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내 인권 경시 풍조, 국방력 약화로 이어져
이러다 ‘안보는 민주당’ 인식 생길지도
2023년 12월 7일 충남 논산시 육군훈련소 각개전투훈련장에서 훈련병들이 훈련을 받고 있다. [뉴스1]
사병 처우 개선 힘쓴 대통령들
사병 처우 개선에 힘쓴 사병 출신 노무현 전 대통령. [동아DB]
병사의 설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높은 사람이 부대에 방문하면 병사들은 쉬지도 못하고 고생한다”며 군부대 방문을 자제했다. 이를 두고 2007년 맹형규 한나라당 당시 의원은 “장병들의 사기와 직결되는 만큼 대통령이 일선 부대를 더 자주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모르긴 몰라도 장성이나 영관급 정도가 아니라면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군에 방문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 사기가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번거롭기 때문이다. 일선 부대에 ‘투 스타(소장)’ 정도만 온다고 해도 사열이니 청소니 하며 난리가 나는데 대통령은 오죽하겠나. 그렇게 아랫사람들이 고생하면 과실은 윗사람들이 다 따먹는다. 사병 처우에 관한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입장 차는 군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높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선 열기가 달아올랐던 2022년 1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SNS에 ‘주적은 북한’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한 줄 공약으로 한창 재미를 보던 때였다. 이에 더불어민주당의 한 청년 대변인이 ‘주적은 간부’라고 맞받아쳤다. 그 메시지는 일파만파 확산해 큰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국민의힘 청년 정치인들은 “군인을 모욕하는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결국 청년 대변인직에서 물러났다.
대선이라는 예민한 시기에, 공당의 대변인직을 맡고 있는 인물의 발언이었기에 논란은 더 컸다. 하지만 ‘주적은 간부’라는 말이 아예 없는 말은 또 아니다. 사병들 사이에서 으레 오고 가는 표현이다. 간부들이 주말이고 야간이고 할 거 없이 툭하면 불러서 사적 심부름시키고, 당연하다는 듯 본인 업무를 떠넘기는 일을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주적은 간부’라는 표현은 단지 훈련이 고되고 상명하복 관계가 엄했기 때문에 생겨난 원성이 아니다. 공과 사의 경계가 무너지고 최소한의 책임감마저 상실한 일부 몰상식한 간부들을 규탄하는 목소리다.
P 전 육군 대장과 아내의 ‘공관병 갑질’ 사건은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2017년 7월 군인권센터는 P 전 대장과 그의 아내가 우월한 군내 지위를 악용해 공관병과 조리병들에게 심각한 갑질을 저질렀다고 폭로했다. 폭로 내용 중에는 음식물을 얼굴에 집어 던지고 휴가 나온 아들의 시중을 들게 하는 등의 ‘흔한’ 사례도 있었지만, 호출을 위해 전자발찌를 채우고 키우는 식물이 냉해를 입었다며 발코니에 감금하는 등의 충격적 사례도 있었다. 폭로가 불러온 분노는 컸다. 급기야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이 지휘관 공관에 근무하는 병력을 철수하고 이들을 민간 인력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P 전 대장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그의 아내는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 끝에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재미있는 건 그렇게 큰 논란의 중심에 섰던 P 전 대장을 2019년 자유한국당이 영입하려 했다는 점이다. 당시 황교안 대표는 2020년 21대 총선을 앞두고 ‘1호 인재’로 P 전 대장을 영입하려 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탄압받은 순교자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러나 국민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큰 논란이 일었다. 결국 자유한국당은 그의 영입을 철회했다. 얼마 뒤 탄생한 미래통합당은 2020년 총선에서 유례없는 참패를 겪었다. 문재인 정부를 성토하는 2030 남성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도 미래통합당은 총선 출구조사 기준으로 20대 남성과 30대 남성 모두에서 더불어민주당보다 적은 표를 얻었다.
‘반미’ 옅고 ‘혐북’ 짙은 2030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태도만 놓고 보면 오늘날의 2030세대는 과거의 청년 세대보다 보수적이다. ‘반미’ 정서는 옅고 ‘혐북’ 정서는 짙다. 특히 남성들의 경우 10대, 20대에 천안함 피격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을 경험한 까닭에 그 윗세대보다 안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9·19 남북군사합의 직후 GP(전방 감시초소)를 철수할 때도 2030 남성들이 자주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북한에 문을 열어줬다”는 비판이 잇따랐다. 북한이 도발을 일으켜도 찍소리 못하는 민주당 정치인들의 태도는 웃음거리가 되곤 한다.주목할 만한 건 안보를 중시하고 북한에 비우호적인 이들의 태도가 국민의힘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민의힘 정치인들의 ‘꼰대 국방’이 그 원인 중 하나다. 보수 정치인들은 사병을 노예처럼 굴리고 부리는 게 국방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과거 야인 시절 인터넷 방송에서 “병사들의 휴대전화 사용 허용은 국방을 허무는 길”이라고 비판한 신원식 국방부 장관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김학용 전 국민의힘 의원은 문재인 정부의 ‘평일 외출 허용’ 정책을 놓고 “이게 군대인가, 학원인가”라며 “군대는 군대다워야 정상적인 나라”라고 비판했다. 학생 인권과 교권이 반드시 반비례하는 것만은 아니듯 국방력과 사병들의 권리도 반비례하는 게 아니다. 사병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게 국방력을 드높이면 드높였지, 어떻게 약화하는 게 될 수 있나. 그런 논리대로라면 미군만큼 당나라 군대도 없다.
대한민국 국군은 강군이다. 그것도 세계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강군이다. 전 세계 국가들의 군사력을 측정하는 단체 글로벌 파이어파워(Global Firepower·GFP)는 2024년 한국의 군사력 순위를 미국·러시아·중국·인도에 이은 세계 5위로 평가했다. 영국(6위)과 일본(7위)이 뒤를 따랐다. 한국의 GFP 군사력 순위는 2013년 9위, 2014년 7위로 꾸준히 올랐으며 2020년부터는 6위를 유지해 왔다. 5위라는 순위가 이례적으로 높게 나온 건 아니라는 의미다.
군사력이란 무엇인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다. GFP는 각국의 군사력을 측정할 때 “재래식 무기를 사용해 지상, 해상, 공중에서 싸울 수 있는 각 국가의 잠재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 잠재적 전쟁 수행 능력은 병력과 무기, 경제력으로 구성된다. 우리의 무기와 경제력이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는 데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병력은 약 55만 명으로 세계 8위 수준이다(World Atlas 측정 기준). 중국·인도·미국은 물론 의무복무기간이 긴 북한도 현역 군인 수가 100만 명이 넘는다. 숫자가 안 되면 사기라도 높아야 한다. 사기는 단순히 월급을 올려준다고 고양되는 게 아니다. 사회로부터 단절된 시간이 헛되게 느껴지지 않게 해야 하고, 부당한 인권 침해가 있을 땐 정부와 군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해 주어야 한다. 군인에 대한 사회적 존경도 뒷받침돼야 한다. 군대가 “심심하면 불러다가 뺑뺑이 돌리는” 조직으로 인식된다면 누가 그런 군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우겠나.
“제가 대신 욕먹겠습니다”
병사들이 군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가득한 군대는 잘 싸울 수 없다. 실제로 베트남전 당시 미군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사를 죽이기 위해 아무 데나 수류탄을 던지는 이른바 ‘프래깅(Fragging)’이 기승을 부렸다. 주요 원인으로 꼽힌 게 유색인종 병사들에 대한 백인 상관들의 인종차별이었다. 생과 죽음을 오가는 전선에서마저 인종차별이 행해지면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프래깅은 남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한 1973년까지 최소 904건이 발생한 걸로 추정된다. 군대 내 인권 경시 풍조가 전투력을 현저히 떨어뜨린다는 교훈을 뼈저리게 깨달은 미국 정부는 전후 징집제 폐지를 포함한 군 인권 보호 대책을 내놓았다.요즘처럼 군을 향한 군필 남성들의 회의와 염증이 극에 달한 때가 있었나 싶다. 이들이 주로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부쩍 ‘나라 꼴’이라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현재 병역을 이행하는 20대 초중반 청년들과 그들을 군에 보낸 가족·연인들도 같은 마음일 것이다.
5월 30일 충남 천안시에서 열린 국민의힘 22대 국회의원 워크숍에 윤석열 대통령이 입장하고 있다. [뉴시스]
안보는 전통적으로 보수가 선점해 온 가치였다. 대한민국 안보란 대북 관계가 얽혀 있는 문제인 까닭에 진보 진영은 태생적으로 안보 이슈를 선점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데 안보 영역에서 보수 진영이 가져온 비교우위가 윤석열 정부 들어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적어도 2030세대에서는 그렇다. 윤 대통령은 주변 인물 몇몇을 지키기 위해 ‘안보는 보수’라는 보수정당의 유산을 갉아먹고 있다. 채 상병 사망사건을 계속 외면하면서 보훈을 중시한다고 말하는 건 모순이다. 병사들의 권리는 나 몰라라 하면서 선진 강군을 이야기하는 것도 난센스다. 보수정당이 졸병(卒兵)들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듣고 이들의 목숨을 졸로 보는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안보는 민주당’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