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호

일본의 거만함과 싸우겠다던 평화운동가의 삶

‘신념형 지한파’ 故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

  • reporterImage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4-07-01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日 청년 100명이 방한한 이유

    • “역사를 공평하게 바라보는 일”

    • “박해가 있을 것은 각오한 바”

    • 1998년이라는 특별한 변곡점

    • 세종대왕·이순신에서 김구까지

    •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했다”

    • 조문부 前 제주대 총장과의 우정

    • 반향 일으킨 두 권의 대담집

    • 서양회화명품전과 소카대의 사례

    • 말이 아닌 행동으로 궤적 남기다

    5월 중순 일본 청년 100명이 한일청년교류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제주에서 열린 한일청년평화포럼에서 권철현 전 주일대사가 강연하고 있다. [SGI]

    5월 중순 일본 청년 100명이 한일청년교류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 제주에서 열린 한일청년평화포럼에서 권철현 전 주일대사가 강연하고 있다. [SGI]

    교류(交流). 근원이 다른 물줄기가 서로 섞여 흐르는 일이다. 말하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다. 섞여 흘러야 할 주체가 한국과 일본이면 방정식은 난마처럼 꼬여버리고 만다. 이 글은 수십 년간 방정식을 풀어가던 사람에 관한 드라마다. 어쩌면 한일관계사(史)의 숨은 ‘키맨’에 대한 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 이야기다. 그는 불교철학자이자 평화운동가로 꼽힌다. 이케다 회장의 사상을 바탕으로 열린 교류 행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봄이 무르익어 가던 5월 중순, 일본 청년 100명이 동시에 방한했다. 한국에 발을 딛는 청년들의 얼굴 사이로 상기된 표정이 스쳤다. 중심지인 도쿄와 오사카, 규슈, 도호쿠는 물론 최북단 홋카이도와 최남단 오키나와 등 일본 전역에서 모인 일행이다. 한일청년교류회에 참석하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다. 일정은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수도권과 지방, 제주 등 3차에 걸쳐 한일청년교류회가 열렸다. 4명이 한 조를 이뤄 1~2차에 25개 지역씩 총 50개 지역서 진행됐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한일교류 행사다.

    제주에서 실시한 한일청년교류회에서 한일 양국의 청년이 문화행사를 선보이며 교류하는 모습. [SGI]

    제주에서 실시한 한일청년교류회에서 한일 양국의 청년이 문화행사를 선보이며 교류하는 모습. [SGI]

    이 행사는 재일 한국인 사이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중앙본부 김이중 단장과 임태수 의장, 정문길 사무총장 일행이 5월 21일 도쿄 시나노마치 창가학회 총본부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하라다 미노루 창가학회 회장이 한일청년교류회 행사를 소개했다. 김 단장은 민간 차원의 교류가 우호의 초석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풀뿌리 교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문화와 청년의 왕래를 지속해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日의 과오를 직시하는 일

    한일청년교류회의 역사는 깊다. 이번 행사까지 그간 여덟 차례에 걸쳐 교류단이 방한했다. SGI가 1998년부터 주최하기 시작했다. SGI는 국내에 약 150만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규모 면에서 존재감이 남다른 편이다. 그럼에도 대중 사이에서는 여전히 이름이 낯설다.

    SGI는 일본 가마쿠라 막부 시대 니치렌(日蓮)이 주창한 불법(佛法)을 신앙의 근간으로 둔다. 니치렌은 법화경이 불법의 궁극적 가르침을 내포한다고 봤다. 법화경의 관점에서 보면, 불계는 마지막에 성취하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명에서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다. 불계는 모든 사람의 현실에서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지혜와 자비, 용기를 말한다. 따라서 불법의 목적은 생명 속에 내재된 가능성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1998년 5월 서울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과 부인 가네코 여사. [SGI]

    1998년 5월 서울에서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은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과 부인 가네코 여사. [SGI]

    니치렌의 불법을 근본에 둔 창가교육학회가 1930년에 결성됐다. 초대 회장은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2대 회장은 도다 조세이다. 1946년 창가학회로 명칭을 바꾸었고, 1960년 3대 회장으로 이케다 다이사쿠가 취임했다. 1947년 19세의 나이로 창가학회에 입회한 지 13년 만의 일이다. 1975년은 SGI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그 해에 이케다 회장이 창가학회 세계화를 기치로 국제창가학회(SGI)를 설립했다. 지금은 세계 192개 국가·지역에 약 1200만 명의 회원을 둔 규모로 성장했다.

    앞서 우리는 한일청년교류회가 1998년에 시작됐다는 점을 확인했다. 국내만 놓고 보자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낳은 고통이 극심하던 시기다. SGI에는 또 다른 각도에서 중요한 해다. 이케다 회장이 경희대에서 국내 첫 명예학술 칭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제주대, 동아대, 창원대, 홍익대, 북한대학원대, 부경대, 경남대, 충북대, 한국외대를 비롯해 20개 국내 대학이 이케다 회장에게 명예학술 칭호를 수여했다.

    1999년 5월 17일 제주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에 대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열렸다. [SGI]

    1999년 5월 17일 제주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SGI 회장에 대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열렸다. [SGI]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생전의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과 대담을 진행하는 등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이 전 총리가 지난해 5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 오바마홀에서 열린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박해윤 기자]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수성 전 국무총리는 생전의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과 대담을 진행하는 등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이 전 총리가 지난해 5월 20일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 오바마홀에서 열린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학위수여식에서 축사를 하는 모습. [박해윤 기자]

    2022년 4월 28일 국립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에 대한 명예교육학박사 학위수여식이 열렸다. 이는 전 세계에서 이케다 회장에게 수여한 400번째 명예학위다. [SGI]

    2022년 4월 28일 국립 충북대 개신문화관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에 대한 명예교육학박사 학위수여식이 열렸다. 이는 전 세계에서 이케다 회장에게 수여한 400번째 명예학위다. [SGI]

    시발점이 된 경희대 수여식에서 이케다 회장이 꺼낸 말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그가 한국을 두고 ‘문화대은(文化大恩)의 나라’ ‘동방예의지국’ ‘위대한 3·1독립운동’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극우의 세(勢)가 오랫동안 잔존해 온 일본 내 상황을 고려하면 쉽사리 꺼내기 힘든 단어다. 당연히도 개인에게는 평탄한 길이 아니다. 자칫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알 수 없는 일대 모험일 수 있다.

    즉흥적 행위가 아니다. 한국에 건네는 ‘립 서비스’와도 거리가 멀다. 한국을 찾기 전에도 이케다 회장은 일본 극우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서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 보장을 주창했다. 재일 1세뿐 아니라 일본서 태어나 자란 2세·3세가 일본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면서도 권리는 부여받지 못한다고 했다. 단발적으로 말한 내용도 아니다. 족히 수십 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개적인 자리에서 강조한 기록이 남아 있다. “기본적인 인권 문제”라는 소신을 강하게 피력하면서 말이다.

    이를테면 그가 조문부 전 제주대 총장과 낸 대담집 ‘인간과 문화의 무지개다리’에는 이런 표현이 등장한다. “역사를 공평하게 바라보는 일이 곧 ‘자학적 역사관’이 된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가. 일본의 과오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다. 과오를 자기 학대라 규정하기 시작하면 역사와 정직하게 대면할 수 없다. 이케다 회장의 눈에는 과오를 직시하는 일이 곧 ‘공평한 역사관’이다. 비난과 핍박 따위에는 전혀 굴하지 않겠다는 투다. 그야말로 ‘신념형 지한파’다.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하다”

    그는 1992년 9월의 발언을 통해 “지금부터 꼭 400년 전인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15만 명의 대군을 보내 침략했다. 이후 7년에 걸친 전란으로, 조선의 국토에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손해를 입혔다”고 밝힌 바 있다.

    1999년 남긴 글에서는 “오만한 일본은 인륜을 짓밟고 이 ‘문화 대은인의 나라’ ‘스승의 나라’를 유린했다”고 썼다. 그의 눈에는 군국주의야말로 국가의 오만함이 노골적으로 현실화한 사례다. 이듬해에는 연설을 통해 보다 적극적인 메시지를 설파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전향적인 내용이다.

    “한국은 일본에 ‘문화대은’의 ‘형님의 나라’입니다. 또 ‘스승의 나라’입니다. 일본은 그 대은을 짓밟고 귀국을 침략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영원히 귀국에 속죄할 것입니다. 최대의 예(禮)를 다하여 영원히 귀국과 우정을 맺고 귀국의 발전을 위해 진력할 결심입니다. 그것에 비로소 일본이 올바르게 번영하는 길도 있다고 확신합니다.”(2000년 5월 19일)

    다시 시곗바늘을 1998년으로 돌린다. 복잡하고도 미묘한 한일관계사에서 1998년은 유난히도 특별한 해다. 그해에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부제는 ‘과거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바꿔가자’다. 흔히 ‘김대중-오부치 선언’이라고 한다. 양국 관계에 새 지평을 연 선언이라는 의의를 갖는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 시민사회에서도 공동선언을 높게 평가해 왔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도 일본 내 지한파 인사들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이 이케다 회장이다. 그가 1966년 일본인들에게 유관순과 항일 독립운동에 관해 언급한 기록은 흥미롭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패망한 지 겨우 21년이 지났을 무렵이기 때문이다. 1990년에는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한 시인 윤동주에 대해 거론했다. 이를 비롯해 김유신, 세종대왕, 이순신, 곽재우, 안창호 등 그가 언급한 인물의 면면은 다양하다. 2001년에는 김구의 ‘백범일지’를 인용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지 않았다면 그 후의 분단도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 기록도 있다. 일본이 남북 분단의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명시한 셈이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전향적인 발언이다. 삼별초와 고려청자, 금속활자, 대장경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 가진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의 대담(1999년 12월)에서는 휘발성이 더 큰 문제를 여럿 거론했다. 이를테면 그는 “‘역사교과서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재일한국·조선인의 인권문제’ 등 이러한 문제들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하나하나가 한일관계에서 뜨거운 현안에 해당하는 이슈다. 이케다 회장의 진정성이 평가받는 배경이다. 생전의 이케다 회장과 여러 차례 대화한 이수성 전 총리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케다 회장은 일본이 한국에 끼친 과거사를 직시하고 일본 사회에 정언(正言)을 해왔다. 한국인이 흘린 피와 눈물에 함께 아파하면서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어 했다. 이케다 회장은 일본 사회에 영향력 있는 일본인이면서도, 한국을 ‘문화대은의 나라, 형님의 나라’라 부르며 고대로부터 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한국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 진실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일본 사회에서 이런 행동은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하다.”

    5월 26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일우호의 비’ 건립 25주년을 기념하는 총회가 열렸다. [SGI]

    5월 26일 일본 후쿠오카에서 ‘한일우호의 비’ 건립 25주년을 기념하는 총회가 열렸다. [SGI]

    한일우호에 관한 이케다 회장의 의지는 1999년 일본 후쿠오카에 설치된 ‘한일우호의 비(碑)’에 새겨져 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소국의 거만함 대은인인 귀국 침범하고
    대국의 횡포함 평화의 산하(山河) 유린한다
    (…)
    한일우호의 「새로운 천년」 구축하리라
    무궁화와 같이 향기 그윽한 행복과 평화의 낙원
    아시아와 세계로 영원히 개척하리라 맹서하면서
    (1999년 5월 3일 이케다 다이사쿠)


    5월 26일에는 ‘한일우호의 비’ 건립 25주년을 기념하는 총회가 열렸다. 규슈 소년소녀합창단이 한국어로 ‘어머니’를 합창했고,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도 참석해 노래로 화답했다. 주후쿠오카대한민국총영사관 박건창 총영사는 이케다 회장의 한일우호 증진에 대한 노고에 깊은 감사를 전했다.

    청년이라는 열쇳말

    용기는 단단한 사상으로부터 발원한다. 이케다 회장에게는 평화론이 사상의 뿌리이자 기둥이다. 한일 간 평화에 천착하면서 이케다 회장이 주목한 열쇳말이 청년이다. 청년은 오랫동안 그를 매료한 화두다. 그는 2010년 3월 19일 중앙일보에 기고한 ‘한일 밝은 미래, 청년들에게 달려 있다’에 이렇게 썼다.

    “21세기 일본에서는 한류 문화의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한류는 일본인의 마음을 여는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것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 양국은 더욱 넓고 깊은 인적 교류를 해나가야 한다. 그 주역은 바로 청년이다. 청년에게는 국가·민족·종교 등 모든 차원을 넘어설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다. 불행의 역사를 넘어 미래의 세계를 건설해 가는 한없는 에너지가 있다. 나는 청년의 정열과 가능성을 믿는다.”

    다시 한일청년교류단 얘기를 경유해 보자. 교류단의 마지막 일정은 제주에서 열렸다. 한일청년평화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청년 100명이 제주로 집결했다. 여기에 한국 청년 100명도 합류했다. 포럼의 주제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청년의 역할 및 의식 강화’였다. 양국 청년들이 주제 발표를 하고 권철현 전 주일대사가 강연을 했다. 권 전 대사는 3년간(2008~2011) 주일대사를 지냈다. 한일관계의 원로와 양국 간 청년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이후 한일 청년이 함께 한국어로 한국 민요 ‘아리랑’을 합창하며 우정을 다졌다.


    제주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화동들이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 부부에게 꽃을 건네고 있다. [SGI]

    제주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화동들이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 부부에게 꽃을 건네고 있다. [SGI]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할 키워드는 ‘제주’다. 올해는 이케다 회장이 제주를 방문한 지 25주년 되는 해다. 이케다 회장과 제주를 잇는 인물은 2021년 타계한 고(故) 조문부 전 제주대 총장이다. 조 전 총장은 1932년생으로 1928년생인 이케다 회장과 네 살 터울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해도 1998년이다. 이듬해 5월 16일 이케다 회장은 조 전 총장의 초청으로 처음 제주를 찾았다. 이튿날 제주대에서 이케다 회장의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이 진행됐다. 4·3의 역사적 아픔이 남아 있는 제주에서 외국인에게 명예학술 칭호가 수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수여식 답사에서 이케다 회장은 “제주도는 금세기 역사의 시련을 엄연하게 끝까지 인내해 왔습니다. 다가오는 신세기는 이 동양의 보배의 섬이 어느 지역보다도 ‘희망’ ‘행복’ ‘영광’으로 빛을 발해 가는 세기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저는 귀 제주대학을 비롯해 귀국의 선생님들과 함께 더 한층 힘을 합해 인간과 인간의 연대의 시(詩)를 그리고 민중과 민중의 결합의 드라마를 더욱 창조하며 후세에 남겨갈 것을 염원합니다”라고 덧붙였다. 제주를 떠나던 5월 18일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믿는다. 제주도는 앞으로 꼭 ‘동양의 하와이’로 번영해 간다고. 한국, 중국, 일본을 묶는 ‘평화의 섬’. 미래의 해양시대의 거점. 자유무역항. 꿈은 펼쳐진다. ‘영원히 평화의 무지개 떠라 제주도’라고 기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와 정면 승부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과 조문부 제주대 총장이 2005년 4월 도쿄에서 7번째 대담을 진행할 때의 모습. [SGI]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과 조문부 제주대 총장이 2005년 4월 도쿄에서 7번째 대담을 진행할 때의 모습. [SGI]

    1999년 12월, 이번에는 조문부 전 총장이 이케다 회장의 초청으로 일본을 찾았다. 세 번째 대담에 이르자 두 사람은 대담집을 출간하기로 결정했다. 대담의 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교육의 역할’과 ‘한일의 역사와 미래’다. 훗날 조 전 총장은 이케다 회장과 대담하면서 느낀 어려움에 관해 솔직히 토로한 적이 있다. 한일 양국의 역사 인식이라는 주제를 다뤘다는 이유에서다.

    바꿔 말하면 두 사람이 역사와 정면 승부했다는 뜻도 된다. 두 사람의 대담은 일본 월간지 ‘등대’와 국내 월간지 ‘법련’에 연재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대담집 ‘희망의 세기를 향한 도전: 만대에 걸친 한·일 우호를 위하여’는 한일 월드컵의 폭발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는 2002년 11월 일본에서 출간됐다. 국내에는 2005년 출간됐다. 2003년 1월, 두 사람은 두 번째 대담집 출간을 위해 계속 대담하기로 약속했다.

    2003년부터 2년에 걸쳐 대담이 이어졌다. 두 사람은 양국의 국민성과 사회성의 차이를 인식해 교육과 문화에서 비롯하는 문제에 대처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이어 젊은 세대의 교류가 국가의 경계를 넘고 역사 갈등도 이겨낼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케다 회장은 “문화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사회를 평화롭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며 “수행의 ‘길’도 인간을 근본으로 한 ‘인간주의’ ‘평화주의’를 관철했을 때 비로소 흐드러지게 꽃을 피우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전 총장은 “대학에는 인류가 지향하는 행복과 평화를 언제나 추구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말했다.

    1999년 5월 제주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위해 방한한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이 무지개가 뜬 제주도 사진을 촬영했다. [SGI]

    1999년 5월 제주대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식을 위해 방한한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이 무지개가 뜬 제주도 사진을 촬영했다. [SGI]

    이런 내용 등을 담은 두 번째 대담집이 ‘인간과 문화의 무지개다리’다. 부제는 ‘한·일 영원한 우호를 위하여’다. 일본에서 2005년, 국내에서 2017년 출간됐다. 오늘날의 한일관계, 동북아 정세와 흐름을 미리 짚어낸 통찰력 덕분에 국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인간과 문화의 무지개다리’에서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일 양국이 더욱 더 우호를 돈독히 하면서 양국의 문화가 지닌 선의 힘을 더욱 발휘하는 일이 ‘세계 문화’를 풍요롭게 하는 데 반드시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아시아와 세계를 눈여겨보면서 양국의 문화와 교육 교류에 힘쓸 결심입니다.”

    10만 관람객 모은 1990년 전시

    이 대목에서 문화와 교육 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문화 교류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례는 1990년 9월 22일 개막한 ‘서양회화명품전’이다. 마침 개막 전날은 이케다 회장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날이었다.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서양회화명품전에는 도쿄후지미술관 소장 서양회화 컬렉션 중 벨리니, 루벤스, 부셰, 밀레, 고야, 마네, 모네, 르누아르, 세잔, 모딜리아니 등 거장 65명의 작품 74점이 해외 최초로 한국에 공개됐다. 르네상스에서 인상파에 이르기까지 서양 회화 500년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장들의 작품이다. 전시는 한 달여 동안 10만여 명의 관람객을 불러 모으며 큰 화제를 낳았다.

    1990년 9월 22일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서양회화명품전’이 개막했다.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은 도쿄후지미술 관 창립자 자격으로 개막식에 참석해 “귀국은 일본 문화의 대은인입니다”라고 말했다. [SGI]

    1990년 9월 22일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서양회화명품전’이 개막했다.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은 도쿄후지미술 관 창립자 자격으로 개막식에 참석해 “귀국은 일본 문화의 대은인입니다”라고 말했다. [SGI]

    서양회화명품전에 대한 답례의 의미로, 1992년 도쿄후지미술관에서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도자기 유물을 전시한 ‘고려·조선도자명품전’이 열렸다. 개막식 참석자들이 유물을 관람하고 있다. [SGI]

    서양회화명품전에 대한 답례의 의미로, 1992년 도쿄후지미술관에서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도자기 유물을 전시한 ‘고려·조선도자명품전’이 열렸다. 개막식 참석자들이 유물을 관람하고 있다. [SGI]

    도쿄후지미술관 창립자 자격으로 개막식에 참석한 이케다 회장은 “귀국은 일본 문화의 대은인입니다. 옛날부터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문화의 광채가 얼마나 선명하게, 얼마나 풍요롭게 일본의 여명을 빛내주셨던가요”라며 “우리가 소장한 서양 회화를 해외에서 공개하는 것도 부족하나마 은혜를 갚는 일분(一分)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케다 회장의 저서 ‘나의 인생기록’에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묘사한 구절이 나온다.

    “무궁화 피는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 아주 오랜 옛날 불교와 문자를 일본에 전해주었던 문화 대은의 나라.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 한국. 나는 나리타공항을 출발, 서울로 향했다. (…) 서울에서 후쿠오카로 돌아오는 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이웃 나라는 역시 가까웠다. 현해탄 상공을 날면서 나는 맹세했다. 더욱더 가까운 나라로 만들자. 문화 은인인 스승의 나라이자 형님의 나라이므로.”

    민주음악협회도 주목할 만하다. 이케다 회장은 “진정한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민중과 민중이 서로 이해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면서 “특히 예술 교류가 반드시 필요하다. 앞으로 국경을 초월해 추진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의 구상을 바탕으로 1963년 창립된 단체가 민주음악협회다. 한국과 관련해서는, 1984년 테너 정광 공연을 시작으로 국민가수 이미자, 국립국악원, 뮤지컬 갬블러 등 현재까지 총 475회의 초청 및 파견 공연이 개최됐다.

    교육 교류에서 핵심 거점은 소카대다. 이케다 회장은 “대학은 대학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있다”면서 1971년 소카대를 창립했다. 소카대는 60여 개국 200여 개 대학과 학술 교류를 맺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외국어대, 충북대, 경남대, 경희대, 제주대, 창원대, 한국교통대, 성균관대, 전북대, 홍익대, 부경대, 중앙대 등 18개 대학과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했다. 학생 교류와 교수 왕래를 통해 강연회나 세미나 등을 활발히 개최하고 있다.

    1984년에는 소카대에 한글문화연구회가 결성됐다. 연구회는 현재까지 십수 회 이상 방한했다. 한국 대학생들을 일본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경희대, 홍익대 등 국내 여러 대학과 더불어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 각종 명승지 등을 방문해 한국 문화와 올바른 역사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경희대에서 출범한 ‘조영식·이케다 다이사쿠 연구회’도 인상적 사례다. 경희대 설립자인 고(故) 조영식 박사와 이케다 회장의 사상을 연구·계승하는 단체다. 연구회는 한국SGI 학술부와 교류하며 매년 ‘평화포럼’을 개최한다. 소카대와 대만 중국문화대, 중국 상하이 푸단대 등과 두루 교류한다. 한일우호와 세계평화가 연구회가 추구하는 학술 교류의 핵심이다.

    그를 지금 다시 소환하는 이유

    이케다 회장은 지난해 11월 15일 향년 95세로 서거했다. 장례는 가족과 가까운 지인만 참가한 가운데 치러졌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소셜미디어 X에 “이케다 회장의 부고를 접하고 깊은 슬픔을 견딜 수 없다”며 “국내외에서 평화·문화·교육 추진에 힘쓰고, 중요한 역할을 다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셨다”고 추모했다. 기시다 총리는 창가학회 총본부를 직접 찾아 조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케다 회장은 헌신적인 지도자,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 그리고 행동하는 사람으로서 평생을 바쳐 모든 사람의 평화와 존엄을 추구했다”면서 “이케다 회장이 남긴 정신은 앞으로 모든 세대에 걸쳐 전 세계가 공명할 것”이라고 조의를 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케다 박사가 긴 생애에 걸쳐 이뤄낸 선(善), 그중에서도 평화 그리고 종교 간 대화의 촉진을 위해 진력한 일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기억에 담아두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 언론에도 그의 삶을 조명한 부고 기사가 여러 건 실렸다. 동아일보, 연합뉴스,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서 ‘대표적 지한파’로 이케다 회장을 소개하며 일본 학생들에게 한국 위인에 대해 강연하고 재일 한국인의 참정권을 요구했으며 일본 평화헌법을 지지한 평화 사상과 한일우호 활동에 대해 조명했다.

    이렇듯 평화와 문화, 교육은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어다. 말로 기록을 남기는 사람은 많다. 행동으로 궤적을 남기는 사람은 소수다. 이케다 회장은 후자다. 이 글을 통해 짧게나마 소개한 그의 삶이 오롯이 웅변하는 바다. 그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던 배경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 화두였다. 친일·반일을 넘어 평화와 우호의 렌즈로 한일관계를 직시할 때다. 이케다 다이사쿠라는 인물을 지금 이곳으로 소환한 이유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反尹 당대표? 잠룡 한동훈의 딜레마

    “원희룡, 親尹 없이 한동훈과 맞대결 쉽지 않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