점 나이 들고 초조하니까 뭔가에 의지하고 싶어 신념을 포기한 것 아니냐. 인간주의의 패배가 아니냐는 거죠. 또 하나는 죽음 앞에선 다 헛되니 죽음까지도 가지려고, 말하자면 천당 가려는 욕심에서 그런 것 아니냐고. 그런 말에 가장 화가 나요. 저의 전 생애를 부정하는 얘기지요.”
▼ 이 선생께서 믿는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신과는 다르지요?
“그래서 나한테 말 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목사님들이 보기에 이단이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성서를 비유로 읽는데 그분들은 사실이라고 믿거든요. 예를 들어 예수께서 말한 ‘본 어게인(born again)’이라는 게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모든 걸 버리고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라는 애기지.”
배터리 떨어진 장난감 곰
▼ 신의 개념은 여러 가지지요. 기독교의 인격신도 있고 이신론(理神論)의 신도 있고 우주의 질서원리, 차원의 끝에 있는 절대자라는 개념도 있지요. 이 선생께서 말하는 신은 기독교의 하나님과는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요?
“종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자력(自力)으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다는 종교와 타력(他力)으로만 건너뛸 수 있다는 종교. 일생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 허물을 벗을 수 없고 누군가가 벗겨줘야 한다는 걸 깨달은 거지요. 그런데 내가 가만히 있으면 절대 외부에서 도와주지 못해요. 북 치는 장난감 곰이 배터리 나가면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여태까지 나는 나 혼자 북 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동인형이라고. 그런데 알고 보니 배터리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거죠. 그 배터리가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는 건데, 이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죠.”
▼ 타력에 의한 구원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건 분명하네요?
“물론이지요. 그거 인정 안 하면 기독교인 아니에요.”
▼ 그 점에선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는 게 맞네요?
“그렇죠. 타력의 존재를 인정해 기도의 형식이든 가슴을 찢는 회개의 양식이든 영접하려는 것, 그게 기독교라는 거지요. 그런데 과연 영접했느냐? 넘어섰느냐? 그건 모르겠다는 거지요. 그 얘기를 나한테 물어보지 말라는 거예요. 왜? 거짓말이 되니까. 오해를 산단 말이에요. 내게는 어떻게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성경을 읽느냐가 중요해요.”
▼ 젊은 시절엔 신을 부정한 니체의 초인류 사상에 심취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 니체만큼 기독교를 잘 이해한 사람도 없어요. 신은 죽었다고 했기 때문에 부활했다고 말할 기회가 주어진 거니까. 그런데 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은 거짓말을 하고 위선하고 십자군을 일으켜 정복하고…. 니체는 굴종하는 낙타가 되지 말고 사자가 되라고 말했어요. 또 자율적인 어린아이가 되라고 했어요. 그게 초인의 시작이지. 그런 단계가 기독교의 프로세스와 똑같다는 겁니다. 다만 결론이 다르죠. 니체는 신이 될 수 있는 인간, 곧 초인의 길을 제시했어요. 바그너, 히틀러가 그걸 잘못 해석해 큰 죄악을 저지른 거죠. 니체를 잘못 이해한 겁니다. 그야말로 지상에 천국을 세우려 하는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잘못이죠. 기독교에서 가장 큰 죄인 오만이고.”
▼ 그런데 니체는 기독교를 강하게 비난하지 않았습니까. 비겁한 자, 약자의 종교라고.
“물론이지요. 알았기 때문에 그랬던 거죠. 몰랐다면 그런 욕도 못해요.”
▼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3단계를 말했습니다. 미적(감각적), 윤리적(이성적), 종교적(신앙적) 단계. 각 단계의 상징적인 인물로 돈 후안, 소크라테스, 아브라함을 꼽았습니다. 선생님은 굳이 구분하자면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동시성으로 봅니다. 서양에서는 단계론을 얘기하지만 동양은 순환론을 말합니다. 같이 도는 거지요. being(존재)이 아니라 becoming(생성)입니다. 신성은 변하지 않아요. 하지만 끝없이 변해요. 신은 존재하는 게 아니라 끝없이 생성되는 존재지요.”
“신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
▼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3단계 인간은 신과 마주하는 단독자입니다. 그 문턱에 서 계신 건가요?
“그렇죠. 그런데 어릴 때부터 이미 신과 단독자로서 대하고 있었지. 단계적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니라는 거지. 우리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순환 속에 신과 마주치고 있는 겁니다.”
▼ 여섯 살 때 굴렁쇠를 굴리다 신의 존재를 느꼈다는 거죠?
“예. 그때 만난 거지요. 어머니의 죽음이 두려웠고, 내가 의존할 데가 없다는 게 쓸쓸하고 외로웠지요. 그것이 88올림픽 때 굴렁쇠를 굴리는 어린이의 이미지로 나타난 거지요.”
▼ 이 선생께서는 내세의 구원을 믿으십니까.
“구원의 의미가 다르죠. 무덤에서 나와서 어쩌고 하는 게 아니라 영의 ‘purification(정화)’이죠. 더럽혀진 내 영을 정화하는 의미의 구원이죠. 영이 내 육체에 깃들어 있지만 이것이 내 것이 아니고 창조 이전의 혼돈 속에 있었던 영이 내게도 있다고 믿으면 그게 구원이지요.”
▼ 죽어서 천당 가는 개념이 아니고요?
“천당이든 뭐든 내 영이 창조주에게―창조주라는 말이 싫으면 ‘something great(위대한 그 무엇)’라고 하죠―속해 있다고 믿고 창조 이전의 그 영이 내게 이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천당이냐 부활이냐 말할 것도 없지요.”
예상한 대로 그의 기독교 신앙은 평범하지 않다. 교회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아마도 그가 교회 목사와 똑같은 얘기를 늘어놓았다면, 인터뷰를 길게 할 필요를 못 느꼈으리라.
▼ 영의 부활인가요?
“영이 정화되면 그게 부활이고 천당이고 영생이지요.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사람이 죽으면 영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잖아요.(웃음) 그 영을 믿으면 그게 어디로 가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지요.”
▼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생각과는 다르지요?
“아니요. 내가 정통이지요.”
▼ 예수 믿으면 천당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성서 어디에 그런 게 씌어 있어요?”
▼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고.
“아니, 어디에 그런 게 씌어 있냐고?”
그의 정색에 웃음이 나왔다. 역시 그는 학자다.
“인간이 그렇게 해석한 거지. 단테의 ‘신곡’ 같은 데서.”
한국교회의 세속화
약속한 두 시간이 지났다. 그가 다음 일정이 있다며 일어섰다. 아직 질문거리가 남아 있었다.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와 ‘하늘나라(Kingdom of Heaven)’의 개념을 두고 신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있어왔다. 진보적 신학자들은 ‘하늘나라’는 비유이고, 예수가 온 것은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 일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랑과 정의라는 하나님의 통치원리가 지상에서 실현되는 상태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한마디로 요약할 게요. ‘고린도후서’ 3장에 보면 ‘문자는 죽음이요, 하나님의 말씀, 영성은 살림이다’라고 나와요. 지금 우리가 쓰는 거, 읽는 거 전부 죽음이야. 이 얘기로 다 끝나요. 더 물을 게 없어.”
내가 “추상적인 말씀이라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라고 하자 그가 약간 흥분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영성. 그게 살림이에요. 나중에 전화로 더 합시다.”
전화로 하지 않고 3일 뒤 다시 만났다. 첫날보다 표정이 여유로웠다. 감기가 나았는지 목소리 상태도 좋았다. 첫날의 마지막 질문을 의식해선지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종교는 지상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예수께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라고 하셨잖아요. 종교가 땅의 것이면 뭐 하러 기독교를 믿어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거꾸로 가고 있어요. 지상천국, 혹은 지상에서 자꾸 뭘 하려고 해요. 복지니 사회봉사니.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너무 세속화돼 있어요. 내가 원하는 종교는 그게 아닙니다. 본회퍼(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 암살을 꾀하다 처형된 독일 신학자)니 해방신학이니, 종교의 이름으로 사회참여를 하는 건 나와 맞지 않아요. 그런 건 굳이 신의 이름으로 하지 않아도 되지요. 사회적 윤리와 도덕으로 하면 되는 거예요. 같은 맥락에서 문학도 정치화되면 안 된다는 거죠.”
그의 보수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건강한 보수든 그렇지 않든.
“내가 저항을 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얼마나 현실비판을 합니까. 칼럼이나 방송 나와서. 하지만 문학의 이름으로는 안 한다는 거죠.”
▼ 젊은 시절 종교를 도그마라며 비판하셨죠? 그때는 신을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라고 생각하신 건가요?
“인간이 만든 것이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든 우리가 사는 데 관계없다고 생각했죠.”
▼ 지금은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건가요?
“내 근거지인 휴머니즘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지요. 더는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팔 없는 비너스
▼ 논리적으로 설명이 됩니까.
“설명되지요. 빵 문제가 해결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걸로 믿었죠. 서구식 산업주의와 근대 인간, 휴머니즘을 믿었는데 그게 무너진 겁니다. 기독교를 부정하고 희랍신들에게 치우쳤던 하이네가 마지막에 죽음을 앞두고 비너스 동상 앞에서 무릎 꿇었을 때 미의 여신(비너스)이 이런 얘기를 했잖아요. 널 도와주고 싶어도 내겐 널 구제할 팔이 없다, 더 힘센 팔이 너를 구제해줄 거라고. 타력의 구원. 하이네에게 필요했던 신이 내게도 필요했던 건지 모르죠. 내가 휴머니스트이지만 심미주의자잖아요. 진선미(眞善美) 중 미에 심취했죠. 그래서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한 거죠. 그런데 그 미는 미로의 비너스처럼 팔이 없는 거예요. 인생을 구하고 역사를 구할 힘이 없는 겁니다. 그런 패배감이 든 때가 세례 받고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때와 일치해요. 그 계기가 딸이었을 뿐이죠. 그런데 내게 신이 존재하는 세계는 어떤 거냐고 물으면 말 못해요. 정말 그 세계에 들어가봤다면 이런 인터뷰도 안 하겠지요. 왜? 무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인터뷰가 가능한 건 아직도 내가 문지방 위에서 서성대기 때문이지요.”
열띤 음성으로 “종교는 지상천국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어령 교수.
“관여하더라도 우리 식으로 관여하는 게 아니니 그 뜻을 모르는 거지. ‘이사야’서에 나의 길과 너희의 길이 다르다고…. 부모가 자식을 학교에 보낼 때 자식은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잖아요.”
▼ 그 점에서 이신론과 명백히 구분되네요?
“그럼요.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작용하는데, 그것이 합리적이거나 논리적이진 않다는 겁니다. 6·25 때 봤잖아요?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럴 수가 없지요. 아무 죄 없는 애들이 죽어가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신 거냐. 그런 의문은 지금도 같아요.”
▼ 신을 받아들여도 삶의 모순, 세상의 모순, 역사의 모순은 해결되지 않았군요.
“그럼요. 그게 실존주의적인 고민이지요. 키에르케고르도 그랬고 쇼펜하우어도 그랬고.”
▼ 이 선생께서도 그 점은 묻어두고 간다는 거죠?
“삶이 부조리한 건 인정하니까. 카뮈의 ‘absurd(부조리)’가 내가 생각하는 부조리와 같거든요. 그것이 원죄든 인간의 조건이든. 그걸 뛰어넘어 부조리에서 벗어나는 게 신의 영역, 부활의 영역이고 본 어게인, 다시 태어나는 거죠.”
▼ 그 지점에서 카뮈와 갈라선다는 거죠?
“카뮈에게는 신이 없었죠. 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그 부조리를 뛰어넘으려는 거고. 세례 받고 나서도 아멘이나 할렐루야 소리가 안 나왔어요. 어색하고 창피해서. 요즘은 그 말이 나와.(웃음) 그만큼 달라진 거요. 하지만 아직도 나는 문지방에서 한 다리는 여기에, 다른 다리는 저기에 걸치고 몸부림치고 있어요. 12사도들도 예수 죽고 나서 뿔뿔이 흩어졌잖아요. 하물며 우리가 뭐 하루아침에 순교할 만큼 믿겠습니까.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나는 오히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 신을 안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구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봐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히 못 믿어요.”
이차돈의 순교
▼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인정하십니까.
“크리스천이 되기 전에도 예수를 폄훼한 적이 없어요. 신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위대한 사람, 감동적인 사람으로 인정했지요. 다만 부활을 안 믿었을 뿐.”
▼ 지금은 믿나요, 부활을?
“부활을 믿어야 세례 받고 크리스천 되는 거요.”
▼ 예수의 대속(代贖)을 통해 인간의 구원이 이뤄진다는 것도 믿습니까.
“그러니까 세례를 받았지.”
가톨릭은 타 종교에 관대하다. 타 종교의 가치와 특수성을 인정하는 이른바 종교다원주의 논쟁이 개신교에 비해 자유롭다. 교황 바오로 2세의 경우 타 종교 안에 있는 ‘진리의 씨앗’을 인정했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도 하나님의 진리에 맞는 삶을 살면 구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 이 선생의 모친은 불교신자였습니다. 기독교적 구원이 불가능한가요?
“그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예요. 예수 이전에 천년 동안 살았던 사람들은 다 지옥에 갔는가. 그 천년은 우주의 시간으로는 몇 초에 지나지 않죠. 예수를 알았느냐, 여호와 신을 알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죠. 인류가 아담과 이브의 후예라고 보면 다 같아요. 동시성으로 보는 거죠. 진정 예수님을 믿는다면, 기독교의 메시지가 ‘이웃을 사랑하라’이고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라면 이미 해답이 나와 있어요.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만나잖아요. 그 사람들, 혼혈에 다신교예요. 예수는 그들에게 손 내밀었습니다. 이웃이라 불렀잖아요. 이교도라도 우리에게 사랑을 베푼다면 우리의 이웃이라는 거죠. 어디 가서 (단군상) 모가지 자르는 사람들, 기독교 정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요. 신라 때 순교한 승려 이차돈도 남을 위해 희생하고 사랑했다면 원죄를 씻은 거죠. 영의 정화.”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자신이 없는지, 혹은 걱정이 되는지 슬쩍 톤 다운을 했다.
“사실 이 점은 내 힘으로 말하기가 힘들어. 신학자들에게 맡겨야 하는데.(웃음) 그 많은 사람이 예수를 모르고 살아갔는데 그걸 어떻게 심판할 거냐. 나는 성경을 알레고리로 읽어요. 그런데 그것을 역사적 팩트로 읽는 사람들, 교조주의자, 원리주의자 눈으로 보면 내가 이단이죠. 그래서 되도록 말 안 하려는 거예요. 눈 감고 돌 던지는 것과 같아 누군가에게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줄 수 있거든요. 이런 얘기를 일반 교양지와 하는 건 처음입니다. 기독교를 놀릴 생각도 아니고 맹신해서도 아닌 것 같아 인터뷰에 응하는 겁니다. 이 기회에 인문학적 관점에서 (종교를) 얘기해보자고. 내게도 답해야 할 의무가 있고.”
화제를 돌렸다.
▼ 한국 교회의 물질주의와 팽창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뿐 아니라 어떤 조직에도 세속적인 의미의 악이라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기독교에도 엄연히 존재하죠. 그래도 기독교 아니면 이웃 사랑의 메시지를 어디서 쉽게 들을 수 있겠어요? 그것 하나만으로도 교회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봐요.”
내 눈의 들보
▼ 대형교회의 물질주의가 큰 문제가 아니란 얘긴가요?
“그게 아니라 교회의 자정능력에 달린 문제라는 거죠. 비(非)크리스천이 돌 던지는 것과 크리스천이 ‘정화’를 얘기하는 건 구분해야 합니다. 만약 그때 하와이교회에 샹들리에나 파이프오르간이 있었다면 난 무릎 꿇지 않았을 겁니다. 정말 가난하고 순수한 교회였기에 그들의 기도가 진실하게 들렸고 내 마음을 움직인 겁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 많이 갖고 있어요. 다만 그런 얘기를 여기서 하면 내가 원하지 않은 결과가 나올 것이기에 삼가는 겁니다. 아직 크리스천으로서 내 신앙이 단단하지 않기 때문에. 내 눈의 들보가 너무 크므로 바깥을 비판하지 않는 거지 그들이 옳아서 비판하지 않는 건 아니에요. 내 눈의 들보를 빼면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선지자를 분노로 다스렸어요. 안 믿는 자에겐 관대했지만 거짓으로 믿는 자에겐 단호하게 징벌했죠.”
신을 주제로 한 ‘문지방 인터뷰’를 끝낼 때가 됐다. 그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었다. 신을 받아들이고 나서 일상생활에서 뭐가 달라졌느냐고.
“기독교를 믿기 전에도 허욕을 부리거나 재물을 탐내진 않았어요.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극적인 변화는 없지만 두 가지가 달라졌어요. 첫째는 사랑하는 법. 타자를 배려하게 됐어요. 한 예로 예전엔 기사와 비서를 많이 꾸짖었거든요. 신경질도 부리고 약속시간에 늦으면 공중이 있는 데서 소리도 질렀죠. 그런 게 바뀌었어요. 더 큰 변화는 내 문학관에서 찾을 수 있어요. 생명자본주의를 시작했으니까. 이전엔 휴머니스트로서 카뮈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관점에서 문명문화의 패러다임을 읽었지만 이제는 기독교 신앙과 생명사상을 토대로 한 예술을 합니다. 문명문화론에 기독교를 어떻게 편입시켜 새로운 옷감을 짜느냐. 어떻게 새로운 텍스트를 만드느냐. 기독교의 미션은 자기 직업을 통해 발현됩니다. 지금 나는 생명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테마를 얻어 그걸 실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어요. ‘세살 마을’이니 ‘창조학교’니 하는 게 다 그런 거지요. 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에요.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건. 처음으로 에고이스트가 아닌 활동을 하고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